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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에드문트 후설, <사물과 공간> 요약

에드문트 후설, 김태희 옮김, <사물과 공간>, 아카넷, 2018

도입부 "세계는 과학에게 나타나기에 앞서 우선은 자연스러운 파악에게 현시된다. [...] 과학의 세계 파악에게 사물들을 내어주는 것은 단순한 경험, 직접적 지각, 기억 등이며, 과학의 세계 파악은 다만 일상적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으로 이 사물들을 이론적으로 규정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과학이 수행하는 것과 같은 모든 간접적[매개적] 정당화는 바로 직접적[무매개적] 소여 위에 놓여 있다. 실재가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체험들은 지각과 기억이고 (어떤 직접성을 지닌) 예상 및 예상과 비슷한 작용들이다. [...] 이러한 원천에서 나오는 모든 직접적 소여를 착각이라고 선언함은 명백한 무의미(nonsens)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선언한다면, [...] 과학이 받아들이는 실재성도, 그리고 이와 더불어 과학 자체도 포기될 것이다.(37-38, 강조는 필자)"

1부 현상학적 지각 이론의 기초

1장 외부지각의 근본 규정들 <사물과 공간>에서 후썰은 <현상학의 이념>에서 정식화된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낮은 경험에서 경험 대상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구성됨을(41)", 특히 외부지각의 본질을 연구하고자 한다. 지각의 다양한 사례들은 "현상학적 소여들로서 심리학적 실존정립이나 여타 초재적[초월적] 실존정립을 포함하거나 그 밖의 실존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 명증에서, 즉 순수 자체소여의 구역에서 나타나는 지각의 본질적 특성들(49-50)"이 특정한 소여들로부터 일반화된다. "이 일반적 본질은 독특한 소여들에서 이러저러한 독특자가 되는(sich singularisieren) 것이다.(51)"

 지각의 본질에는 지향성뿐만 아니라, 고유하게 "지각에서 대상은 몸소(leibhaft) 있다. [...] 그것은 현행 현재의 대상이고, 현행 지금의 자체소여 대상이(53, 강조는 필자)"라는 것이 속한다. 반면 외부지각이 사실은 착각인 사태가 상상 가능하므로 "지각 대상의 실존은 지각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각주 44번)." 후썰은 지각 대상이 현실에 있다는 믿음 성격을 배제한 직각(Perzeption)으로 일단 연구의 초점을 제한한다.

 후썰은 "현출과 현출하는 대상을 구별하고, 나아가 현출의 내용(현출의 내실적 성분[reeller Gehalt])과 대상의 내용을 잠정적으로 구별하고자 한다.* [...] 어떤 한 지각의 대상은 현출하는 '지향적' 대상이지만, [이 지각이 주어지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주어지지는 않는다. 즉 현실적이고 완전하고 본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 그러니까 두 명증의 성격은 서로 다르다(58-60)." 이처럼 지각의 내실적 층위와 지향적 층위는 서로 구별되어야 하며, 후썰은 전자를 먼저 분석한 뒤 그것과 관계되어있는 대상 자체 즉 후자를 나중에 분석하는 방법론을 취한다. 이를 후썰은 성층(Schichten)의 방법이라 부른다. 그로써 알려지고 서로 구별되는 지각의 내실적 요소들로는 "감각, 파악성격, 믿음성격(62)" 등이 있다. 한편 지향적 "대상은 체험들에서 구성된다.(63)"

 cf. 사물의 사태, 귀속자, '면'으로서의 현출(274)

*이런 사유의 연장선에서 공간은 사물의 형식이지, 체험의 형식은 아니게 된다(104). 후썰의 칸트 비판.

2장 지각 분석의 방법적 가능성 외부 지각과 달리 체험 지각, 즉 (현상학적 반성으로서) 체험에 대한 지각은 "믿지 않음이나 의심과 양립할 수 없(66)"다. 체험 지각의 본질은 (1) 대상의 현행적 현전에 대한 의식이라는 점, (2) 절대적으로 내어주는 의식이라는 점, 그리고 (3) 그 몸소 있음에서 믿지 않음과 의심, 심지어는 통상적 의미에서의 믿음까지도 배제하는 의식이다. 존재를 겨냥하지 않고 그저 소여된 것을 붙들기 때문이다(67).

 후썰은 자현selbststellen하는 지각과 현시darstellen하는 지각을 구별하는데, 체험 지각 즉 내적 지각은 전자에 속한다. "자현되는 것은 내재적이고, 현시되는 것은 [...] 초재적이다.(69)" 즉 자현지각의 대상은 체험인 반면 현시지각의 대상은 초월자이다. 사물에 대한 자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자현하는 지각에서는 대상의 동일성과 지각의 동일성은 하나이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지각이면 서로 다른 대상을 가진다는 뜻이다.(72)" "가령 외부 지각에서는 [내실적 내용은 상이할지라도] 하나의 대상을 여러 번 지각할 수 있으나, 내적 지각에서는 그럴 수 없다.(각주 62번)"

 동일한 대상에 대한 여러 차례의 외부 지각은, 그 가운데 번번이 다른 내실적 내용들 또는 지각들이 "동일한 것을 의향하고 동일한 것을 현시한다(74)"는 동일성 의식을 통해 동일성 결합을 이룸으로써 가능하다. 물론 이 동일성이 현실적임에 대해 믿지 않거나 의심할 수 있다. 다만 명증적인 것은 어떤 의향들은 각 의향의 대상뿐만 아니라 상호적인 동일성 역시 의향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때 동일성 의식, 즉 "이런 묶음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 현상들의 본질에 달려 있(76-77)"으므로, 본질 직관에 성공하면 동일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본질에 토대를 둔 동일성 의식을 통해 자현의 영역(서로 다른 반복 불가능한 지각들)에서 현시의 영역에 대한 앎(그 지각들이 의향하는 대상들이 동일한 대상이라는 앎, 궁극적으로는 그 대상이 자기동일적이라는 앎)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자체증여하는 두 작용이 본래적 동일성 의식에 의해 서로 연결되면, 필연적으로 이 동일성 의식도 자체증여하는 의식이다.(91)"

 cf. 총체적 동일화 vs 국부적 동일화(전체의 부분이다)

 의식도 물론 대상화될 수 있지만, 의식(의 대상성)은 "모든 초재하는 대상성들의 근본토대이고 담지자(97)"이다. 사물은 의식과의 지향적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증여 받을 수 있으며, "오로지 지향 연관들 덕분에 그렇게 존재"한다. "하지만 의식 자체는 절대적 존재이고 [...] 단적인 자현에서 절대적으로 주어진다. 그것은 순수 직관에 주어진다. 그것은 [...] 의식 연관들에서, 그리고 이 연관들을 종합하여 연결하는 의미에서 비로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하고 직관된다. 세계는 말하자면 의식에 의해 담지된다. 그러나 의식 자체는 그런 담지자가 필요 없다.(98, 강조는 필자)" 그럼에도 현상학은 유아론과 결별한다. "자아에 대한 초재적 정립을 배제하고, 절대자에, 즉 순수한 의미의 의식에 머"물기 때문이다.(99) 유아론의 자아 역시 구성된 대상, 사물존재에 불과하다.

 Q. 저 단순하다는 의식은 현행적 의식에 불과한가?

2부 불변하는 외부지각의 분석 후썰은 지각 주체도, 대상도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있는 이상적이고 허구적인 상황을 상정해 분석을 시작한다. 우선은 시간적 연장의 계기도 무시한다.

3장 지각 상관성의 요소들 각 감각내용과 대상 자체의 각 계기는 가깝게 상응하고 공속하지만(125-6 참고) 결코 같지 않다. "완전히 똑같은 내용 복합체가 한편으로 초재로 포착되면 사물이고, 다른 한편 내재로 감각되면 바로 감각복합체인 것은 아니다. 지각에 내재적인 것과 사물로서 초재로 정립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 즉 사물은 단적인 지각에 내재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소여가 아님이 드러날 것이다. [...] 사물의 부분, 속성, 성질도 그러하다.(105)" 예컨대 사물의 색은 균질하지만, "지각의 내재적 내용에 주목하면 [...] 연속적 음영(Abschattung)"을 발견한다. 자기동일적 대상을 규정하려면 "감각내용들의 교체나 연속적 변화(107)"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지각에 내실적인 것은 감각내용(대상을 현시하는 내용)뿐만이 아니다. "감각내용들 자체는 아직 지각이라는 성격을 전혀 포함하지 않으며, 어떤 지각 대상으로의 향함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파악을 겪어야 한다. "그 자체로는 마치 죽은 소재(Stoff)와 같은 감각내용들이 파악에 의해 의미를 얻(110)"는다(beseelen). 요컨대 감각내용은 현시내용으로 기능하며 파악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후썰이 사용하는 감각의 개념의 의미이다. 또한 감각내용과 파악은 서로 분리가 가능하다.

 cf. "현출은 현시내용과 파악의 통일"인데, "이 통일은 어떤 합계도 아니고 상호결합한 이원성(Zweiheit)도 아니다. 이는 가장 내밀한 통일체인데, 우리는 이것의 성격을 생기화(Beseelung)라는 말로 규정하고자 했다. 현시하는 내용이 따로 있고 거기에 파악성격이 끼워지는 것이 아니다. 파악은 현시내용에 의미를 증여하여 생기화한다. 현시내용은 이 의미 안에 그 자체로 단순하게 있다.(271)"

 Q. cf의 내용과 저 마지막 문장은 어떻게 조화되는가? 내용은 이미 의미를 가지는가, 아니면 파악 이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가? 또는, 파악되지 않은/아무런 파악도 겪지 않은 내용이 가능한가? (McDowell의 Conceptualism 참고)

 대상은 오직 "한 단편씩 현시(117)"된다. 대상 전체를 지각하기 위해 대상의 모든 부분을 지각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로써 본래적 현출(찬 지향)과 비본래적 현출(빈 지향)이 나뉜다. "본래적 현출의 상관자는 본래적 의미에서 지각되는 대상면, 현실적으로 현시되는 대상면이다.(118)" 반면 비본래적 현출"의 상관자는 대상에서 [본래적으로 현출되는 것을 뺀] 나머지이다. 본래적 현출은 어떤 식으로든 의식하게 하지만, 대상성을 현시하지는 않는다. [...] 현시되는 것만 보이고 '직관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적 현출과 비본래적 현출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본래적 현출이 파악 요소들의 어떤 여분[비본래적 현출]에 의해 보충될 것을 요청함은 본래적 현출의 본질이다.(119, 강조는 필자)"

 Q. 면과 단편의 구분이 이해가 안 된다.(121)

 공간사물에 대한 외부지각은 본질적으로 일면적이므로 본질적으로 비충전적이다. "사물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과 계기에서, 외부와 내부에서, 앞면과 뒷면에서 사물의 온전한 내용을 단번에 현시하는 본래적 직관인 삼차원 직관은 불가능하다.(122)"

 Q. 비본래적 현출의 감각내용은 현시기능이 없으므로, 그를 통한 대상 규정이 감성화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126)?

 찬 파악과 빈 파악에 더불어, 규정적 파악과 미규정적 파악도 구분된다. 규정적 파악은 대상에 대한 앎과, 미규정적 파악은 무지와 관련되어있다. 이때 미규정성의 본질에는 규정가능성이 속하며, "완전한 미규정이란 터무니없는 말이다(132)." 미규정은 언제나 어떤 범위 내에서의 미규정이기 때문이다.

4장 현출하는 것의 시간적 연장과 공간적 연장의 구성 시간적 연장의 계기를 고려하면 "모든 지각의 본질에 일종의 지각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지각의 본질에는 어떤 연장이 속한다.(139)" 지각에서 사물은 시간적 연장을 지닌 대상으로 현출한다. "위상들의 연속체에서, 마지막으로 선현상적 연장 전체에서, 사물의 시간성이 구성된다.(143)" 달리 말해, "선경험적인 시간적 신장은 [어떤 사물을 지향하는] 현출 연속체에 의해 충족된다.(203)"

 "시간성과 같이 공간성도 현출하는 사물성의 본질에 속한다." 공간성은 공간형식Raumgestalt(또는 형상Form)과 질료로 나뉘는데 전자에는 기하학적 규정들이 속하고 후자에는 색채, 거칢, 뜨거움 등의 질(Qualitaet)이 속한다. 이 중에서도 "공간을 채우는 것은 질료(Materie)"로(147), 질료화 규정들의 복합인 일차 질료와 수반 규정들의 복합인 이차 질료로 나뉜다. 질료화 규정이란 시각적, 촉각적 규정으로 본래적으로 공간을 채우며 "근본적 의미에서 구체적 [공간]사물을 형성한다.(149)" 반면 수반 규정은 우선 구성된 사물에야 비로소 수반될 수 있는 청각적, 후각적 규정, 온도 규정 등이다. 질료화 규정을 현시하는 감각내용은 선현상적 공간성의 형식을 지니며 하나의 동일한 공간을 차지하는 사물을 구성한다. 그러나 감각내용의 연장적 계기에 현출하는 (객관적) 공간성이라는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파악에 의한 것"이다(167).

 cf. 연속성과 도약의 본질(156-7)

 본래적 현출(찬 지향)과 비본래적 현출(빈 지향)의 구별은 서로 다른 질료화 규정들의 구별과 교차한다. 예컨대 어떤 대상의 앞면은 시각적 대상으로서는 본래적으로 현출하지만 만약 거리를 두고 보아지기만 하는 것이라면 촉각적 대상으로서는 본래적으로 현출하지 못한다. 그 대상의 촉각적 규정들은 표면 위로 그저 덧보일ansehen 뿐이다. 서로 다른 질료화 규정들, 채움들은 상호침투하며 "몸체 공간의 동일성 덕분에 [...] 철두철미 서로 합치한다.(163)" "더 나아가 이러한 침투 덕분에, 이러한 합치에서 이중파악이 일어나서, 신장, 곧 전체신장이 (본래적으로 현출하는 신장을 넘어) 시각적 몸체와 촉각적 몸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동일한 신장이며, 하나의 동일한 (그러나 다양하게 덮이는, 곧 다양하게 충족되는) 몸체를 구성하는 것이다.(167)"

 cf. 온도, 통증 분석(169-179)

 한편 "지각되는 사물은 결코 홀로 있지 않고, 어떤 직관적 사물들이 이루는 둘레 가운데에서 우리 눈앞에 있다. [...] 특별히 지각되는 사물을 공동지각되는 다른 사물들과 합일시키는 것은 공간적 연관이다. [...] 그리고 여기에서 공동지각되는  이러한 사물성 중에는 언제나 내 몸도 있다(171-2, cf.279)." 내 몸은 지각의 준거점이며, "모든 공간적 관계는 이와 관계 맺으며 현출한다.(172)" 한 사물둘레 내에서 공동지각되는 서로 다른 사물들에 대한 각 파악은 다른 파악들에 의해 "말하자면 연속적으로 매개된다.(175)" 이로부터 생겨나는 전체파악에서 전체공간이 현시된다.

 "시각적 전체현출에서 현시하는 내용들은 연속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이 연관을 시각장(visuelles Feld)이라고 부른다(175)." 마찬가지로 촉각장도 있다. 이 두 장들은 근본적이고 선경험적인 연장 또는 신장을 가지므로 공간과 사물을 일차적 의미에서 구성한다.

3부 운동적 지각 종합 분석. 지각 변화와 현출 변화 이제 후썰은 불변지각이 아닌 변화하는 지각, 즉 그 시간적 연장이 위상마다 '새로운' 내용들로 채워지는 지각을 탐구한다. 지각이 변화함은 필연적인데, "위치와 자세의 변화들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183, 어디서 안구 조절되는 소리...)" 또한 지각이 변화하면 그를 통해 현출되는 대상과 세계가 변화함은 명증적이다.

5장 정지한 사물이 지각의 연속적 경과에서 주어짐 

 cf. 동일성 의식과 합치 재정리 192-3

 한 현출은 다른 현출을 상세규정(Naeherbestimmung)할 수 있다. 여기서는 동일성 종합(두 현출이 같은 대상 또는 의미를 지향한다는 종합)과는 다른 부합 종합이 일어난다. 부합 종합에서는 상위 의미에 하위 의미가 종속되며, 후자가 전자를 상세규정한다. 처음에는 빨강색으로 또는 규정되지 않은 색을 가지는 것으로 현시됐다가 진홍색이라는 더 상세한 규정이 가능해지는 사태를 예로 들 수 있다. 의미 부합은 비본래적 현출에서도 가능하다.(220)

 Q.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도 불합이 가능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197)

 A. 기존의 규정이 상세규정에 의해 반증되는 경우를 일컫는 것 같다.

 "첫 단계에서 수행되는 파악은, (통일적 지각이 진척됨에 따라) 이후 단계들에서 수행되는 파악들에 의해 입증되거나 반증된다. 그리고 첫 단계에서 본래적 현시에서 이루어진 지향은 충족이나 실망을 겪는다. [...] 명증한 것은, 충돌은 부합을 전제로 하고 실망은 충족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모순이 있다고 해서 대상의 통일성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199)"

 대상은 부단히 상호부합하는 또는 동일한 의미로 합치되는 현출 계기들의 연속체를 통해 구성된다. 이 연속체에는 음영들 간 "유적 통일성 및 최소 차이들의 계조(Abstufung)가 있다." 예컨대 어떤 평면은 "'면'들이라는 형식, 곧 음영들이라는 형식에서만 소여되고 소유된다.(207)" 이때 음영들은 단순히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체로서 연속한다. 변화지각에서는 "연속적으로 시작되고 충족되는 지향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가 주어진다. 정상적 지각에서 이 지향들은 예상 지향들이다. (현출 계열은 어떤 목적론에 의해 철저히 지배된다.) 각 위상은 다음 위상을 지시한다. [...] 그러한 앞으로의 지시에서 각 음영은 이제 올 것에 대한 예감이다. 이 예감, 이 암시, 이 지향은 충족된다.(208-9, 강조는 필자)"

 cf. 공간사물에서는 선율 같은 것과 달리 역전된 현시도 동일 대상성을 내어준다. (211)

6장 공간사물의 충전적 지각의 가능성과 의미 소여의 채움에는 증가와 감소, 즉 주어짐이 더 완전해지거나 덜 완전해지는 사태가 존재한다. 불완전하게 현시하는 한 위상은 대상이 가장 완전하게 현시되는, 다가올 위상을 목표하고 지시한다. 후썰은 이를 "지향과 충족의 놀이(220)"라고 표현한다. 지각이 더 충전적이게 되는 경우로 후썰은 상세규정과 상이규정(풍부화)을 제시한다. 나아가 채움의 증가에는 어떤 한계점이 있어, 그 한계점에 이르면 현출이 (대상이 주어지는 방식과 관련하여) 상대적 포화 또는 충만의 계기를 갖게 된다. "이 [가장 본래적으로 자체현시하는] 지대에서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규정 자체를 내어(243)"준다. 물론 "또 다른 종합의 사건은 비본래성이 본래성으로 전환되는 것이다.(223)"

 종합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어떤 견지에서는 사태가 더욱 명료하게 드러나고, 어떤 견지에서는 덜 명료해진다. "연속적 종합은 그때그때 마치 증가와 감소의 국부종합들로 짜인 편물과 같은데(224)" 이 편물Geflecht을 이루는 각 실들은 충족의 통일형식 하에서 서로 묶여있다. 이때 "절대적 포화(모든 견지에서 포화된 어떤 한계점)로 이끌어가는 지각 다양체"는 상상할 수 없다. "사물지각은 모두 비충전적이다.(226, 강조는 필자)" 현출은 "상대적으로만 최선인 소여"가 되는 것이 최선이다. 비본래적 소여가 없는, "철두철미 본래적 현출이자 완전히 규정하는 현출"인 "이상적 현출(229)"에서는 "현출, 현출하는 것, 이로써 정립되는 초재자라는 구별이(230)" 상실된다. 그와 같은 이상성은 자현하는 내실적으로 내재적인 지각에서만 가능하며, 따라서 신의 직관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cf. 새로운 경험이 발생하면 새로운 경험 동기가 끌어들여져 사물 파악에 영향을 미치고, 대상에 대한 새로운 규정들이 가능해지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결코 사물 규정은 원칙적으로 종결될 수 없다.(256)

 감각내용의 층위에서는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위상마다 각각의 내용이 있을 뿐이다. "유사운동하는 내용 자체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현시이고, 사물은 이러한 현시들의 연속적 변화 중에도 동일한 것일 때라야 비로소 운동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장은 그 자체가 공간이 아니라, 모든 공간적인 것과 (이를 통해) 모든 사물적인 것을 위한 현시장이다.(231-2)" 공간은 무한하지만, 장은 유한하다. 따라서 "공간의 내포와 외연에서의 (모든 사물이 나름의 방식대로 거기 참여하는) 무한성은 충전적 방식으로 현시될 수 없(238)"다.

 "사물 현시의 본질에는 충전화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충전화의 가능성은 "사물 현시의 이념에 의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240) 이러한 가능성에 기반해, "가장 본래적인 소여의식[최대로 증가한 현출]이 지각의식의 목표이다.(244)" 이런 현출은 점이 아니라 구역에서 주어진다.(246) 또한 관심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른 관심에서는 완전히 충분하던 현출 권역이 불충분한 것으로 달리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충족의 의미는 둘로 나뉜다. 첫째는 "목표에 도달했다는 의식"이고, 둘째는 "관심 자체에 속하는 만족"이다.(248) 관심에 의한 인도와 제약이 있는 덕분에 사물 규정은 무한한 과제라는 신칸트주의적 주장이 거부된다. 사물에 대한 절대적 규정은 이성적인/이성이 따를 만한 목표가 아니다.

 cf. "시각장 안에서 불분명한 각 현출은 이에 대응하는 분명한 현출에 대한 지시를" 가지고 있다(255).

 cf. 사물지각 종결의 불가능성과 그 다섯 가지 이유 요약(257-260) + 정황의존성(261, Hume의 습관 개념 참고)

 "사물성의 본질은 (그것의 모든 계기들에 있어) 무한정한 연속적 흐름이며, 선차적으로 열린 가능성들의 무한정한 영토이다. 이 가능성은 후차적으로 계속해서 상세히 규정되고 한정되고 풍부해질 수 있지만, 또 다시 무한성에 직면한다.(261)" 후썰의 현상학을 통해 알려지는 우리네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들을 품음으로써 이토록 다채롭다.

7장 정리-현상학적 환원의 틀 안에서의 지각분석 <사물과 공간>에서의 환원은 객관적인 것의 현실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게 만드는 환원이다. 현실적 실존에 대한 판단은 삼가질 뿐만 아니라 아예 무관해진다. 이런 정립을 전제하는 학문적 명제나 일상생활의 의견 역시 고려되지 않는다. "우리의 세계는 절대적 소여들의 세계이고 절대적 의심 불가능성들의 세계이며 '현상들'의 세계이자 '본질들'의 세계이다.(267)" 후썰의 관심은 존재론이 아니라 존재현상학에 있다. 또한 경험의 발생 역시 아직 물어지지 않으며, 경험의 타당성과 그 근원을 쫓는 정적 현상학의 물음에 머무른다. "경험에, 지각과 기억 등에 본질적으로 놓여 있는 그 의미가 (실재적 존재에 대한 모든 해석의 정당한 의미를 가늠하기 위한) 최종 규범을 제시해야 한다.(269, 강조는 필자)"

 cf. 연속체를 연속체일 수 있게 해주는 것, 여러 현출들이 하나의 자기동일적 사물을 구성하는 종합의 견고함의 출처는 믿음이다. 사물은 "한낱 '표상통일체'가 아니라 '판단통일체'"다.(286)

 Q. 믿음에는 명증이 있는가?

 Q. 이후 키네스테제 체계가 사물의 이미지Bild를 동기화하고 연상시킨다는 주장에서는 발생적 현상학의 면모가 보이지 않는가?

8장 키네스테제의 현상학적 개념 삼차원적 공간성은 구성의 결과이며, 시각 규정으로써도 촉각 규정으로써도 구성될 수 있다. 이때 각각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렇게 저마다의 규정으로써 질료화된 각각의 공간들이 어떻게 동일한 것이 되는지 후썰은 묻는다. 후썰은 우선 사물 몸체(연장 등의 기하학적 규정)와 그것을 채우는 질료(색채 등)*가 불변하고 단순히 운동하거나 정지해있는 사물을 설정한다. 두 경우에 대해 몸은 움직일 수도, 역시 정지해있을 수도 있다. 몸의 움직임 가운데서도 움직여짐이 아닌 스스로 움직임, 예컨대 눈 운동은 반드시 운동감각을 동반한다.

*"모든 구체적인 시각감각에는 이 두 계기[질료(=채움)과 펼침(=연장, 신장Dehnung)]가 있다.(305)" "(펼침과 질료 양자에서) 같은 두 개의 시각적 구체자는 각자의 위치로 구별될 뿐이다.(306)"

 현시에는 질료화하는 현시와 질료화하지 않는 현시가 있다. 운동감각은 후자에 속한다. 역자인 김태희 선생님은 해제에서 이를 '몸의 투명성'으로 해석한다. "운동감각은 모든 외적 사물의 파악에서 본질적 역할을 하지만, 본래적 질료나 비본래적 질료가 표상되도록 그렇게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물의 '투영'에 관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에는 사물에서 질적인 어떤 것이 상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물체를 음영시키거나 투영현시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의 도움이 없다면 어떠한 물체도 없고 어떠한 사물도 없다.(298-299)"

 운동 감각은 사물 구성뿐만 아니라 공간 구성에서도 본질적 역할을 수행한다. 시각적 감각, 촉각적 감각의 연장적 계기 그리고 질적 계기만으로는 공간성을 구성하는 데 불충분하다. 공간성 구성을 위해서는 (일반적인 운동감각의 개념에서 심리학적 의미, 초재적 가정들을 배제한 현상학적 개념인) 키네스테제 감각이 요구된다. 키네스테제 감각은 시각적 감각, 촉각적 감각과 뒤섞일 수 없으며 규정적 독자성을 지닌다.

 키네스테제 감각은 외부 사물의 질료는 현시하지 않지만, 자아 신체에 대해서는 현시하는 것이 있다. "신체와 모든 외부 사물은 본질적 차이가 있다. 한편으로 신체도 모든 여타 사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물리적) 사물이다. 신체도 자신의 공간이 있고, 이 공간은 본래적 질료나 수반 질료로 충족되기 때문이다. 신체는 다른 사물들 사이에 있는 하나의 사물이고, 다른 사물들 사이에서 그 위치가 변하고, 다른 사물들처럼 멈추거나 움직인다. 다른 한편 이 사물은 바로 신체이며 자아의 담지자träger이다. 이 자아에는 감각들이 있는데, 이들은 (때로는 생각에 의해, 때로는 직접적 현출에 의해) 신체에 '정위'된다.(300-301, 강조는 필자)" 특히 촉각의 이중감각에서는 대상화 기능을 수행했던 감각들이 "주의와 파악을 변경하면 주관화하는 것으로 파악"된다(301). 후썰이 주관적이라고 부르는 규정들, 예컨대 운동적 감각이나 여타 감각, 감정 등은 신체에 수반된다. 그로써 신체 현출은 여타 물리적 사물의 현출로부터 차별화된다. "우리가 사물로 대상화하는 기능을 가진 감각에만 머문다면, 이들이 이중파악을 받음을 발견한다. 하나는 물리적 사물과 (물리적 사물로서의) 신체를 나타나게 하는 파악이고, 다른 하나는 신체를 감각하는 신체(이러저러한 감각의 담지자)로 나타나게 하는 파악이다.(302)" 이 감각들은 신체에 편입되고 정의되며, 결국 모든 감각과 현출과 현상학적 사건은 "자아와 자아 신체로 내사(Introjektion)"된다(302). "나아가 내사적인 '심리적 사건'과 '감각, 지각 등의 체험'을 다른 물리적 사물에 편입시켜서 이를 '마음을 지닌 몸'으로 파악할 가능성이 생겨난다.(302)" 신체에 대한 객관적 탐구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키네스테제 감각은 파악된다고 해서 물리적 대상을 현출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주관화 파악만 받을 수 있다. 이러한 파악은 "자아 신체가 다른 방식으로 이미 구성되었음을 전제하는데, 이는 운동적 감각이 다른 방식으로 기능했음을 전제한다.(303)"

 Q. 마지막 전제는 무슨 뜻인가?

9장 시각장과 키네스테제 진행의 상관관계 현시매체로서의 시각장은 하나의 질서연관을 이루는 여러 부분들로 분할될 수 있다. "나눔은 현출에 있어 질적 불연속성 때문에 구성된다. [...] 이에 따라 시각장의 각 절편, 시각장에서 서로 구별되는 각 시각 구체자는 전체 연관에서 자기 위치를 지닌다. 또한 이 구체자 안에서 각 부분도 [...] 각 경계와 각 점도 그렇다. 이러한 질서가 고정적 위치체계로서의 장의 성격이다.(307, 강조는 필자)" 시각장은 이차원의 다양체다. 왜냐하면 시각장의 각 절편은 그 자신 역시 점들의 다양체인 선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각장은 가령 객관적 공간의 평면이 아니다.(309)" 시각장에서의 선, 점, 위치, 모양, 크기, 질료변화, 이동, 회전, 팽창, 왜곡 등은 모두 그 용어들이 삼차원의 구성된 객관적 공간에서 쓰일 때와 구별되어서, 즉 그 용례와 오직 유사하기만 한 선경험적인 판본들로서만 이해돼야 한다(예컨대 '유사 변화' 등).

 "선경험적 시간흐름에서 경과하는 모든 연속성에는 [...] 통일체 의식에서 이 연속성을 수행할 이념적 가능성이 놓여 있다.(310)" 이처럼 "다양체에서의 통일체", "선경험적 우유성들(Akzidentien)" 가운데의 "선경험적 실체(Substanz)"가 파악되는 것이 객관적 사물 또는 공간 구성의 첫 단계이다. (후썰은 이처럼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확보된 명증의 영역에서 기존의 형이상학이 다뤘던 개념들을 재구성해낸다.) 그러나 "연속체에서의 동일성" 즉 "선경험적 위치 변화에서의 저 이미지Bild의 동일성"은 "아직 사물의 동일성은 아니다.(312)" 현출연속체에서의 동일성은 키네스테제 감각--눈뿐만 아니라 신체 전체를 아우르는--과 만나야만 비로소 사물의 동일성으로 구성될 수 있다.

 색 규정들 내부에, 늘림 규정들 내부에, 그리고 두 규정 사이 "모든 곳에 본질에 토대를 둔 공속이 있다. 이 공속은 개별 계기들이 어떻게 변화하더라도 그 유Gattung는 유지하도록 제약하며, 이에 의해 불가분의 통일체를 산출한다. [그런데] 키네스테제 감각은 다르다. [...] 이것은 시각감각과 기능적으로(funktionell, Q. 함수적으로?) 연관되지만 본질적으로 연관되지는 않는다. Funktionell한 통일체로 결합된다는 것은 (정초의 결합도 아니고 하물며 정초의 내적 통일은 더욱 아니며)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들의 결합이다.(314)"

 cf. 단안시각은 깊이값을 갖지 못하고 "양각이라는 의미만 가질 수 있다.(320)" 반면 양안시각은 깊이감각, 수렴감각, 발산감각을 가능케 한다.

 키네스테제 감각이 사물 구성을 위해 본질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상장이 멈추고 눈만 움직이는 사례와 눈이 멈추고 대상장만 움직이는 사례"를 생각해 보자. "이때 시각장은 [두 사례에서] 정확히 동일하게 변할 수 있다.(322)" 하지만 "현출의 진행은 동일하더라도, 이전에는 [대상장] 정지가 현출한 반면, 이제는 [대상장] 운동이 현출한다. [...]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한낱 시각적 진행은 파악을 위해 사실 충분하지 않으며 정지와 운동을 서로 다르게 현출시키는 매체를 포함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객관적 위치와 객관적 공간성의 구성이 신체 운동을 통해,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 키네스테제 감각들을 통해 본질적으로 매개된다는 뜻이다.(323-324, 강조는 필자)" 쉽게 말해 대상이 정지해있는지, 운동하고 있는지 또는 대상이 정지해서 공간질서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인지, 아니면 운동해서 이렇게 나타나는 것인지 판별하기 위해 키네스테제 감각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키네스테제 감각 없이는 대상의 위치 변화로서의 운동 여부 및 정도를 알 수 없다.

 다음으로 후썰은 키네스테제 감각 중에서도 안구의 감각에 한정하여, 키네스테제 감각의 진행과 그에 대응하는 이미지의 변화 사이의 관계를 추적한다. "임의의 K 변화는 모두 일의적으로 b 변화를 제약(324)"한다. "정지 사물의 각 현출에서 K 인수(Faktor)와 b 인수라는 두 감각인수가 등장한다. 이 둘은 의존 관계인데, [...] 여기에서 의존은 상호의존이다. 동일 K 감각에서는 동일 이미지가, 그리고 동일 이미지에서는 동일 K 감각이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동일 K가 다른 이미지와 합일하여 동일 사물이나 다른 사물이 통일적으로 나타나게 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알게 되는 것은, K 와 b가 가령 지속적으로 공존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325)" 그런데 이처럼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통해 정초 통일체를 이루지 않는 내용들이 그래도 서로 통일될 수 있는 방식은 연상뿐"이다. "여기에서 '연상'이라는 용어는 [...] 어떤 공속이라는 현상학적 사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어떤 식으로든 지시한다는 현상학적 사실을 뜻한다. 그리하여 하나에 대한 믿음 정립이 다른 하나에 대한 믿음 정립을 동기화하고, 이 하나는 다른 하나에 관련된 어떤 것이자 이 다른 하나와 특유하게 합일된 어떤 것으로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체는 내적인 본질 통일체나 정초에 의거한 통일체는 아니다. 의식에 함께 주어지고, 그것도 여러 차례 함께 주어진다면 일종의 [연상] 통일체를 창출(326, 강조는 필자)"하게 되는 것이다. 연상에 의거한 통일성은 "선험적 통일성에 대비되는 후험적 통일성 혹은 경험적 통일성이다.(327)" 유의할 것은, 모든 경우에서 "K와 b의 규정적 결합을 책임지는 양자의 연상은 없(327)"다는 것이다. 같은 K는 얼마든지 다른 b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럼에도 두 운동 체계들은 서로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후썰은 "임의의 정지한 둘레로 둘러싸인 특정 사각형(332)"을 예로 든다. "자신의 연속적 이웃(330)"을 지시하는 b들의 지향적 계열과 달리 "K들은 서로를 지시하지 않는다.(331)" 두 계기는 "서로 완전히 다르게 기능"하며, "K는 '정황(Umstand)'이고" b"는 '현출'이다. 정황의 특정 변화에는 현출의 특정 변화가 뒤따른다.(331)" 이 사례의 결론을 일반화하면, 정지 대상장이라는 현상이 "K 감각들의 연속체와 전체 이미지 장들의 연속체를 일의적으로 조응시(333)"킨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나의 정지 대상장 안에서도 역시나, 같은 K는 얼마든지 다른 b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므로 K와 b 사이의 "연결은 오직 진행이라는 형식적 통일성에 있"다. 이미지의 계열은 하나의 유형(Typus)을 이루는데, 가능하거나 실제적인 각 유형은 "흘러가면서 실현되면서, 특정 K 진행과 시간적으로 합치하여 함께 주어진다. 그러니까 늘 두 계열체계가 평행 진행한다.(334, 강조는 필자)" 주어진 정지 대상 체계에서 이미지 다양체들은 비록 상이해질 수 있으나 "각 다양체 자체의 일반적 유형은 같"으며, 따라서 "각 다양체가 늘 같은 K 다양체와평행 결합되는 일반적 유형도 같다. 이 일반적 유형은 일반적 연상의 토대가 된다. 만일 이런 유형에 배속될 수 있을 진행이 한 조각이라도, 말하자면 어떤 미분이나 초기정립ansetzen만이라도 주어진다면 이 일반적 연상 덕분에 통각에 의해 곧 이 유형에의 배속이 일어난다. 즉 정지 대상이나 대상장이 여기 있게 된다.(335)" 쉽게 말해, 이미지들이 달라진다 해도 특정한 K 계열과 대응되는 그 평행적 진행의 형식이 일반적으로 공통되게 유지된다. (내가 잘 이해한 걸까...)

 Q. '유형'의 예에는 무엇이 있는가?

 A. 정지/운동이나 차폐 등이 아닐까? 예컨대 정지해있는 사물을 지각하려는 키네스테제 감각의 진행은 대개 비슷하다는 식으로 후썰은 이야기하고자 한 게 아닐까?

 cf. 질(색채)와 장소의 관계(337)

10장 키네스테제에 의해 동기화되는 현출 다양체에서의 통일체인 사물 단순한 이미지에서의 동일성이 사물의 동일성으로 구성되려면 키네스테제 감각이 요구된다. "전체 체계에서의 가능한 키네스테제 정황들에서" b의 진행 및 경과가 실현시키는 충족의 연관에서 발생하는/동반되는 "통일성 의식이 정지한 자기동일적 사물을 이미지들을 관통하여 자기동일적으로 현시되는 사물로 구성한다.(339)" 이제 문제는 키네스테제 감각이 정확히 어떤 경로로 사물의 구성에 참여하는가이다.

 키네스테제 감각은 이미지들과 늘 함께 파악된다. <정황-정황 하에서 동기화된 현출>이란 관계를 가지는 두 요소는 모든 현출 통일체에서 발견된다. "현행 경과하는 이미지와 K의 이중 다양체들은 통일적 파악 연속체에 의해 합일된다. 통일적 파악 연속체는 각 시간위상에 속하는 (K, b)하나의 파악 통일체로 (현출*로) funktionell하게 합일하고, 이런 현출들은 시간적으로 흘러가는 전체현출로 합일한다. [...] b 요소는 '무엇에의 지향'을 제공하고 K 요소는 이 지향의 동기를 제공한다. '무엇에의 지향'은 이 K 정황하에서 이러저러하게 차별화되고 이러저러하게 향하는 지향이다. [...] K들의 흐름은 (규정적으로 동기부여함에 의해) 이 흘러가는 '무엇에의 지향'의 종류와 형식을 규정한다.(340-1, 강조는 필자)" 키네스테제 감각과 이미지들 사이의 연관이 무법칙적이지 않다는 것, 이런저런 규정들을 가지는 하나의 함수관계를 이룬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좁은 의미의 현출은 이미지만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의 현출은 키네스테제 감각까지 포함한다.

 Q. 연상관계와 동기화관계는 서로 같은가?

 그런데 현행적인 b 위상은 '무엇에의 지향'뿐만 아니라 "유사지향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마당(Hof)도 포함한다.(341-2)" 유사지향이란 만일 K가 다르게 변화했더라면, 또는 당장 논의되고 있는 안구를 제외한 다른 신체 부위가 움직여 새로운 정황이 형성되었더라면* 동기화되고 현행적으로 존재하게 됐을 새로운 지향들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가능하긴 했던 K 감각들에 따라, 마찬가지로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가능하긴 했던 지향들의 집합이 곧 유사지향들로 이루어진 마당이다. 후썰은 이 유사지향들이 "파악계기들"이며 "현행 b 지향들에 융합되어 이들의 성격에 색조를 입힌다(färben)"고 주장한다(342). 이러한 파악계기들이 포함된 파악의 본질적인 성격규정은 ""만일 K가 이러저러하다면, '현출'은 이러저러할 것이다."라는 의식을 정초"한다.(343, 강조는 필자) 유의할 점은 유사지향들이 결코 임의적인 가능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가능성들은 사물의 각 현행 현출의 본질에서 밑그림 그려지고, 이 현행 현출에 본질 법칙적으로 명증하게 관련된다.(346, 강조는 필자)" 하나의 현행 지향에 대한 일종의 지평으로서의 유사지향들은 충족하는 지향도, 충족된 지향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명증을 가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단순한 가능성에 불과해 보이는 유사지향들이 현실적인 사물 구성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경로는 다음과 같다(고 나는 읽었다.) 외부지각은 본질적으로 비충전적이며, 사물의 한 면만을 현출시킬 수 있다. 그러나 사물은 삼차원적 대상으로서 결코 한 면만 가지지 않는다. 사물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선택되어 실현된 현행 "노선에서의 동일자인 동시에 모든 가능 노선에서의 동일자이며, 모든 가능 K 정황 아래에서 모든 가능 이미지 연속체에서의 동일자"여야 한다(342). 다른 말로 표현하면 "통일체는 다른 이미지 연속체들에서도 현시될 수 있어야 하며, 상응하는 다른 현출 계열들에서 다른 면들이 증시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346)" 그런데 모든 사물이 만족시켜야 할 이 요구, 일종의 필요조건을 곧 유사지향이 만족시켜준다. 유사지향들 덕분에 비로소, 어떤 사물이 현출하는 상황에서, 설령 선택되지 못한 키네스테제적 관점이 있어서, 그 관점 하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사물의 면이 주체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혹은 앞으로도 알려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키네스테제 감각과 이미지들 사이 법칙적인 연관을 따라 관점을 바꾸면 언제든 그 면이 알려질 수 있다는 명증적인 예상(그것도 이전의 면들과 동일한 사물의 면이라는 공통성격, 즉 통일성을 가지는 채로 그 면이 알려질 수 있다는 명증적인 예상)이 파악계기로서 사물 파악의 전체 과정의 일부에 포함되게 된다.** 요컨대 K 정황이 바뀌어도, 그리고 그에 따라 이미지 연속체가 바뀌어도 사물은 같은 사물이며, 같은 사물이어야 하는데, 이 동일성을 유사지향들이 보증해준다. 이것이 "유사지향들이 비로소 현출에 사물현출이라는 규정적 성격을 부여한다(345)"는 테제의 의미이다. 

*361쪽 서술 참조.

**운동-감각 관계 및 키네스테제를 암묵지로 규정한 김태희 선생님의 해제는 발생의 축적과 그에 따른 습성의 형성이 이 예상들의 적중도를 높여주며 명증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cf. 외현과 함축(347-352)

 이제까지는 정지 대상을 지향함에 있어 눈 운동에 따른 키네스테제 감각 변화를 쫓았지만, 눈 외의 다른 신체 부위들 역시 지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키네스테제 정황 일반은 항상 복합적이다. 그러니까 변수(K, K', K'', ......)로 이루어진 하나의 복합체가 있는데, 이 변수들은 상호 독립적 가변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 변수들은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 가변적 정황들의 총체는 가능 정황들로 이루어진 폐쇄된 체계이다. 그리고 이 폐쇄체게에는 가능한 이미지 변화들의 폐쇄체계가 대응"한다(360-362, 강조는 필자). 키네스테제 복합체는 동기화하는 정황으로서 동기화되는 현출 다양체와 공배열(Zusammenordnung)된다.

 

5부 안구운동장에서 객관적 공간으로의 이행. 삼차원 공간 몸체성의 구성

11장 안구운동장의 확충Erweiterung 후썰은 이제 정지 대상장이 아닌, 현출의 변양 유형들을 살펴본다. 첫째는 시각장 내 이미지들이 장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거나 밖으로 사라질 수 있도록 대상장이 확충되는 사태이다.* 대상장의 순환적 확충에서는 대상장에서 한때 퇴장했던 대상들이 재현출한다. 대상장의 무한한 확충에서는 새로운 대상들이 무한히 뒤따른다. 둘째, 주체가 회전하고 대상은 정지해있을 때 마치 대상이 회전하는 것처럼 현상되는 가현회전Scheindrehung이 있다. "이런 순환적 현출 연관에서는 몸체 형상의 폐쇄성이 현출한다.(370-1)" 현출 면의 팽창과 수축을 불러일으키는 접근(Annährung)과 이격(Entfernung), 그리고 현출하는 사물면이 다른 사물의 면들을 가리는 차폐(Bedeckung) 현상도 중요한 현상학적 사건들이다. 안구를 제외한 다른 키네스테제 복합체인 K'는 항상적이고 K만 임의적으로 가변적인 경우에는 접근, 이격, 회전, 차폐가 발생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한다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변화하거나 운동한 것이다.(372) 여기서 다시금, 대상의 정지해있음이나 운동성을 구성하기 위해 키네스테제 감각이 요구된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처럼 K와 K'가 상호독립적이라고 할지라도 이미지 다양체는 하나만 현출한다. K와 K' 복합체에 각각 따르는 "변양은 마치 힘처럼 합성된다.(374)"

*대상장 확충이란 대상장이 정지해있지 않고 이동 및 회전과 같은 변화에서도 동일한 대상장으로 유지되는 사태를 일컫는 것 같다. 414쪽 참고.

 다음으로 후썰은 "현실적 현시 구역을 넘는 대상"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묻는다. 이를 후썰은 '포괄적 대상성 지각'의 문제로 명명한다. 예컨대 우리는 "한 눈으로 파악되지 않는, 인파로 가득한 강당을 보거나 나무가 빽빽한 숲을 보거나 초원이나 밭을" 본다. 심지어는 결코 그 전체가 보아질 수 없는 "별이 총총한 하늘(378)"마저 지각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는 의식의 초월작용이 핵심이다. 포괄적 대상성은 키네스테제가 항상적으로 유지되는 정지 지각에서는 지각될 수 없다. 제한된 부분들에 대한 본래적 지각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질 때, 하나의 대상장이 생긴다. "파악은 지각에 의해 (비록 연쇄적으로라도) 포착된 것도 넘어서 나아간다. 그때그때의 운동성 지각이 끝나는 곳이 세계의 끝은 아니다.(376)" 대상성의 한 단편에 대한 본래적 지각 위상은 다른 위상들과도 통일적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지각 통일체가 생겨나고 여기에서 더 포괄적인 대상성이 현시된다.(377)" 대상 전체가 시각장에서 나간다고 해도 "그 사물이 속하는 (우리의 흥미를 끄는 통일체인) 포괄적 대상 맥락은 [여전히] '지각된다'고 말할 수 있다.(379)" 키네스테제의 변화가 언제든 그 대상의 현출을 가능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의 의식은 본질적으로 주어진 것을 계속해서 초월한다.

 대상의 변화와 달리 "키네스테제 변양은 시각장의 한 개별 이미지가 아니라 장 전체를 촉발(affizieren)하는 변양이다.(379)" 키네스테제의 변양은 시각장 전체의 변동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변양에서는 [...] 개별 대상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 대상 연관도 구성된다. 왜냐하면 공존하는 이미지들의 통일적 변양에서 현출하는 통일체(대상 복합체)는 공간적 복합체이기 때문이다.(380)" 여러 대상들 사이의 공간적 관계 역시 여기서 구성된다. 쉽게 말해, 키네스테제 감각에 변화가 있을 때에는 개별 이미지들이 통째로 함께 변화한다는 것이 주체에게 알려질 텐데, 그 함께임이 곧 해당 개별 이미지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파악시켜주며, 이 통일체에 곧 통일적인 공간질서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질서 연관들의 이러한 변양을 관통하는 통일성 의식이 공간질서를 구성한다.(386)" 이 공간질서는 전체의 통일적 변양 가운데서 "객관적이며 통일적인 것(381)"으로 남는다. 이 개별 이미지들은 이처럼 함께 하나의 공간적 통일체를 이루기도 하지만, 각자 저마다 동일자로도 구성된다. 장의 내적인 질서는 키네스테제 감각 덕분에 그 질서 하의 요소들이 동일자로 정립됨으로써 공간적 질서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구성되는 것이 완전한 삼차원의 공간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는 단지 안구운동장 내의 이미지들이 선경험적인 유사공간적 질서연관을 가짐을 발견하고 있을 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다 T^T

 후썰은 가로수길 지각의 예로써 이제껏 설명했던 것들을 구체적으로 보이고자 한다. "규정적 키네스테제의 경과에는 전체적으로 이러저러하게 충족된 이미지 장들의 규정적 경과가 대응한다.(390)" 가로수길의 나무들의 현출은 키네스테제 정황에 의해 동기화되어, 각 정황에 규정적으로 대응하는 변화를 겪는다. 이처럼 무규칙적이지 않고 규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미지의 연쇄에서 반복되는 이미지들에 대해서는 동일화가 행해진다. 그러나 반복되지 않는 이미지 역시 전체와의 연관성을 잃지 않는다. "한 번 현시된 각 대상은 이 현시에서만 견지되거나 이것의 연속적 현시 변화에서만 견지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시가 사라진 후에도 자신의 연관 지향을 남겨두기 때문이다.(393)" 비본래적으로 현출한다고 말할 수 있을, 지각되지 않는 부분들과 현행 지각되는 부분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전자는 "(인도하는 키네스테제 진행과의 규정적 공속성을 지닌) 견고한 질서를 지닌 통일적 지각들에 인도되어, 현행 지각되는 것으로 넘어갈 가능성(394)"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공간대상은 연쇄적인 지각의 과정에서 시간대상으로서도 정립되며, 이전에 지각된 것 및 이후에 지각될 것 역시 "지금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지금 정립된다.(394-5)" 

12장 안구운동장에서의 현출변양의 유형학 11장의 논의는 차폐와 회전이 없는 대상장을 상정한 뒤, 안구운동장들의 연속체가 어떻게 새로운 대상장을 내어줄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K' 복합체가 고정된 채 안구만 운동함으로써 새 대상이 운동장의 테두리 내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사례를 탐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삼차원의 공간이 구성되지 못했으므로 "여기에서 대상들은 여전히 아직 사물이 아니다.(399)" "안구운동장도 사물장이 아니다. 안구운동장 통일체는 다양체에서의 통일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외부지각에서 대상으로 정립되는 사물이 아니라] '이미지'이다.(410)" "이 이미지 다양체들이 (법칙적 방식으로 그리고 키네스테제 다양체 변양에 의해 법칙적으로 동기화되면서) 연속적으로 변양되고 통일체 의식이 (개별 이미지들과 이미지 군들이 겪는) 이러한 연속적 변양을 관통(411, 강조는 필자)"해야만 비로소 공간에서 사물의 대상성이 구성된다.

 Q. 대상장, 시각장, 안구운동장의 관계는 무엇인가? 각각은 어떻게 다른가?

 12장에서는 "회전의 성격을 지닌 현출 계열이 어떻게 [...] 하나의 대상성을 정립할 수 있는지 묻는다. [...] 안구운동장을 다차원적 공간사물성의 한갓된 투영으로 만드는 그것이 문제이다.(399-400, 강조는 필자)" 후썰은 우선 (눈 외의 다른 신체 부분들을 움직였을 때에야 비로소 발생할 수 있는) 안구운동장의 사건으로서의 접근과 이격, 장회전(=가현회전)을 분석한다. 접근과 이격은 크기변화를 불러일으킨다. 크기 변화는 이동 및 회전과 결합될 수 있다. 이 "크기변화가 추가로 취해질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공간을 현시할 능력이 있는 완전한 현시재료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크기변화란 자아점과 공간현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다. 따라서 "영구히 주어지는 근원재료의 연속적 변화 다양체"와 "키네스테제 다양체에의 가능한 배정"뿐만 아니라 자아의 배속Einordnung 역시 세계 구성의 본질적 부분이다(417). "모든 크기변화에는 자아점에의 관계가 있다. 모든 크기변화는 자아점으로부터의 원근의 변화를 현시한다. [...] [키네스테제 정황에 따라 규정되는] 자아 위치와 현출 간에는 고정적으로 규정된 상관관계가 구성된다.(422)" 그러나 안구운동장이 크기 변화 다양체 및 이동 다양체로 이행했다고 해서 바로 삼차원 공간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13장에서 논의될 선회 다양체 개념이 여기에는 결여되어있다.

Q. 422-3쪽의 투영 평면 논의가 이해되지 않는다.

13장 안구운동장이 크기변화 다양체와 선회 다양체로 이행함을 통한 공간 구성 후썰은 이제 "이미지 변양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433)"이자 크기변화 중의 하나인 선회(Wendung) 변양을 탐구한다. 선회에서는 차폐와 노출이 특정 방식으로 작동한다. 다른 대상이 아니라 해당 대상 자체가 자기의 대상점들을 가리는 경우가 곧 선회다.(434) 순수한 원근변화는 선형의 변양인 반면, 순수한 선회는 순환의 변양, 두 차원을 가지는 순환 다양체이다. "대상이 다른 면들을 가지는 것은, 가능한 선회변양들이 대상을 공동 구성하기 때문이다.(434, 강조는 필자)"

Q. 선회가 2차원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A. 접근이나 이격의 가능한 경로는 선이다. 그러나 선회의 가능한 경로는 면을 이루며 면적을 가진다.

cf. 한갓된 이동에서는 점들이 서로 간의 간격이나 상대적 위치 따위의 상호정향을 유지한다. 반면 크기변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크기변화 중에서 원근변화에서는, 예컨대 두 점 사이의 간격에 주의한다고 할 때 그 간격의 크기만 변화한다. 그러나 선회변화에서는 크기뿐만 아니라 간격의 형식까지 변화한다.(436에서 유추)  

cf. 차폐가 발생했을 때의 이미지들로부터의 통일체 구성은 427-8 참조. 크기변화와 차폐의 상호침투는 431-3 참조.

 선회라는 현상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크기변화 변양에 있어서 불변 이미지가 외부로부터 새로운 현시내용들을 연속적으로 취하고 이전 현시 내용들을 잃는다. 이때 새로운 이미지 내용들은 (거기에 이들이 연속적으로 결합하는) 저 이미지 내용들에 의한 차폐에서 연속적으로 벗어난다. 그리고 역으로 가리는 이미지 내용들은 이미지에서 이웃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가려진다.(436-7)" 선회의 방향이 어떻든 간에 모든 이미지 점은 통일적이고 조화로운 방식으로 움직인다. 선회는 대상의 새로운 면들을 연속적으로 드러내며 그와 동시에 방금까지 보이던 것을 사라지게 만든다. "완전한 선회는 물체 형상의 폐쇄성을 구성(437)"하며 폐쇄된 키네스테제 계열에 의해 동기화된다. 

 이제 크기변화의 근본 형식인 원근 변화와 선회 사이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원근 변화의 결과로는 주체가 대상에 무한히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뿐 순환의 성격이 없으므로 이미지가 자신에게로 순환할 수 없다. 또한 원근 변화 변양은 대상을 언제나, 오직 하나의 면에서 현시하기 때문에 자체차폐나 자체노출에 의해 현시내용을 얻거나 잃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선회 없이는 사물 형상의 폐쇄성이 전혀 현시될 수 없다.

 "모든 키네스테제 변양은 안구운동 변양이거나 기타 키네스테제 체계[K']와 관련된다. 전자는 안구운동장만 구성하고, 후자는 원근변화와 선회로서, 이 장으로 (모든 정향도 포함해) 크기변화 체계를 들여온다. 이를 통해 이차원 안구운동장은 삼차원 공간장으로 변전하는데, 이는 일차원 선형 원근변화 다양체와 이차원 순환 선회 다양체의 결합이다. 삼차원 대상이 구성되는 데 있어서, 더 이상의 변양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442, 강조는 필자)"

14장 보충 고찰 1. 폐쇄성을 매개로 한 개별 사물의 구획 문제 / 2. 차폐를 원근간격으로 파악하게 되는 과정 / 3. 대상의 분리 기준으로서의 크기변화의 역할, 구성의 결과로서의 빈 공간(cf. "안구운동장이나 시각장은 언제나, 또 필연적으로 꽉 찬 장"이다. 453쪽 참조.) / 4. 몸체성의 폐쇄성, 빈 공간은 구성 가능하지만 "표면과 대비되는 내부(454)"는 현시될 수 없다.

 

6부 객관적 변화의 구성

15장 지각대상의 질적 변화 이전의 논의들은 "절대적으로 정지한 사물세계라는 허구" 위에서 삼차원 공간성을 구성했다. 이제 후썰은 색채의 변화 가능성을 고려한다. "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정지 사물성으로부터 기하학적 사물 몸체가 부각되고, 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색채의 가능한 가변성에 있어서 순수 공간이 그 형식으로서 구성된다. 이 형식에 모든 사물 몸체가 그 단편으로 끼워지고, 모든 점들에 있어 절대적으로 고정적 방식으로 배열된다(459)."

 사물은 질적으로 변화해도 그 형상이 동일하게 유지된다면 동일한 사물이다. "대상적 색 변화의 '다름'이 지니는 의미는 [색] 정지에 조율된 예상이 실망됨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불변하는 대상 색'이라는 정상 경우에 나아가는 것과는 다르게 나아간다. [...] 물론 이탈의 속도와 가속도는 상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이탈 형식이 상이할 수 있다.(464)" 그러나 이탈의 형식이 무법칙적이거나 임의적일 수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대상의 변화가 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의 각 위상이 불변 정지로 펼쳐질 수 있음은 변화의 폐기할 수 없는 본질(469)"에 속한다.* 이렇게 변화의 한 위상을 정지시켜 지속시킨다면, 그 위상에서 현시되는 색채는 시간질서, 키네스테제 체계, 형상이라는 변수들에 대응하는 규정적인 색채를 지닐 것이다. 이러한 규정성은 모든 변화 위상들에서 유지될 것이므로, 변화는 무법칙적이지 않다. "변화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 변이하는 이미지 색채들이 [단순히 색채가 불변하는 경우와 다르게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법칙적으로 규정된 방식으로 다르게 나아가되, (모든 가능한 지각 계열 일반에 있어) 달리 나아감의 법칙이 고정적으로 미리 지시되어 있어야 한다.(467)"

*16장 극초반부에 이 명제를 재요약해준다. 베르그송은 제논의 역설을 들며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고, 나도 조금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명제다.

16장 한갓된 운동의 구성 사물의 모든 것이 이산적으로 변한다면 변화는 성립할 수 없다. 변화 가운데서도 뭔가는 연속적으로 동일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후썰은 연장의 통일성이 곧 변화하는 사물의 동일성을 유지시켜준다고 주장한다. "공간형상의 통일성은 색채의 통일성의 기초이고, 모든 색채 변화에서 통일성의 기초이다. 이미지들의 연속적 흐름에서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고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언제나 이미지 연장들이다.(476)" 이때 공간 몸체는 질의 담지자로서 질을 위한 기체(Substrat)가 된다. 이러한 몸체의 통일성은 몸체의 연속성을 전제로 한다.

 몸체의 운동이란 몸체가 동일자로 남으면서 위치 변화만 겪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키네스테제 정황의 배정 양상에도 연속적, 법칙적 변화를 일으킨다. 사실 몸체가 운동하는 이미지는 키네스테제 정황에 따라 정지 사물에서도 현출 가능하다. 이미지 또는 직관 자체는 정지와 변화 둘 모두의 결과로 해석 가능한 것이다. "정지와 변화의 차이는 오직 키네스테제 배정에 있는 것이다.(480)" 키네스테제 정황이 곧 대상을 정지해있는 것으로, 또는 변화하는 것으로 현출시킨다

 후썰은 이제 키네스테제 진행을 '스스로 움직임'과 '움직여짐'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후자의 예로는 차를 타고 있는 신체가 있다. 후자의 경우 신체는 위치가 변화하고 있는데도 어째서 정지의 의미를 얻으며, 마찬가지로 정지해있는 것으로 현출하는 차는 어째서 운동의 의미를 얻을 수 있는지의 물음이 대두된다. 이는 키네스테제 감각이 대상뿐만 아니라 신체의 운동을 파악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물음이다.

 몸은 다른 사물처럼 몸체를 지닌 사물이며, 다른 사물처럼 구성된다. 그러나 몸은 "근본적 비정상성Abnormität"을 가지고 있다. 먼저 "세계의 모든 사물은 나로부터 멀어질 수 있지만 내 몸만은 그럴 수 없다." 또한 내가 나의 정수리를 볼 수 없듯 "언제나 필연적으로 시각장 테두리에서 사라지고 이 테두리를 넘어서서 결코 추적할 수 없다."(484) 이제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첫째는 예컨대 달리거나 걸을 때의 신체이다. 몸에 속하는 이미지 다양체에 대응하는 키네스테제 변화 계열은 세계 전체를 흐르게 하고 다른 사물들과의 간격을 변화시킨다. 이 키네스테제 감각에 의해 다른 사물들처럼 변양하며 통각되는 신체는 움직여지는 것(bewegt)으로 파악된다. 반면 자아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둘째 사례는 움직이는 대상 위의 신체이다. 그때의 주체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지는 것이다. 주체는 "정지의 키네스테제 정황을 가지며, 마차가 운동하는 것으로 파악한다.(486)" 이와 달리 '나'가 스스로 움직일 때 키네스테제 감각은 운동하는 신체의 이미지와 항상적으로 결합하며, 이 이미지 연관들은 키네스테제 감각들에 특수하게 귀속된다. 이때 키네스테제 감각은 몸의 사물로서의 현출에 구성적으로 기능하는 동시에 신체에 정위된 감각으로도 기능한다. 후썰은 이를 "이중의 파악"으로 명명한다.(487) "어쨌든, [...] 나의 신체는 '나와 더불어' 움직인다.(487)"

 마차의 사례에서, 분명 나는 정지해있는 것으로 감각되고 마차 역시 정지한 사물로 현출하며 주위의 풍경은 변화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는 움직이는(움직여지는) 것으로 해석되며 주위는 멈춰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마차를 탄 다른 사람을 본 경험에 대한 이입으로써? 내가 만일 마차와 나란히 달렸다고 해도 주위의 이미지 연관, 세계가 현출하는 모습은 동일했을 것이다. 다만 마차 위에서는 "달림이라는 키네스테제 동기화 대신에, 마차의 흔들림이나 바퀴가 굴러가는 소음 등만 있는 것이다.(489)" "정상적인 경우에는 키네스테제 정황(이제까지 그렇게 불렀던 감각 복합체)이 수행하는 기능을 이제 다른 정황이 수행한다. 그러나 아마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이 정황이 정상적 정황을 대리하는 정황으로 파악됨으로써 수행하는 것이다.(490, 강조는 필자)" 내가 스스로 움직이나, 마차가 나를 움직이게 만드나 현출은 동일할 것이다. "같은 정황에는 같은 현출이 대응한다.(490)" 이처럼 키네스테제 변화 대신 그것을 대리하는 변화가 등장함으로써 현출의 정황을 형성할 때도 몸은 움직이는 것으로 해석된다.

 주체의 몸은 타자의 몸과도 현상학적으로 구별된다. "나는 다른 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자신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나의 키네스테제는 멈추고 내 몸은 움직이는 것으로 현출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여기에서는 모든 다른 사물에게는 있는 어떤 지각 가능성들이 결여되어 있다. 이에 반해서 나는 타자를 이입감지(Einfühlen)할 수 있고(491)" 상호소통할 수 있다.

 

결어 여기서 후썰은 여태까지 현상학적으로 탐구된 바들의 형이상학적 귀결을 논한다. 우선 존재에 있어서, "현행 정립의 성격은 개별적 현출에는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전체현출을 주어진 정황에서의 현출로 만드는 동기화에 의하여) 근본정립(Grundsetzung)들이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근본정립들은 정립들의 충돌 가능성의 전제가 되고, 정립들의 (이른바 '기각[Verwerfung]' 혹은 '무효의식[Nichtigkeitsbewusstsein]'이라는 형식에서의) 폐기 가능성의 전제가 된다.(494)" 다른 한편 비존재는 정립된 존재의 법칙성 및 조화에 어긋나는 현출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이미지 허구(Bildfiktum)가 그렇다.(496)" 이처럼 비존재가 "미리 주어진 존재에 맞서는 충돌"으로부터만 가능하다면,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현출 존재가 한갓된 허구, 즉 공상, 환각, 꿈이라는 것은 배리이다.(497)" 

 그러나 우리는 모든 지각이 결국 비실재적인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느 순간 갑자기 "조화로운 충족이 모두 중단되고, 현출계열들이 서로 뒤섞여서, 어떠한 정립된 통일체도 [...] 결국 유지될 수 없음"이 불가능한지 알 수 없다. "하나의 세계가, (유념해야 하듯이) 사물의 세계인 실재하는 세계가 있어야 한다는 절대적 필연성이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간파할 수는 없다.(498)" 정립된 통일체는 법칙성에 따라 앞으로도 정립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출들의 법칙적 경과로부터 이루어지는 존재정립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통일체로서의 사물 없이 "무의미한 감각들의 한갓된 혼란(Gewühl)"으로 세계가 해소돼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계는 그 있음(Dasein)과 어떠함(Sosein)에 있어서 비합리적 사실(Faktum)이고, 이것의 사실성(Faktizität)은 오로지 동기 연관들의 견실함에 기인한다.(500, 강조는 필자)" "달리 말해 (현실적이고 가능한 현출 연관에 놓여서 견지되는) 사물 통일체 및 세계 통일체를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합리성 자체가 비합리적 사실일 것이다.(같은 쪽의 원주)"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지각이 한낱 상상은 아니다. 모든 지각은 이성적으로 정초된 정립이다. "모든 지각파악은 동기화된 것이며, 이 동기화에서 이 지각파악은 말하자면 존재를 선언(proklamieren)할 권리를 가진다. [...] 존재를 정초하는 힘은 경험이 진행될수록 커지고, 경험과학이라는 형식으로 합리화(Rationalisierung)가 진행될수록 커진다. [...] 그리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경험의 힘은 (이성 권력인) 압도적 권력(Gewalt)으로 커져서, (현출연관에서 엄격하게 법칙적이고 통일적으로 구성되며 늘 더 완전하게 규정되는) 실재하는 세계의 비존재로 나아갈 가능성은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비이성적이고 근거 없는 가능성(바로 공허한 가능성)이 된다.(501, 강조는 필자)"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에서 "주어지지 않는 사물의 현실성은 따라서 가능성들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 가능성들은 빈 상상가능성이 아니라, 동기화에 의해 정초된 가능성(502)"이 된다.

cf. 현실적 가능성을 정초하는 연상에 대해서는 504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