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현상학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3권> pp.50-91(후썰 시간론 분석) 요약 및 논평

폴 리쾨르, 김한식 옮김, 『시간과 이야기 3권』, 문학과 지성사, 2004 中 시간의 드러남: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에 대한 후설의 "강의"(pp.50~91)

 I. pp.50~55: 객관적 시간의 배제/환원에는 동음이의/애매성/모호성이라는 대가가 따른다.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에 대한 "강의"의 서론에서 후썰의 의도 또는 야심은 "시간의 드러남을 그 자체로 직접 기술(50)"하는 것이다. 이렇게 드러나는 시간은 의식된 시간이고, 그에 대한 의식은 내적인 시간의식Zeitbewusstsein이다. 그러나 이 "직접적인 것[의식된 시간 및 내적 시간의식]"은 저절로, 또는 "직접적으로(51)" 드러나지 않는다. "내적 의식은 객관적 시간을 배제함으로써 만들어"지는데, 이때 배제되는 것은 "앞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물리적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바 있고, 『순수이성비판』에서 객관적 시간, 다시 말해서 사물objets을 결정하는 데 함축된 [세계의 비가시적인] 시간(49)"이다. 리쾨르는 이렇게 배제된 객관적 시간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휘(흐름, 연속성, 연속체, 다양성, 동시성, 시간적 거리, 시간 간격의 동등성 등)와 배제 이후 드러나는 내재적 시간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휘가 "서로 관계는 없지만,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한다"고 짚어둔다. "배제된 객관적 시간의 분석에서 계속해서 무엇을 빌려오지 않고서는 내재적 시간의 분석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52)." 이런 "겉으론 같지만 그 뜻이 다른 용어들, 어휘 상의 애매함"은 "스스로 전복시키고 있는 경험[객관적 시간에 대한 경험]에 의지하는 시도의 역설(55)"이다.*

*이에 대해 리쾨르는 뒤에서 "배제의 과정에서 감내해야 하는, 어쩌면 요구하고 있는 동음이의의 혼란과 애매함은 파지라는 소중한 지향을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59-60)"라고 다시금 강조한다.** 모든 접근법에는 포기하는 것, 즉 대가가 따른다는 리쾨르의 직관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동음이의는 타자성/차이 및 동일성과 관련된 동음이의이고, 앞서 제기된 동음이의의 문제는 내재적 영역 및 객관적 영역과 관련된 문제였다. 두 동음이의는 이질감/무리 없이 서로 중첩되는 성격의 것일까?

 1. 이때 리쾨르는 각주 33번에서 지각된 것에 대한 지성론과 감각된 것에 대한 질료학hyletique을 구분하며 일상적인 사물 지향에서는 감각보다 지각이 더 "대표적"이고 앞선다고 말한다(52). 여기서 왜 그가 "후설이 최초의 인상, 일상 경험을 모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51).

 2. 이 애매함/역설을 후설은 "보다 정제된 현상학적 분석(55)"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로서의 아포리아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아포리아들은 무엇이며, 그 아포리아로 인해 야기되는 애매함/역설은 왜 문제인가? 그 자체로 문제인가, 아니면 새 문제를 야기하는가?

 3. 리쾨르는 "애매함"이라는 표현을 이어 "모호성(55)"으로 대체한다. 그러나 애매함과 모호함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객관적 영역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내재적 영역을 지칭하는지 애매한) 애매성이 문제인가, (객관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태와 내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태 사이의) 모호성이 문제인가? 애매한 동시에 모호한 것인가?

 4. 후썰은 시간에 대한 선험적 진리 몇 가지를 규정하고 넘어가는데, 이러한 규정이 현상학자에게 걸맞은 행위인가?


 II. pp.55~69: 후썰의 과거/미래와 상호배제적인 한계개념으로서의 지금-순간, 다시 말해 과거/미래의 타자로서의 현재는 사유 전환 또는 시선 전환을 통해 얻어지는 파생적인 사태이지, 근원적이고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사태는 아님을 파지 이론이 보여준다.

 송가라는 멜로디를 예시로 선택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후썰은 "어떤 음son이라는 가능한 한 평범한 [...] 최소 대상(56-57)"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복잡성이 떨어져서 "너무 모호한 실체"로까지 생각되는 감각된 대상이어야만 "내재적 영역에서 [...] 유지"될 수 있고, 그 덕에 후썰적 개념으로서의 지속Verharren--"같은 것이 다른 국면Phase의 연속을 거쳐 계속된다는 의미에서의 지속(57)"--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과거로 밀려나는 음은 어떻게 "같은 것으로서의 지속(58)"을 유지하는가?* 리쾨르에 따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파지Retention에 있다.**

*리쾨르가 말하는 이 "같은 것"이 예컨대 t1에서 t3까지 울린 음이 있다고 할 때, 예컨대 t1에 울린 음이 t3에도 같은 음으로 남아있는 사태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t1에서 t3까지 울린 음이 자기동일적인 음이라는 사태에 대한 것인지 애매하다. 이러한 애매성은 후썰의 텍스트에서도 나타나며, 이 글에서는 그것을 '무엇이 동일한지를 둘러싼 애매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역자는 'Retention'을 "과거 지향"으로, 'Protention'을 "미래 지향"으로 번역했으나 이 글에서는 이남인 선생님의 번역을 따라 "파지"/"예지"로 번역하고자 한다.

 리쾨르는 후설이 "자신의 기술의 근거가 되는 가장 중요한 [일상적] 용어들 [...] 이 갖는 분명히 은유적인 성격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일상 언어는 질료학 그 자체에 더할 나위 없는 자원을 제공"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흘러가는 속에서도 남아 있는 것을 지칭하는 데 적합한 은유를 제공(59, 강조는 필자)"한다.

 1. "흐름", "국면", "흘러가다", "밀려나다" 등의 '철학-일상용어(또는 일상-철학용어)'들의 은유적 성격에 대해 후썰이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왜, 그리고 얼마나 큰 문제인가?

 2. 리쾨르의 관점을 심화시킨다면 모든 철학 용어가 어느 정도는 은유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지 않는가? 철학이 탐구하는 사태를 탐구함에 있어 일상언어를 경유하지 않은 채, 단순히 사태에 적합한 은유를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태를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순수하게 철학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일이 가능한가?

 파지를 통해 의식에 드러나는 타자성/차이는 "그 어떤 동일성도 허용하지 않는 차이가 아니다." 어떤 음은 한때 지금이었던 순간에 울린 뒤에도, 그것을 뒤따라 잇는 말하자면 새로운 지금들에도 (앞서 지적한 무엇이 동일한지를 둘러싼 애매성을 갖는) 같은 음으로서 의식에 주어진다. 그 결과 '지금'이라는 시간적 계기에는 단지 과거에 지금으로 적절하게 인식됐을 뿐인 대상마저 '여전히' 포함된다. 그 대상은 동일한/같은 대상으로서 포함되는 동시에, 최초의 인식 당시보다 희미해졌으므로 다른 대상이 된 채로 포함된다. 이것이 리쾨르가 "'여전히'는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동시에 내포"하며 "파지를 통해 붙잡은 내용들[이] 점점 더 희미해지거나 가라앉는" 사태가 "이중의 현상(60)"이라고 말한 이유다. 이렇게 후설의 '지금'/현재는 "한 점에 국한된 순간으로 수축되는 것이 아니라 세로 방향의longitudinale 지향성(57)"*을 가진다.

*이남인 선생님의 번역을 따르면 '종단지향성Längsintentionalität'이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는 "종단지향성"로 번역하고자 한다. 종단지향성은 흐름을 따라 가는 지향성이고, 횡단지향성은 흐름을 가로질러 가는 지향성이다. 후자를 리쾨르는 "지각 작용에서 대상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선험적 지향성(58)"으로 풀어쓴다.

 1. 종단지향성을 통해--그라넬의 표현을 빌리자면--커다래지는 이 현재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씨름했던 순간의 아포리아를 푸는 후설의 고유한 해결책이다.

 2.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차이로써/차이에도 불구하고(둘 중 뭘까?) 허용되는 이 동일성이 객관적 동일성은 아니라는 점이다. 리쾨르는 종단지향성이 "대상을 객체화하지 않는(60)"다고 못박는다.

 "파지의 기능은 한 점에 국한된 현재Jetztpunkt와 한 점에 국한된 것이 아닌 내재적 객체/대상 사이의 동일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파지는 동일자와 타자의 논리에 대한 도전이며, 그 도전은 시간이다." 차이나지만 같다는, 또는 타자지만 동일자라는 "역설은 단지 말에 있을 따름이다. 그 역설은 이제부터 지향성 그 자체에 부여해야 하는 두 가지 뜻으로 이어진다. 즉 지향성이 "그 방식 속에 있어서 나타나는 것"에 대한 의식의 관계[종단지향성]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단적으로 나타나는 것과의 관계[횡단지향성], 즉 선험적으로 지각된 것을 가리키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61)" 차이 가운데서의 지속으로부터 "비롯되는 동일성은 더 이상 논리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바로 그 어떤 시간적 전체성의 동일성이다(63)."

 1. 거칠게 정리하자면 종단지향성은 차이를 보이는 현출의 요소들에 대한 지향성을, 횡단지향성은 차이를 보이는 현출의 요소들이 구성하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지향성을 뜻할 것이다. 종단지향성-횡단지향성, 동일성-차이의 구분을 다소간 동떨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리쾨르 덕에 연결지점이 선명해졌다.

 2. §10의 유명한 시간 도해에 대한 리쾨르의 분석 및 비판이 63-64쪽에 잘 정리되어있다.

 파지는 "원천-시점Quellpunkt의 직관력intuitivity이 점차 완화되면서 현재 순간이 그 속에 혹은 그 밑에 붙잡고 있는 모든 것[음영Abschattung으로서의 최근의 현재들/가까운 과거들]에 확산되게 해준다.(65)" 파지의 확산 기능은 변양과 더불어(변양을 통해?) 발휘된다. 쉽게 말해 파지작용은 파지대상을 희미하게 변양시킨다. 이 변양된 최근의 현재들/가까운 과거들이 넓은 의미에서의 현재에 포함된다. 이때 "후설의 의도가 변양 개념을 다듬어가면서, 현재 인상을 특징짓는 근원성의 특권을 가까운 과거로 넓히는 것이라면, 그 속에 내포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더 이상 ~ 아니다"를 통해 표현되는 차이, 타자성, 부정성의 개념들은 근원적(역자는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순간에 멈춰 서서 그것을 원천-시점에서 한계-시점으로 변환시키는 시선을 통해 연속성을 추상화하는 것에서 파생한다는 사실이다(67, 강조는 필자)." 리쾨르는 파지 개념의 이러한 함축을 sein 동사의 시제 변화가 부정을 도입하지 않으며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언어표현은 "완전히 긍정적인 표현들이(68)"라는 점에서 확인한다. "파지와 파지 변양의 개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일차적 기억[파지]이란 인상[근원인상]을 긍정적으로 수정하는 것이지, 그 차이는 아니다라는 것이다(68, 강조는 원 저자)." 일차적 기억과 인상 사이의 분리는 "사유를 통해 파지적 흐름을 멈추고 현재를 분리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 그제야 "과거와 "지금"은 서로를 배제한다.(68)" 이로써 현재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한편으로는 원천-시점, 즉 파지적 연속성을 주도하는 것으로서의 현재라는 의미,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적 연속체를 무한정 분할함으로써 추상화된 한계-시점으로서의 현재라는 의미(68-69, 강조는 원 저자)"이다. 이러한 리쾨르의 견해는 이후 "차이에 대한 연속성의 우위(72)"라는 표현으로 재정리된다.

 1. "최근의 현재와 말 그대로의 과거의 구별은 근원인상(역자는 "근원적 인상"이라고 번역했으나 이남인 선생님의 번역을 따른다)과 파지 변양Modifikation(역자는 "과거 지향적 수정"이라고 번역했으나 이남인 선생님의 번역을 따른다) 사이의 연속성을 위해서 치러야만 하는 대가다(65)"는 대체 무슨 뜻일까? --> 69쪽에 답 있음.

 2. "직관력"을 일종의 힘으로 이해해도 될까? 원어에서도 力의 계기가 들어있는지 궁금하다.

 3. "순간에 멈춰 서서 그것을 원천-시점에서 한계-시점으로 변환시키는 시선"을 어떤 시선으로 규정해야 할까? 인위적인/사변적인/철학적인?('무전제적이지 않은' 정도가 가장 정확할 것 같긴 하지만.) 그런데 그런 식으로 규정하기엔 과거와 현재를 구분짓는 태도가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상적이지 않은가? 그때에 구분지어지는 것은 이차적 과거이므로 우리의 일상은 그래도 근원적 사태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걸까? 아무튼 생각해볼 문제는 파지라는 사태 자체가 우리의 일상에서 은폐되어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너무 근원적인 사태여서 오히려 그것에 대해 사유하는 능력을 우리가 잃었는지도 모른다. 후썰 이전에 시간에 대해 사유한 철학자들 중 많은 이들은 파지 그리고 파지가 가능케 하는 과거/현재/미래의 보다 매끄러운 연속성을 가장 근원적인 사태로 여기기는커녕/여기기보다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날카로운 단절이라는 파생적인 사태를 가장 근원적인 사태로 잘못 여겨온 셈이다. (적어도 후썰을 해석한 리쾨르에 대한 나의 해석은 그렇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적 체험이 근원적인 사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학적/학문적 체험뿐만 아니라 일상적 체험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근원적인 사태를 은폐한다. 사태 자체에 씌인 여러 겹의 베일들을 드러내는 것이 현상학의 과제일 테다.)

 4. 리쾨르는 후썰이 "단지 세 겹의 현재, 보다 정확히 말해서 "과거의 현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개념을 세련되게 다듬고 있을 뿐이(63쪽 각주 38번)"라고 말하면서도 ""정신 속에 고정된 인상"으로 간주되는 과거의 이미지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분석에 비해볼 때 파지 이론은 어떤 진전을 보여준다. 현재의 지향성은 현존하는 것인 동시에 부재하는 것의 기호라 할 흔적vestige의 수수께끼에 직접 대꾸한다(69쪽 각주 47번, 강조는 원 저자)"고 평한다.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  두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첫째, 후썰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어떻게 진전시켰는가? 둘째, 데리다의 흔적은 후썰의 파지된 것에 다름 아닌가?


III. pp.69~80: 파지와 재기억은 본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작용이지만 결국 동일한 내적 시간에 속해 그것의 통일성을 함께 성립시킨다.

 "일차적 기억과 재기억ressouvenir, Widererinnerung(역자는 "회상"이라 번역했으나 이남인 선생님의 번역을 따른다)이라고 불리는(역자는 "부르는") 이차적 기억의 구별은 『강의』에서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순수 현상학적 지식[첫 번째는 파지 이론]이다." 파지에 대한 논의는 파지되는 대상처럼 "한 점에 국한된 현재에 밀착"되지 않는 더 먼 과거, "더 이상 현재라는 혜성의 꼬리로 묘사될 수는 없는(69)" 과거에 대한 작용인 기억이 파지 작용과 어떤 차이(또는 유사성)를 지니는지 묻게 만든다. 일차적 기억에 해당하는 파지와 구별해 이차적 기억이라 불리는 재기억을 설명하기 위해 후썰은 이번엔 단순한 음이 아닌 선율의 예를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썰은 이 예가 음의 예만큼이나 단순한 것이길 기대하는(것으로 리쾨르는 읽는 것 같은)데 그에 아마 수반되었을 불안은 리쾨르의 해명을 통해 진정된다. 리쾨르에 따르면 후썰은 복잡다단한 시간대상으로서의 선율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재기억된 선율이 지각된 (한 점에 국한된) 현재와 결부되는 방식에만 집중한다. 재기억된 선율은 "준quasi*지각된 선율(70)"이다. 재기억의 과정에서 한 점에 국한된 현재/원천시점은 그에 상응하는 [재기억으로서의] 준현재--"마치 [현재 지각되는 것] 처럼"이라는 위상을 가진다--를 가지며, 이 준현재 역시 "자기의 시간 지평(71)"을, 즉 나름의 파지와 예지를 가진다.

*이 대목에서 '준quasi-'은 '원본적originär(역자는 "근원적"이라 번역했으나 이남인 선생님의 번역을 따른다)'과 대립쌍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후썰의 "강의"에서 '준-'이 꼭 '원본적originär과 대립되는 것으로 쓰여있지는 않다. 예컨대 §1에서(부터) 후썰은 '준공간적 연속체'를 공간에 대한 시각적 감각내용을 가리키는 말로 쓰는데 감각은 곧 세계를 주관에게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작용이다.

 1. 리쾨르는 "순수 현상학적 지식"이란 표현으로 어떤 종류의 지식을 가리키는 걸까? 앞서  『시간과 이야기 1권』 그리고  『시간과 이야기 3권』 1장 1절에서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을 해석하며 현상학적 접근과 심리학적 접근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현상학과 심리학은 엄연히 다른 성격의 학문이다. 초월론적 현상학과 심리학 사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현상학적 심리학과 일반 심리학 사이에도 간극이 크다(물론 이 간극의 정체와 크기는 심리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겠지만).

 일차적 기억과 재기억 사이의 첫 번째 차이는 전자는 원본적으로 생산/산출하는 작용, 즉 현전Gegenwärtigung/Präsentation(역자는 "현전화(72)") 작용인 반면 후자는 재생산하는 작용인 재현Vergegenwärtigung/Repräsentation 작용이라는 데 있다. 재현에는 재기억뿐만 아니라 상상 역시 포함된다. 두 번째 차이는 현재에 대한 원본적 직관과 일차적 기억은 연속적인 관계를 이루는 데 반해, 그것과 이차적 기억은 서로 "불연속적차이를 구성한다"는 데 있다. 세 번째 차이는 재현에서의 불명료함과 파지에서의 불명료함 사이의 본질적 차이에 있다. "현상학적 심연은 좁힐 수 없다(73)."

 1. 상상은 왜 재현의 일부인가? 상상 역시 일종의 산출 작용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cf) '유사지각'으로 상상을 규정했던 이경은 선생님 석사 논문 읽어보기.

 2. 리쾨르는 브렌타노처럼 "현재의 연장[후썰의 파지 같은 것]이 상상의 결과"라고 착각하는 것은 현재가 단지 "한 점에 국한된 현재라는 집요한 선입견(73)"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선입견 하에서는 현재와 가까운 과거/미래가 마치 현실과 상상이 단절되듯 불연속적인 관계를 이루며 서로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임을 밝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후썰이 재기억을 분석하는 이유가 단지 "시간 구성에서 일차적 기억/파지가 갖는 우위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재기억은 "다시 돌이켜보는 그 능력과 더불어 자유로운 유동성(73)"을 가진다. 재기억의 자유는 "파지적으로 파악된 과거와 과거 위를 다시 지나가는 재생산 사이 [...] 겹침Deckung(이남인 선생님께서는 "강의"의 전반부에서는 "합치", 중반부에서는 "중첩"으로 번역하신 것 같다)"현상에 후썰이 유달리 주목하는 원인이 된다.* 재기억의 자유는 "그 자체가 가장 기본적인 과거 지향 경험을 반복할 수 있는--되돌아오게 하고 되풀이한다는 이중의 의미에서--능력에 근거하고 있(74-75)"는 현상학적 방법의 근거다. 겹침은 재기억의 명증성(역자는 "[과거에 현전했던 그 대상에 대한]충실성")을 보장해줌으로써** "현재에 속하는 파지와 현재에 속하지 않는 재현 사이의 단절을 보상(75)"한다. 나아가 리쾨르 고유의 분석에서 정립과 더불어 "역사적 과거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77)"***

 1. 재기억의 자유가 현상학적 방법의 근거라는 점과 겹침 현상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재기억은 그 "템포와 분절과 명료성(74)"의 결정이 기억자의 자유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에 겹침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 이상의 뜻이 있을까?

 2. **겹침은 재기억의 명증성을 (i)직접적으로 보장하는가, 아니면 (ii)보장되거나 되지 않은 것을 보장되거나 되지 않았다고 알게 해주는 인식론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치는가?

 3. 리쾨르는 왜/어째서 이 겹침이 "재생산된 "지금"의 정립position/Setzung이라는 관념을 이미 담고 있었다(76)"고 말하는가?

 4. ***리쾨르의 기획은 시간에 대한 후썰의 미시적(이렇게 불러도 된다면) 분석을 토대로 역사에 대한 거시적 분석을 성립시키는 기획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근원적인 토대를 닦아놓아야 '그 위의' 대상들을 연구할 수 있다는, 학문 분류 및 현상학의 근본적 중요성에 대한 후썰의 신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리쾨르에게 역사에 대한 체험이 시간에 대한 체험만큼이나 그 자체로 근원적인 사태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역사에 대한 체험은 시간에 대한 체험의파생태일까, 아니면 그 자체로 근원적인 사태일까? 그 자체로 근원적이라면 그 근원성은 시간에 대한 체험이 가지는 근원성과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

 재기억의 명증성이 문제시되면서 같은 재현 작용에 속하는 재기억과 상상 사이의 차이 역시 문제시된다. 그 차이는 "재기억에는 부여되어 있으나 상상에는 없는 정립적 가치"에 있다.* 재기억은 나름의 시간지평을 가지므로 그에 따라 일차적인 파지적(나아가 예지적) 지향성--"시간-객체를 생성하는 종단지향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재기억을 "~에 관한 재현으로 만드는 "이차적 지향성"(76)" 역시 가진다. 이차적 지향성은 재기억되는 과거를 일차적으로 기억되는 과거와 같은 내재적 시간 및 체험의 흐름 속에 통일/편입시켜준다.** 이 편입은 재기억이 포함하는 기대 지향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현재는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인 동시에 재기억된 과거의 기대를 실현하는 것이(77)"기 때문이다.

*이남인 선생님의 "강의" 초벌 번역에 따르면 정립이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아마 이 존재는 현실적 존재 즉 실재일 것이다. 물론 주관과 독립된 근대적인 실재는 아니겠지만.

  파지(일차적 기억) 재기억(이차적 기억) 상상
분류 현전 재현/자기현전화Selbstvergegenwärtigung 재현
정립 기능 수행 여부 O O X
지각과의 관계 넓은 의미에서의 지각의 일부 준-지각(리쾨르) 유사-지각

 1.**어떻게/어떤 경로로 이차적 지향성이 재기억되는 과거를 일차적으로 기억되는 과거와 같은 내재적 시간 및 체험의 흐름 속에 통일시켜주는가? 리쾨르는 일차적 지향성과 이차적 지향성의 중복을 통해 재기억이 "현재를 지향하며, 그렇게 해서 현재를 있었던 것으로 정립"하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대는데 이 부분이 아예 이해가 안 됐다. 그렇게 지향된 현재는 준-현재인가, 아니면 근원인상에 해당하는 지각된 현재인가? 아니면 근원인상뿐만 아니라 파지와 예지 계열까지 포함하는 더 큰 현재인가?

 2. 재기억의 이차적 지향성뿐만 아니라 정립적 성격(에 대한 강조) 역시 "파지와 동일한 시간적 흐름 속에 기억을 편입시(80)"켜준다. 이미지의식(역자는 "심상 의식")과 달리 재기억은 그 정립적 성격 덕에 파지와 함께 형식적 의미에서의 과거에 속하게 된다. 재기억이 발휘하는 정립 기능 자체가 '과거'에 있었던 것으로서의 정립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후썰에게는 과거라는 시간형식보다 재기억의 정립 기능이 더 근원적/앞서는 사태일 것이기에 '과거'에 따옴표를 붙였다.

 3. 여태껏 파지와 달리 재기억은 일종이 객관화 작용이라고 생각해서 재기억의 대상은 내재적 시간층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는데 난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과거와 현재가 같은 계열에 속한다면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왜 불투명하지...★

 이제 리쾨르는 재기억된 사건이 고유하게 가지는 시간적 위치와 그것에 대한 위치 지향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 이차적 지향"은* "다른 내용들을 제시하지만 시간의 연쇄 속에서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속들을 과거, 현재 또는 미래로 특징짓게끔 하는, 따라서 [그것들에] [...] 형식적 의미를 부여하게끔 하는 것이다.(78, 강조는 원 저자)" 그러나 이 형식적 의미는 의식에서 직접 주어지는 게 아니라, "재기억의 [...] 이차적 지향성과 관련해서만 다루어진다."** 시간 형식은 시간 배경/시간적 지평/직관으로 채워지지 않고 비어있는 지향성/주제화되지 않는 지향성/"실제적으로 재기억된 것의 흐릿한 "주변"으로(78)"서 기능하며 재기억된/되는 대상을 직관의 대상으로서 의식 전면에 두드러지게 해준다.

*리쾨르는 이러한 위치 지향 역시 "이 이차적 지향(78)"이라고 부른다. 재기억의 내용적/횡적 지향을 지시할 때와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러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흑...

 1. **재기억을 통해서만 과거, 현재 또는 미래라는 형식적 시간위치가 (i)존재한다는 뜻인가? (ii)알려진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과거, 현재 또는 미래라는 형식적 시간위치는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 재기억 작용으로부터 파생된 사태인가?

cf) "하지만 그 형식적 성격 자체는, 그러한 형식적 연쇄에서 "주변 지향"이 갖는 구체성을 보존하는 재기억의 이차적 지향성에서 비롯된다[...].(80, 강조는 원 저자)"

 2. 그런데 왜 꼭 재기억인가? 다른 작용을 통해서는 시간 연쇄의 형식을 성립시키거나 인식할 수 없나?

 리쾨르는 후썰이 "기대를 희생시켜가면서 이 정도로까지 기억에 특권을 부여(78)"한다고 평한다. 그에 따르면 후썰에게 기대는 재기억의 이중적 지향성을 분석함으로써 "비어 있는 지향"의 개념이 해명된 이후에야 분석 가능한 것이 된다. 더 급진적으로는 "보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후설은 기대를 직접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거나 "후설은 기대를 거의 지각을 예견하는 것으로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기억은 재생산의 작용인 데 반해 기대는 "자기 나름대로 "생산적"이(79)"기 때문이다. 기대에 대해서는 그 기대마저 충족 또는 실망을 거쳐 일차적 기억/파지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그 결과 기대는 파지에 대한 이론에 종속된다.

 1. 기대 및 예지에 대한 후썰의 심도 있는 논의는 리쾨르 자신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다루지 않기로 된(리쾨르는 이를 각주 27번에서 자백한다) 다른 원고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강의"만 본다면 이런 인상을 가질 만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IV. pp.80-84: 후썰은 시간 위치의 "개념이 객관적 시간을 구성하도록 [...] 허용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84)."*

*리쾨르의 망설임과 후썰의 불안이 함께 깃들어있는 이 표현은 후썰의 "강의"가 『국가』나 『순수이성비판』과 달리 경전화될 수 없음을 느끼게 한다. 리쾨르의 표현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면 "강의"는 후썰이 계획보다는 기대를 가지고 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그가 '쓴'--완성시킨이라는 의미에서--글이라고도 말하기 어렵다.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강의록이나 수고가 슈타인의 손을 거쳐 정리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강의"로부터 영감과 통찰을 빌려와야지, 그 안에 견고하고 완성도 높은 체계가 있기를 기대해선 안 된다. 그와 같은 것을 기대한다면 Hua X에 함께 실린 부록이나 베르나우 원고까지를 종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종합의 결과물이 과연 후썰이 의도한 것과 동일한 체계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나아가 만일 후썰 자신이 다소 느슨한 준-체계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전자와 후자가 동일한 것인지 묻는/평가하는 작업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후썰의 의도가 이러했을 것이다, 라는 접근보다는 후썰의 원고들로부터 얻은 통찰을 하나의 일관된 틀 안에 정리해보면 이런 것이 될 것이다, 라는 접근이 나에게는 더 철학적으로 여겨진다.)

 2장의 막바지에 이르러 대두되는 문제는 과연 "객관적 시간의 구성이 성공했는가"의 문제다. 리쾨르에 따르면 "파지와 재생산을 내적 시간의 연쇄 속에 편입시킨다는 것"은 시간 위치Zeitstelle라는 개념을 실마리 삼아 객관적 시간 구성의 토대가 된다. 그는 "객관적 의미에서의 시간"을 "시간을 채우는 내용과는 무관한 계열적 질서(81)"로 이해하는데* 시간적 형식으로서의 시간위치의 개념은 상이한 대상/감각내용들이 같은 시간위치에 있을 수 있음을 드러내준다. 이때 개체화Individuation는 대상적 동일성과 시간위치의 동일성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고 후썰-리쾨르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 *객관적 시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사실상 객관적 시간이란 "시간 속의 고정된 위치"의 할당을 말한다(82)"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이해/정의는 타당한가? 리쾨르는 혹시 객관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을 섣불리/너무 빨리/지나치게 곧바로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재적인 영역에서도 형식성은 존재/인식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형식성의 발견과 객관적 시간 구성을 동일시해선 안 될 것이며, 이러한 주관적 형식성이 어떻게 객관적 형식성에 이르는지 그 도약**에 대한 설명이 요구될 것이다.

**점점 더 먼 과거를 향해 이념적으로 무한히 되풀이될 수 있는 재기억을 통한 시간장들의 중첩이 이 도약에 대한 설명 아닐까?

 2. 어째서 위치의 동일성이 내용의 동일성의 "열쇠(82)"인가? 리쾨르는 칸트의 체계에서와 달리 후썰의 시간론에서는 위치에 대한 지향과 내용에 대한 지향이 분리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시간위치(형식)과 내용(질료)은 서로 완벽하게 병렬적/수평적 관계를 이루지 않고 전자가 후자에 대해 일종의 우위를 점하는가? 이 우위의 정체, "열쇠"라는 표현의 참된 뜻은 무엇인가? 시간위치(형식)과 내용(질료)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를 간과해선 안 된다.

 시간위치의 동일성은 "변양하는 흐름의 본질에 속(82)"하며 매 순간 갱신되는 절대적인 "현재와의 거리를 수정함으로써" 성립한다. 이것이 객관적 시간 구성의 첫 번째 단계이다. 그러나 리쾨르는 "후설[이] 시간 위치를 가라앉음 그 자체, 다시 말해서 원천-시점[으로부터]의 멀어짐과 연결시키려는 자기의 시도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에 더해 재기억을 통해 과거의 시간장/지평을 원천-시점으로 말하자면 소환하고, 그 지평에서 말하자면 비교적 더욱 과거에 속하는 한 점의 지평--이 지평은 더욱더 과거로 뻗어져있을 것이다--을 또 소환하는 식으로 "끝없이 되풀이"하는 "상상적 연장(83)"이 요구된다. 시간장과 시간장 사이의 중첩은 중첩된 영역을 "개체적으로 동일화("강의", §32)"한다. 이와 같은 개체적 자기동일성을 지니는 시간점/시간구간들이 하나의 "유일한 연쇄(83)" 즉 객관적 시간을 구성한다. 이때 이 연쇄를 이루는 각 시간위치들이 자기동일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시간에 대한 선험적인 법칙에 해당한다.

 1. 만일 객관적 시간에 대한 후썰의 정의가 리쾨르의 정의대로 고정된 시간위치를 가지는 (현재의 앞뒤로 무한히 뻗어나가는) 계열이라면, 그런데 이 고정된 시간위치 또는 시간위치의 동일성이 시간에 대한 선험적인 법칙 또는 "시간의 선험적 본질("강의", §33)"에 의해 명증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라면, 객관적 시간을 따로 '구성'할 필요가 있는가? 물론 재기억을 통한 시간장들의 중첩을 수행함으로써* 고정된 시간위치들의 계열을 무한히 길게 연장시킬 필요가 남겠지만, 내 말은 내재적인 영역 안에 이미 객관성의 계기가 있다는 사실과 두 층위를 전적으로 구별해서 한 층위가 다른 층위를 구성한다는 식의 논리가 양립 가능하냐는 것이다. 또 다른 물음은 시간위치의 동일성이라는 객관성의 계기가 정말 현상학적으로 발견된 것일까, 리쾨르가 분석의 초기에 우려했던 대로 객관적 시간이 완전히 배제되지 못하고 유령처럼 배회한 결과는 아닐까, 다시 말해 객관적 시간에 대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이 리쾨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목적론적인 지침(84, 각주 56번)"으로 작용한 것은 아닐까, 그 결과 철저한 배제/환원을 통해 성취 가능한 무전제성의 철학이라는 현상학의 이념이 좌절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객관적 시간이 구성되고 그것의 존재가 비로소 성립하기 위해 이 수행이 실제로 수행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후썰을 읽기 전까지는 한 번도 이런 시간장의 중첩을 수행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시간의 개념을 가진 채 그 안에서 무리없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수행은 단순히 인식론적인 기능을 가지는 걸까? 아니면 수행의 실제적 수행이 아니라 가능성만으로도 객관적 시간의 존재가 성립하는 것일까? (칸트 식으로 표현하면 초월적 영역에서?)

 2. 여기서 내가 후썰에 대해 문제 삼고 싶은 것은 객관적 시간 구성이 해명되는 순서다. 그는 '내재적 시간영역의 개괄 -> 그 영역에 내재하는 시간장 중첩의 가능성 -> 그것이 객관적 시간질서를 가능케 함을 발견'의 순서로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내재적 시간영역의 개괄 -> 객관적 시간질서가 모름지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개괄 -> 이 둘의 차이를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 시간장 중첩(의 가능성)이 둘을 연결짓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순서로 논의를 진행하는 것 같다. 이러한 흐름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객관적 시간질서가 모름지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미리 말하는 것--이건 어쩌면 서론이나 §1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자체가 논의의 결론을 선결*한다. 후썰의 "강의"에서 결론은 직관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있다. 직관을 통해 새롭게 밝혀지는 것은 전제(ex 내재적 소여들)뿐이다. 이제 후썰은 전제와 결론을 연결짓는데, 이 연결 역시 직관을 통한 현상학적 발견인지 아니면 전제를 결론에 인위적으로 끼워맞추는 사변적 작업--현상학이 가장 경계해야 마땅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둘의 외모가 똑같기 때문이다. 만일 후자라면, 그것이 내보이는 인위성은 명백히 반현상학적이다. 목적(ex 우리가 체험하는 객관적 시간)이 정해져있다면 현상학은 무전제성의 철학이라는 자신의 이상을, 조금의 의심도 불가능하게 투명하며 모두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실현할 수 없다. 그런데 목적은 정해져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목적이야말로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 선결과 철저한 환원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연결될 수 있을까?

**물론 이에 대해 가능한 반론은, 목적이 일종의 전제가 아니라 그 역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다만 파생적인 사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래서 그 파생의 과정이 직관을 통해 알려지는지 사변을 통해 알려지는지 알 수 없다는 현상학자의 자기의심을 피할 수 없다. 

***리쾨르는 각주 56번에서 심지어 후자의 편을 들어준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근사치"를 찾아 근사치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연결시키는 것이 시간의 현상학이라면 그것은 명백히 실망스럽다. 그러나 이렇게 섣불리 실망하기보다 첫째, 최대한 자비를 가진 채 내가 문제 삼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 후썰의 텍스트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게 맞는지 꼼꼼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둘째, 현상학에 대한 나의 기대를 후썰에게 강제하기 이전에--후썰이 현상학의 창시자임을 생각하면 이런 강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현상학이 나의 기대와 무관하게 본래 무엇인지 공부하는 게 먼저일 테다.

****이 문제의식을 데리다의 박사논문을 다시 공부하며 되살려봐도 좋을 것 같다.


V. pp.84-91: "순수 현상학의 시도는 이러한 자동 구성auto-constitution으로 마무리된다."(88)

 리쾨르는 이어 구성의 가장 근본적인 층위인 절대적 흐름의 층위를 분석한다. 이 층위에는 더 이상 지속하는 것이 없으며, 따라서 그와 관련된 사실을 지칭할 명칭이 없다. 이 층위를 분석하려면 "구성하는 것--흐름--을 구성된 것(현재 단계, 파지 속에서의 과거의 연속성 등)에 따라 이름 붙이거나, 흐름, 근원-시점, 분출하다, 잠기다 등의 은유를 신뢰"해야 한다.(85)

 리쾨르는 절대적 흐름이 통일적이라는 후썰의 주장에 대해, 그 흐름의 통일성 나아가 [모든 객체들에 적용되는] 통일적 형식"에 접근하기 위한 어떤 뚜렷한 수단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86) 이에 대해 후썰은 그저 '보라'는 말을 할 뿐이며, 이에 리쾨르는 "칸트가 전제 사항으로 여겼던 경험의 형식적 조건들은 그저 직관처럼 다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통찰한다.(86) 이때 직관되는 원천-시점, 파지와 예지 사이 관계들의 형식이 구성된 윗 층위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과연 직관될 수 있는지 역시 의문시된다. I에서 제기되었던, 철저한 배제가 가능하냐는 문제의식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읽힌다.

 후썰은 이 통일성을 "흐름 그 자체의 자기 구성의 지향성"을 제시함으로써, 그리고 그것과 "국면들의 겹침을 통해 음을 시간-객체로 구성하는 지향성"(87)을 구별함으로써 뒷받침하고자 한다. 흐름은 시간대상을 구성하는 동시에 스스로도 구성해낸다. 후썰에게 이 같은 사실은 명증하기만 하다. 리쾨르는 다만, 이 명증이 과연 윗 층위에서 제공되는 명증성 없이 그 자체로 충족적일 수 있는지 묻는다. 마지막으로 리쾨르는 이 세 번째 층위를 인상적 의식의 층위로 이해한다. 그렇게 객관적 시간-초월적 대상, 시간대상들의 객체화된 시간-현출, 내재적 시간-인상이라는 단계 구분이 이루어진다. 여기서도 단계들 사이의 순환성이 문제시되며 분석이 마무리된다.

 1. 연속성과 통일성의 동시 입증에 대한 리쾨르의 분석을 이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