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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에드문트 후설, <현상학의 이념>

에드문트 후설, 박지영 옮김, ⟪현상학의 이념⟫, 필로소픽, 2020

 후썰 자신이 현상학의 기획과 목표, 방법론을 개괄한 강의록이다. 그에 따르면 현상학은 일종의 인식비판으로서, 인식의 본질과 서로 다른 인식의 형식들을 탐구함으로써 회의주의를 논파하고 객관적 학문의 가능성, 나아가 존재론(형이상학) 일반의 가능성을 정초하고자 한다.

 자연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인식의 가능성을 문제 삼지 않고, 인식하는 주관에게 인식 대상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자명하게 여긴다. 이 태도 하에서는 주관이 대상에 대한 명증적 앎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역시 자명하다. 그들과 달리, 철학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인식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가? 인식은 의식의 테두리 내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와 어떻게 부합할 수 있는가?(18-19)"라는 <초월Transcendenz의 수수께끼>와 맞닥뜨린다. 인식에 내재하지 않는 모든 초월적인 것들은 본질적으로 그 존재와 그에 대한 앎의 가능성 및 경로가 의심스럽다. 칸트와 흄마저 자연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회의주의에 봉착했다(46-47).

 이 수수께끼를 풀지 않으면 인식 대상이 인식되는 대로 존재하는지, 우리의 인식이 대상에 대한 앎을 가져다주는지가 확실치 않게 되기 때문에 그와 같은 확실성을 전제로 가지는 모든 자연적 학문들의 토대가 흔들린다. 이에 따라 현상학은 데카르트의 성찰로부터 누구도 그 명증함을 의심할 수 없는 순수한 인식 영역, 즉 코기타치오네스cogitationes--상상, 지각, 판단, 회의 등의 사유작용들--의 영역으로부터 고찰을 시작해 모든 학문들을 다시 정초하고자 한다. 

 후썰은 현상학적 환원Reduktion을 통해 모든 초월적인 것에 대한 판단을 중지, 유보, 보류, 또는 배제하고 의식체험을 구체적인 개인이나 인간의 심리학적 사실이 아닌 순수 현상으로 돌려놓고자 한다. 현상학적 환원은 코기타치오네스의 영역에 대해서도 가해지는데, 그것을 그 실존이 절대적이지 못한 심리적 현상이 아닌 절대적 소여로 돌려놓기 위함이다.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주어지는 절대적 자체소여Selbstgegebenheit의 영역은 그것의 명증성에 대한 의심이 무의미nonsens하다. 이 영역을 직관anschauen하면 신뢰할 수 있는 순수한 인식의 영역이 코기타치오네스의 영역(현상학의 전문용어로 내실적--의식체험 내에 속하는 성격--내재reelle Immanenz의 영역에 해당)에서 지향된 대상들, 즉 지향적 내재 또는 내실적 초월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쉽게 말해 인식 주관의 사유작용들뿐만 아니라 그 사유작용들이 필연적으로 지향하는 사유대상들 역시 의심할 수 없는 명증성과 함께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로써 초월의 수수께끼 역시 풀리게 된다. 모든 초월적 존재가 인식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수 초월의 대상들은 현상학적 환원을 거치지 못했으므로 그에 대한 명증이 부족하지만, 인식 주관은 일단 지향성, 전문용어로 노에시스-노에마 상관관계의 덕분으로 내실적 초월의 대상들과 만난다.*

 이 만남의 양태는 구성Konstitution이다. 인식 대상은 체험 속에서 구성 즉 의미가 부여되고 규정되며, "그러한 현상들 속에서 그러그러하게 자신을 현시(33)"한다.** 구성 작용을 통해 비로소 인식은 스스로를 초월해 대상과 관계할 수 있으며, 모든 객관적 학문이 필요로 하는 인식의 가능성이 일차적으로 해명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은 불충분하다. 인식은 개별적으로 또는 사실적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상학은 가능성들, 그러니까 인식의 가능성과 가치의 가능성들을 해명하되, 그러한 가능성들을 그것의 본질 근거들로부터 해명하기 위한 학문이며 방법이고자(96)" 한다. 절대적 자체소여의 영역은 사실이나 개별적 체험들이 아닌 보편적 대상들과 사태들 즉 본질로까지 확장되어야 하며, 실제로 확장된다. 인식 주관에게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순수 명증의 영역을 직관하면 그 안에 보편성과 본질에 대한 앎 역시 드러나기 때문이다(105). 이것은 신비가 아닌, 상식적인 일이다. 빨간 물체를 보면서, 그 빨강이 여러 개체들에 보편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보지 않는 사람, 혹은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과 우리는 아무것도 함께 시작할 수 없다.(113)" 본질 직관은 "이념화하는 추상(25)"으로서 실존을 정립하는 지각을 통해서도, 정립하지 않는 상상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절대적 자체소여의 영역은 파지Retention에 의해 붙들리는 일차적 기억 즉 가까운 과거의 영역으로도 확장된다(120). 이렇게 현상학을 그 위에서 전개해나갈 절대적 명증의 토대가 세워졌으므로***, 후썰은 현상학의 구체적인 연구 주제들을 나열하며(133) 글을 마친다.

 중요 부분 발췌

 "소박성[자연적 태도]의 견지에서 [...]직관은 바로 단순하게 사물을 바라본다. [...] 단순히 거기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직접적 파악, 또는 취함 혹은 지시." 32 

 “순수 철학은 자연적 학문 속에서 그리고 학문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자연적 앎과 지식 속에서 수행되는 정신적 작업 일체를 도외시해야 하고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자연적 태도와 철학적 태도는 취급하는 대상이나 내용의 차이보다도 내용"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논리적 처리 방식"이 다른 것이다. 53

 “만일 인식 비판이 어떠한 것도 미리 주어진 것으로 전제해서는 안 된다면, 다른 곳에서 검토 하지 않고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그 자신이 최초의 것으로 정립한 그 어떤 인식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이 최초의 인식은 불명료하고 의심스러운 어떠한 것도 포함해서는 안 된다.” 60, 강조는 필자

 “초월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초월은 인식 대상이 인식 작용 속에 내실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할 수 있다[내실적 초월=지향적 내재]. [...]  코기타치오가 생각하고 또 자칭 지각한다거나 기억한다고 하는 사물은 코기타치오 자체 내에 체험으로서, 부분으로서, 실제로 그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내실적으로 발견될 수 없다. [...] 따라서 내재적이란 말은 여기서 인식 체험 속에 내실적으로 내재적임을 뜻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초월이 있다. 이 초월의 반대 개념은 완전히 다른 개념의 내재인데, 이 내재는 곧 절대적인 명료한 소여, 절대적 의미에서의 자체 소여를 뜻한다[순수 내재]. 모든 중요한 회의를 배제한 이러한 주어짐, 생각되는 대상성 자체를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대로 완전히 직접적으로 직관하여 파악함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명증의 개념, 그것도 직접적 명증으로 이해된 명증의 개념을 형성한다. 명증적이지 않은 모든 인식, 대상적인 것을 사념하고 정립하기는 하나 그 자체로 직관하지 않는 인식은 두 번째 의미에서 초월적이다[순수 초월]. 그러한 인식 속에서 우리는 그때 그때 진정한 의미에서 주어진 것을 넘어서, 직접적으로 직관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다.” 70-71

 “초월적 인식이 실제적이라는 사실로서의 그의 앎은 초월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그에게 보증한다. 그러나 수수께끼는 바로 초월적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74

 “한갓 알려졌을 뿐 직관되지 않은 존재들[초월적인 것들]로부터 연역하는 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직관은 증명되거나 연역될 수 없다.” 77 초월적인 것으로부터는 인식의 가능성을 해명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환원된 직관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모든 인식론의 근본적 오류는 소위 메타바시스, 즉 한편에서는 심리학주의, 다른 한편에서는 인류학주의와 생물학주의의 근본 오류와 관련된다." 78

 "순수 현상을 직관할 때, 대상은 인식 밖에, ‘의식’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직관된 것의 절대적 자체소여의 의미로 동시에 주어져 있다." 82

 cf. 감정론적 명증 개념 비판 pp.110-111. 사태 자체가 주어지는 직관과 공허한 지향만을 가지는 기호적 사념 간의 명증의 차이는 감정이 아닌, 직관에서 드러나는 현상 자체의 차이이다.

 "근원, 즉 절대적 소여를 직관하는 인식에 있어서, 너무 애써 골똘히 생각하면서 이러한 사유하는 반성들로부터 자칭 자명성들을 길어내는 일보다 위험한 취미는 없다." 114 

 “대상적인 것은 현상의 내실적 부분이 아니며, 현상 속에서는 결코 발견될 수 없고 현상 속으로는 용해될 수 없는 무언가를 자신의 시간성 속에서 갖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현상 속에서 구성된다. 대상적인 것은 현상에서 나타나며 현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서 명증적으로 주어진다.” 125

 "구성한다는 것은 [...] 내재적 소여들이 그때그때 [...] 그 자체는 대상들이 아니며 대상들을 내실적으로 포함하지 않는 현상들 속에서 자신을 나타냄을 뜻한다." 127

 "이것은 최초의 본질 통찰인데, 모든 사유 현상은, 그것의 내실적 내용을 갖는다. [...] 다른 한편, 사유 현상은 지향적 대상을 소유하는데, 지향적 대상은, 사유 현상이 대상의 본질 특성에 따라 그러그러하게 구성된 것으로 생각한 대상이다." 132-3

 “인식 작용, 넓게 파악하자면 사유 작용 일반은 연관 없는 개별적인 것들이 아니며, 의식의 흐름 속에서 연관 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관계하면서, 목적론적으로 함께 속해 있음을 나타내고 충족, 확증, 증명, 그리고 그것에 반대되는 것의 상응하는 연관들을 나타낸다. [...] 이러한 연관들 속에서야 비로소 객관적 학문의 대상성이, 무엇보다도 실재하는 시공간적 현실성의 대상성이, 단번에가 아니라 점증하는 과정 속에서 구성된다.” 134-135 

 궁금증

 *우리는 순수 초월의 대상에 대한 명증을 가질 수 있는가? 가질 수 있다면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칸트의 은밀한 회의론은 어떻게 논파되는가? 순수 초월의 대상과 내실적 초월의 대상은 단지 환원 전후의 동일한 대상이므로 둘 모두에 대해 같은 수준의 명증이 가능한가? 아니면 전자의 명증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가? 그 떨어짐은 어느 정도인가? 

 **구성은 얼마나 능동적인가? 규정, 또는 의미 부여는 얼마나 자유롭게 이루어지는가? 구성의 자유도에 대하여.

 ***회의주의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 인식이 사태와 맞아떨어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현상학의 전제는 어떻게 증명되는가? A. 직관의 명증성은 그것에 대한 의심을 무의미하게 만드는데, 그 속에서 인식이 사태와 맞아떨어지는 것이 가능함이 드러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