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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자크 데리다, <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

자크 데리다, 심재원 신호재 옮김, 『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 그린비, 2019

 대학원생 동료분들과 데리다의 박사 논문을 읽는 세미나를 진행했다. 너무 늦게 합류해서 리뷰를 남기기 민망하지만 문제의식을 개괄하는 머리말 정도는 정리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읽기에 대강의 문제의식은 ‘기원이 절대적이라면서 어떻게 역사 속에서 발생하니?’로 요약된다. 말을 있는 그대로 옮긴 경우 페이지 수를 괄호 안에 넣었고, 조금 쉽게 단순화하여 옮긴 경우에는 꺽쇠 속에 넣었다. 모든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이다.

- 발생의 철학은 철학사와 역사철학 사이의 본질적 불가분성을 드러낸다. <13> : 이 책 내내 데리다는 철학적 이념과 그것이 출현한 역사 사이의 불가분성을 역설한다. 이것이 확장되어 철학사와 역사철학 사이에도 불가분성이 있음이 내세워진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이 확장이 비약이라는 느낌이 있다.

- 역사는 이성적 구조, 의식, 기원적 의미 체계의 연속적 출현을 기술한다. 또한 모든 인식 혹은 철학적 지향의 역사적 실재성reality에 대한 의존을 함축한다. 따라서 역사는 객관성의 절대에 대한 토대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를 저버린다. <14-15> : 역사는 우연성에 의해 지배되지만 토대는 모든 역사적 시점에서 필연적으로 토대로서 작동해야 한다. 그런 토대가 특수한 역사적 시점에 (i)탄생하거나 (ii)착상/발견된다는 것은 우리가 토대에 기대하는 필연성을 깎아내린다. 사실 두 번째 경우에는 별다른 모순이 빚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 데리다가 지적하는 것이 첫 번째 경우인지 두 번째 경우인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 발생은 첫째, 자율적 토대의 연구로서의 철학의 가능성을 문제 삼게 만든다. 둘째, 실제적 발생의 스펙터클을 전개하는 과학과 철학의 관계를 문제삼게 만든다. 철학적 의식이 이러한 과학적 가치들을 토대 지을뿐 아니라 [그 속에서] 다시 불러 일으켜지고 발생하며 내포되는 것일 때 셋째, 철학 자신의 고유한 의미와 존엄성이 문제시된다. <15> 

- “왜 이 담론의 잘못된 출발이 항상 필연적인가? [...] 우리가 구성적 원천, 즉 가장 기원적 계기를 향하여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은 왜 항시 구성된 것, 즉 파생물로부터인가?(14)”

cf, “[...]모순은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출발하도록 강제하는 방법론적 요구의 구실하에, 즉 부동의 대상들의 선술어적 지각에서 구성된 명증성의 구실하에 후설이 사실 가장 복잡한 것, 가장 정교하고, 가장 완수된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완성된, 방법론적으로 가장 접근성이 높은 구성의 영역은 실제 가장 복합적이고 가장 ‘침전된’ 것이다. 방법론적 요구에 양보하는[굴하는] 것은 가장 단순한 것에서 가장 복잡한 것으로 나아가는 실제적 발생을 고려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260)” 

-모든 역사적 발생의 환원이자, 그것과의 작별을 뜻하는 ‘초월론적 환원’과 모든 환원에 저항하며 현상학과 세속적 과학들 사이에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론적 발생’의 개념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17-18>

- “한마디로, 초월론적 발생의 주제가 이것을 자연적 시간에서 선행했던 경험적 발생의 주제를 이해하고 토대 짓기 위하여 특정 계기에 출현했다면, 이 진화의 의미를 우리는 자문해야만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였는가?(18)” : 그 특정 계기 이전과 이후의 단절이 낳는 여러 문제들을 예고하는 듯한 문장이다. '진화'라는 표현이 참 익살스럽다. 여기서 데리다가 ‘초월론적 발생’으로 일컫는 사태가 초월론적 주관성의 발생인지, 아니면 대상을 지향할 때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초월론적 발생인지 모르겠다는 게 함정. (33쪽을 보면 전자 같다만.)

cf, “[...]어떻게 ‘유럽적 인간’에 기원적으로 선행했던 의미인, 현상학의 구체적 이념이 그토록 늦게 유럽사에 나타날 수 있었는가? 그것의 동기화가 완수되고 나타나게 되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338)” :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망각되었다는 식의 해명이라면 정말 만족스럽지 못하다.

- 역사와 철학 사이의 변증법은 존재론적 또는 초월론적이다. “이러한 변증법의 실재적 시작을 결정하는 것은 항시 불가능”하다. “어떤 실재적 시작의 실재적 결정 일체의 불가능성”이 “발생의 철학의 최종 의미일 것”이다. “줄곧 두 항이 결코 어느 하나의 실재적 이차성으로 귀결될 수가 없이 상호 문제화될 것이다.” <20-21> : 후설의 철학은 질료와 형상, 존재와 시간, 수동성과 능동성과 같은 이항 관계에 의존하여 진행된다. 이 중에서 보통은 후자가 더욱 근본적이거나 근원적인 것으로 상정되는데, 발생의 철학은 전자의 항 없이는 후자의 항이 존재할 수 없다는, 다시 말해 근원은 순수하지 않다는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근원의 비순수성은 존재론적 변증법의 근원적 작동 때문이다.

cf,“순수한 형식은 본질적으로 이미 질료적이다.(224)”

cf, “[...]초월론적인 것 혹은 존재론적인 것에 절대적 우선성을 부여하는 것은 발생을 동결하는 것이다.(253)” : e.g. 형상>질료, 부정>실망

- “발생은 자신의 개념 안에 모순되는 ‘기원’의 의미와 ‘생성’의 의미를 결합한다. [...] 간단히 말해서, 절대적 기원이 없는 발생은 없는데, 이 기원은 존재론적으로 혹은 시간적으로 최초성originality이고 가치론적으로 독창성originality이다. 모든 발생적 산출은 자신이 아닌 것을 향한 초월성[불연속성, 이타성alterity]에 의해 나타나고 의미를 취한다. 그러나 [...] 모든 발생적 산물은 자신과 다른 것에 의해 산출되고, 과거에 의해 전달되고, 미래에 의해 호출되고 방향이 정해진다. 발생적 산물은 어떤 맥락에 기입되는 한해서만 그 스스로 자신의 의미가 되고 자신의 의미를 갖게 된다. [...] 발생은 또한 포섭, 내재성[연속성, 동일성]이다.(21)” : 발생은 자신과 다른 곳으로 초월해 가는 운동이지만, 그 운동은 (전체 맥락에 의해 매개되어) 자신에게 내재된 곳으로만 향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자신과 극단적으로, 절대적으로 이질적인 것으로는 발생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발생은 “어떤 의미도 제시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인지될 수도 없을 것이다.(26)” 

- “어떤 선취가 이 모든 발생의 의미를 고수한다. 모든 ‘혁신’이 ‘검증’이고, 모든 ‘창조’가 ‘완성’이며 모든 ‘갑작스러운 출현’이 ‘전통’이다.(24, cf protention)” : 베르그송이 자유로운 선택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Y자 모양으로 직선이 꺾이는 운동이 아니라 늘 곡선의 형태를 그린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곡선 위의 점은 자신이 그로부터 온 곳과 그곳으로 갈 곳을 모두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기원 속에 파생물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면 기원은 이미 오염되어 있고, 이미 세속화되어 있기에 “초월론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구별은 붕괴되고, 이와 함께 철학의 모든 근본적 토대의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붕괴될 것이다. [...] 이 무한한 모순이 현상학적 시도의 동기인 동시에 최종 의미일 것이다.(23 cf, 349쪽의 "반복")” : 데리다는 후설 철학에 대한 변증법적인 이해를 시도한다. 후설 철학은 초월론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구별로부터 시작하지만, 그리고 이 구별을 통해 객관/경험주의도 형식주의도 물리치지만 결국은 그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즉 시작점으로 되돌아온다.

- “모든 의미는 의식에 대한 것이고 정의상 지향적이고 ‘초월론적 자아’에 외부적으로estranged 될 수 없으므로[낯설 수 없으므로] 항시 이미 현존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 ‘종합적인’ 가치 자체에 의하여, 하나의 생성, 하나의 시간적 행위는 검증적인 것이 되고 극단적으로는 분석적인 것이 된다.(25)” :  분석적이라 함은 술어가 주어에, 발생의 결과가 발생의 원인에 포함된다는 뜻이다. 라이프니츠의 초본질주의가 상기되는 대목이었다.

cf, 극단적으로 비분석적인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의미의 초월론적 구성이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소외[e.g.대상/경험/사실에 대한 집착, 실증주의]의 기회들과 조건들 자체를 산출한다.(340)” : 왜냐하면 지향성의 임무는 타자, 대상으로의 초월이니까. “모든 지향성은 본질적으로 객관주의적인 소박함과 전제 삼음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종합적 성격에 연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341)”

- “칸트 철학에 있어서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은 상호 배제한다. [...] 지향성의 의문의 여지가 없는 기원적이고 근본적인 경험은 [칸트의] ‘비판적’ 태도를 정복하며 선험적 종합을 역사적 생성의 한가운데에 기입한다. 그러한[역사적 생성에 기입된] 선험적 종합이 모든 경험에 대한, 또한 경험 속에서, 경험에 의해 내맡겨져 있는 기원적 토대이다.(26-28)” : 역사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사이의 종합이 모든 체험에 선행한다.

cf, 흄은 철학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회의주의에, 칸트는 초월론적인 것을 망각하고 세속적인 것에 만족하는 소박함에 빠졌다. <346-7>

- “발생의 절대적 의미가 어떻게 ‘기원적인’ 동시에 ‘선취된’ 것일 수 있는가를 아는 문제는 미정으로 놓아두자. 이 선취가 그러한 것으로의 미래에서, 혹은 아니면 기원적 현재와 선취된 미래에 의해 항시 재구성된 과거에서 행해지든 간에, 이러한 선취는 그 의미가 어떻든 모든 가능 의미의 나타남에 항시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29)” : 선이해로서의 본질과 예지는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질까?

- “발생의 철학은 철학으로서의 자신의 토대를 발생에 두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테면 철학의 역사적 의존으로부터 철학의 영원한 무능이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 일체의 회의주의[feat. 심리주의, 역사주의]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32)” 그러나 “어떻게 철학이 자신과 다른 것에 의해 발생되면서도 여전히 기원적인 자율을 자부할 수 있겠는가? 철학을 구하기 위해, 철학은 철학에 의한 철학의 발생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러나 이러한 가설에서, 우리는 ‘범논리주의’에 아주 가깝게, 실재사를 오직 철학적 목적론의 하녀의 상태로 환원하고 지향성의 기원적 경험, 세계의 초월, 이타성, 실제적 시간성 등등에 관하여 현실성 없는 가상을 행할 ‘범철학주의’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33)” 

- 초월론적 지향성은 자아와 자아 외부의 것 사이의 변증법을 본질로 가진다. 하지만 그 중 자아, 즉 초월론적 주관성은 기원으로서 절대적이고 자율적인, 즉 비변증법적인 지위를 가져야 한다. 이 둘 사이의 변증법(양립?)이 존재론적으로 가능한가? <34-35>

cf, X는 Y를 전제한다. 동시에 X는 Y를 구성한다. = X와 Y 사이의 변증법 <207>

- 역사를 박탈당한 순수 의미는 “순수 불명료함, 전체적인 부조리”다. <36-37> : 가장 투명한 것이 가장 불투명하다. 너무 투명하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 분석과 종합은 발생의 철학에서 대립되지 않는다. <39>

 사실 머리말을 혼자 읽다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했다. 나는 과연 철학에 소질이 있는 것일까?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