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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District of Columbia 2

 무척 잘 먹고 있다. 외식을 자주 하지 않아서 거의 집에서만 챙겨먹는데도 살이 쪄서 돌아갈까 봐 걱정이다. 김치 대신 올리브를, 밥 대신 계란프라이를 주식으로 삼고, 내 몸통만한 레이즈 감자칩을 (지금도) 먹고 있다. 내 유학생활의 청사진이 그려지는 기분이다. 단기임대한 집에 식기세척기가 있어서 한국에서와 달리 설거지 걱정 없이 온갖 식기류를 꺼내 쓸 수 있는 것도 편하다. 한국에서는 믹스커피 따위를 마실 때, 뜨거운 물을 붓고 난 후 컵을 단순히 살살 흔들거나 포장지로 커피를 저었었는데, 여기서는 아무 생각 없이 티스푼으로 커피가루를 듬뿍 뜨고 휘젓기까지 할 수 있다. 설거지를 하는 일이 손목에 부담이 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사소하지 않은 축복이다. 커피는 세이프웨이라는 식료품점에서 5달러짜리 인스턴트 제품을 구매해 매일 두 잔씩 야무지게 타마신다. 앞으로 구십 잔은 거뜬히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얼마 전 시내에 나가 마신 플랫화이트 한 잔 값이 4달러였던 것을 생각하면 가격 책정의 메커니즘만큼 신비로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조지타운에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여기는 대중교통이 그렇게까지 편리하지 않아서, 걸어서 20-30분쯤 걸리는 애매한 거리는 라임이라는 전동 킥보드를 이용해서 오가는데(한국의 따릉이 같은 개념이다. 유료일 뿐) 내 운동신경이 발목을 잡았다. 언니 혼자 킥보드를 탔다면 10분이면 주파했을 길을 40분이나 걸려 간 데다 그 사이 두 번이나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한 번은 아예 잔디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무 장애물도 없는 공원 길이 뭐가 그렇게 무서웠는지... 속도를 내자니 두렵고, 안 내자니 균형이 잡히질 않다 보니 아무튼 그렇게 됐다. 땀을 뻘뻘 흘리는 채로 피자 집에 들어가 혼자 한 판을 먹어치웠다. 가장자리 도우는 올리브 기름을 찍어서 냠냠해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공항에서 집까지 나를 태워주셨었던 우버 아저씨께서 대체 왜 그렇게 줄을 서서 먹는지 모르겠다고 농담조로 불평을 한 컵케이크 집에 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성공적인 바이럴 마케팅이 아니었나 싶다.

 컵케이크 가방을 덜렁덜렁 들고 부둣가를 걸었다. 산책로의 서쪽에서는 대마초 냄새가 났고, 동쪽에서는 색소폰 소리가 들렸다. 또 킥보드를 탈 엄두가 안 나서 언니를 졸라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온 컵케이크를 까먹으면서 넷플릭스 앤 칠을 실천했다.

 그 다음날에는 햄버거와 젤라또가 너무 먹고 싶어서 가까운 번화가인 듀퐁 서클에 나갔다. 서점에 가서 ⟪존재와 무⟫를 구매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니체를 읽었다. ⟪안티크리스트⟫를 레비나스의 책과 함께 보관하는 데서 오는 기묘한 희열이 있다. 자기숭배 대 타자숭배, 선량함에 대한 경멸과 선의 절대적인 우선순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서로 교차한다. 둘 중 누구의 세계관을 삶의 모델로 삼아야 할까 생각해보면 즉시 둘 다 너무 극단적이라는 반응이 인다. 하지만 유연성을 목표로 극단을 피하려 하다 보면 원칙의 부재와 비일관성의 혐의를 벗기가 어렵다.

 마지막으로 어제는 언니와 팔짱을 끼고 필라테스를 하러 나갔고, 차이나타운의 마라탕 모임에 다녀왔다. 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다. 내일이면 엄마도 D.C.에 온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엄마와 함께 관광지를 둘러볼 생각이다. 백악관과 국립미술박물관이 가장 기대가 된다. 벌써 이 도시에 정이 들었다. 언니가 자꾸 근처로 유학을 오라고 슬금슬금 유혹하는데 이대로라면 넘어갈 것 같다. 이렇게 말해놓고 독일어 숙제를 하러 가겠지. (23일에 ZD를 쳐서 틈틈이 살펴보고 있다. 합격하면 기분이 좋겠지만, 불합격해도 그만이라 별로 부담이 없다.)

 남는 시간에는 한겨레 작가 아카데미에서 듣는 수업의 과제를 한다. 조우리 작가님의 소설 창작 강의인데, 무척 친절하고 성실하셔서 듣는 내내 기분이 좋다. 또 한 편의 단편을 무사히 완성할 수 있기를.

 이런 식으로 내 일련의 행위들을 꼼꼼하게 추적하는 종류의 일기는 오랜만에 써본다. 가치가 있는 기록일지 의구심이 들지만, 글을 써서 유해할 것도 없으니 그런 의혹을 제기하는 게 더 이상하다. 가까운 누군가가 재밌게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반, 내 삶의 국면 하나를 나중에 기억해보기 좋게 정리하고 싶은 마음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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