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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에마뉘엘 레비나스, <탈출에 관해서> 요약 및 비판

에마뉘엘 레비나스, 김동규 옮김, ⟪탈출에 관해서⟫,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모든 강조는 필자.

기꺼이 빌려주신 M씨께 감사.

 이 책에서 레비나스는 존재의 외부를 사유하는 데 무능했던 서양철학을 비판하면서 존재로부터의 '탈출(évasion)'이란 개념의 가능성을 탐사한다. 존재의 외부를 가리키는 탈출 개념의 근거로 그는 '말레즈(malaise, 불안감)'자아를 존재로부터의 탈출로 초대하는 현상을 분석한다. 레비나스에게 말레즈란, 자아로 하여금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게 만들지만 무엇이 그러한 벗어남을 가능하게 해줄지에 대한 앎이 없는 그런 감정이다. 우리가 아무리 (어떤 목표에 봉사하는지 잘 아는 이런저런 대상들을 통해) 욕구를 충족해도,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근원적인 말레즈--<내가 나로 존재한다>는 데 대한 절대적인 불만--는 해소되지 않는다. 애초에 욕구는 '충족' 가능한 결핍이나 '극복' 가능한 한계로부터 오는 것, 그러므로 완전한 해소가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욕구 자체가 말레즈로부터 오는 것으로서, 존재 자체로부터의 탈출이 성공하지 않는 이상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쾌락이 욕구의 '끝'으로서 욕구를 해소시켜줄 것이라는 믿음은 그릇됐다. 쾌락은 존재 자체로부터의 탈출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황홀경의 순간 우리는 탈출에 성공한 것처럼 느끼지만, 그 느낌은 일시적인 기만에 불과하며, 탈출의 실패가 확정되자마자 우리가 우리의 존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무능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수치심이 발한다. 수치심은 일반적인 정의에서와 달리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에 상응하는 사태가 아니라 <'나'가 모든 것이다>에 상응하는 사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말레즈 및 말레즈를 해소시킬 수 없다는 무능으로부터의 수치심을 가장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현상은 구역질이다. 구역질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존재에 '못박혀 있음'을 절실하게 체감한다. 구역질을 통해 우리는 순수하게 존재함과 존재로부터 벗어나지 못함은 서로 같은 뜻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못박혀 있음'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그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해지는 또는 적어도 가리켜지는 계기이다.

 한 편의 멋진 철학적 에세이지만, 내가 옳게 이해한 것이 맞다면 레비나스는 적어도 이 텍스트를 통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 물음들에 응수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말레즈는 정말 인간의 조건인가? 우리는 정말 '내가 나로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고자 열망하는가? 경험적으로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열망이 모든 인간에게 타당한 선험적 사실로서 보편화될 수 있을까?

② 존재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외부가 있다'는 문장이 성립해야 하는데, 이 문장은 모순이다. 레비나스는 존재로부터의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거나, '존재' 개념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만들어버렸다는 혐의에 응답하거나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 (그는 둘 중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과연 자신이 비판하는 서양철학사의 구성원들과 동일한 외연 및 내포를 가지는 '존재'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가? 달리 말해, 그가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로부터의 탈출이 사실은 특정한 존재의 양태로부터의 탈출이 아닐 가능성을 어떻게 배제하는가?


 아래는 이 책에 대한 상세한 요약으로, 국역에서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 및 7-8장은 Stanford University Press에서 나온 Bergo(2003) 역(On Escape)을 참고했고, [] 안에 들어간 내용은 Bergo(2003)의 역어 선택을 선호한 부분이거나 특별히 나의 해석이 들어간 부분이다.

1장 ⟪탈출에 관해서⟫는 존재가 인간의 자유를 공격한다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기존의 [자기 및] 주체 개념은 그 어떤 경우에도 통일성과 단순성을 잃지 않았고, 자아와 비자아의 투쟁 가운데서도 [비자아를 자아의 대상으로 동화시킴으로써] 평화 속에 폐쇄되어 있었다. [달리 말해 자기 혹은 주체들은 자신과 동일한 것과만 마주했지, 진정한 타자성과는 마주한 적이 없었다.] 낯선 실재[현실](réalité étrangère)로부터의 해방을 외쳤던 낭만주의조차 이 평화를 깨트리지 못했으며, 이방인에 대한 배척과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을 주장한 루소나 바이런만큼 오만한 철학자도 없었다. 자기만족의 철학을 체화한 부르주아들이 보여주듯이, 존재는 스스로에게 절대적으로 만족하면서[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면서] 오직 자신만을 지시하고, 그런 의미에서 자기동일적이다. 이것이 곧 서양철학의 역사가 결코 넘지 못한 존재론주의(l'ontologisme)라는 도그마의 벽이다. 존재론주의 하에서 인간 조건의 불만족[불충분성]은 존재 자체의 불충분성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만의 불충분성으로 잘못 사유되었다. 철학은 [존재가 전부, 전체라는 사상을 붙들면서 다만] 이 유한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데 열중했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무한한 존재'는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한계를 가지지 않고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존재 바깥의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존재 바깥의 무엇이 있다'는 표현이 부담스럽다면, 적어도 존재 바깥의 무엇을 가리키는 체험이 있다. 그 체험에 대한 현상학이 곧 이 책의 본문을 이룬다.

 그러나 "현대의 감수성"은 [존재론주의의 벽을 넘어] 존재 자체로부터의 탈출을 종용한다(26). [존재가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여태까지는 자명하게 여겨졌던] '존재가 있다(il y a de l'être)'는 진리가 비로소 드러나버린 것이다. 이 진리는 '비-자아가 있다' 따위와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이때 존재 자체로부터의 탈출*은 관습이나 육체적 욕망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다.** 후자는 진정한 탈출이 아닌 [당장의 존재양태로부터의] 도피(fuite)에 불과하며, 다른 존재[양태]로 나아갈 뿐이다. 창조적 진화의 철학 역시, 실재를 만드는--그로써 실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활동을 포착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재-너머를 포착하지는 못했다. "근본적으로 생성은 존재의 반대가 아니"기 때문이다(30). 미래로 나아가며 현재를 말하자면 초극하려는 움직임조차 "존재의 흔적[낙인]"이다(31). 죽음조차 우리를 감금하는 존재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다.***

*어느덧 후설리안이 돼버려서인지, 일종의 현상학적 환원처럼 생각이 된다.

**영역에서는 전자가 후자의 근원이라는 뉘앙스가 있는데("All these motifs are but variations on a theme whose depth they are incapable of equaling."(Bergo(2003), 53)), 국역에서는 전자와 후자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처럼 번역되어 있다("이러한 모티프들은 전부 심층에 이르지 못하는 주제들의 변양에 불과하다."(29)). 어느 쪽이 맞는지는 원문을 봐야 할 것 같다. 다만 영역본이 맞다면, 모든 도주는 탈출의 변양물이라는 테제가 성립한다.

***Q. 논증은 없고, 단지 "죽음은 하나의 해결책이 아닌 것처럼"이라는 비유와만 병렬되어 있다(31). 죽음은 왜 탈출이 못 되는가?

 "존재(L'existence)란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않으면서 확증되는 절대이다. 이것이 바로 동일성이다. [...] 자아의 동일성 안에서, 존재의 동일성은 그 결박상태의 본성을[결박이라는 본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 동일성은 고통과 탈출로의 초대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따라서] 탈출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것을, 다시 말해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용서할 수 없는 결박상태,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의 결박상태를 깨트릴 것을 요구한다. [...] 탈출은 자기에 대한 자아의[du moi à soi] 결박상태를 깨트리는 것을 동경[한다.]"(32-33)


2장 레비나스는 다시 한 번, 탈출이 존재 자체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존재의 한계를, 곧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을 넘어[서서 무한한 존재가 되는 것]을 열망하는 게 아닌지 되묻는다. 만일 그렇다면, 탈출에 대한 욕구*는 일종의 결핍을 딛으려는 [도주의] 욕구일 뿐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유한성과 그보다 완전한 속성으로서의 무한성은 "존재하는 것[존재자](ce qui est)"에게만 적용될 뿐, 존재에는 명확하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36). 존재에는 완전성의 정도가 없기 때문이다. [덜 존재하거나 더 존재할 수는 없다.] "존재의 사실은 언제나 이미 완전하다[완벽하다]. [...] 탄생이나 죽음이었을지도 모르는 것[탄생이나 죽음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과만 관련하는 확증의 절대적 성격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37) 다시 말해 욕구의 토대가 되는 결핍은 존재의 완전성으로부터 아무 것도 덜어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욕구의 구조에 대한 앎은 "존재 사실의 순수성을 발견하도록 해줄" 수 있고, 이러한 발견 자체가 일종의 탈출이다(38).** [여태까지의 철학에서처럼 존재의 내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외부에서 존재를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Bergo(2003)는 'need'로 번역한다.

**이 부분은 영역의 이해가 개연적으로 보여 그에 따라 정리했다.

Q. 존재에는 완전성의 정도가 없다는 논의로부터 존재는 스스로를 지시하고 정립한다는 논의로 어떻게 넘어가는가?

A. 존재자가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간에 모두 똑같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가 아닌 것을 지시하거나 정립하지 않는다.


3장* 레비나스에 따르면, "욕구를 특징짓는 특정한 고통의 양상, 그것은 불안감[malaise]이다."(40) 불안감은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나는데, 빠져나와서 그리로 향할 그런 "목표점에 관한 무규정성[목표의 무규정성]"을 본질로 가진다(40). 자신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런 욕구는 [일반적인(usual) 욕구로 구체화되지 못하고] 불안감에 머무르며, 그 경우 욕구는 그것의 만족이 아닌 그로부터의 해방에 의해 극복되는 것에 가깝다.** 

*Q. 처음 두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영역의 이해가 개연적으로 보여 그에 따라 정리했다.

 레비나스는 [아마 불안감으로서의 비일반적] 욕구가 가지는 두 특성을 열거한다. 첫째, 이런 욕구는 (유한한 존재자가 가지는 것으로서) 충족되어야 할 어떤 결핍을 가리키지 않는다.* 둘째, "욕구 충족은 욕구를 파괴하지 않는다."(42) 충족[의 행위]는 욕구를 진정시켜주고 평화를 가져다주지만, 이런 평화가 과연 욕구가 최초에 요구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불안감으로서의 욕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우리 존재의 심연에 자리하는 무거운 짐이다.** "욕구에 대한 이 충족의 부적합성[충족이 욕구를 해소하는 데 불충분하다는 성질]"이 곧 인간의 조건에 중요성을 부여하며, 금욕적 전통을 정당화해준다(42). 이를테면 금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의 근본 사건"인 "탈출에 대한 욕구"에 가까워지게 해준다(42-43).

*, **이 부분은 영역의 이해가 개연적으로 보여 그에 따라 정리했다.

Q. 첫째 특성을 해명해주는 근거들로 레비나스가 제시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4장 레비나스는 욕구가 존재의 (결핍이 아닌) 현전을 표현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쾌락(le plaisir)'을 분석한다. 욕구함이 곧 '쾌락을 추구함'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쾌락은 [정적이라는 의미에서]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전개되고 앞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쾌락에 대한 경험에서 인간으로서 우리의 존재는 말하자면 희박해지고 황홀경에 이른다.* 우리는 쾌락의 가운데서 술에 취한 듯 가벼워지는 것처럼, 흡사 분산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쾌락의 순간이 끝나면 우리는 실망감에 이르며, 다시 존재하게 된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Q.(황홀경 등의 개념이 더 명확하게 정의되어야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존재 자체가 소진되거나 희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에 대한 감각이 다소간 상실되는 양태로 존재하는 것일 가능성을 어떻게 배제하는가? 전통 철학의 존재 개념을 비판하는 레비나스가 해당 존재 개념을 자의적으로 협소하게 만들었을 위험은 없는가?

**Q. 존재 자체에 대한 수치심이 아닌, 그저 쾌락 없는 존재 양태에 대한 아쉬움 또는 쾌락의 비정당성으로부터의 수치심일 가능성을 어떻게 배제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쾌락 속에서 한 가지 포기, 자기 자신의 상실, 자신으로부터 벗어남, 황홀경을 확인한다. [...] 욕구는 존재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존재로부터의 해방이다. 왜냐하면 쾌락의 운동이 바로 불안감의 해소[탈출]이기 때문이다. [...] 쾌락이 욕구의 목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다. 왜냐하면 쾌락은 [욕구의] 끝(terme)이 아니기 때문이다. 쾌락은 과정, 곧 존재를 벗어나는 과정이다. [...] 쾌락은 촉발성[수동성, affectivité <-> activité]이다. [...] 쾌락이 존재의 형태를 채택하지 않고 이 형태를 깨트리고자 [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만적 탈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패한 탈출이기 때문이다."(46-48)

 따라서 쾌락은 자신이 약속하는 바인 탈출을 실현하는 데 무능하다. 쾌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실망이다.* 수치심(la honte)은 이 실패의 의미를 부각시켜준다.

*이 부분은 영역의 이해가 개연적으로 보여 그에 따라 정리했다.


5장 수치심은 부도덕한 행위 이후 "우리 자신을 그 위신이 땅에 떨어진 존재로 형상화하는 표상"이기보다, "우리에게는 [이미] 이질적인 [것이 돼버린] 이 존재와 우리를 동일시하지 못[하겠]는 불가능성과 우리가 더 이상 그것의 작용 동기를 파악할[이해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 속에서 나타난다."(50) 그러므로 수치심은 자아의 유한함[부족함, 한계-있음]보다는 자아가 존재함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 수치심은 "우리 존재의 존재 자체,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무능함에 의존"하며*, "우리 자신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기 위해 강제성을 부과하는 우리 존재의 연대책임(solidarité)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50-51)

*Q. 수치심이 존재 자체가 아닌 존재의 일부 양태에만 관계할 가능성을 어떻게 배제하는가?

 그러나 레비나스는 수치심을 도덕적 행위의 종속변수로서 제한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수치심은 보다 근본적으로, 이를테면 가난에서처럼 "그 자체로 감출 수 없는 존재의 벌거벗음"이 그대로 드러날 때 나타난다(51). 우리는 행위와 사유, 고귀한 말 등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감추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 한다. "[...] 이는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감추기 위한, 이 도주의 필연성[필요성, nécessité]은, 자기 자신에 대한 도주 불가능성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다[억제된다]. 따라서 수치심에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 못 박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요, 자기 자신을 숨기기 위한 자기로부터의 도주의 철저한 불가능성이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자아의 현전이다."(52-53) 그러므로 수치스러운 것은 부도덕이라는 특정한 존재의 양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현전" 곧 우리의 "내밀함[intimité?]" 그 자체이다(54). 이 부끄러움(la pudeur)[modesty]은 욕구의 [일시적인] 충족을 통해 해소시켜버릴 수 없는 것으로, 쾌락의 끝에 우리를 항상적으로 실망시킨다.

"그것[수치심]은 우리의 무(néant[nothingness])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존의 전체성(totalité de notre existence)을 드러낸다. 벌거벗음은 그 현존(existence)을 변호하고자[현존에 대해 변명하고자] 하는 욕구다. 결국 수치심은 스스로 변명을 모색하는 현존(existence)이다. 수치심이 발견하는(découvre)[discover] 것은 스스로를 드러내는(se découvre)[uncover] 존재(l'être)다."(54)


6장 불안감의 본성이 가장 순수하게 드러나는 것은 구토를 유발하는 구역질[la nausée]의 사례에서이다. 구역질은 우리의 바깥이 아닌 내부로부터 올라오는 것이므로, 우리 외부의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들러붙어 있[는 무언가]다."(57) [우리들 자신과 구분되지 않는] 구역질 가운데서 우리는 그럼에도 구역질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절실하게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노력을 거듭하면 할수록 더더욱, 역설적으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못박히게 된다.* 구역질 가운데서 "우리는 그저 거기에 있으며(On est là), 있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행하지 못한다. [...] 이것은 [...]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 자체이다(c'est l'expé-rience même de l'être pur)."(58-59) 그러나 그 모든 행위의 무용성으로부터만 우리는 탈출의 순간을 발견할 수 있다.**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은 순수 존재 안에 내재한 안타고니즘***과 순수 존재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탈출에 대한 경험이다. 그러나 탈출이 우리를 죽음으로 떠미는 것은 아니다.****

*, **, ***이 부분은 영역의 이해가 개연적으로 보여 그에 따라 정리했다.

****Q. 탈출과 죽음 사이의 관계를 아직도 이해 못하겠다. 국역과 영역의 번역도 너무 다르다. "만일 탈출이 그 자신을 반성해 본다면 죽음은 죽음으로만 나타날 뿐이다."(59) vs "Death can only appear to it[escape] if escape reflects upon itself."(Bergo(2003), 67)

 구역질은 존재의 벌거벗음을 충만하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너무나 잘 드러내주기 때문에 [레비나스 자신이 정의한 방식대로] 수치스럽다. 구역질에서 오는 수치심은 신체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수치심에 가까우며, 사회적인 시선과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혼자 있는 이에게조차 그 자신의 구토는 일종의 '스캔들'이다.* 마지막으로, 구역질은 자아에게 귀속되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를 정립하는 자기지시적/자기폐쇄적 절대이다. 레비나스는 그 이유로 구역질이 우리에게 존재를 현전시켜주며, 이때 이 현전에 대한 절망이 현전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으로 든다. 이렇게 현전하는 존재는 벌거벗은, 즉 "고유한 현실 앞에서의 무능함(impuissance)"을 지니는 순수 존재이다(62). "[...] 구역질의 본성은, 이러한 현전을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함에 다를 바 없고, [그러한 무능을 본질로 가지는] 존재의 현전과도 다르지 않다."(62)

*이 부분은 영역의 이해가 개연적으로 보여 그에 따라 정리했다.


7장 요컨대 존재의 순수한 현존 및 무능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경험인 욕구는 존재의 결핍, 유한성, 한계가 아니라 존재의 충만함을 근거로 가지며, 따라서 [무한성에 접근하려는] 충족이 아닌 탈출을 열망한다. 모든 존재는 그처럼 불안감 가운데서 스스로를 무거운 짐으로 여기며 탈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하기에, '유한한 존재'는 동어반복, '무한한 존재'는 형용모순이다.

 이어 레비나스는 존재의 기원을 추적하려는 시도들의 실패에 대해 논한다. 존재가 불가피하다는 설명도, 신[적 존재]를 상정하는 설명도 모두 이미 구성된 것으로서의 존재를 전제해버리는 역설을 낳는다. 이에 레비나스는 존재의 기원이라는 문제는 존재가 무로부터 나왔느냐, 아니냐와 관련된 파르메니데스적 사태가 아니라, 존재로 충분하냐, 충분하지 않냐[존재가 전부냐, 아니냐]와 관련된 사태에 입각해 해명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설령 영원한 존재를 상정한다고 해도 도리어 스스로에게 못박힌 존재의 숙명성이 강화될 뿐 해명의 필요는 잔존한다.


8장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의 역사를 존재자 및 사물을 넘어 이상의 영역을, 의식의 영역을, 생성의 영역을 발견해온 역사로 규정하면서, 그 모든 시도들에서 존재론주의는 여전히 도그마로 남아 있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저 철학적 발견들의 의의는 이상과 의식, 생성을 결국 존재케 하는 데 자리했기 때문이다. 사유는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것, 존재해야 하는 것, 존재하기를 기대되는 것 등등에 대해서만 이루어졌으며, 무마저 존재의 옷을 입은 채로 생각되었다. 레비나스의 마지막 비판의 화살은 관념론을 겨눈다. 관념론은 존재 자체를 능가하기를 희망하며 출범했으면서도, 존재자의 구조를 변형하는 데 그쳤을 뿐 존재자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공격하지 않았다(또는 못했다).* 이제 철학은 여태까지 성립된 우리의 사유와 행위 일반이 존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무능했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어야 한다.

*Q. 어째서 레비나스는 관념론이 존재 자체를 능가하기를 희망한다고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