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현상학

에마뉘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필립 네모와의 대화> 발췌

에마뉘엘 레비나스, 김동규 옮김∙해설, ⟪윤리와 무한: 필립 네모와의 대화(Éthique et Infini: Dialogues avec Philippe Nemo)⟫, 도서출판100, 2020. 모든 강조는 나의 것.

"나는 모두를 대신할 수 있지만,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115)

번역이 매끄럽다.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친절한 인트로덕션. 겸허하지만 그만큼 강박적이고, 숭고하지만 그만큼 실현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자체완결적이며 매우 매력적인 세계관임에는 틀림 없다.


1. 성서와 철학

"아마도 사유는 분리, 폭력 장면, 단조로운 시간 가운데 갑자기 생긴 의식처럼, 어떻게 언어 형태로 표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트라우마나 암중모색(tâtonnements[더듬기, 시행착오])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최초의 충격은 을--꼭 철학책이 아니라도--읽으면서부터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물음이 되고 문제가 되지요."(13)

“실제로, 모든 것은 철학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철학이 존재 의미의 첫 번째 장소, 의미가 시작하는 장소는 아닌 것 같습니다.”(18) ➔ 근원은 철학이 아닌 경험이다.

“현상학은 이렇게 망각된 사유, 이러한 지향, 오롯한 의식을 소환하는 것이며, 세계 안에서의 사유에 함축된—오해된—지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 사태 곁에 선 철학자는 환영이나 수사와 무관하게 그 사태의 참된 위치에서 그 사태의 지위, 그 대상성의 의미, 그 존재의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함으로써,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인식의 물음만이 아니라 ‘이것은 어떻게 존재하며,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자입니다.”(26)

2. 하이데거

“하이데거가 보기에, 우리는 일련의 이론적인 전개 과정을 따라 무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 속에서 직접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39) cf. 근본기분으로서의 불안—‘초월론적 불안’—과 자연적 불안 사이의 관계 ≒ 환원과 자연적 태도 하에서의 자연적 태도변경 사이의 관계(Luft(2011), chapter 3 참고)

후설에게는, 매우 존중할 만하며 확실한 지식, 학적 지식이 있더라도, 그 대상에 정신을 몰두한 나머지 대상성의 지위에 대한 문제에 무관심하다면 ‘소박한[안일한]’ 것입니다.”(41)

“그런 이들[교조적 하이데거주의자들]은 사유의 궁극적 준거점을 찾기 위한 여정의 우여곡절을 쓱싹한 이들이 아닐지.”(42)

“하이데거에게는 철학자들과 대화하고 위대한 고전들로부터 완전히 현재적인 가르침을 요청하는 직접적이고 새로운 방식이 있습니다. 물론 과거의 철학자가 바로 대화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현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온갖 해석 작업이 수행되어야 합니다.”(43)

3. ‘그저 있음(il y a)’: ⟪존재에서 존재자로⟫

“잠들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의 불가능성은 나의 주도권과는 무관한 어떤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 비인칭성이 나의 의식을 흡수합니다. 말하자면 그 의식은 탈인칭화됩니다. 내가 밤을 새우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ça)가 밤을 새우고 있습니다.”(50)

대상화하는 의식의 종말, 심리적인 것의 전복”(51)*

*Q. 후설은 이러한 현상 가운데서도 에고의 대상화 작용 및 지향성이 수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나마 작동하고 있다고 해석할 것이다. 이러한 직관차를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레비나스가 후설을 진정한 의미에서 '반박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4. 존재의 고독: ⟪시간과 타자⟫

“게다가 저는 ‘사회적 문제’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순수할 수 있는 순수 철학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타자⟫는 타인과의 관계를 시간이라는 요소와 관련지어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마치 시간이 초월이라는 듯이, 타인과 타자에 대한 탁월한 열림이라는 듯이 다루지요.”(60) cf. 후설의 ⟪철학 입문(Hua XXXV)⟫에서도 시간과 타자는 필증적 환원의 두 대상이다. 

“저의 노력은 지식이 실제로 내재성이라는 점[고립된 자아의 것이라는 점]과 지식에서 존재의 고립이 전복되는 일은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지식의 소통에서 타인 곁에 있는[cf. Mitsein] 우리 자신을 발견할 뿐이지, 타인과 마주하지 않으며, 타인의 면전에 올곧이 서지도 않습니다[cf. 대면, face-à-face]. […] 존재라는 사실은 가장 사적인 것입니다. […] 사회적인 것은 존재론 저편에 있습니다.”(62-63) ➔ 고독/인식(=동화, 흡수)/지식/세계구성적 자기/존재 vs 사회성

“[…] 저는 이 땅의 모든 먹거리[nourritures]를 주체가 자신의 고독을 회피하기 위한 향유[jouissances]로 이해합니다. […] 인식에 관한 한, 그것은 본질상 우리가 동등시하고 포괄한 것, 우리가 타자성을 유보한 것, 내재적이 된 것과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척도와 나의 눈금에 있기 때문입니다. […] [데카르트가 우리에게 알려주듯] 코기토가 스스로에게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은 무한의 관념입니다. 앎은 언제나 사유와 사유 대상의 일치입니다. 결국 인식으로는 자기로부터의 벗어남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성은 인식과 동일한 구조를 지닐 수 없습니다.”(66)*

*Q. 말하자면 타자와 나 사이의 무한을 마주함으로써, 그렇게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자기라는 후설의 자아론적 관점이 엄밀한 의미에서 반박되지는 않은 것 같다. 달리 말해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깨달음 또한 적어도 후설에게는 '인식'의 일부다. 레비나스는 '인식'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협소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 같고, 그 경우 후설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오독한 데 불과하다.

“사회성은 인식을 통한 것이 아닌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그 책에서는 논증 작업이 끝까지 진행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 저에게 나타난 시간존재의 확장으로 이해된 시간입니다. 그 책은 무엇보다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향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몇몇 구조를 보여 주었습니다.* […] ‘시간은 지속에 대한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우리를 우리가 소유한 것 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끄는 역동(dynamisme)이다.’”(67) ➔ 타자에 대한 에로스, 부성애(동일화가 아닌 방식의 관계맺기)

*이러한 구조가 가능하다는 직관이 레비나스를 후설과 차별화시킨다.

5. 사랑(amour)과 자식성(filialité): ⟪시간과 타자⟫

“[…] 사랑의 관계에서는 타자성과 이원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두 존재 사이에서 혼동[뒤섞임]이 되는 사랑 관념은 거짓된 낭만적 개념입니다. 에로스적 관계의 파토스는 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그래서 타자가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75) cf. 미래와의 관계=‘여성적인 것’*과의 에로스=신비=“세계 속에서 결코 거기 있지 않은 것과의 관계”(75)**

*Q. 아무리 타자성을 숭상한다 할지라도, 굳이 여성적인 것을 본질상 타자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시대착오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Q. (성애의 상대는 반드시 존재할 텐데) 이 비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레비나스는 ‘존재’의 개념 역시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식성은 훨씬 더 신비롭습니다. 그것은 타자가 철저히 타자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나(moi)인 타자와의 관계입니다.”(76)

6. 비밀과 자유: ⟪전체성과 무한⟫

"이 역사[전체성을 옹호하는 철학사]는 보편적 종합을 시도하는 것으로, 의식이 세계를 포용하며 의식 바깥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따라서 절대적 사유가 되는 전체성으로 모든 경험과 모든 합리적인 것을 환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자기에 대한 의식은 동시에 전체에 대한 의식입니다. 철학사에는 이런 전체화에 반대하는 항의가 거의 없었습니다."(83)

“[서로를 초월하지 않는 것들 사이의] 종합이 아니라, [서로를 초월하는] 인간들의 대면에, 사회성에 그것의 도덕적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제일철학은 윤리학입니다.”(85-86)

“정말로 정치는 언제나 윤리에 기초하여 점검받고 비판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번째 형태의 사회성[정치를 능가하는 상호주관적 윤리]은 각자에게 자신의 삶인 비밀, 폐쇄된 내면성이라는 어떤 엄격하고 사적인 영역으로 고립될 수 있는 울타리를 고집하지 않는 비밀, 그럼에도 타인에 대한 책임을 고수하는 비밀을 [전체주의와 달리] 정당하게 평가할 것입니다. 이 책임은 그것이 윤리적으로 도래할 때 양도할 수 없는 책임일 터이고, 우리는 이 책임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이 책임은 절대적 개별화의 원리일 것입니다.”(90)

7. 얼굴: ⟪전체성과 무한⟫

“지각은 확실히 얼굴과의 관계를 지배할 수 있지만, 얼굴 특유의 것은 지각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 얼굴에는 본질적인 빈곤함이 있습니다. [...] 얼굴은 마치 우리를 폭력 행위에 초대하는 것처럼, 노출되고 위협받습니다. 동시에, 얼굴은 우리가 [사실적으로가 아니라, 당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94-95)

“얼굴은 당신의 사유가 포용할 만한 내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얼굴은 담아낼 수 없는 것이며 당신을 저편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얼굴의 의미작용이 지식과 관련된 존재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96) cf. 말함=얼굴에 응답함=타인에 대해 책임을 짐 vs 말해진 것=지식

‘살인하지 말라’는 얼굴의 첫 번째 말입니다. 또는 명령입니다. [...] 그렇지만 동시에 타인의 얼굴은 벗은 채로 있습니다. 그는 내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가난한 자입니다.”(98)

“만일 나와 타자만 있다면, 그 타자에게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있습니다. [...] 나는 또 다른 누군가가 내 이웃과 이해관계가 있는지, 아니면 이웃의 피해자인지 알고 있습니까? [...] 내가 타인과 함께 수립한 상호인격적 관계를, 나는 또 다른 사람들과도 수립해야 합니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이런 특권을 완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로부터 정의가 도래합니다. 불가피하게 제도를 통해 행사되는 정의는 언제나 처음의 상호인격적 관계를 따라 점검되어야 합니다.”(100) ➔ 레비나스의 사회계약론.

“저는 욕망이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욕망과 욕구의 차이를 기술하려고 했습니다. [...] 욕망은 사유가 그것의 생각함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유 또는 사유가 생각하고 있는 것 그 이상을 생각하는 사유와 같다는 점을 통해서 말이죠. 그것은 분명 역설적 구조이지만, [데카르트가 말한] 유한한 작용 속에서의 무한의 현전과 다를 바 없는 구조입니다.”(103-104)

8. 타인에 대한 책임: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사건(l'essence) 저편⟫

“저는 책임을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나의 행위가 아닌 것에 대한 책임으로, 심지어 나와 무관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이해합니다.”(108)

주체성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애당초 타자를 위한 것입니다.”(109)

“⟪전체성과 무한⟫의 근본 주제 중 하나는 상호주관적 관계가 비-대칭적 관계라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호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내 목숨을 대가로 치르는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상호 반응은 그의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 내가 타인에게 예속(sujétion)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주체’(sujet)입니다. [...] 이는 실제로 나의 것인 이런저런 죄책 때문이 아니며, 혹은 내가 범했을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다른 모든 이에 대해 응답하고, 다른 이들 안의 모든 것에 응답하고, 심지어 그들의 책임에까지 응답하는 총체적 책임이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112-113)

“[...] 주체성은 애당초 볼모이며, 타자를 대신하는 속죄[대신, 대속, substition]에 이르기까지 응답합니다.”(114)

“나의 책임은 양도될 수 없으며,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책임으로부터 시작하는 인간 자아의 동일성 자체를 말하는 문제입니다. [...] 나는 모두를 대신할 수 있지만,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115)

9. 증언의 영광: ⟪전체성과 무한⟫

“무한은 자신을 [이를테면 충전적인 소여로 드러나면서]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의 의미가 성립합니까? 저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주체가 무한을 증언한다(témoigne)고 말할 것입니다. 무한의 계시가 일어나는 것은 이 증언을 통해서이며, 그것의 진리는 표상이나 지각의 진리가 아닙니다.”(121)

10. 철학의 엄격함과 종교의 위안

“[...] 성서의 위대한 기적은 공통된 문헌적 기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상이한 문헌들이 동일한 본질적 내용을 향해 합류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합류의 기적은 유일한 저자라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합류의 중심은 윤리이며, 이것이 단연코 책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131)

“저는 궁극에 가서는 타인에 대한 책임 속에 타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는[타인을 죽게 내버려 두지 말라는 명령은] 아마 분명 사회성의 토대이고, 에로스 없는 사랑의 토대입니다. 타인의 죽음을 향한 두려움은 확실히 타자에 대한 책임의 근간을 이룹니다.”(135-136)

“나는 존재해야 합니까? 존재함으로써, 존재 안에서 존속함으로써, 내가 무언가를 죽이지는 않습니까?”(137)

“저는 결코 자살이 이웃 사랑 및 참된 인간의 삶에서 비롯한다고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 참된 인간의 삶은 타자로 인해 깨어나는 삶, [...] 존재는 결코 [...] 그 존재함의 고유한 근거가 아니라는 것, 저 유명한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conatus essendi)은 모든 권리와 모든 의미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