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단편소설

하설, <아날로그 블루>

하설, ⟪아날로그 블루⟫, 별닻, 2021(독립출판)

"그렇기에 소망한다. 몇천 년의 시간이 지나 누군가가 나를 보아 주면 좋겠다고. 평생을 괴로워하다 간신히 남은 내 뼛조각을, 혹은 내 공간을 보고 욕을 해도 좋고 비난해도 좋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아도 좋으니. 그저 오랜 시간이 지나 작은 공간으로 남을 내 부피를 보고, 내 삶이 지고 갔던 몸집 큰 괴로움을 상상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112, '고백의 형상')

beonty coffee에서

 실제로 만나보기도 전에, 서로가 소설을 쓰고 싶어 하고 쓰고 있다는 사실부터 알았던 우리. 2016년에 처음 인사를 해서 햇수로 7년째 인연을 이어오게 되었네. 그동안 정말 많은 글을 쓰고 고치고, 버리고 응모하고, 어리숙하게나마 책으로 엮기도 해보았다. 이마를 맞대고 합평도 질릴 정도로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을 몇 개만 꼽자면, 연어덮밥을 먹으면서 죽은 아내를 생각했던 남자에 대한 내 이야기. 애달픈 마음으로 몸 안에 식물을 심은 노숙자에 대한 네 이야기. 증오에 휩싸여 형의 전시를 망치는 동생에 대한 내 이야기. 망자의 세계를 설계하는 타칭-신에 대한 네 이야기. 마지막 소설로 너는 의미있는 상을 탔고, 그때 트로피를 들고 사진을 찍는 널 보면서 솔직히 말하면 눈물이 핑 돌았어. 네가 너무 자랑스러웠거든. 네가 언제든, 어디서든 뭔가를 상상하고, 꿈꾸고, 꿈으로 꾼 것들을 치열하게 기록해왔음을 너무나 오랜 시간 옆에서 지켜봤었기 때문에, 그 노력이 보상 받는 순간 가장 가까이서 널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였다는 게 기뻤다.

 너의 글로부터는 아무리 슬픈 이야기 속에서라도 인간에 대한 정과 삶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어. 인물이 살아있고, 무엇보다 감정이 살아있고, 지루하다고 느낄 새 없이 끝까지 읽게 된다. 이번 책에서도 마찬가지였어. 서로 날카로운 크리틱도 주고받았던 사이니까, 내가 괜히 사탕 발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네가 잘 알 거야.

 단편집이기도 하고 상당히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책 전체를 몇 마디로 정리해버리고 싶지는 않다. 특별히 좋았던 작품들을 몇 개 골라서 이야기해보려 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파파'. '나'가 아버지의 흰 머리가 담긴 지퍼백을 건네받았을 때, 햇살로 환한 카페 안에서 내 코가 찡해졌다면 믿겠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재에서 시작해서 사람살이의 단 맛을 느끼게 해주다니, 대단했어. 나한테 누군가 그 소재로 소설을 써달라고 말했다면 엉엉 울면서 내 처지를 좀 용서해달라고 빌었을 거야. '누누'와 '류', '화, 이화'는 인연의 오묘함을 그려냈다고 읽었어. 나도 내가 지나쳐왔거나 아직도 붙잡고 있는 우정과 애정 들을 덕분에 곱씹어볼 수 있었다. 너는 사람 마음의 자연스러운 내용물과 그것의 개연적인 경과를 관찰할 줄도, 상상할 줄도 아는 것 같아서 몹시 부러워. 감정의 자연스러움이나 개연성을 연출한다는 건 나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능력이니까. (가끔 나는 내가 철학을 공부하고 이성을 비대하게 만든 일이 소설을 쓰는 데 독이 됐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봐.) '바닐라 천사'에서는 천사의 과로가 씁쓸했으면서도, '나'와 유진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돼서 훗훗해진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어. 이어진 '빛바랜 회갈색 브라우니'는 '파파' 다음으로 아렸는데, 네 무한에 가까운 상상력이 현실의 슬픔과 결합될 때 어떤 문학적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지 실험해본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했어. ⟪아날로그 블루⟫ 속의 환상들은 단순히 환상을 위한 환상이 아니라 결국에는 현실을 위한, 현실에 향해져 있는 환상이었고, 바로 그 이유로 소설적 도피가 아닌 다만 아름다운 형태의 직시들이었어.

 이 책을 통해 내가 내 내면의 감옥에 갇혀서 어떻게 하면 평화로운 은둔에 대한 열망과 인정 욕구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자폐적인 고민에 빠져있었던 동안--7년 내내 그랬던 것 같은데--너는 가슴을 활짝 열어서 사회를 관찰하고,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왔음을 느끼고 반성했어. 나는 용기가 없어 묘사하기를 시도하지 못했던 형상들을 능숙하게 재현하고, 또 그것들을 통해 감동까지 전하는 너의 노력 어린 재능이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는 언제나 멀리서든, 곁에서든 너를 이렇게 동경할 거고, 너의 이야기를 즐길 거고, 너의 세계를 기대하면서 지낼 거야.

 너도 나도 이제는 글 쓰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절감하고 체념한 지 오래거나 아직까지도 절감하고 있는 중이겠지. 그것은 불현듯 찾아오지만 사실은 매우 체계적으로 우리 삶 속에 스며들어있는 고통이고. 그러므로 언젠가 그것이 돌연 고개를 내밀어, 너를 다시금 힘들게 할 때, 나의 존재함이 네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나는, 너의 글벗이기 이전에 너의 열렬한 독자로 남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