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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번역

에드문트 후설, <형식 논리학과 초월론적 논리학> §93 '데카르트 이래 경험비판에의 시도들의 불충분함' 번역

E. Husserl (Hrsg. von P. Janssen), Formale und Transzendentale Logik: Versuch einer Kritik der logischen Vernunft, Martinus Nijhoff: den Haag, 1974(Hua XVII), s. 234-238, 모든 강조는 필자.

[234] §93 데카르트 이래 경험비판에의 시도들의 불충분함(Ungenügen)

a) 객관적 논리학의 유효성에 대한 소박한 전제

 데카르트에 의해 시도된 모든 학문의 인식이론적 개혁과 모든 학문을 철저한 근거지움 가운데서 통일시켜주는 사피엔티아 우니베살리스[보편 지식]으로 학문을 재창조[하는 작업]에는 물론, 정초(Fundierung)를 위해 이 작업들에 [앞서] 학문들에 [235] 세계의 현존을 미리 부여하는 경험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 속한다. 이러한 비판이 데카르트를 경험이 절대적 명증(세계의 존재를 필증적으로 근거지우는 것의 명증)을 결여하고 있으며(entbehren), 그에 따라 세계[의 존재]에 대한 소박한 전제가 지양되어야 하며 모든 객관적 인식이 하나의 존재자, 곧 에고 코기토의 유일한 필증적 소여에 의해 근거 지워져야 한다는 유명한 결과로 이끌었다. 우리는 이것이 근대 전체의 시작이었음을, 언제나 새로운 불명료성들과 혼란들을 [관]통해 부상한(emporringen) 초월론적 철학[의 시작이었음을] 안다. 위대한, 그러나 오직 절반만 돌파된 초월론적 주관성의 발견과 함께 [성립한] 이러한 데카르트적 시작은 즉시 가장 불운하고 오늘날까지 뿌리 뽑을 수 없게 남아있는 혼란에 의해 흐려졌다(getrübt). 이 혼란은 우리에게 저 '실재론'을,  그것의 마찬가지로(nicht minder) 잘못된[거꾸로된] 대립자들이 버클리와 흄이 꾀한 관념론들인 그런 실재론으로서 선물했다(bescheren). 이미 데카르트에게서 최초의, 의심 불가능한 존재자로서의 에고는 절대적 명증을 통해 세계의 가장자리(멘스 시베 아니무스[마음 또는 정신/영혼], 숩스탄티아 코기탄스[생각하는 실체])로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오직, 논리적으로 강제력이 있는(bündig) 연역의 조치(Schlussverfahren)를 통해 나머지 세계(데카르트에게는 절대적 실체이고 내 고유한 영혼적 실체 외의 세계의 유한한 실체들인 [세계])를 그로부터 이끌어내는 일만이 문제시되었다.

 이때 데카르트는 이미 초월론적 주제설정(Thematik)을 취급하기 위해 소박한 아프리오리한 상속물(Erbgut)을 가지고, 인과성의 아프리오리를 가지고, 존재론적이고 논리적인 명증들에 대한 소박한 전제를 가지고 작업을 수행했다(operieren).* 그는 그러므로 그에 의해 발견된 에고의 고유한 초월론적 의미를, 세계의 존재에 인식상 선행하는 [바로 그것의 고유한 초월론적 의미를] 놓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경험과 학문적 사고에 대한 물음, 그리고 그러므로 원칙적 보편성 속에서 논리학 자체에 대해 세워져야 하는 물음들의 고유한 초월론적인 의미 [또한] 놓친다.

*그러므로 후설이 데카르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일종의 메타바시스 때문이다.

 이러한 불명료성은 인식이론이 자연적 소박성으로 되돌아가-떨어지는 모든 경우들에 특유한(eigen) 가상적인[가상적이기만 한] 명료성 속에, 그리고 그렇게 현대적 실재론의 가상적으로[만] 명료한 학문성 속에 은폐된 채 상속되었다. 이 인식이론은 소박하게 고립된 논리학과의 결합들(Bunde)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학자에게 증명하고 그로써 학자에게 무엇보다 그것을 최초로 완전히 확실하게 만들어주는 데 봉사한다. [바로] 실재적 세계에 대한 실 [236] 증적 학문들의 근본확신들과 세계를 논리적으로 취급하는 방법들이 철두철미 올바르다는 것, 그리고 학자는 그로써 인식이론 없이 지낼 수 있다는(entraten) 것을 말이다. 그가 어찌 됐든(ja ohnehin) 그것[인식이론] 없이 몇 세기동안 잘 빠져나왔던 것처럼.

b) 자아로의 데카르트적 환원의 초월론적 의미의 결여

 그러나 실증적 학문, 논리학 그리고 인식이론과의 그와 같은 관계로 충분한가?[그것으로 끝인가?](Bewenden haben) 우리가 이전의 연관들에서 상술해야 했던 모든 것 이후에 이미, 그것이 아무리 불완전하고 완전히 한갓되게 암시적이기만 했을지라도(so - es sein musste), 이러한 질문에는 부정적으로 답해져야 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데카르트에게서처럼, 초월론적 자기숙고가 우선 그리로 소급지시하게 되는 에고 속에 인간의 실재적 영혼을 이미 포함된 것으로 사념하는 실재론 그리고 이러한 최초의 실재적 가설들과 그럴 듯한 결론들로부터 초월론적 실재들의 제국 속으로 기투하는 실재론은--이때 (그것이 명시적이든 함축되어있든) 논리학 자체에 속하는 그럴 듯함들[개연성들]의 수학의 원칙들이 그리고 아마 그 외의 형식적 논리학 또한 사용[된다]--이치에 어긋나게도 진정한[현실적인] 문제, 그것[실재론]이 가능성으로서 그 자체로 도처에서 의문시되는 것을 가능성으로서 도처에서 전제하고 있다는 문제를 놓치고 있다.

 논리적 원칙들의--모든 근본개념들과 근본명제들을 포함해--타당성에 대한 해명은 주관적으로 향해진 연구들, 그것 없이는 이 원칙들이 학문적으로 공중에 부유할 그런 연구들로 이끈다. 이는 우리에 의해 이미 이끌어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루어질 연구들의 부분들에 따라 의심 불가능하다. 그러나 에고 코기토로 돌아가면, 그것의 순수한 의식과 특히 그것의 명증으로부터 이러한 에고를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 그러나 또한 가능하고, 생각 가능하고, 추측컨대 그러하고, 그릇되고, 이치에 어긋나는 등등의 것들까지가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주관성으로서의 에고 코기토로 돌아가면--여기서 논리학을 전제할 수 있는가? 모든 논리학을 위해 무엇보다도 그리고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근거를 놔주는 주관적 연구들은 이와 관련해서 어떠한가? 그 주관적 연구들을 논리학으로 반박할 수 있는가? 그 연구들을 통해 비로소 해명되어야 하고 아마 그 연구들의 세계성 속에서, 이러한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의미존립요소와 명제타당성들을 가지고 [237] 들어오는, 이러한 주관적 연구들의 토대를 불법으로(unzulässig) 넘어서는 논리학으로?

 나아가, 이러한 주관적 연구들이 심리학으로 반박될 수 있는가? 철두철미 이러한 객관적 논리학 위에 그리고 모든 경우에서 객관적 세계, 그에 그것의 의미를 따라서 모든 심리적 체험들이 실재적 심리물리적 본질의 실재적 계기들로서 속하는 객관적 세계의 지속적 전제 위에 지어진 심리학으로? 논리학의 철저한 근거지움을 위해서는 전체 실재적 세계가 의문시되지 않는가? 그것[논리학 또는 세계]의 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논리학 또는 세계]의 가능하고 진정한 의미를 산출하고 그것을 가지고 의미가 논리적 근본개념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의미의 사정거리를 산출하기 위해서 말이다. 형식적 논리학의 무엇임-일반이 객관적 논리학으로서의 그것의 포착[판본](Fassung)에서 궁극적으로 또한 세계적 존재라는 의미를 자신 속에 숨기고 있다면, 이 의미는 곧바로 논리학의 근본개념들에, 논리학의 전체 의미를 규정하는 그것에 속한다.

c) 논리학의 근거지움은 초월론적 현상학의 보편적 문제로 이끈다.

 나아가 실재론자들에게 너무나 쉽게 제공된 가설, 그를 통해 데카르트적 환원에 의해 의심 불가능하게 명증한 것으로 남고 모든 인식을 위해 그 자체로 최초인 것인 그런 에고의 존재 토대 위에 실재적 외부세계가 획득되어야 하는 그런 가설은 사정이 어떠한가? 이러한 외부(Außen)가, 초월적 실재성의 가능한 의미와 초월적 실재성에 속하는 아프리오리가 연역[추론](Schlüsse)을 허락하는(gestatten) 공간, 시간과 인과성의 형식들과 함께 문제인 것은 아닌가? -- 그것이 에고의 내재 속에서 우리가 소박하게 곧장 가지고 사용하는 초월의 저 의미를 받아들이고 보존할 수 있는지가 바로 문제인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의미를 구성하는 주관성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숨겨진 가정들이 이러한 의미의 사정거리를 획정하는지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최초로 해소되어야 했던 문제가 아닌가, 그와 같은 가설의 원칙적 가능성, 의미담지성격 또는 부조리에 대해 에고의 초월론적 권역 속에서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끝에 가서는, 이러한 에고로의 귀환과 함께 발원하는 진정한 문제가 포착되면, 순수하게 내재적인 소여들을 [238] 가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리고 [해당되는] 소여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된 객관적 실재성을 통해 '설명'하는 전체 도식이 완벽한(vollendet) 모순이 아닌가?*

*여기서 지적되는 부조리 역시 메타바시스의 문제다.

 실제로 사정은 그러하다. 그리고 모순은 내 순수한 의식의 주체로서의 나의 에고로의 데카르트적 환원과 더불어 하나의 신종의 인식가능성 그리고 존재가능성이 문제가 된다는 데서 유래한다 -- 바로 그 자체로[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초월론적 가능성, 이러한 의미와 함께 배타적으로 내 순수한 의식의 가능성들로부터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서 -- 그리고 이러한 문제적[미정적] 가능성이 이미 인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실재적인 것으로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실재로 추론할 완전히 다른 가능성과 혼동된다는 데서 [또한 유래한다.]

 물론 오직 가능하기만 한 이런 혼동(Verwechselung)의 이행의 자리는, 사람들이 전자의 가능성 일반의 의미를 전혀 명료하게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적 영혼으로서의 자아의 실재성과 에고 사이의 혼동이다. 사람들은 실재로서 받아들여진[가정된](angenommen) 영혼(멘스)가 이미 (공간세계의) 외부성의 의미계기를 가진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모든 외부성, 심지어는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가설들을 통해 가로채고(sich zueignen) 싶어했던 외부성은 처음부터 에고의 순수한 내면성 속에 자신의 자리를 [어떤] 경험, 가능한 경험과 이론을 통해 내면에 요구될 수 있는(zumuten)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세계적 경험의 전체 흐름 그리고 그 속에서 스스로 조화롭게 확증되는 존재자와 함께 내면에 속하는 그런 경험의 지향적 극으로서 가진다는 것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에고로부터 세워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문제설정이 에고 자신 속에, 그의 의식현실성들과 가능성들, 그의 성취들 그리고 그 성취들에 속하는 본질구조들 속에 속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앎과 학문의 지도로 학문이론으로서의 논리학에로 이끌어져 그리고 논리학의 현실적인 정초의 지도로 논리적인 또는 학문적인 이성의 이론으로 계속 이끌어져(fortleiten) 초월론적 철학의 보편적 문제 앞에 그리고 구체적으로 초월론적 철학의 유일한 순수한 그리고 철저한 형태에서는 초월론적 현상학의 보편적 문제 앞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