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배수아 옮김, ⟪G.H.에 따른 수난⟫, 봄날의 책, 2020 '장편은 서사, 단편은 인물'을 무의식중에 공식처럼 생각하며 지냈던 것 같다. 손보미 소설가의 단편이 서사와 서스펜스로 넘쳐나고, 오정희 소설가의 (하나뿐이었던) 장편이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 것을 어쩌면 의도적으로 망각한 채로. 그런데 ⟪G.H.에 따른 수난⟫은 저 공식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처음부터 없었던 것마냥 무화시킨다. ⟪G.H.에 따른 수난⟫에는 서사랄 것이 없다. 가정부가 자신 몰래 치운, 자기 집에 속한 방에서 바퀴벌레와 마주하는 것, 그 바퀴벌레를 죽이는 것, 그리고 벌레의 사체에서 배어나온 하얀 체액을 섭취하는 것이 240쪽 남짓 되는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부다. 그렇다고 해서 인물의 성격이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