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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025년 10월의 연구

GENAUUUUUUUU
Alicja Kwade, ‘Eadem Mutata Resurgo’, 2014
피곤했던 날의 통찰
존재론 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1. Fahrmeir, Andreas. Deutsche Geschichte. Munich: C.H.Beck, 2025 (Erstauflage 2017).

 몇 천 년의 독일사를 128쪽 안에 담았다(구겨넣었다). 지금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설립된 부분을 읽고 있다. 오늘날에는 보수 정당이 지지할 법한 민족적 통일성에 대한 열망이 당시에는 가장 급진적인 사상이었으리라는 사실이 새삼 정치적 감각이란 얼마나 세월에 예민한 것인가를 상기시켜준다. 독일어가 술술 읽혀서 뿌듯한 순간도 있는가 하면, 모르는 단어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문단도 많다. 또 읽기보다는 듣기가--무려 철학자의 생활 속에서조차--훨씬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보니, 'Bergbau'나 'Freizügigkeit' 같이 일상에서 듣기 어려운 단어를 익혀봤자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2. McIntyre, Alasdair. After Virtue. London: Bloomsbury, 2007 (first published in 1981).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은 얄팍하나 계몽주의 도덕이론의 실패에 대한 통찰은 예리하다. 고대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텔로스도, 기독교도 호소력을 잃은 오늘날, 도덕이 저마다 자신만의 권위를 주장하는 아집들 사이 통약 불가능한 갈등에 대한 위장물 이상이 되려면 대체 무엇이 필요한가의 문제를 절실하게 파고든다. 맥킨타이어 본인의 윤리관이 전개되는 마지막 챕터들을 아직 읽는 중인데, 아마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의 현대적 전유를 시도할 것처럼 보인다.

 개인적으로 품었던 궁금증: 텔로스의 관념을 부활시키고자 할 맥킨타이어가 과연 아이리스 머독의 기획에 대해서도 비판적일지 궁금하다. 머독은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텔로스와 같은 것은 부재하며, 선의 추구란 원래 포인트리스한 것임을 관철하면서도 맥킨타이어와 마찬가지로 덕 윤리에 기반해 도덕을 재건하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맥킨타이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머독은 플라톤을 주된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이에 어떤 영향을 주려나? 또 다른 동시대인 윌리엄스는 이 지형도에서 어디를 점유할는지. 70-80년대 영국 윤리학 씬은 정말이지 근사한 폭풍 속에 있었다.

3. Krema, Andrew. “Husserl’s Concept of Hingabe.” Husserl Studies 41 (2025): 179–196.

 전적으로 수동적인 과정처럼 보이는 세계의 현상appearing에조차 자아는 특정한 능동성을 발휘해 참여하며, 그 능동성의 가능한 한 가지 표현이 자기양도Hingabe라고 주장하는 논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후설에게서 자기양도의 개념은 세 가지 맥락에서 등장한다. (가치 정립과 독립적일 수 있는) 주의attention의 체험, 가치평가의 체험, (단순히 평가하는 일을 넘어) 특정한 가치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체험이 그것이다. 서로 상이한 목표와 경과, 구조를 지니는 이 체험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자기양도라는 한 개의 개념 하에 묶일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이 이 논문의 기여이다.

 자기양도는 한 마디로 자아가 비자아에게 자신을 능동적으로 내어주는 체험, 비자아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도록affect [기꺼이] 허락하는 체험이다. 세계를 향한 자기의 자발적 개방의 사태라 이해하고 있다. 다만 특히 정동Affekt의 문제에 있어 인간의 자발성이 얼마나 힘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 적어도 나는 좀 회의적이다. 소위 '트리거링'한 상황을 만났을 때, 과연 '영향 받지 않겠다는 의지' 따위가 유효하기나 할 것인지. 

 한편 베유를 읽기 시작한 이후로 순전히 행위자적 능동성만을 내세우는, 곧 '가함' 또는 '해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agential 것이 아닌 '당함' 또는 '느낌' 중심의 행복pathic flourishing을 개념화할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있다. 후자의 행복은 정동의 차원에서도affective flourishing, 심지어는 지각의 차원에서도perceptual flourishing 나타날 수 있을 것 같다. Krema가 그리는 후설의 경우, 베유와 달리 정동과 지각의 작동, 곧 파토스πάθος 가운데서조차 자발성이, 심지어는 자유가 살아있(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나 행복의 추구 또는 윤리적 삶의 시작점이 행위가 아닌 파토스라는 점에서만큼은 둘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있으며, 나는 아이리스 머독을 베유와 후설 사이에 위치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아직까지는 초보적인 구상이지만 언젠가 이 세 사람을 묶어 수동성의 윤리(학)적 의의(및 그 의의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서로 다른 방식들)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싶다. 베른하르트 발덴펠스를 필두로 독일어권 철학계에서 천천히 인기를 몰고 있는 응답Antwort/Responsivität의 윤리학과도 발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4. Carta, Emanuela. "Husserl on Eidetic Norms." Husserl Studies 37 (2021): 127-146.

 '논문이란 건 이렇게 쓰는 거야'를 느꼈다. 분석철학과의 소통에 열려있는 이런 논문이 더 많이 쓰였으면 좋겠다. 본질이란 그 정의상 해당 본질을 예화하는 개별자가 절대 위반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반대로 규범이란 그 정의상 위반의 가능성--그러므로 더더욱 준수해야 할 필요--을 전제할 때, 어째서 후설이 종종 본질이 규범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말하는지 따져보는 논문이다. 저자는 이 해석적 문제에 '규범적 전환normative Wendung'을 해답으로 내놓는다. X의 본질(에 대한 법칙)은 그 자체로는 좋은 X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나 좋은 X가 되라는 의무를 제시하지 않는다. 즉 본질을 예화하는 개별자 X들에 대한 규범으로서는 기능할 수 없다. 그러나 본질 법칙은 규범적 전환을 겪음으로써 적어도 우리네 판단과 관련해서는 위반 가능한 규범으로 기능할 수 있다. [개별자와 같은 노에마가 아니라 판단과 같은 노에시스를 구속하는] 이 규범은 해당 법칙을 위반하면서 이루어지는 판단은 부정확하거나 비합리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정확하고 합리적인 판단은 성공적으로 고무해낸다. Carta의 궁극적 제안은 이런 종류의 규범들을 '본질적 규범' 혹은 '형상적 규범'이라고 부르자는 것이다(144).

5. Yoshikawa, Takashi. “Husserl’s Idealism in the Kaizo Articles and Its Relation to Contemporary Moral Perfectionism.” In The Palgrave Handbook of German Idealism and Phenomenology, edited by Cynthia D. Coe, 233–56. Cham: Palgrave Macmillan, 2021.

 첫째, 철학자로서의 후설의 기획이 초월론적 관념론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그의 윤리학에 대한 연구에서도 간과돼선 안 된다는 생각과 둘째, 후설과 머독을 철학적으로 엮을 수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학자를 만나 반가웠다. 물론 초월론적 관념론의 어떤 의미-계기 그리고 머독과의 어떤 공통점이 내세워질 것인가는 연구자의 시선에 달려있다.

 요시카와는 초월론적 관념론의 결론을 '참된 실재'의 지각이란 사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점근만이 가능한 이념이라는 성찰로 규정한다. 그 결과 그처럼 불가능한 과제에 애초에 왜 착수해야 하느냐는 실천적 질문이 가장 사변적인 이론적 탐구 한가운데서 샘솟게 된다. 이론이성에서는 참된 실재가 이념이었다면, 실천이성에서는 참된 [삶을 사는] 자아, 곧 (내멋대로 환언해도 괜찮다면) 선의 충전적adequate 확보가 그 이념이다. 이처럼 윤리학에서도 이념의 언어를 동원함으로써 후설은 일종의 도덕적 완벽주의에 개입하게 되며, 바로 이 부분이 선의 실재는 우리로부터 무한히 떨어져있고 따라서 그에 다가가는 길도 끝없이 이어진다는 머독의 주장과 공명한다(247).

 독자로서 재밌는 부분이 있었다면, 정작 머독 자신은 후설을 (머독의 철학적 주적) 실존주의의 조상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눈에는 지향성 개념 자체가 이미 세계를 의식의 함수로 만듦으로써 자의가 감히 선 앞에서 날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아마 후설은 이에 대해 선 위에 주제넘게 군림하고자 하는 난폭한 자의도, 머독 당신이 원하는 겸허도 모두 지향성 하에서만 가능하다고 대응할 것이다. 아이리스 씨는 제 지향성 개념을 오해하셨답니다, 같은 느낌이다.

*"[...] the existentialist moral philosopher, among whose mutually incompatible ancestors are Kant, Hegel, Kierkegaard, and Husserl [...]" (Murdoch in "De Beauvoir's The Ethics of Ambiguity", 1950)

6. Husserl, Edmund. “Fichte’s Ideal of Humanity [Three Lectures].” Translated by James G. Hart. Husserl Studies 12 (1995): 111–33 (originally in Hua XXV, 267-293).

 소위 '피히테 강연'이라 불리는 글. 아무리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을 위한 강연이었다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잔뜩 묻어나는 독일 민족주의의 색채에 거부감이 들었다. 또 한 국가와 민족--둘은 마치 자명한 양 동일시되어있다--의 쇄신 여부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이념의 설정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안일하게 읽혔다. 철학자의 입에서 '철학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 나올 때는 의심을 꼭 해봐야 한다.

 다름슈타트에서 후설의 위기-텍스트군Krisisschriften과 관련한 G. Heffernan의 발표를 듣고 결이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같은 위기에 대해서도 소위 정신이나 이념보다도 물질적 조건의 영향력을 훨씬 높게 사는 관점에 대해 후설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선생님의 답을 거칠게 요약하면, 후설은 물질적 조건의 변화--특히 실증과학이 약속하는 번영prosperity--란 기만적 위로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적어도 실존의 위기에만큼은 (사회경제적 대응이 아니라) 종교적, 윤리적 방향설정이 중요하다는 취지로 이해했다. 그럼에도 맹자 아저씨의 항산항심 쪽에 나는 좀 더 마음이 간다.

*그러나 맥락은 다른. 피히테 강연은 1차 대전 직후에 이루어진 반면, 후설의 본격적인 위기론은 2차 대전의 전조기에 전개되었다. 피히테 강연의 강조점은 '독일'이지만, 위기-텍스트군의 방점은 '유럽'에 찍혀있다는 말을 누군가 내게 해준 적이 있다. 이 변화는 1930년대 중반에 독일 당국으로부터 강의 자격Lehrbefugnis을 박탈당하는 등 후설 자신의 개인사적 수난 및 (추정컨대) 배신감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둘 다 문제적이나, 다르게 문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히테 강연은 ①초월론적 철학자로서 후설이 칸트를--정확히 말해 데카르트 이후의, 피히테 이전의 칸트를--의식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소중한 문헌이다. 달리 말해 주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있는 실재에 대한 타당하고 의미있는 지식의 가능조건을 코기토를 매개로 해명해야 한다는 칸트적 아이디어에 대한 후설의 긍정이 명시되어있는 글이다. 나아가 Yoshikawa (2021)가 앞서 지적한 대로 ②어떻게 후기 후설이 실천적 문제의식을 이전보다 무게감 있게 받아들이게 됐는가를 이해시켜주는 글이기도 한다. 이제 지향성은 노력,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향의 충족 및 목표의 달성을 향한 노력이라는 정동적 의미계기를 덧입게 된다. 충동의 보편성, 완벽한 만족의 불가능성, 그럼에도 굳건한 충족의 이념이라는 아이디어들은 후설의 거의 모든 후기 저술의 밑바탕에 깔려있다(125; cf. Hua XXV, 285; see also e.g., Hua XXXV, §6). 특히 ②와 관련해, ③후설이 피히테에게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가 이 글에 정말 잘 드러나있다. 내멋대로 정리해도 괜찮다면 후설에 대한 피히테의 영향은 총 아홉 갈래이다:

 하나, [인식의 대상이 되는] 사실에 대한 행위의 우선성, 내 식으로 환언하면 (행위자성의 영향력으로부터 차단되어있는) 순수한 수동성의 거부.
 , 행위를 비롯한 작용act 일반의 발달사로서의, 곧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아. 
 , 작용은 본질적으로 목적을 지니며, 그렇기에 작용의 사슬인 역사 역시 목적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확신. 
 , 동일한 텔로스를 쫓아 이어지면서 목적론적 통일체를 이루는 과제의 사슬의 이미지. 한 개의 과제는 자신을 계승할 다음 과제에 추동력을 부여하며, 이 동기부여Motivation의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후설의 목적론은 닫힌 목적론이 아니라 열린 목적론이며, 비록 필증적 진리를 'ein für alle mal' 정립하자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상하는 목적론적 사슬의 개별적 고리는 언제나 수정 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저 입버릇을 그냥 간과해도 괜찮은 걸까 싶은 궁금증. 이 궁금증을 내게 던져준 티모 메이티넨의 기조 연설과 질문자 드미트리에게 감사를...)
 다섯, 이론은 인간이 스스로를 그에 헌신해야 할--Krema (2025)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면 양도해야 할--텔로스와 이념을 올바르게 제시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하는 실천적 목표에 봉사해야 한다는 책임의식. 
 여섯, 해당 텔로스와 이념을 준수한 결과로서 인간의 행복이 지복Seligkeit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아이디어. 
 일곱, 해당 텔로스와 이념은 (이를테면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이) 형식적이지 않고 실정적인 의미와 내용을 가진다는 직관. 
 여덟, 그렇기 때문에 해당 텔로스와 이념의 준수는 "의무의 형식적이고 일반적이며 공허한 명령이 아니라 각 상황마다 의무에 그것의 구체적 내용을 제공하는, 영원한 가치들에 대한 실정적 사랑"의 형태를 띤다는 생각(126, Hua XXV, 287). 
 아홉,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가운데서--자아가 아닌 비자아, 그것도 가장 완전한 비자아(=신)를 향한 사랑임에도 불구하고--개별성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매우 독일관념론다운] 필요. 단, 당장 신앙인이 아니다 보니 피히테와 후설이 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치사 'in'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일상적으로는 z. B. 'in Christus zu sein'). 이를테면 'with God' 또는 'for God'와는 어떤 의미론적 차이가 빚어지는 걸까?

7. Uemura, Genki. “Husserl’s Essentialist Reform of Brentano’s Axiology.” In The Phenomenology of Essences, edited by Till Grohmann, 73–92. 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2025.

 후설의 초기 윤리학이 브렌타노의 가치론을 (1) 꽤 성실하게 계승하면서도 (2)형식적(=의지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일지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타당성을 누리는) 아프리오리(=거칠게 말해 사실적 경험이 아닌 본질과 관련한) 법칙의 형태로 부활시킴으로써 그에 무제한적 타당성unrestricted validity을 부여하고자 했다는 해석이 담긴 글이다. 브렌타노가 무제한적으로 타당할 법칙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는 그의 가치론이 노에시스에 대한 규범--주체야 이렇게 해라, e.g. 최선을 다해라--만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반면 후설은 가치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경유해 노에마의 규범--객관적으로 이러저러하다, e.g. 최선만이 유일한 선이다--도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 우에무라의 주장이다.

 완독 후 사견: 브렌타노와 후설에 대해 내가 공통적으로 불만스러운 부분은 바로 가치들의 합계라는 것이 산출될 수 있다는 그들의 직관이다(„Summationsprinzip“). 두 사람은 합계의 원칙을 무려 자명한 것으로 취급하는데, 내 눈에는 안일보스이다. 아직 조야한 형태의 비판이지만 첫째, 합계라는 것은 정의상 서로 동질적인 단위들 가운데서만 성립한다. 연필과 연필을 더해야 두 개의 연필이 되지, 연필과 마스카라를 더하고자 한다면 그때의 '합계'란 정확히 무엇일지 헤아리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런데 가치, 특히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가치들은 마치 연필과 마스카라처럼 서로 동질적이지 못하다. 물론 '도구'라는 보다 일반적인 개념 하에 강제로 함께 집어넣을 수야 있겠지만, 연필과 마스카라는 도구의 일종이기만 할 뿐 도구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기에--즉 '도구 것'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가 있기에--그 같은 강제적 합계의 산물이 과연 처음에 의도된 바와 같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나의 의심을 윤리적 평면에서의 예시로 옮겨온다면... 같은 사람이 '고집스러움(-)'과 '호탕함(+)'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육화할 때, 둘을 도대체 어떻게 합계 낼 것인가(또는 상쇄할 것인가)? 와 같은 질문이 나온다. 고집스러움과 호탕함은 서로 관련이야 있겠지만 질적으로 다른 속성이기 때문이다. 한편 서로 같은 원자값valence을 지니는 가치일지라도, 마치 사려깊음(+)과 용감함(+)을 더해 단순히 두 개의 좋음이 산출되지는 않는 것처럼, 가치의 합계 내기라는 행위는 거의 모든 경우에 부조리하다. 효용을 사랑하는 공리주의자와 같이 모든 가치들을 한 개의 근원적인 가치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합계의 원칙과 같은 것이 말이 될 것이다.

 둘째, 설령 합계 내기가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과연 총합체의 부분들이 기존에 지녔던 가치가 합계의 산물로서의 전체 가치에 오롯이 반영되는지 의심스럽다. 가치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그 상호작용의 양상은 단순히 '서로를 강화하거나 약화한다' 이상으로 복잡하기 때문이다. 부도 좋고, 명예도 좋고, 권력도 좋지만 셋 다 가질 경우 사람은 아주 다양한 경로로 몰락한다.

 셋째, 만약 합계의 원칙이 이상의 두 고려사항을 피해갈 정도로 일반적인 원칙에 불과하다면--'형식적' 법칙이라는 후설의 언명이 시사하듯--그 지나친 일반성에 의해 합계의 원칙은 윤리학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리고 만약 합계의 원칙이 무너지면, 합계를 극대화하자는 명령도 함께 무너진다. 요컨대 최고선이라는 관념 자체는 매력적이나 그에 도달하는 길이 합계뿐이라면 음... 글쎄. 궁극적으로 후설은 가치들이 서로 통약 불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에로 나아가면서 브렌타노의 윤리학을 부분적으로 거부한다. 내가 후설의 후기 윤리학을 높이 사는 이유이다. 처음부터 (적어도 근본적인) 가치들 사이의 통약 불가능성에 민감했던 사람의 철학(예컨대 니체, 베버, 벌린)과 처음에는 가치들의 대통합잔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나 모종의 계기로 자신의 생각을 바꾼 사람의 철학(내게 후설) 가운데, 두 번째 경우만이 갖는 파급력이라는 것이 있다. 

8. Plantinga, Alvin. “An Existentialist’s Ethics.” Review of Metaphysics 12, no. 2 (1958): 235–56.

 전기 사르트르를 난도질하는 논문이다. 플랜팅가는 ⟪존재와 무⟫의 자유론이 도덕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애초에 무le néant의 여러 가능한 의미들 사이, 특히 [즉자존재가] 아님과 [단순한] 없음 사이를 어리석게 혼동한 결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플랜팅가에 따르면, 합리성을 비롯해 가치 일반이 자유 이전에는 현존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이후에만 그로부터 기원한다면 '그릇된 선택'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즉 모든 선택은 선택인 한 분석적으로 옳은 선택이 된다. 이는 도덕의 가능조건을 말소시킬 뿐만 아니라 사르트르의 체계 내에서 [가치론과 인간학 사이] 비정합성을 초래한다. 그릇된 선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경우, 옳은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인간이 불안angoisse을 느낄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불안은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가 인간의 자유로부터 독립적으로, 곧 객관적으로 이미 정립되어있는 세계에서나 가능하다(248). 나아가 '의식은 무화와 규정differentiation의 주체로서 대자존재임, 곧 즉자존재가 아님'과 '의식은 존재 자체의 부재 곧 없음에 해당함'은 서로 다른 사태이다. 사르트르의 자유론이 성립하려면 의식은 후자여야 하는데--곧 의식이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의미에서의 없음에 해당해야만 (애초에 과거나 인과의 사슬이 작용할 건덕지가 사라져) 그의 자유가 절대화될 텐데--사르트르의 해명 속 의식은 전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플랜팅가가 지나친 자신감에 취해 자비로워야 할 부분에서 그렇지 못한 지점도 분명 있다. 내가 생각하는 ⟪존재와 무⟫ 속 자유론의 진정한 의의는 자아의 근본적인 분열 또는 분산이라는 아이디어, 그리고 그것이 자아의 삶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에 대한 거의 강박에 가까운 천착에 자리한다. 사르트르의 자아관을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아관(고대인의 철학과 관련해서도 '자아'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면)과 비교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에서는 일반적으로 한 행위자의 선택이란 그의 성격character에 기반한다. 바로 그 이유로 '이건 그 사람답지 않다something is out of her character'와 같은 표현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Douglas Langston, Conscience and Other Virtues, University Park, PA: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2001, 47). 나는 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일상적 대화나 타인에 대한 윤리적 평가 가운데서 거의 전제와 같은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르트르의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 입장에 아주 거대한 반기를 든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성격이 있기 때문에 선택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격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택이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플랜팅가의 비판이 ⟪존재와 무⟫가 제공하는 형이상학적 그림은 일부 무너뜨릴 수 있어도, 적어도 이 반-아리스토텔레스적 통찰을 가능케하는 인간학적 그림anthropological picture 자체는 여전히 문자 그대로 끔찍하게 흥미롭다. 보다 거시적인 시선에서 사르트르의 전기 자유론이 줄 수 있는 영감에 대해 플랜팅가는 무지한 것인지, 아니면 다만 흐린 눈을 뜰 뿐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악의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둔감성이 엿비쳐 아쉽다. 그럼에도 플랜팅가가 사르트르를 상당히 성실하게 독해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조건과 인간의 본질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지적도 유의미하다(256). 언젠가 이남인 선생님께서 하이데거가 아무리 실존을 개념화할지언정 사실은 실존의 본질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말씀하셨던 것이 떠오른다.

9. 이 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지도교수 님과 읽고 있다. 저번주에는 4원인론이 개괄되는 대목을 읽었고, 성지 순례하는 기분이 들어 짜릿했다. 나중에 자식을 낳았는데 (몇 살이어도 귀여울 목소리로) 어머니 소인은 고대 그리스 철학을 연구하고 싶사와요 이러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식의 인생이 어떻게 흐를 것인가에 대한 선호도를 미리 정립하지 말라는 꾸중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