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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1-10장 요약

Alasdair McIntyre, After Virtue, Bloomsbury, 2007 (third edition, first edition published in 1981). 국내에는 ⟪덕의 상실⟫이라는 제목으로 발간(이진우 역, 문예출판사, 2021). 원문의 패러프레이징을 넘어서는 해석은 '[]' 안에 넣었다.

도덕적 언어의 실향失鄕을 다루는 책. 10월 초부터 오래도 읽었다


서문 (매킨타이어가 현대의 도덕철학 및 문화 일반에 대해 지적하는) '도덕적 빈곤impoverishment'이 [꼭 도덕적으로 그릇된 판단의 산출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도리어] 도덕의 이해와 실천을 관장하는 언어language of morality의 어떤 무질서disorder 상태이다.

1장. 어느 불온한 제안 당장의 세상, 그 속에서 전개되는 문화와 도덕철학에서 도덕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쓰이고 있는 언어는 특정한 무질서 상태에 놓여있다. [그 언어를 구성하는 개념*이] 제 의미의 원천인 본래의 맥락 또는 개념적 도식conceptual scheme을 상실한 채, [고향 잃은] 파생물이자 파편으로서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실과 결핍은 현대인에게 그다지 인지되어있지 않다.

*[좁고 전문적인 의미를 지니는 concept보다는 notion에 가깝게 읽힌다. 'human nature', 'telos', 'virtue', 'moral rules', 'justice' 같은.]

**이를테면 인간적 공동체의 목적 달성에 기여함으로써 차지하는 응분desert과 명예라는 관념 없이는 '정의justice'는 [실향어가 된다.] 애석하게도 오늘날에는 공동체가 와해되었고, 인간의 종적 목적이라는 아이디어 또한 파쇄되어 정의라는 이름은 저마다의 선호를 단지 포장하게 되는 데 그쳐있다(cf. 269f. & 292).

2장. 오늘날의 도덕적 갈등disagreement이 지니는 본성과 감정주의emotivism의 주장 도덕적 갈등과 그를 둘러싼 토론은 오늘날에 이르러 종결되지 못하는interminable 성격을 띠게 되었다. 즉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주장들 사이에 합의를 도출할 합리적 방법*이 부재한다.** 현대의 도덕적 주장은 첫째,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완전무결하다. 전제에서 결론으로 이어지는 타당성과 관련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건덕지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논리적 비판은 효력을 잃고] 그 어느 편도 철회할 생각이 없을 최초의 전제에 대한 관철assertion만이 이루어진다. 이 같은 개념적 통약 불가능성conceptual incommensurability은 각 주장을 사적 자의private arbitrariness, 전제와 최초의 원칙에 대한 비-합리적non-rational*** 결정(결단, decision)의 산물로 만든다. 

*[논증이나 토론 등 (좋은) 이유의 권위에 호소해 보다 정당한 입장을 가려내는 방법. 이를테면 권력을 통한 상대 입장의 제압은 합리적 방법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사적 소유를 위한 자유와 기본적 필요의 충족을 위한 평등 사이의 갈등은 적어도 논증과 담론을 통한 소통에 의해서는 해소되지 않는 채 소위 최초의 직관 싸움으로 번진다(마지막 장).

***[=정당화가 불필요한 또는 정당성의 문제로부터 독립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주장은 둘째, (도덕적 판단의 참거짓을 가르는) 초인격적(개별적인 인격을 뛰어넘는, impersonal) 기준이 현존하[며, 자신의 주장은 그 기준에 부합한다고] 자칭한다purport. 그리하여 한편으로 각 도덕적 주장은 논증되지 않는, 단순히 상대에게 적대적이기만 한 의지로만 이루어져있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타당성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호소하는 표현들이 [마치 갈등의 합리적 해소가 여전히 가능한 것처럼] 사용된다.

 셋째, 각 주장에 동원되는 개념(e.g. 정의, 권리, 자유 등)들은 서로 다른 원천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본래 부상한 맥락과 현대 사회는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그리하여 각각의 의미가 그것이 태동된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와는 달라졌음에도--우리는 "잘못 선별된ill-assorted 파편들의 조화 없는 멜랑쥬"인 언어로 도덕을 이해하고 또 표현하고 있다(12). 현대철학은 도덕적 개념의 의미를 초역사적으로 취급함으로써 의미의 이 같은 변천사를 추적하는 데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철학은 역사학 그리고 사회학과 잘못 유리되었다.

 감정주의자는 애초에 철학과 역사학의 분리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일축할 것이다. 감정주의에 따르면 도덕적 판단은 감정, 태도, 선호의 표현일 뿐이다. 오늘날에 와서야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심지어는 평가가 포함된evaluative 모든 주장은 필연적으로 그 합리적 정당화가 불가능하다. 어떤 객관적 기준을 동원한 갈등의 합리적 해소 또한 허락하지 않는다(그런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매킨타이어가 보기에 감정주의는 도덕적 판단의 의미와 사용을 서로 혼동하고 있다. 도덕적 판단이 물론, 그를 위해 이유가 제공될 필요 없이 순전한 선호의 표현을 위해 사용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체로 선호[만]을 의미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혼동조차 20세기 초, 무어의 직관주의--선은 비자연적 속성이며, 그에 대한 판단은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직관이다--의 태동이라는 철학사적 사건이 미친 영향에 주목하면 역사적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혼동으로부터 출발해] 이유reason의 권위를 말소시킨 감정주의는 도덕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 실천, [심지어 문화 전체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도덕관의 단순한 변화가 아닌 쇠락degeneration에 해당한다.

3장. 감정주의: 사회적 내용과 사회적 맥락 무어 이후 분석적 전통 속 도덕철학의 전개는 이를 놓쳤으나, 사실 모든 "도덕철학은 [...] 사회학을 전제한다."(28) 어떤 도덕철학적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입장이 실제의 사회에 어떻게 구현되어있는지를 이해하는 과제를 포함한다. 감정주의가 사회 속에 구현되어있는 모습, [곧 그것의] 사회적 내용이란 "타인을 조작하는manipulative 사회적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 사이 그 어떤 진정한 구분도 말소됨"이다(28). 감정주의는 평가 일체를 감정의 표현과 그를 통한 타인의 변화[의 사태로 축소함으로써,] 그에게 단지 합당한 이유만을 제공하고 최종적 판단은 전적으로 타인에게 맡기는 일과 타인을 단순히 내 목적의 수단으로 만드는 일 사이를 서로 구분하지 않는다.

 감정주의가 본래적으로 작동하는be at home with* 사회적 세계란 "개별적 의지들의 [한갓된] 만남의 장소" 그리고 [고립 가운데서 이미 완성되어있는] 선호에 기반해 "자신의 만족을 성취하는 장"에 불과하다(29). 도덕은 심미적 취향이 되어있으며, 관료제적 합리성이 지배력을 행사한다. 이유는 가치에 대한 [최초의] 선택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가치의 선택이 다른 가치의 선택보다 더 합리적일 수가 없다. 서로 다른 명분들 사이의 중재 불가능한 충돌 가운데서 관료적 매니저는 자신에게 자의적으로 주어져있는 목적을 질문하거나 비판하지 못하는 채, 단지 그것을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단을 그에 짝지어주는match 인물형character이다. 상담자therapist 역시 [주어진 사례에 대한 이성적이고 규범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감정주의적 자아를 구현한다.]**

*[≒참이라 널리 전제되며 가장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는]

**[오늘날에는 인플루언서 정도가 지배적인 인물형이 아닐까? 그는 자신을 가꾸며, 혹자에게는 선의 추구조차 그 치장의 연장선에 있다. 단, 인플루언서가 감정주의적 자아를 구현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개인성을 관철하기보다 타인의 보편적 호감을 살 만한 이념적 인간형을 실현하는 데 관심이 더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매킨타이어의 문화 비판이 오늘날, 특히 한국 사회에서도 유효할 것인지와 관련해 나는 회의적이다.]

 다른 한편 목적을 자의적으로 [남에게서 받아들이거나] 설정하는 도덕적 행위자는 "그 어떤 특정한 우연적 사태와의 필연적 동일시도 피해갈 줄 아는 [...] 자신이 관여된 그 어떤 그리고 모든 상황으로부터 물러날 줄 아는" 자기self를 향유하며, "모든 사회적 특정성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detached 순전히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관점"에서만 상황을 평가한다(36f.; cf. I. Murdoch, "Idea of Perfection"). 감정주의적 자아는 그 자신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 어떤 사회적 정체성도, 역할도 필연적으로는 체화하지 않는다.*** 그 어떤 규정성의 고정도 불허하는 사르트르의 (무한한 자유로서의) 인간 의식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같은 자아관, 그리고 그에 연계된 도덕관은 특별히 근대적인 것, 근대의 특수한 역사적 변화의 산물에 불과한데도 철학자들에 의해 마치 무시간적으로 참된 양 생각되어왔다. 그 역사적 변화란 무엇이었던가?

***[후설의 경우 원초적primordial, egoistisch 환원은 사회적 정체성의 타당성을 판단 중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체 발생의 상호주관적 토대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물론 그래서 두 마리 토끼가 과연 잘 잡혔느냐 평가하는 문제는 별개. 오히려 사르트르처럼 한 토끼를 포기하는 쪽이 철학적으로는 더 깔끔할 수 있다.]

"[...] the peculiarly modern self, the emotivist self, in acquiring sovereignty in its own realm lost its traditional boundaries provided by a social identity and view of human life as ordered to a given end." (39, 강조는 내것)

4장. 선행predecessor 문화와 도덕성의 정당화라는 계몽주의 기획 약 1630년에서 1850년까지 북유럽의 사유와 문화 일반의 화두는 종교, 법, 미(학)의 권역으로부터 최초로 분리된* 도덕morality의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정당화"**였다(46, 강조는 내것). 그러나 계몽주의의 이 같은 기획은 매킨타이어가 보기에 실패했다. 오늘날 도덕언어의 무질서는 이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인지에 입각해서만 이해 가능하다intelligible.***

*Q.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이런 구분은 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의 저술들의 종류가 지금처럼 나뉘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의 구분과 이 근대적 분리는 무엇이 다르기에 도덕이 최초로 독립성을 쟁취했다고 맥킨타이어는 말하는 것일까? cf. 모랄리티라는 단어의 역사(46: 성품 ➤ 실천 일반 ➤ 성(적) 도덕)

**justification, grounding, vindication, [founding = 좋은 이유의 제공, '왜?'의 해명]. → Q. 그렇다면 모든 정당화는 (좋은-이유-제공하기로 정의되는 한에서, 그리고 합리성 자체가 좋은 이유에 대한 민감성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합리적 정당화인가? 비합리적이거나 합리성과 독립적인non-rational 정당화는 개념적 모순을 빚는가?

***[따라서 철학의 전개가 문화의 전개 전체를 인과적으로 지배한다는 오만한 주장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주장이다.]

 먼저 디드로와 흄은 (규범이나 의무ought를 산출하는 데 무능하다는 점에서 추동력motivational power을 결여하고 있는 이성을 대신해) 정념과 욕망을 통해 도덕의 정당화를 이룩하고자 했다. 그러나 도덕을 준수하기 위해 (여러 정념 가운데) 어떤 정념이 계발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려면 정념 외부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난점에 부딪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흄과 스미스가 도입한 동감sympathy의 개념은 매킨타이어의 눈에 철학적 허구일 뿐이다. 이들의 실패에 대한 역사적 반응으로 칸트는 [이성의 능력으로서] 모순 없는 보편화 가능성을 도덕의 근간으로 내세웠으나, 그의 사상은 하찮거나trivial 반도덕적인 결론을 낼 가능성을 차단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키에르케고어는 칸트의 실패를 출발점 삼아, 이성이 해내지 못한 도덕의 정초라는 사명을 [모든 결론적 판단의 전제가 될] 최초의 원칙에 대한 기준 없는criterionless 근본적radical 선택chocie에 맡겼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에게 이유가 될 힘reason-giving force을 우리 손으로 줌으로써만 비로소 좋은 이유가 되는 그런 전제나 원칙이 과연 도덕으로서의 진정한 권위를[--곧 우리를 초월하는 권위를--]낳을 수 있느냐는 비판을 맞는다. 오늘날의 감정주의적 문화와 자아, 그리고 도덕언어의 무질서는 이 같은 일련의 실패의 끝에서야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다.

5장. 도덕을 정당화하고자 한 계몽주의 기획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계몽주의자들의 철학은 "도덕에 대한 무시간적" 담론이 아니라 "도덕적 믿음의 특정한 도식" (그리고 기독교적 과거로부터 온 동일한 도덕 준칙의 내용)을 [특정한 시점에] 다 함께 물려받은 결과일 뿐이다(61). 환언하면 이 담론에 참여한 모두가 도덕성의 합리적 정당화란 어떤 모양새여야 하는가의 관념을 공유한다. 이 도식의 "내적 비정합성은 처음부터 [저] 공통의 철학적 기획이 실패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61, 강조는 내것)

 저 모양새란 "인간 본성human nature에 대한 전제들"로부터 [특정한 그리고 말하자면 공동체 단위로 전승 받아 공통의 내용을 지니는]  "도덕적 규칙과 수칙precepts의 권위"를 도출하는 논증이다(62). 이 같은 논증의 형식을 공유하는 모든 개별 논증은 실패한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과 특정한 내용의 도덕적 규칙군이 본래 함께 자리를 잡고 있던 도덕적 도식이란 (고전적인 것이었든, 유신론적인 것이었든) 목적론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래의 도식 하에서 ①아직 계발되지 않은untutored 인간 본성의 상태와 ②윤리학이 제공하는 수칙은 [구조상] 서로 충돌한다. 후자를 따르는 실천이성의 지도와 경험의 축적을 통해 전자가 ③자신의 텔로스를 달성한 인간 본성으로 변화하는 것이 윤리의 관건이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기에 이르러 ③, 곧 인간적 텔로스의 존재와 내용, 구속력 일반이 회의에 처해지면서 ①과 ② 사이의 관계가 불명확해졌다. [이 관계에 대한 오해가] ①로부터 ②를 연역하고자 하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한--왜냐하면 ②는 그 개념상 ①로부터의 탈출 수단이므로--] 시도를 낳았다.

 [역설적이게도] 계몽주의의 기획에 참여한 철학자들은 ①과 ② 사이의 충돌을 사실과 의무is-ought 사이의 구분을 통해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견해와 달리 둘 사이의 구분은 시간을 초월하는 논리적 진리가 아니라, 인간을 더 이상 기능적 개념functional concept*으로 보지 않게 된, 즉 인간을 목적론적으로 규정하지 않게 된 철학사적 전개의 산물이다. 아주 오랫동안, 아리스토텔레스보다도 이전부터 인간은 기능적으로 규정되어왔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사회적 삶의 맥락 가운데서 특정한 역할(e.g. 가족 구성원, 시민, 군인, 철학자, 신의 하인)을 수행하는 자리를 자신으로써 채워넣는fill 일이었다. 이 같은 전통 하에서는 사실과 의무 사이의 구분이 부재하며, "도덕적이고 평가적인 진술들은 다른 모든 사실적 진술들이 그렇게 불리는 정확히 그 방식으로 참 또는 거짓이라 불릴 수 있[었]다."(71) "모든 역할에 사전적으로 그리고 그와 분리된 개인으로서" 인간이 생각된 이후에야 그는 더 이상 목적론적으로 규정되지 않게 된다(70).**

*=그것이 충족하리라serve 기대되는 목적이나 기능을 통해[서야] 정의되는 그런 개념, 그리하여 좋은 X의 개념과 X의 개념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은 그런 개념(69)

**Q. 만약 목적론적 질서 및 사회적 조직이 자율적 개인의 관념과 개념적으로 상충하는 게 맞다면 후설은 어떻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가? 또는, 둘이 서로 개념적으로 충돌한다는 매킨타이어의 언명은 '목적론'과 '자율성'의 어떤 정의 또는 기술 하에서만 옳은가? 또는, 어떤 텔로스 하에서만 인간의 자율성이 침해되지 않는가? 또는, 어떤 자율성의 관념만이 텔로스 없이 고삐 풀린 자의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가?

"What I have described in terms of a loss of traditional structure and content was seen by the most articulate of their philosophical spokesmen as the achievement by the self of its proper autonomy. The self had been liberated from all those outmoded forms of social organization which had imprisoned it simultaneously within a belief in a theistic and teleological world order [...] What was then invented was the individual [...]"(72-73, 강조는 원저자)

6장. 계몽주의 기획의 실패가 낳은 몇 가지 결과들 계몽주의 기획(의 실패)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 사회적 조직과 목적론으로부터 해방된 개인individual은 "그의 도덕적 권위에 있어 주권적인sovereign" 존재로 이해되기 시작했다(75). 둘째, 전승된 도덕의 내용들(e.g. 불장난 < 안정적인 결혼생활)이 저 해방에도 불구하고 유효성을 보존하도록 새로운 목적론이 고안되거나(효용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삼는 공리주의*), 실천이성의 본성을 경유해 도덕의 정언적 지위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시도들(칸트주의)이 따라나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도덕적 행위자의 자율성"과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서의 도덕적 규칙" 사이를 일관적으로 결합하고자 한 흄 이후의 철학적 시도들은 (계몽주의 이후의 것을 포함해) 전부 실패했다(79).**

*벤담과 밀의 실패 이후 시즈윅은 자의를 표현하지 않는, 곧 도덕적 갈등을 합리적으로 중재하고 종결시킬 권위를 가진 목적론적 질서의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도덕적 믿음이 서로 "환원 불가능하게 이질적"이며, "그 참됨을 위해 그 어떤 추가적 이유도 주어질 수 없다"고(unargued) 주장한다(78). 시즈윅의 직관 개념은 계몽주의의 윤리학적 유산과 무어의 [메타]윤리학 사이 철학사적 가교가 되어준다. 

**공리주의적 효용의 관념은 욕망의 합산이 불가능한데도 마치 가능한 양 도덕적 계산식을 운용하고, 칸트주의적 인권의 관념에는 그 자명성에 대한 호소 이외에는 (인권의 관념이 공허하지 않고 실체가 있다는 데 대해) 아무런 증거가 없다. 효용과 인권이라는 두 허구물은 서로 다른 도덕적 주장 간 무게를 측정해주는 "객관적이고 개별 인격을 뛰어넘는 기준을 제공한다고 자칭하지만 [외양과 달리 실제로는] 그러지를 못한다."(84) [따라서 그 이면에서 누군가의 자의를 정당한 것으로 포장하는 데 얼마든지 오남용될 수 있다.] 이 위선에 대한 폭로 자체가(e.g. [헤겔], 니체) 상당히 근대적인[=근대에서만 가능한] 활동이다.

 "신적인 법, 자연적 목적론 또는 위계적 권위의 외부성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 [...] 각 도덕적 행위자"의 개별적 도덕적 언사utterance는 그 의미와 관련해서는 [객관적인 구속력을] 상실한 지 오래이다(82). 그러나 [있는 것처럼 자칭되는 객관적 구속력에 근거한] 조작을 위해 같은 언사가 여전히 사용되고는 있다. "현대의 도덕적 경험"의 이 같은 "역설적 성격", 달리 말해 "우리의 태도와 경험에서의 비정합성은 우리가 물려받은 개념적 도식[의 비정합성]에서 기인한다."(82) 그리하여 의심에 처해지는 일 없이 다만 주어져있는 목적을 달성하고 그 목적을 타인 또한 쫓도록 조작하는 매니저가 사회적으로 부상하지만, 그의 권위를 뒷받침해줘야 할 것인 (수단 동원에서의) 효율이란 그 자체로는 아무 실체도 갖지 못한다. 요컨대 매니저의 활약은 [아마 목적에 미리 배있었을] 숨겨진 욕망을 위장할 뿐이다. [그의 조작이 정당하기 위해 필요한] 베버적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사실'이 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 사실에 대한 탐구에 해당하는 법칙적 일반화[=사회과학에 대한 가능한 한 가지 기술]도 실패하기 때문이다. 가치평가로부터 [기만적으로] 분리돼있는 사실이라는 관념은 무시간적 진리가 아니라 역사적 전개의 산물로서만 이해 가능하다.***

***Q. '역사적 산물로서만 이해-가능함'과 '무시간적 진리임'은 상충하지 않는 것 같다. 전자라고 해서 후자가 반드시 못 되는 것은 아니다.

A. consult McInytre's own response in 308ff..

7장. '사실', 설명과 전문지식expertise 아무런 해석이나 이론의 매개 없이 [순수한] 경험--이를테면 '감각자료sense-datum' 따위--이라는 경험주의자들의 관념은 현상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인공적으로 발명된 것에 불과하다. 그처럼 아무 평가도 더해지지 않은 [순수한] 사실이라는 관념은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 등에게 아예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의 권역과 인간과학human studies의 권역 사이의 대조는 유난히 근대적인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야 단순한 이해와 설명은 과학의 몫, 그와 배타적으로 구분되(리라 잘못 상정되어있)는 평가는 윤리학의 몫이 됐다. [이 같은 사실과 사실에 대한 가치평가 사이의 구분에 힘입어] "'인간'은 더 이상 [...] 기능적 개념이 [...] 아니게 된다."(96) 인간의 행위도 이제는 "선 또는 덕의 관념으로부터 단절된 것으로서" 의도, 이유 등에 대한 심리학적이고 생리학적인, 곧 기계적인 방식으로만 설명된다(97).* 이처럼 기계론적인 설명은 모종의 인과관계를 법칙적으로 일반화하는 작업을 동반한다. 인간 사회에 대한 가치중립적[이라 표방되는] 법칙에 대한 앎, 곧 사회과학적 지식[에 대한 한 가지 기술]이 곧 관료적 매니저들의 전문지식이 된다.

*Q. 심리학과 윤리학 사이의 결별이 인공적이라는 데 대해서는 공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의 구분에 아무 의미도 의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의사는 심신이 미약한 죄인을 탓하지 않을 것인 반면 윤리학자는 그에게 책임을 물을 방도를 찾을 것이다. 전자는 치료를 위해, 후자는 정의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8장. 사회과학에서의 일반화들이 지니는 성격과 그들의 예측력 부족 그리고 그런 전문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킨타이어의 주장은 사회과학의 실제적, 현행적actual 실천이 무가치하다는 주장이 아니다. 단지 사회과학에 대한 철학이 사회과학의 현 실천이라 규정하고 있는 성취--인간 사회 속 법칙적 일반성의 발견과 그에 의거한 예측--이 일어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에 의거해 자신의 전문성을 호소하는 관료적 매니저들은 없는 힘을 있는 양 과시하고 있다.

Q. 상관관계와 인과관계 사이의 차이에 대해 매킨타이어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 당황스럽다. 그 차이에 대해 민감하지 않은 사회과학-철학자는 (1980년대라 해도) 없을 것인데도, 매킨타이어가 가하는 모든 비판은 사회과학의 성취를 인과관계의 발견으로 축소하고 있다.

9장. 니체냐 아리스토텔레스냐? 요컨대 특정한 도덕적 개념 또는 규칙은 그것이 가장 본래적으로 작동했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는 불가해하며 [이해 없이는 그 정당성도 보장될 수 없다]. 적합한 이해 없이도 계속해서 작동하는 개념 또는 규칙[이 있다면 그것은] 원 맥락의 상실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생존한 파편들일fragmented survivals 뿐이다.

 "앵글로색슨 감정주의, 대륙의 실존주의"와 달리 니체는 "객관성에 대한 호소라 자칭하는 것이 사실은 주관적 의지의 표현"이라는 주장이 도덕성 일반에 대해 지닐 함축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132). (합리성과 무관한non-rational 자율적 의지로 이유를 대체하는 베버적 가치중립성Wertfreiheit의 철학의 전조로서) 니체의 🅐비합리주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적 텔로스의 관념을 거부하면서도 🅒도덕을 여전히 합리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한 계몽주의의 실패에 대한 철학사적 반응이다.* 그렇다면 니체(🅐)의 사상의 정당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의 정당성은 서로에게 배타적으로만 성립한다(이것 아니면 저것).

  🅐 니체 🅑 아리스토텔레스 🅒 Team 계몽주의
인간(종)의 텔로스의 존재를 긍정하는가? X O X
개별 인간의 누구임personhood을 윤리학적으로 유의미한 요소로 간주하는가? O O X
윤리(학)적 판단의 정당성은 합리적으로 수립되는가? X O O

*[Q. 철학 일반이 무시간적 진리를 담지하기보다는 역사적 전개의 산물이라는 보다 큰 주장을 함축하려나? cf. 후설의 역사주의 비판]

 니체가 근대 도덕철학에 가하는 비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론을 축출함으로써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what sort of person am I going to become?"의 질문을 도외시했다는 점이다(138).  그 결과 덕이 아닌 "규칙이 도덕적 삶의 일차적 개념이 되[었]다."(138) 덕은 단순히 규칙 또는 원칙의 준수로 이어지기 때문에만 의미를 갖는 이차적이고 후행적인 관념이 아니며, 오히려 "규칙의 기능과 권위를 이해하기 위해 처음부터" 덕에 주의해야 한다는 데 니체와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동의한다(138f.).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덕은 어떻게 이해되어왔는가?

10장. 영웅 사회에서의 덕 영웅서사가 반영하는 도덕적 [도식] 속 각 인간에게는 (특히 친족공동체kinship 내에서*) "주어진 역할과 지위"가 고정되어있었으며, 자기이해는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어있는well-defined) 역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루어졌다(142). [덕성은 사실에 대한 지식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현대의 도덕철학자라면 인간의 본질로 규정할 법한 것인, "그 어떤 특수한 관점으로부터도 물러설detach oneself 수 있는 능력"을 영웅사회 속에서의 인간은 갖고 있지 않았다(147, see also "the freedom of choice of values"). [고독한] 외부자의 관점은 사회 바깥 이방인의 관점일 뿐이었다. 그 시기의 덕이란 "운명과 죽음에 취약한" 인간적 조건 속에서[조차] 주어진 역할을 다하게 해주는 성질들이다(150).

*소포클레스와 소크라테스가 활약하는 아테네에서는 도시국가city-state, polis가 보다 유의미한 도덕적 단위로 부상한다.

**이때 한편으로는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책임이 주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책임은 (상대적으로 작은) 사회 속 구체적인 개인들을 향해/위해서만 성립한다. [따라서 자기결정의 윤리학이 아님에도 익명성이나 단순한 보편화에 대한 열망과는 거리가 있고, 이를테면 동양 윤리와는 달리 천하라는 단위가 부재한다.] 


 매킨타이어는 이어서 소포클레스와 소크라테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철학자들의 덕 윤리를 개괄한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에 개입하지 않고도 텔로스의 윤리(학)적 구속력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덕의 의미를 재규정한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덕 가운데 하나인 자긍심megalopsychia과 기독교적 겸허 사이의 대조. 공리주의는 특정한 실천practice과 관련해 내적 좋음internal good과 외적 좋음을 구별하지 않기에 [그 자체로] 특정한 전통의 거부로 이어진다는 통찰(230). 인간 자아를 삶의 통일체를 살아내는 서사적 존재자로 규정하면서, 그의 도덕적 출발점을 일종의 멤버쉽 그리고 (전통의) 유산inheritance으로 보는 매킨타이어의 고유한 덕론. 어떤 전통의 개념 또는 언어를 사용해 도덕을 논하느냐가 실제 개별적 규범적 주장에 영향을 미친다는 통찰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