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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용기에 관하여

플라톤, <라케스> 메모

플라톤, 한경자 옮김, ⟪라케스⟫, 이제이북스, 2014, 모든 강조는 필자.

꿀잼

"[...] 누군가 그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경우, 그들은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바를 지레짐작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하곤 합니다."(178b) ☞ 철학의 전제 조건: 솔직함, 진정성(청자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돌려주는 것, 곧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내비치는 것, 그리하여 진리를 위한 경합(아곤)을 피하지 않는 것. cf. ⟪고르기아스⟫ 속 칼리클레스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대신 소크라테스가 원하는 대로 응답함으로써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사실 저는 선생님에게서 단지 중무장 보병대에 있는 용감한 자들뿐 아니라 기병대에 있는 그리고 온갖 전투 부대에 있는 용감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또 전쟁에서 용감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만나게 되는 위험에서 용감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또한 질병과 맞서는 용감한 사람들과 빈곤이나 정치적 일에 맞서 용감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 고통이나 무서움에 맞서는 용감한 이들뿐만 아니라 욕구나 쾌락에 맞서 싸우는 능력이 놀라운 그 모든 자들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제자리를 지키기도 하고 등을 돌리기도 하면서 말입니다."(191d-e) ☞ 용기는 "대오를 지키면서 적들을 막아 내고자 하고 도망치지 않는" 것--용기에 대한 라케스의 첫 번째 정의--에 국한되지 않는다(190e). 소크라테스가 원하는 것은 용기의 한 사례가 아니라 "이 모든 상황 속에 동일하게 있는 용기", 곧 용기의 본성이다(191e). 이어 라케스는 "영혼의 어떤 인내karteria"라는 두 번째 정의를 제시하게 되지만, 현명함을 동반한 인내어리석음을 동반한 인내[e.g. 유해한 것에 대한 인내] 사이의 구분*을 도입한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박 당한다(192c).** 

*★인내해서 좋을 것, 인내해야 마땅한 것을 위한 것이 아닌 대담함은 용기가 아니라는 직관.

*라케스가 무모함과 용기를 구분할 줄 알았다면 논박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논박 당하는 이유는 현명함을 동반한 인내만이 용기라고 규정했으면서도 불리한 상황에 놓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동일한 인내를 수행할 때 전자가--더 무모하고 어리석은 쪽이--더 용감하다고 동시에 규정하기 때문이다. 

Q. 소크라테스는 어떤 경우 비겁함 속에서 용기를 가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191e). 그가 가리키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비겁과 용기는 어떤 의미에서 양립할 수 있는가?

니키아스의 정의 "두려워할 것들과 대담하게 할 수 있는[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에 대한 앎[지혜]"(195a) ☞ 라케스는 각 기술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이와 같은 앎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감한 자가 되지는 않는다고 반박한다. vs. "그는[라케스는] 의사들이 아픈 자들에 관하여 건강하고 병든 상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뭔가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분명 의사들은 그만큼만[건강하고 병든 상태에 대해서만] 알 뿐이지요. 만일 어떤 이에게 아픈 것보다 오히려 건강한 것이 두려운 일일 경우, 라케스, 당신은 의사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오?"(195c) ☞ ★니키아스의 이 말은 용기가 주관적으로 규정된다는 나의 테제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니키아스가 보기에 라케스의 오류는 용기를 용기를 갖추거나 갖추지 못하는 자의 입장에서, 곧 1인칭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라케스는 다소 돌연히 니키아스는 그렇다면 예언자들을 용감한 자로 인정하는 셈이라고 반박하는데, 이 반박은 몹시 흥미롭다. 이때 예언자는 누군가에게 죽는 것이 좋은지, 사는 것이 좋은지 아는 사람으로 규정된다. 예언자이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다는 라케스의 전제는 진리를 계시받지 못하는 일반 행위자는 자신에게 무엇이 궁극적으로 좋은지--구체적으로는 고귀한지--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 주장을 함축하는 것 같다. 과연 용감하다고 불려지는 행위자는 그에게 적합한 고귀한 목적을 위해--현명하게--행위했는가? 그의 목적이 고귀한지, 아닌지 그 자신은, 나아가 타인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행위자가 고귀한 목적을 위한 행위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그 목적이 고귀하지 않았던 경우, 과연 그는 용기를 발휘한 것이 맞는가? 달리 말해 어떤 행위가 용감한지가 정말 주관적으로만 규정되는 것인가?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용기있는 행위가 객관적으로 규정된다고 말하기엔, 고귀한 목적에 대한 행위자 자신의 명시적 의식이 없더라도 용감한 행위--'우연히 용감해진 행위'--는 불가능한 것 같다.

*두려움을 주는 것 vs. 두려움을 주지 않는 것(198b)

★더 읽어볼 문헌: ⟪프로타고라스⟫ 358d-360e, ⟪국가⟫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