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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프레데릭 바이저, <독일 관념론> 피히테 장 요약

Beiser, Frederick, German Idealism,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p. 217-345 요약

 (세계 가운데서 내가 수용해야 하는 것과 내가 직접 형성해내는 것 중 후자의 비율을 무한히 높이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Introduction: The interpretation of Fichte’s Idealism

 피히테에 대한 주된 해석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 두 갈래로 나뉜다. 한 편에서 피히테는 물 자체와 주어진 잡다(manifold)를 말소시키는, 그리하여 전체 세계를 구성하는 단 하나의 절대적 자아의 존재에 개입하는 절대적 관념론자로 이해된다. 다른 한 편에서 피히테는 주체가 이를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주관적 관념론자로 이해된다. 그 경우, 주체에게 주어진 잡다로 이루어진 표상을 넘어서는, 즉 의식의 경계 바깥의 실재는 없고, 외부세계—칸트의 물 자체에 해당할 텐데—를 믿는 것은 오직 실천적 당위에 따른 결과이다. 전자의 해석의 약점은 곧 후자의 해석의 강점이 되고, 그 역도 성립한다. 이에 바이저는 피히테를 실천적(pragmatic) 관념론자로 이해함으로써 두 해석을 종합할 길을 모색한다.*

 먼저 절대적 관념론자가 아닌 실천적 관념론자로서 피히테는 실천이성의 우위를 주장하면서 다음의 네 주장에 개입한다.

① 세계는 그 자체로 이상적(ideal)이지도 합리적(rational)이지도 않지만, 도덕적 행위자의 노력을 통해 그렇게 되어야 한다. 경험은 주체의 합리적 활동에 의해 형성되기는 하지만 주체가 모든 경험을 지배하지는 않는다—즉, (자연으로부터의) 단순소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단순소여에 비해 자신이 이성으로써 형성한 것을 증가시킴으로써 자연을 주체의 의도 안에 복속시키는 이념을 향해 나아간다—이는 물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이다.

② 모든 현실을 정립하는 절대적 자아는 구성적 원칙이 아닌 규제적 이념이다. 그는 절대적으로 독립적이며 자연을 완벽하게 지배한다는 점에서 유한한 자아의 이념으로 기능한다.

③ 지식은 행위나 실천에서 오지, 관조나 이론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이러한 사상만이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주체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세계를 자신의 이성의 요구에 점차 순응시켜 나간다.

④ 이론이성이 아닌 실천이성이 곧 경험의 가능성을 설명해준다.

*Q. 전자의 해석의 핵심을 이루는 ‘구성적 주체’와 후자의 해석의 핵심을 이루는 ‘규제적 주체’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A. 주체가 (사실적으로) 이미 그러그러하게 구성되어있다(x) vs. 주체는 (이념적으로) 그러그러하게 구성되어야 한다(o)

 뿐만 아니라 피히테는 주관적 관념론을 적극적으로 배척하면서, 자기의식이 세계의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모든 자기지식은 (데카르트의 생각에 반해) 상호주관적이고, 모든 지식은 실천적 활동, 궁극적으로는 의지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cf. ③). 그럼에도 여전히 피히테는 세계가 주체에 의해 구성적으로 정립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독단주의에 해당하는) 초월론적 실재론에 반대해 (비판적인) 관념론의 계보 위에 선다.

 

Chapter 1: Fichte and the Subjectivist Tradition

“What is the basis for our claim that there is something outside of us which corresponds to our representations? […] Why do we believe that there are real things outside our representations?”(224)

 피히테는 주관에게 주어진 표상이 전부라고 주장하면서 자아 바깥의 외부 세계, 타 정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self)의 실재마저 의심하게 만드는 주관주의적 회의주의에 반대해 칸트 철학의 토대를 다시 닦고자 했다. 야코비로 대변되는 주관주의적 회의주의자들은 흄의 정신을 따라서 끝내는 허무주의(nihilism)에로 치닫는데, 이 허무주의에 따르면 주어진 잡다는 아무 필연적 법칙도 따르지 않고 단지 우연적으로만 종합되어있으며, 우리의 표상은 표상 외부의 실재와 아무런 상관도 없고, 세계는 단지 나만의 세계, 임의적인 인상들의 향연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피히테는 객체에 대한 지식의 가능근거를 묻는 초월론적 관념론을 통해 외부세계와 타 정신 그리고 자기 자신의 경험적이고 독립적인 실재를 구제하고자 했다. 이 연장선에서 피히테는 허무주의뿐만 아니라 버클리로 대변되는 독단적 관념론과도 거리를 두었다. 피히테의 비판적 관념론은 의식의 한계를 긍정함으로써 그와 더불어 의식 바깥의 객관적 실재를 긍정하는 반면, 독단적 관념론은 모든 것을 자아의 산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피히테의 목적은 주체와 객체의 상호의존성을 보이는 것이지, 객체에 대한 주체의 장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 철학을 체계화하고자 한 라인홀트는 표상을 모든 지식, 욕망, 판단의 근원이자 가장 근본적인 소여로 보면서 의식을 주체, 표상 그리고 표상을 통해 표상되는 객체로 나누었다. 이에 피히테는 표상이 단순히 사실로서 주어진다는 테제를 반대하고, 표상마저 특정한 활동 혹은 행위를 통해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표상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주체가 자기 자신을 객체로부터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표상함이라는 상태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존재)와 구분되는 것으로서 구동시킬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상태를 구동시키는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표상의 가능조건이 되는 저 행위/활동/작용(act, Handlung)은 자연스럽게 표상과 구별되며, “정신이 표상을 산출하는 양식”으로 이해된다(228). 표상과 같은 사실적 소여가 아닌 행위가 철학의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The primacy of practical reason then means that we can do in the sensible world what we ought to do in the supersensible world, or that the realm of nature, the domain of theoretical reason, can be subordinated to our moral ends, the domain of practical reason.”(230)

 표상의 단순한 소여성을 비판함으로써 피히테는 주관주의 전통과 결별하기 시작한다.* 그 결별은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사변과 행위 사이의 구분에 반대함으로써 보다 심화된다. 피히테에게 표상을 가능케 하는 행위의 원천은 의욕(volition)과 욕망(desire)의 능력에 있다.** 의욕에 의해 형성되는 표상은 이론적/관조적이기보다 실천적/도덕적(moral)인 것이다. 이제 정신을 관장하는 첫 번째 원리는 의욕, 구체적으로 말해 “도덕 법칙을 통한 욕망(will, Begehrung)의 자기의식”에 있게 된다(229). 실천의식을 일차적인 것으로 두면서 피히테는 모든 것이 인과적으로 결정된 감각세계에서 어떻게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가 가능한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그는 당위로부터 사실을 이끌어냄으로써 자연을 실천이성의 권역 내부에 있는 도덕적 목표에 종속시키고자 한다. 요컨대 지성과 감성,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통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뿌리는 표상이 아닌 욕망이다. 표상은 오히려 욕망의 한 기능에 불과하다. 

*Q. 표상이 아닌 표상능력에서 시작하는 것이 어떻게 주관주의와의 결별에 해당하는가?

A. 내가 작용하기 때문에 비로소 표상이 가능하다는 주장 vs 우리는 주어진 표상밖에 모르기 때문에 실재와의 대응 정도를 우리는 판단할 수 없고 따라서 표상은 신뢰하기 어려우며 자기의 존재밖에는 확신할 수 없다는 주장 Or 실재를 제거해버리는 주장(J씨) / 단순소여=내가 질서에 따라 정돈하지 못한 것, 따라서 우연적인 것(J2씨)

**표상으로써 욕망을 설명하거나 표상을 욕망보다 앞서는 것으로 두는 일(cf. Reinhold)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첫째, 표상을 단순히 가지는 것만으로는 표상에 따르는 행위가 불가능하다. 둘째, 욕망의 저차적 능력은 이성이 아닌 감각을 대상으로 삼기에 (표상과 같은)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셋째, 표상은 이미 주어진 대상에 대한 표상인 반면 욕망은 기존에 없던 대상을 형성하는(create) 작용이다. 넷째, 선에 대한 표상을 가지는 것이 반드시 선한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가 되는 의지의 나약함(weakness of the will)이 표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실천이성이 이론이성에 비해 우위를 가진다는 테제는 적어도 세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실천이성이야말로 이론이성의 근본전제인 외부대상/외부세계의 현존을 설명해준다. 달리 말해, 이성은 실천적이어야만 비로소 이론적일 수 있다. 외부대상/외부세계의 현존은 실천이성, 즉 세계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의 가능조건으로서, 도덕적 의무 준수의 매개자이자 수단으로서만 긍정된다. 결론적으로 도덕성은 경험 자체의 가능조건이다. 피히테는 이처럼 이론이성의 독립성을 부정함으로써 칸트로부터 멀어진다. 둘째, 실천이성은 이론이성을 통해 증명하지도 반증하지도 못하는 도덕적/종교적 신념을 보증해준다. 셋째, 지식은 관조가 아니라 행위의 결과이다. 대상은 그것이 주체 자신에 의해 형성되는 한에서만 투명하게 알려진다. 물론 행위는 자의적이어선 안 되고 보편필연적인 이성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While we cannot demonstrate the reality of the external world according to theoretical reason, we can do so according to practical reason, which gives us not only the right but the duty to believe in anything that is condition of our moral action.”(238)

 실천이성의 우위와 피히테의 토대주의적 기획이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토대주의적 기획은 지식을 자명한 전제들/원리들로부터 관조적으로 연역하여 얻어내며, 외부 세계의 실재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양립 불가능성을 해소하려면 피히테가 주장한 이론이성, 그것에게 가능한 연역의 한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때 피히테는 단지 구성적 연역만을 부정했을 뿐이다. 구성적 연역은 자아의 현존(existence)으로부터 세계의 현존을 연역하려 할 텐데, 이론이성은 그 어떤 것의 현존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외부 세계는 실천이성을 위한 소여에 그쳐야 한다. 그러므로 외부 세계의 현존은 구성적이 아닌 규제적 원리들—사실이 아닌 당위에 대한 원리들—로부터 증명된다. 피히테의 토대는 자명한 공리가 아닌 정언명령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초월론적 논증은 정언명령을 충족시키는 행위의 가능조건을 따지게 된다. 비자아가 존재하는 것마저 자아가 비자아를 파생시켜야 한다는 요구/당위 때문이다.

*Q. 어째서 그러한가?

A. 단순히 소여된 표상만을 알지, 물자체를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T씨).

 

Chapter 2: The Battle against Skepticism—“how can we establish knowledge of an objective world?”(256)

 “[Even after] [a]ssuming that truth consists in the conformity of intuitions with rules, the problem still arises of how we know that these rules ever do apply to these intuitions. It is possible that all of our experience is illusory […] The nightmare of nihilism—the possibility that our representations represent nothing at all—now recurs […]”(252)

 슐체 및 마이몬과 같은 신-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피히테는 칸트의 초월론적 연역이 과연 흄의 회의주의를 대적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신-흄주의자들에게 칸트의 논증은 만일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경험적 판단이 있다면, 지성의 범주들은 감성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데 불과했다. 그러나 지성의 범주들은 정말로 감성에 적용됨으로써 이를테면 인과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가능케 하는가? 어째서 우리의 감성적 경험은 (객체에 가닿지 못하는) 환영이 아닌가?

 슐체에 따르면 칸트의 철학은 그 형식주의로 인해 주관주의로 미끄러진다. 칸트의 관념론 반박은 첫째, 의식에 독립적인 공간적 사물의 현존을 구제하지 못하고 둘째, 물자체를 제한다면 칸트적 현실은 버클리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의식의 내부에 자리하게 되기 때문에 실패한다. 피히테는 이에 대하여 슐체가 초월론적 실재론에 입각한 진리관—진리는 표상과 물자체의 상응이라는 진리관—을 벌써 가정한 채로 칸트를 비판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이러한 진리관은 그 어떤 생각으로부터도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물자체에 대한 관념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부조리한데, 합리적 존재자에게 물자체가 어떻게 생각되어야 하는지 자체는 알려져있기 때문이다. 물 자체가 없기 때문에 상응의 진리관은 반박되며, 주체에게 참된 것 이외에 별도로 참된 것은 없다. 사유의 법칙이야말로 진리와 환영을 가르는 기준이다.

 슐체의 또 다른 비판에 따르면 칸트의 철학은 인과의 원칙을 단순히 가정하며, 칸트에게 지식의 능력 역시 현상적인 것에 불과하고, 의식이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필요에 사실로서의 의식을 잘못 복속시키며, 초월론적 주체를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을 지식의 원천으로 볼 수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피히테는 이에 대하여 슐체가 칸트의 초월론적 주체를 주체의 지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체화[기체화](hypostatize)한다고 반박한다. 이를테면 표상과 완벽하게 구별되는 표상의 능력을 설정하는 식이다. 그러나 자기의식이야말로 주관성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실체화는 거부되어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우리를 무엇으로 생각하는지에 의존한다; 자기의식적일 수 없는 주체는 사물이지 주체가 아닐 것이다.”(246) 즉, 자아는 단지 대자적이다(the I is only for itself). 방법론적으로 말해, 자아는 이를테면 물리법칙과 같은 3인칭의 관점에서는 설명될 수 없다. 자아는 주체의 자기이해에 입각해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존재론적으로 말해, 자아는 자기개념화(self-conception)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표상되지 않고서는 표상할 수 없는 것이다. 윤리학적으로 말해, 자아의 본질은 자기규정/자기정립의 활동 또는 자율성(autonomy)에 있으며, 자아의 정언명령은 그것이 독립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슐체의 비판이 지식의 능력에 대한 분석이 지식의 실재와 어떻게 상응하느냐는 비판으로 수렴한다면, 피히테는 그것이 주체의 자기분석을 통해 가능하다고 대답하는 셈이다. 요컨대 자아는 그의 자기이해로부터 설명되어야 하며, 물자체와 같은 초월적 존재자를 설정해서는 안 된다. 이 둘을 어길 경우 초월론적 철학은 회의주의에 빠질 것이다.

 다른 한편 마이몬의 칸트 비판은 경험으로부터 파생되지 않는 선험적 개념들이 어떻게 경험에 적용되느냐는 물음으로, 즉 지성과 감성, 예지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그토록 날카롭다면 둘의 교통, 개념과 직관의 만남이 어떻게 가능하느냐는 물음으로 집약된다. 도식만으로는 범주의 적용을 정당화할 수 없다. 이를테면 도식은 여전히 단순히 반복되는 결합(conjunction)과 필연적 인과 사이의 구별을 가능케 하지 못한다.

 이에 피히테는 마이몬 자신 역시 독단에 갇혀있다고 반박한다. 마이몬은 지성이 자신에게서 완벽하게 독립적인 무언가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피히테는 “상상력의 작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대상이 주어진다는 전제”를 공격한다(253). 마이몬이 상상력의 형성적(creative)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상상력—우리의 자기의식의 가능조건이기에 반드시 현존하는—이 형성해낸 것 내부에서만 판별되기 때문에, 그 외부에 진리가 따로 있고 상상력은 환영만을 만들어내게 되는 시나리오는 불가능하다.

 피히테에 따르면 상상력은 형식(e.g. 감성, 지성)과 질료(잡다)를 통일시켜준다. 상상력은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들고자 하며, 무규정적 잡다를 규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비록 완벽한 규정은 불가능하지만 상상력의 노력 역시 끝이 없다. 상상력에 의해 규정된 감각적 질료는 상상력에 의해 내면화되어(internalize) 의식의 일부로 편입되고, 그 결과 아프리오리한 형식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규정되지 못한 감각적 질료는 외면화되어(externalize) 상상력의 지배력의 한계를 알려온다. 결론적으로 상상력은 칸트의 생각과 달리 단순히 도식을 산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현실을, 경험의 형식뿐만 아니라 경험의 내용까지도 형성하는 (데 참여하는) 생산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고 해서 피히테가 상상을 무로부터의 창조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피히테는 (상상력의 질료로 기능하는) 철저히 외부적인 현실에 의한 주체의 제약을 인정한다. 감각이나 느낌과 같은 것 자체는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상상력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한의 영역에 의해 한계 지워져있으며, 다만 경험의 대상을, 그것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형식을, 그리하여 객관적 지식을 가능케 하는 구조를 형성해낼 뿐이다.

 “Although all the determinations of the object of experience can be created by the imagination, the matter of experience, its raw sensations or feelings, remains simply given, recalcitrant to all efforts of an infinite striving.”(255)

 마이몬의 이원론 비판은 결국, 사유는 사유의 질료로서 자신으로부터 외재하는 개별자(particular)를 요구하지만 사유의 투명성의 이념은 그와 같은 외재자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수렴한다. 이에 마이몬은 자신의 회의주의에 대한 실천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즉 관조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자연을 주관의 사유의 형식에 복속시킴으로써 현상계를 점차 예지계에 복속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칸트의 이원론은 약화되고, 지성과 감성은 종적 차이가 아닌 정도차만을 가지게 된다.* 나아가 예지체의 개념은 현상을 넘어선 어떤 초월자가 아니라 현상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라는 목표를 가리키는 한계개념으로 재정립된다.

*Q. 어째서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가?(cf. 257) 

A. 감성의 지식화가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친구들이 말하는 감성이 칸트의 감성인지는 모르겠다.

 피히테 역시 (마이몬의 영향을 받아) 자연적 외부자에 의한 주관의 제약이라는 유한성의 조건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의 요구로서 자연에 대한 완전한 지배, 그로써 이성의 완벽한 독립이라는 이념을 유지한다. 이러한 입장이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자연에 대한 독립적인 지배를 위해 (자아가)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수동성이 제로가 되는 경지에 점근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피히테의 입장은 이해의 증가가 정언명령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도덕적 관점에 서기도 함으로써 마이몬과 차별화된다. 그리하여 마이몬의 회의주의를 향한 피히테의 최후의 변론은 실천이성의 우위에 대한 그의 테제로 되돌아간다. 회의는 주객의 구분을 유지하는 사변이 아닌, 주객의 구분을 약화시키는 행위의 영역 내에서 해소된다. 지식을 활동의 산물로 봄으로써 피히테는 주관주의의 전통과 단절할 뿐만 아니라 회의주의를 대적할 열쇠를 쥐게 된다.

 

Chapter 3: Criticism versus Dogmatism

 “The task of Fichte’s criticism, however, is to explain how representations can correspond with objects if the mind and the world are so different from one another. Hence the Fichtean problem is broader than the Kantian: it extends to any class of representations, […] it does not arise for synthetic a priori concepts alone. […] How does the subject know the object if the subject and object have opposing characteristics?”(262-263)

 피히테에 따르면 철학은 비판의 체계독단의 체계로 나뉜다. 먼저 경험을 설명함에 있어 비판철학은 자기(self)나 에고, 자아(I)와 같이 의식에 내재해있는 원리를 활용하며, 경험이 자아 자체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관념론이지만, 독단철학은 의식을 초월한 물 자체를 활용하며, 경험이 물 자체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자연주의이다. 주관이 객관세계를 아는 것은 전자에 따르면 이성의 법칙에 따라 주관이 그것을 형성하기 때문이고, 후자에 따르면 의식이 그것에 작용하는 세계—이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져있으며 자연법칙의 기계적 인과에 의해 지배받는다—를 단지 반영하기 때문이다. 피히테는 물 자체를 말소시키는 전자만이 자유를 가능케 하며, 후자는 스피노자에게서와 같이 숙명론(fatalism)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한편 비판철학과 독단철학 사이의 구분은 경험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무조건자/무한자에 대한 형이상학적 입장에서도 발견된다. 초월론적 철학의 과제는 어떻게 절대적/무한한/무조건적인 자아가 ‘자신 바깥으로 나가’ 제약되고 유한한 것이 되는지 해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철학에는 오직 두 체계만이 가능하단 말인가? 우선 피히테에게 주객이원론은 선택지가 아니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주객이원론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질성에 개입함으로써 둘 사이의 교통을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렇기에 피히테에게 남는 선택지는 주체일원론과 객체일원론, 즉 비판철학과 독단주의 철학 둘뿐이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칸트에 의해 현상과 물자체 사이의 이원론으로 탈바꿈했다면, 피히테의 과제는 회의주의를 방지하기 위해 이원론의 모든 싹을 잘라내는 것이었다.

 이어서 이 두 체계는 어째서 형이상학적 입장을 기준으로 분기되는가? 피히테에 따르면 경험의 근본적 토대(ground)로서 초월론적인 것은 그 자신이 모든 경험적 규정의 가능조건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런 규정/술어화의 가능성도, 따라서 비교도 대조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절대자/무한자/무조건자여야 한다. 이처럼 일원론을 지향하는 철학에서 그 토대가 무한자여야 한다면, 피히테의 비판철학과 대비되는 독단주의 철학의 선봉에는 무한실체를 상정하는 초월론적 실재론으로서 스피노자주의가 서있게 된다. 스피노자주의는 무한자를 마치 경험적인 것인 양 유한하게 규정해버리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The ultimate reason for the failure of dogmatism is clear: it attempts to explain experience from some standpoint external to the mind itself, when the mind is essentially for itself, something that has to be explained internally in terms of its self-consciousness alone. The necessity of idealism is that it alone explains experience on an immanent basi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inherent in the mind itself.”(269)

 피히테가 독단철학을 거부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네 경험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자아 또는 주체는 본질적으로 대자적으로 존재한다(is for itself).”(267) 달리 말해 자기의식은 주관성의 본질이다. 그런데 독단철학은 주체를 그 내부에서부터 내재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고, 말하자면 3인칭의 시점을 취함으로써 자기의식의 이 같은 필연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주체를 다른 대상과 똑같이 취급하며 기계적 법칙 하에 놓여있는 것으로서 실체화해버리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주체에게는 대상표상의 계열과 대상표상에 대한 자기의식의 계열이 언제나 함께 진행되지만 독단철학은 이 두 계열의 분리 불가능성을 놓친다. 뿐만 아니라, 독단철학은 자신의 정의에 입각한다면 그 어떤 지각으로부터도 독립적인 대상적 존재의 계열만을 긍정하게 된다. 반면 표상은 정의상 특정한 주체에 대한 것이다. 요컨대 독단철학에서 유일하게 긍정하는 물질 및 그것을 관장하는 기계적 인과로는 표상의 경험도, 자기의식이 포함된 의식의 근본단위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피히테가 물자체를 거부하게 되는 경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먼저 “피히테는 물자체의 개념이 생각-불가능한(unthinkable) 한에서 그것을 반박한다.”(269) 물자체는 감성에 의해 지각되지도, 지성에 의해 사유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자체를 개념화하는 순간 그것은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나아가 관념론자로서 피히테는 “사물들은 우리가 그에 대해 생각해야만 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론 원리”를 받아들인다(269). 이런 이유로 그는 칸트조차 물자체의 개념을 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석한다. 둘째로 피히테는 물자체가 “현상들의 초월론적 원인”인 한에서도 그것을 거부한다(270). 표상과 이질적인 것이 표상의 원인이 될 수는 없으며, 현상을 넘어 인과성의 범주를 적용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오해는 의식의 조건을 성찰하는 철학자의 시선과 그러한 조건에 얽매인 경험적 의식의 시선을 혼동한 데서 온다. 후자의 시선은 의식의 조건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상과 별도의, 현상에 앞서는 물자체를 상정한다. 그러나 의식의 조건에 대해 아는 철학자의 시선은 대상이 초월론적 종합에 의해 형성된 현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안다.

 반면 피히테는 물자체가 예지체, 즉 순수 사유의 산물로 이해되는 한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예지체는 이성의 필연적 법칙들에 따라 형성되어 현상들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지체는 대상들이 왜 우리의 표상과 독립적인 것으로 드러나면서도 초월자가 아닌지 설명해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또한 피히테는 물자체를 자아의 활동에 제동을 거는 것(Anstoß), 유한한 인간이 끝내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도 받아들인다. 이로부터 과연 피히테가 물자체를 거부하는 이유들과 받아들이는 이유들이 양립 가능하느냐는 문제가 야기된다. 피히테는 표상과 느낌을 구분함으로써 논쟁을 피해가고자 한다. “[…] 우리는 사물들을 현상들로서만 표상하지만, 물자체로서 느낀다.”(272)

*Q. 예지체가 현상에 객관성을 부여한다는 서술을 이해하지 못했다(271).

A. 법칙성 ➔ 객관성. 둘의 외연이 같은 듯하다.

 

Chapter 4: Freedom and Subjectivity

 “I am, from the moment I have come to consciousness, that to which I make myself according to freedom, and I am this simply because I so make myself.”(277)

 피히테가 관념론에 개입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만이 자유를 보존하고 그로써 도덕을 옹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독단철학이 야기하는 숙명론은 자유와 도덕의 가능성을 위협한다. 나아가 피히테에게 자유는 경험의 가능성과 외부세계에 대한 의식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원리이기도 하다. 자유에 대한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 of freedom)으로부터 비로소 (세계에 대한) 경험이 연역되기 때문이다. 감각적 세계는 자유에 대한 자기의식의 필요조건으로서, 자아가 자신을 자율적인 도덕적 주체로 알게 해주는 수단으로서 이해된다.

 피히테는 자유를 두 개념으로 이해했다. 한편으로 자유는 ①순수의지(Wille)의 자유로 이성의 법칙인 정언명령과 동일시된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②자의(Willkür)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선택의 자유이다. 자의에 의한 선택은 순수의지에 대한 자기의식 또는 반성으로부터 발원한다(arise). ①의 자유는 의식의 가능조건이기 때문에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②만이 주체에게 알려지며, 피히테 역시 ②의 자유에 집중한다.

 이때 첫째, ②의 자유는 외부 원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성립하며—즉 의지는 자기 자신의 원인이며—따라서 칸트적 자발성과 같다. 자유는 또한 스피노자에게서와 달리 완벽한 필연성이 지배하는 자연의 권역 내에(서도) 자리할 수 없다. 나아가 자유는 선택지들 사이에 무엇을 고를지가 무규정적인 상황에서만 성립한다. 이 세 가지 이유로 자유는 필연성(달리 할 수 없음)을 배제한다. 둘째, ②의 자유는 우연성(이유 없음)을 배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히테는 결정론에 빠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유로운 행위의 이유는 오직 사유의 권역 내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행위의 이유는 행위의 원인이 아니라 (i) (모든 생물체가 아니라) 자기의식적인 합리적 행위자에 의해 생각된 (ii) 목적 또는 의도이다.

 요컨대 자유는 자기규정(Selbstbestimmung, self-determination)으로 정의될 수 있다. 자기(self)는 규정 이전에 현존하기 때문에, 규정적으로(결정되어) 현존하는 대상과 달리 주체의 경우 그 (무규정적) 현존과 본질이 분리된다. 또한 자기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의 자신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은 그 자신의 합리적 선택에 순응한다. 그러나 (완벽한) 자기규정은 이미 달성된 바가 아니라 주체가 언제나 목표로 삼아야 할 이상이다. 주체에게는 완전히 자유에만 따를 역량이 있지만 사실적으로 그는 자연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자연에서 주어진 것은 이성에 따라 재형성되어야 한다. 주체는 자연과 싸우는 노력을 감행해야 하며, 자연*이 이성의 목적에 합치하도록 그것을 통제해야 한다. 피히테의 자유 개념은 그 같은 노력의 끝에 자기동일성, 곧 (자유로운) 예지적인 것과 (필연에 의해 지배되는) 현상적인 것의 통일을 지향함으로써 칸트와 결별한다.

*내적 자연, 외적 자연 모두를 지칭하는 것 같다.

 “[…] to be self-conscious, the subject must know itself as an object, in other words, it must manifest, express, or objectify itself; but this activity of self-manifestation, self-expression, or self-objectification is identical with self-determination and so with freedom itself.”(280)

 경험을 설명하는 바탕이 자아 자체(Ich an sich)라는 언명은 자아의 본질이 자유이기 때문에 자유의 개념과 상보적이다. 피히테에 따르면 에고의 본질은 주객동일성에 있다. 주객동일성은 ①자유와 ②자기의식 사이상호의존성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기는 대상과 달리 합리적 행위자로서 ①자유로우며, 또한 ②자기의식적이다. 이에 상응하여 자기는 ②주관적 또는 이념적으로 자신의 활동에 대해 표상 또는 생각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사유하고 숙고할 수 있고, ①객관적 또는 실재적(real)으로 의지와 행위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목적에 따라 행위하여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 주체는 어떤 것을 목표하(고 그에 따라 실천함으로써) 순수하게 주관적이었던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이것이 자기규정을 위해 그토록 본질적인 무규정자로부터 규정자로의 중대한 이행이다.”(280) 물론 생각함과 의지함, 반성함과 행위함은 일상적 의식에게만 분리되며, 초월론적 철학자에게는 분리되지 않는다. 주체의 주관적 면모와 객관적 면모는 서로 통일되어있는 것이다. 자유롭지 않은 주체는 자기의식적이고 반성적일 수 없으며, 자기의식적이고 반성적일 수 없는 주체는 자유로울 수 없다.

 자기의식은 어째서 자유를 요구하는가? 자유란 스스로를 규정하는 활동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자유 이전의 나는 “가능성들의 추상적 집합”에 불과하다(280).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자유를 통해 나 자신이 누구인지가 규정되어있어야 한다. 반대로 자유는 어째서 자기의식을 요구하는가? 선택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고를지 그리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획득할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수동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어떤 (능동적) 활동을 ‘나의’ 개념화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에 부합하는 활동으로 만듦으로써 성립한다. 그리하여 에고 혹은 절대적 주체는 영혼, 혹은 영혼적 실체에 반해 자기정립적이다(self-positing). 에고는 물화될 수 없고, 자유로운 활동의 산출물이다. 자기의식은 일종의 창조이며 자유 없이는 자아정체성도 없다.

 “First, the I posits itself when it becomes conscious of itself, that is, when it becomes an object for itself. Second, the I posits itself when it constitutes or makes itself. Positing therefore contains an aspect of both knowing and doing, of perceiving and making. In self-positing, self-knowing and self-making are intertwined: I know myself because I make myself; and I make myself because I know myself. Hence when the ego posits itself—when it reflects on its existence as a pure subject—it also creates or makes its existence through this very act.”(281)

 그런데 자연법에 대한 피히테의 서술에 따르면 자아는 특정한 규정의 옷을 입어야만 존재할 수 있고, 육체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의식하게 되며, 다른 자아들 사이의 개별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적’ 자아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에, 피히테는 주관성의 형식을 이루며 지적 직관(intellectual intuition)을 통해 주어지는 절대적 자아—순수한 자기규정적 활동으로서 존재의 사실만을 가지지, 존재의 양태(how)는 가지지 않는 자아—와 주관성의 내용을 포함하는 자아—현행적이고 잠재적인 규정을 모두 갖춘 (완벽한) 절대적 자아—를 구분한다. 후자는 자아의 실제가 아닌 이념에 불과한데, 주체는 자신이 정립한 (또는 정립해야 하는) 모든 것을 아직 (심지어는 영원히) 성취하지 못했기(못하기) 때문이다. 주체를 이루는 일부 규정은 그가 그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자아는 순전히 형식적인 한에서, 즉 규정의 가능조건을 가리키는 한에서 절대적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아는 (너무나) 완벽한 한에서, 즉 모든 현실을 스스로 정립해내야 한다는 당위/이념을 성취한 한에서 절대적이다.

 궁극적으로 첫 번째 자아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자아, 자아의 사실을 가리키는 반면 두 번째 자아는 존재해야 하는 대로의 자아, 자아의 당위를 가리킨다. 피히테에 따르면 자아는 어떤 곤경에 처해 있다. 자아는 그 현존에 있어서는 완벽하게 자기규정적이고 합리적이지만, (실제로, 즉 현존의 양태 혹은) 본질에 있어서는 수동적이고 감성적(sensible)이다. 이로 인해 자아는 그가 완전히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그리하여 그의 질료와 본질에 있어서까지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도덕성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게 된다. 이 곤경을 해소하려면 ‘에고는 자기정립적이다’라는 구성적 원리는 ‘에고는 자기정립적이어야 한다’는 규제적 원리로 읽혀야 한다. 그리하여 에고는 완전히 자기정립적이기 위해 무한히 노력해야 한다. 자아에 대한 구분을 통해 피히테의 에고는 절대적인 동시에 개별적이고, 유한한 동시에 무한한 것으로서 개념화될 수 있게 된다.

 “[…] there is a conflict between their[human beings’] power of self-determination and their having a passive nature determined by external causes. The task of every human being is to resolve this conflict, so that their entire nature is the product of their self-determining activity alone.”(288)

 

Chapter 5: Knowledge of Freedom

 피히테에게 자유 그리고 자유에 대한 자기의식은 자기의 개념에서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와 타 정신의 존재를 연역하게 해주는 전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자유롭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답하는 것은 그에게 매우 중요하다. 초기의 피히테는 주관에게 “도덕적 의지, 욕망의 순수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290). 이와 같은 의지는 (다른 표상과 달리 감각이 아니라 우리들 내부에서 오는) 의지표상의 내용이자 도덕법칙의 순수 형식, 곧 정언명령—“오직 우리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것, 우리의 자발성만으로부터만 파생되는 것”(290)—에 대한 자기의식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나 피히테는 점차 의식의 사실로부터 자유를 도출하는 칸트적 시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피히테는 첫째, 도덕법칙을 규정함(determining)이라는 행위와 도덕법칙의 규정(determination)이라는 행위의 산출물을 구분하면서 전자는 (의식의 사실로서) 알려지지 않고 단지 상정될(postulate) 뿐이라고 보았다. 둘째, 칸트-초기 피히테에 따르면 주관이 경험적 동기가 아닌 도덕법칙을 따라서만 행위한다는 것은 오직 존경의 느낌(이라는 의식의 사실)로부터만 알려지는데, 이러한 테제는 도덕을 감정으로 설명하는 다른 이론들의 약점에 스스로를 똑같이 노출시킨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피히테는 “자유가 의식 자체의 가능성의 필요조건”일 때에만 자유의 실재가 진정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291-292). 그 결과 통일체로서의 의식은 무조건자 없이는 불가능한데, 이 무조건자가 곧 의지 또는 실천이성이라는 논증이 탄생하게 된다. 쉽게 말해 자유 없이는 경험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유의 실재에 대한 피히테의 증명은 주체가 이미 절대적 독립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독립성을 향해 노력한다는 것으로부터 온다. 이 노력은 자기의 독립적이고 예지적인 부분과 의존적이고 현상적인 부분 사이의 통일에 대한 노력이기도 하다. 자유의 존재에 대한 아프리오리한(, 행위 이전에 이론적으로 알려지는) 보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우선 우리들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294) 결과적으로 후기의 피히테는 자유의 실재에 대한 이론적인 증명의 가능성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We cannot know that we are free prior to the attempt to make ourselves so, because we only become free agents through struggle against nature and the external causes forcing us into action.”(294)

 그런데 칸트는 자기규정적 주체의 활동의 원천인 예지적 자기(noumenal self)를 알 수 없는(unknowable) 것으로 규정하지 않았던가? 칸트의 규정은 주체가 대자적이기에 스스로 의식한 것과 같다는 피히테의 테제와 양립할 수 없었다. 이에 피히테는 칸트로부터 예지적 자기의 개념을 제거함으로써 비판철학을 순수하게 내재적으로 만들고—즉 물자체와 같은 초월자를 제거하고—슐체의 회의주의로부터도 구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칸트에게서는 예지적 자기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 자체로부터, 즉 그것이 인과성의 원리로부터 독립적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가 도출되었었다. 자아가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순간—인과성의 범주 안에 복속시키는 순간—자유는 박탈되기 때문이다. 칸트에게서와 달리 자유와 주체의 자기의식이 양립 가능한, 심지어는 상보적인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딪혀서 피히테는 지적 직관의 개념을 개발한다. 지적 직관은 초월론적 철학자가 분석한 의식과 의식 자체를 상응하게 해준다.* 또한 지적 직관은 모든 가능한 표상들의 주체인 절대적 자아 역시 (주체에게 가능한 경험의 한계 내에서) 알 수 있게 해준다. 주체가 스스로를 직관한다는 것, 그리하여 직관 속에서 스스로를 구축한다는 것은 일종의 요청이다.**

*“[…] there is no problem of a correspondence between the philosopher’s reflection on consciousness and consciousness itself, because the philosopher constructs in intuition, or produces according to a rule, the very object that he knows; it is not as if the mind were some thing-in-itself that exists apart from and prior to its reflections on itself.”(297)

**행위로 인해 당위와 사실이 통하게 되는 것 같다. 행위란 당위를 사실로 만드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지적* 직관**이란 “자발적이고 행위하는 주체로서의 자기의식”으로, “내가 행위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행위할 때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무매개적 의식”이다(298). 지적 직관은 주체가 스스로를 작용/규정당하는 것이 아닌 작용하는/행위하는/규정하는 것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지적 직관에서 알려지는 것은 이미 범주에 종속되어있는 규정성이 아니라 규정함 자체이다.

*=감성적이지 않은, 주어지는/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거나 정립되는 것인(창조적인), 직관의 주체를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활동적인) 주체로 만드는

**=무매개적, (추론이나 추리로써) 증명불가능한(indemonstrable), 비개념적, 그에 대해서는 경험만이 가능한, 직관의 주체에게 개념을 적용 불가능하게 만드는(개념의 적용은 주체를 수동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cf. '지적 직관'의 개념은 칸트 철학의 맥락에서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 피히테는 지성/감성 사이의 철저한 구별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런 개념을 만들 수 있었다(J씨).

 “In short, then, an intellectual intuition consists in the active self-knowing self knowing itself as an active self-knowing self. […] The self-knowledge that I am acting creates or acts out what I know, simply because what I know is that I am acting! […] in intellectual intuition I know something is so because I make it so.”(298-299)

 그러나 피히테의 스승 칸트는 “나의 자발성에 대한 자기의식”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경로인 지적인 직관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300). 칸트에게 자기지식을 비롯한 모든 지식은 개념의 적용—이는 지적 ‘직관’의 불가능성을 가리키고—과 감각적 잡다의 소여—이는 ‘지적’ 직관의 불가능성을 가리킨다—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히테는 칸트의 지적 직관 개념과 통각의 통일성 개념에 대한 개성적인 해석을 통해 자신이 칸트의 뜻을 거스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cf. 300-301). 그러나 피히테가 “모든 지식은 개념적인 동시에 경험적이라는 칸트의 주장을 거부한다”는 것(300), 그리고 자기규정하는 주체에 대한 (칸트에 따르면 생각(thought)인 것이 아닌) 직관이 가능하다고 본 것만큼은 확실하다. 피히테가 칸트와 자신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한 것은 칸트가 피히테를 직접 비판한 1799년에 이르러서였다.

 칸트와 피히테가 모두 자유를 위해 자기규정하는 주체의 자기지식의 (불)가능성을 논증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피히테는 칸트가 자기의식이 불가능한 영역에 주체를 놓음으로써 주체를 실체화해버린다고 비판하고, 자유가 자기의식을 요구한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행위하는 주체에 대한 자기의식이 불가능하다면, 주체는 (자신에 대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기는 자신의 자기사고(self-conception) 이전에 자리하는 그리고 [그럼에도] 그가 준수해야 하는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다. 도리어 자기의 정체성은 그의 자기사고에 의존하며, 자기의 자유는 그 자기사고를 실현하고자 노력함에서 성립한다.”(303)

 자기규정하는 주체의 자기지식의 두 가능조건은 주객동일성의 원리에 따른다. 첫째, “대상으로서의 자기는 주체로서의 자기로부터 분리되거나 그보다 선행하여 존재하지 않는다.”(303) 달리 말해 대상으로서의 자기는 주체로서의 자기가 정립 또는 구성한, 그가 자기 자신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둘째, “주체로서의 자기는 대상으로서의 자기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현현시키고, 육화한다. 이는 자기를-아는 자기가 그것의 자기표현, 자기현현, 또는 자기육화[자기객관화] 이외의 다른 것에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303) 쉽게 말해, 주체로서의 자기는 대상으로서의 자기를 구성하고, 대상으로서의 자기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표현한다. 궁극적으로 “자기는 그것이 스스로라고 사고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이, 자기는 자기정립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304).

 “To be self-positing implies self-constitution since the self-knowing self brings itself into existence when it posits itself; there is no preexisting self who is just given prior to the self-knowing self. Self-positing also implies self-expression since to say that the self posits itself as P is to say that the self simply is P, that it makes itself what it is through P or whatever it posits itself to be.”(304)

 피히테의 지적 직관의 이론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적 직관을 통해 피히테가 달성하고자 한 것은 자유의 실재를 인식 가능한 것으로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실재할 수 있는 가능조건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앞서 피히테가 자유의 실재를 무매개적 경험(의식의 사실)을 통해 증명하는 것에 반대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의 실재 여부는 이론적 근거로써는 결코 결정될 수 없다. 한편으로, 알려지지 않은 원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비판철학자는 자신의 경험만으로는 자유의 실재를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원인이 모두 알려져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독단철학자가 자유의 실재를 부정할 수도 없다. 독단철학자는 단순히 자아가 자연의 일부임을 (맹목적으로) 전제하고 그 때문에 자유롭지 않다고 말할 뿐이다. 어느 접근로를 거쳐서든 주체의 자유로움은 ‘알려질’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우리가 자유롭다고 믿어야 하는가이다.

 이 물음에 대한 피히테의 답은 양심, 도덕법칙에 대한 앎(awareness)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믿을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무에 거스르는 무언가를 행할 때, 양심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우리는 언제나 달리 행할 수 있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305-6) 물론 이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양심 역시 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피히테는 도덕법칙의 자연성 여부를 가타부타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도덕법칙은 실천적 필연성으로서, 그와 관련해 그렇게 가타부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자유의 실재는 (단지) 선택의 행위, 도덕적이고자 하는 결정에서 온다. (내가 자유롭고자 하기에 나는 자유로워진다.)

 

Chapter 6: Critical Idealism

 주관주의와 회의주의에 대한 피히테의 비판은 지식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보증해주지만 그 지식이 단지 우리의 표상에 대한 것, 우리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은 바에 대한 것으로 국한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보증된 것은 주체가 형성한 것에 대해서는 주체가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피히테의 관념론은 외부 세계의 현실성을 증명하는 데 실패할 것처럼 보인다. 주체와 객체, 형식과 질료/물질(content/matter)의 이원론을 피하기 위한 절대적 자아의 교설이 규제적인 이념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문제, 주객이 동일하게 비춰지는 초월론적 관점이 그렇지 못한 경험적 관점을 도대체 설명할 수 있느냐는 문제, 마지막으로 주체가 어떻게 스스로를 촉발함으로써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일 수 있느냐, 그것도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자아가 어떻게 수동적이 될 수 있느냐는 내적 촉발의 문제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피히테의 해결은 노력의 개념에 있다.

 경험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 피히테가 맞닥뜨리는 결정적인 문제는 사실 다음과 같다. 절대적 자아는 그 무엇에도 제약되지 않는 독립자, 무조건자로서 순수하게 자기규정적이다. 그러나 자아의 일상적인 경험은 비자아에 의해 제약되는 것처럼, 그에 감성적 수동성이 관여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경우 자아는 한계를 가지는 유한자이자 조건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자아는 동일한 자아여야 한다. 이는 피히테뿐만 아니라 모든 관념론이 부딪히는 문제이다. “관념론은 우리 경험의 현실, 어떤 표상들은 우리의 의지와 상상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원인들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310)

 “[…] there is an apparent contradiction between the principle of idealism, which states that everything depends on the reality of the ego, and our actual experience, which shows that our representations depend on something outside ourselves, independent of our conscious control.”(310)

 이에 피히테의 최종 전략은 무한한 자아와 유한한 자아의 갈등을 대립되는 활동들로써 설명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무한한 자아의 순수한 자기관계적 활동이 있고—이로써 그는 자신의 모든 현실을 스스로 정립하기에 이른다—다른 한편으로는 유한한 자아의 객체를 향한, 비자아에 겨눠진 활동이 있다. 이때 두 활동이 사실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만 두 활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당위, 자아가 결국에는 비자아를 전부 장악해야 한다는 당위가 있을 뿐이다. 유한한 자아는 자신을 자극하면서도 견제하는 비자아를 규정하고자, 자신의 이성의 요구 하에 복속시키고자, 궁극적으로 절대적 자아라는 이념에 도달하고자 무한하게 노력한다. 이 노력은 성과 없는 노력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념에 도달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 이념에 도달하는 순간 유한자는 더 이상 유한자가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은 끝내 탈피될 수 없다.)

 노력(striving, Streben)의 개념으로써 단순히 요청되기만 했던 비자아의 존재는 현실성/실재를 얻는다. 노력은 그것이 가해질 방해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노력은 모든 객체, 우리의 활동에 대립되는 세계에 대한 모든 경험의 가능조건이 된다. 이론이성이 단순히 전제해야만 했던 외부세계의 존재는 노력하는 실천이성에 의해 비로소 설명된다.* 나아가 자기정립에 대해서도 자기의식이 있다는 점, 동시에 의식함은 일종의 규정함이라는 점은 내적 촉발의 문제를 해결해준다. “[…] 자아는 자신을 알기 위해 자신을 제한한다.”(313) 이제 절대적 자아의 교설은 규제적 이념에 불과하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자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무한한 노력을 통해 절대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아는 노력해야만 한다. 노력에는 방해물이자 저항 대상으로서 비자아/세계가 요구된다. 따라서 비자아/세계가 존재해야 한다.

 피히테의 비판적 관념론은 독단적 관념론과 독단적 실재론 모두를 거부한다. 독단적 관념론은 비자아를 절대적 자아의 한 양태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고, 독단적 실재론은 자아를 비자아의 한 양태에 불과한 것으로 만든다. 전자는 경험을 환영으로 전락시키고, 후자는 주관성을 오해한다. 그에 비해 비판적 관념론은 경험의 성립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 자아와 비자아의 상호의존적 역할을 인정한다. 상호의존성의 정체는 다음과 같다. 주체는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고 그에 의해 제약되지만—물론 제약이 있기에 ‘활동’도 있다. 피히테에게 모든 활동은 저항이다—객체의 속성을 규정함에 있어서는 독립적이다. 주체의 활동만이 객체에게 규정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객체를 무로부터 창조할 수는 없지만, 객체가 무엇인지는 스스로가 해석한다.) 자극자/제약자(Anstoß)로서 현존하는 객체는 주체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 그에 대해 (그것이 자극자/제약자이자 자신의 대립자라는 것 외에는) 조금도 알 수 없는 것이자 요청의 대상이다. 이것이 피히테가 그리는 인간 정신의 한계이다.

 그렇다고 해서 피히테가 ‘결코 생각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물 자체의 개념을 복권시켰다고 (헤겔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자아를 요청함으로써 피히테에게 물 자체의 개념은 (급진적으로) 재해석된다. 이를 이해하려면 피히테에게 주객의 관계가 역동적이라는 점—비자아를 이성에 굴복시키는 노력(여부)에 따라 주체는 끊임없이 객체가 되고, 객체는 끊임없이 주체가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노력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주체에게 복속되지 못한 비자아의 일부는 (재해석된) 물 자체로서 의식의 권역을 초월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칸트에게서와 달리 피히테에게서 물 자체에 대한 자아의 무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정도차를 갖고 교정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초월하는 자연을 자신에게 내재하는 (이성의 법칙을 따르는 존재자라는 의미에서) 예지체로 부단히 변경해야 하는 자아의 숙명이 피히테의 비판적 관념론을 특징짓는다. 복권된 물 자체는 이제 비단 경험적 관점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 the predicament of the finite subject: that it knows things only to the extent that it makes them conform to reason; and that it is always limited yet must transcend its limits. The finite knowing subject is therefore forever caught between the noumenon that it creates and the thing-in-itself that transcends it, though it can forever push forward the boundaries between them.”(317) 

 

Chapter 7: The Refutation of Idealism

 노력의 개념을 가다듬음에 따라 피히테는 외부세계의 실재에 대한 연역 역시 추가하기에 이른다. 그의 새로운 논증들은 첫째, 경험의 형식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구조화되어있으며 그에 따라 주체의 표상들은 자의적이지 않고 질서지어져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 “내 경험의 현존 또는 질료/물질은 그 모든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점을 보이고자 한다(320). 전자는 지각의 경험적 실재를, 후자는 경험되는 질료의 초월론적 실재를 입증한다.

 외부세계의 실재에 대한 피히테의 연역은 실천이성의 활동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회의주의에 대한 이론적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이전의 테제는 손상을 입지 않는다. 피히테의 연역은 자유에 대한 자기의식*이 외부세계에 대한 의식, 즉 나의 변경에의 노력과 의지에 저항하는 것에 대한 의식을 포함한다는 내용을 그 핵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피히테에게 내 세계의 경계(circumference)는 내 의지의 한계들과 동일하다.”(321)

*그러나 자유의 실재성은 이론적으로 입증될 수 없기 때문에, 피히테의 연역의 시작점은 애초부터 우리가 자유를 믿어야 한다는 당위에서 온다는 약점이 있다. 그리하여 피히테의 연역의 도착점도 우리가 외부세계를 믿어야 한다는 당위에 그친다. 피히테의 연역은 외부세계의 사실성도, 그 현존에 대한 지식도 보장하지 않는다.

 “The central thrust of Fichte’s arguments is that I can be self-conscious as a free agent—I can ascribe to myself a will and rational ends—only if I am also aware of a world outside myself in which my actions take place. The existence of the external world therefore becomes a necessary condition of moral action. […] Any demonstration of the existence of the external world, Fichte maintains, must be based entirely on practical principles, which tell us not what is the case but what ought to be so.”(322-323)

 “How does a rational agent act in the sensible world? What ensures the reality of the moral law, or that it has application in experience? If we can show that our belief in the reality of the external world is based on the self-consciousness of freedom, then we will have done everything necessary to show the reality of the principle of morality itself.”(324)

 외부세계의 실재(의 당위)에 대한 피히테의 연역은 다음의 단계들로 이루어진다.

① “I posit myself, or I exist only in and through the activity of thinking of myself.”(325):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나-자신에-대해-생각함이라는 활동으로서의 나는 현존한다.)

 첫 번째 단계는 자아를 주체로서 대상화해야 한다는 주객동일성 원리에 따른 요구(의 결론이)다. 그것은 활동의 산출물인 사실보다는 사실에 선행하는 활동에 대한 요구이기도 한데, 활동에 대한 지식은 사실/대상에 대한 지식보다 무매개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 번째 단계는 생각하는 사물/실체가 아니라—그런 생각은 무매개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생각함이라는 활동이 보장하는) 단지 나 자신의 현존에 대해 생각하라는 요구가 된다(나는 나의 현존을 오직 나에 대해 생각함으로써만 안다). 이때, 단지 나 자신의 현존만이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가지는 개(별)성이나 구체적인 특징들은 추상된다. (이러한 요구에 따른 결론으로서) 첫 번째 단계는 의심 불가능하다. 내가 나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지 의심하는 것조차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② “If I posit myself, I must ascribe free activity to myself.”(327, cf. “If I know myself, I know myself as willing”(325)): (나-자신에-대해-생각함이라는 활동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의지를 부여한다 / 내가 현존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 나는 스스로를 의지하고 행위하는 자로서 의식한다)

 피히테에 따르면 합리적 행위자는 그 자신에게 의지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부여’라는 사태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는 자기 자신을 의지를 가진 것으로 발견한다는 것과는 다른 사태다. “우리는 자유에 대한 무매개적 지식 또는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328). 주체가 스스로에게 의지를 부여하게 되는 이유는, 주체가 객체와 다른 것으로서 자신을 의식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과는 다른 것, 즉 행위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의식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③ “If I ascribe free activity to myself, I must also assume the existence of something outside myself toward which it is directed.”(328): (의지의 부여는 그 의지가 향해지는/내 노력에 저항하는 주체 외부의 것의 현존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세 번째 단계를 위해 피히테는 두 논증을 준비한다. 첫째, 특정한 행위의 경로를 선택하는 의지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자신과 다른 무언가를 산출하게 된다. 둘째, 주체가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선택과 독립적으로 계속해서 현존하는 대상을 (선택지로서) 생각해야만 한다. 다른 곳에서 피히테는 행위는 그러한 행위에 저항하는 것, 그리하여 나에게 대립되어있는 것에 대한 생각과 함께 따라온다고 논증함으로써 회의주의자에 대적한다. 만일 회의주의자의 말대로 세계가 주체의 표상에 불과하다면 그 어떤 것도 주체에게 저항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Thus the original character of the world—the first form in which I am conscious of it—is that it is an obstacle to my activity.”(329)

④ “If I ascribe free activity to myself, I also must assume that I have the power to act on and change things in the sensible world.”(330): (주체 외부의 객체는 감성적 세계에 속하는 경험적/시간적/질 또는 양적 잡다이며, 주체가 변경할 수 있는 무엇이다)

 선택이란 반드시 특수한 것, 규정된 것에 대한 선택이다. 즉 선택은 선택받지 못한 것에 대한 배제를 포함한다. 이처럼 “나의 행위들이 규정적이어야 한다면 […] 그것은 감성적 세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나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 나의 활동에 그것의 규정적 성격을 주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은 오직 경험과 느낌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330) 그리고 이 경험은 시간 속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 시간 속에서 행위한다는 것은 […] 외부적 감성적 세계 속에서 행위한다는 것이다.”(330)

“Although I know that I act through an a priori intellectual intuition, I know how I act only by virtue of my opposition and relation to an external world.”(330)

⑤ “If I have the power to act and change things in the sensible world, then I must perceive this power in a manifold having a definite and irreversible order, that is, my experience must have a necessary and universal form.”(331): (의지에 따른 행위는 의지 외부적인 질서를 따라야 한다)

 선택의 행위가 그 목적에 이르려면 수단의 계열을 지나야 한다. 목적은 결코 한 번에 달성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건들을 객관적인, 우리의 의지와 상상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경험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들에 대해 저항에 맞닥뜨리고 특정한 억제된(circumscribed) 질서 속에서 행위들을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331) 이러한 주장은 두 개의 명제로 입증된다. 첫째, “나의 인과성은 연속 속에서 또는 계속적인 계열 속 다양체로서 지각된다.”(331) 이는 나의 인과력이 무한히 분할 가능한 시간 속에서 발휘되기 때문이다.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이 다양체는 규정된, 비가역적인 질서를 따른다. 나의 활동은 나의 저항과 함께 지각되기 때문이다. 둘째, “다양체의 연속적 질서는 나와 독립적으로 [나에게 비의존적으로] 규정되며, 그와 같은 것으로서만 나의 활동의 한계이다.”(331) (피히테는 시간을 이성에 대한 일종의 저항자로 보고 있는 것이다.)

 “[…] I cannot be aware of my activity as a free agent unless I am also aware of an objective time order of events, an order that is independent of my representation and my will. […] I arrive at an objective view of the world, Fichte concludes, because my activity encounters resistance, so that it can be realized only through following a definite order of means to ends.”(331-332)*

*내가 나의 자유를 행사하려면 지속이 요구되는데, 그 지속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세계적 질서다.

⑥ “If I have the power to act in the sensible world, then that world must also have a power to act on me, that is, it must follow its own objective laws.”(332): (내가 작용/행위한다는 것은 나에게 작용하는/나에게 저항하는 자연이 현존함을 의미한다)

 자아가 자기 자신을 활동적인/능동적인 존재자로 아는 것은 그의 충동(Trieb, drive) 때문이다. 자아는 느낌을 통해 그 충동 및 충동의 (불)충족을 지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주체가 느끼는 한에서 주체는 제한받는다. 충동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 충동들이 특정한 방식으로만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자기정립적 활동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충동과 느낌을 가지는 한에서 나는 자연의 일부이다[일부로 스스로를 정립한다].”(332) 그러나 이러한 정립으로써 주체는 나의 자연 외부의 자연 또한 정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주체의 활동이 가해져야 할 질료가 주체 바깥에 있어야 하며, 둘째, 그 질료가 나의 목적을 특정한 질서에 따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특정한 형태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자연과 내 외부의 자연은 서로를 조건지으면서 자연 전체를 이룬다. 주체는 결국 자연의 일부로서만 현존하는 것이다.

 “For Fichte, the only effective proof of the reality of the external world is that I cannot make that world conform immediately, entirely, and automatically to my desires. Hence the limits of the objective world consists in that which resists or opposes my activity. Again, the problem with skepticism is that it has a much too contemplative or theoretical attitude toward the world; it is only once I try to change the world, to make it submit to the demands of my activity, that I see that the world cannot be only the product of my will and imagination.”(333)

 

Chapter 8: The Structure of Intersubjectivity

 주관주의에 대한 피히테의 대항은 외부세계의 실재에 대한 증명에서 그치지 않고 타 정신(other minds)의 실재에 대한 증명에까지 이어진다. 만일 타 정신이 실재하지 않고 단지 이를테면 복잡한 기계들만이 존재한다면, 그들에게 권리와 의무를 부여할 이유도, 그들을 목적으로 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타 정신의 실재성이라는 문제는 피히테에게 특히 중요했다. 게다가 이 문제는 합리성을 어떤 경우에 부여할 것이냐는 질문과도 결부되어있었다. 피히테에게는 칸트가 타 정신의 실재성 문제를 단순한 유비추론으로 해결 가능한 것으로 보고 방관한 것이 불만족스러웠다. 칸트는 상호주관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음으로써 지성과 감성의 형식이 타 인간존재에게는 공유되지 않을 수 있다는, 나아가 공유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회의주의를 미해결 상태로 남겨두고 말았다.

 “If intersubjectivity means everyone sharing the same structure for experiencing and explaining the world, then it involves at least two elements. First, that every self-conscious or human being has a conceptual structure like my own […] Second, that the other creatures who inhabit my world are really self-conscious or human beings like myself.”(337)

 피히테는 타 정신의 실재성 증명에 있어 경험주의적 접근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경험은 타 정신에 대한 표상만을 제공해줄 뿐, 그 표상과 상응하는 실제 정신의 실재 여부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신성에서 핵심적인 자유는 경험의 대상이 아니다. 이때 피히테에게 경험의 한계는 이론이성의 한계와 동일하므로 타 정신에 대해서도 이론적 접근은 불가능하고, 오직 실천적 접근만이 열려있으며, 이로부터 타 정신은 피히테의 체계에서 구성적 타당성보다는 규제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음이 유추된다. 달리 말해, 우리는 타 정신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히테는 타 정신의 존재 여부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한다. 한 존재자가 ‘나’와 같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자유에 의해 규정된 목적에 따른 행위’의 여부이다. 단순히 목적에 따르는 행위는 일반적인 유기체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의 요소가 무엇보다 핵심적이다. 그러나 자유는—심지어 나 자신의 자유조차—의식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자유를 부정적인 의미에서 알 수 있는데, 나의 행위함을 위해 내 의지를 제하고서는 다른 어떤 원인도 알지 못할 때 그렇다.”(339) 이때 ‘나’의 자유로운 행위를 관장하는 법칙인 자연법의 원리들은 타 정신에게도 공유되며, 이로부터 그가 합리적임이 알려질 수 있다.

 다른 곳에서 피히테는 주체의 합리적 본성은 사회 속에서 타 정신과 함께할 때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의 자유는 ‘내’가 타인 역시 자유롭게 만들고자 할 때만 성립한다. 이 테제 역시 피히테의 증명을 위한 초석 가운데 하나이다.

 “We know ourselves as rational individuals, and we ascribe an equal and independent reality to other rational individuals, Fichte further explains, only by virtue of the principles of natural right. These principles demand that I treat others as free agents like myself; if they respect my freedom by not interfering with my actions, then I have an obligation to respect their freedom by not interfering with their actions. But to recognize the freedom of another being is to accept its status as another rational being, as another mind equal to and independent of my own.”(340)

 이 문제에 대한 피히테의 성숙한 입장은 자연권을 정초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나온다. 자연권의 개념이 연역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타 개별자와 구분되는—즉 상호주관성을 인지하고 있는—개별자의 자기의식의 필요조건이어야 한다. 이로부터 피히테는 타 정신의 가능조건을 제시할 뿐 아니라 타 정신적 존재자에게 자연권을 부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에까지 나아간다.

 “The finite rational being cannot ascribe to itself a power of free action in the sensible world unless it also ascribes it to others, and consequently assumes the existence of other finite rational beings outside itself.”(341)

① “For a rational being to posit itself as a rational being it must ascribe free activity to itself.”(341): 자기반성적이고 자기규정적인 활동, 곧 자유는 합리성의 본질이다.

② “To posit my freedom, I must oppose it to my activity in the perception of the external world.”(341): 외부세계 지각이라는 ‘나’의 활동은 제약되어있는데, 지각의 내용은 주체의 의지와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행위는 그와 같은 제약과의 대비 가운데서만 부각된다. 이로부터 피히테는 주체와 객체, 자아와 세계 사이의 대립을 결론 짓는다.

③ “What limits and opposes my activity must be the source of a demand (Aufforderung) that I act freely.”(342)*: ‘나’의 활동에 대립하고 제약을 거는 무언가는 곧 ‘나’의 활동에 어떤 효과나 영향을 불러일으킨다. 이 효과나 영향은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래야만 그에 대해 ‘내’가 자유롭거나 그렇지 않게 행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만일 저 효과나 영향이 물리적 인과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면 (①과 ②에서 약속된) ‘나’의 자기의식된 자유가 파괴될 것이다. 같은 결론을 낳는 다른 논증도 있다. “[…] 내가 나의 자유에 대해 자기의식적이 되려면 나의 자유는 나를 위한 대상이어야 하는데 […] 나의 자유가 나를 위한 [그저 주어지는] 대상이 된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 나의 자유는 내가 [비로소] 형성해내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일 내 자유가 나를 위한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조건화되고 제한된 무언가가 될 것이다 […]”(342) 이러한 모순이 해소되는 것은 문제시되고 있는 ‘대상’이 (타인도 공유하는?) ’나’ 자신의 고유한 자유로운 활동에 대한 표상—개념이 아닌 정언명령으로서의 표상—일 경우뿐이다. 그리고 이 명령은 ‘나’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요구와 같다. 이 요구는 ‘나’의 권리를 존중해준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요구이자 일종의 교육으로 이후 구체화된다.**

*Q. 해당 테제로부터는 타 정신뿐만 아니라 일반 사물(e.g. 탁자)도 이러한 요구를 발동시킨다는 부조리한 결론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활동을 제약하고 대립하는 것”이라는 주어는 지나치게 많은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가?

A. 탁자는 확실히 나에게 뭘 요구하지 않는다. 제약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J씨).

**Q. 이 논증과 ③ 사이의 연관성을 모르겠다.

A.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요구받아야 한다.

④ “What makes the demand on me must have a concept of me as something rational and free; otherwise, its demand that I act free would be pointless.”(343): ‘나’가 로봇이라 할지라도 나를 향한 요구는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단계는 문제적이다. 그러므로 나를 향하는 요구는 자기의식적 합리적 행위자성을 이미 요구하는 자유로운 활동에 대한 요구로 읽혀야 한다.*

*Q. 이렇게 읽힌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적인 것 같다. X가 나를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것으로 보지 않아도 X는 충분히 나에게 그와 같은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A. 그러나 그 요구는 ‘부당한’ 요구이다. 바이저가 ‘pointless’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것이다.

⑤ “What assumes that the object of its activity is rational and free must be rational and free itself.”(343): 행위의 대상에 대해 어떤 지식을 갖고자 의도하는 행위는 합리적 행위자의 것이다. 어떤 것이 ‘내가 자유롭다’는 지식을 갖고자 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그 의도만으로 합리적 행위자가 된다. 결론적으로 ‘나’ 자신을 자유롭고 합리적인 존재자로 정립하려면 다른 자유롭고 합리적인 존재자의 현존이 정립되어야 한다.

 상술한 논증의 아래에 깔린 직관은 바로 ‘우리’가 자연권에 의해 설립된 일반적인 규범적 질서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 이유로) 타 정신의 현존을 정립한다는 점이다. 이 질서에 따르면 타 존재자는 ‘나’의 권리를 존중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했으므로, ‘나’에게도 동일한 제한을 스스로 가할 것을 요구한다. 저 제한의 역량이 나로 하여금 타 존재자를 타 정신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해당 규범적 질서는 타 정신의 개입 없이 행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권역이 어디까지인지를 알려줌으로써 자기정체성을 정립하는 데도 역할을 수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