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부 23문

토마스 아퀴나스, 손은실•박형국 옮김, ⟪신학대전: 자연과 은총에 관한 주요 문제들⟫, 두란노아카데미, 2011 중 예정설을 다루는 1부 23문에 대한 나의 코멘터리.

1. 열며

 『신학대전』1부의 23문에서 아퀴나스의 목표는 명백하다. 그는 첫째, ‘신이 전 이성적 피조물의 구원 여부를 확실하게 예정해두었다’는 테제와 둘째, ‘어떤 이성적 피조물이 구원받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그가 우연적으로 저지르는 과오에 있다’라는 테제를 양립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만만치 않은 기획이다. 첫 번째 테제는 구원의 여부가 이성적 피조물의 행위 이전에 결정되어있음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두 번째 테제는 구원의 여부가 이성적 피조물의 행위 이후에나 결정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퀴나스가 초시간성과 시간성을 암묵적으로 구분함으로써 이 같은 표면적 모순에 대응한다고 독해하였다. 이러한 문제설정에 입각해 각 절의 세부를 읽어나가고자 한다.

2. 각 절의 세부

제 1절: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는가

 제 1절은 예정이 과연 신에게 적합한 작용인지 따짐으로써 예정에 대한 논의가 신학의 논의로서 성립할 수 있느냐는 물음을 취급한다. 이에 대한 아퀴나스의 답은 긍정적이다. 왜냐하면 예정의 개념—“이성적 피조물을 영원한 생명이라는 목적에로 옮긴다는 개념”(co.)—은 신의 개념과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그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예정이 예정하는 바인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목적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섭리는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인도해주는 작용을 포함한다. 따라서 예정은 섭리의 일부인데, 섭리는 신의 소관이다. 그러므로 예정 역시 신의 소관으로서 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제 2절: 예정은 예정된 자 안에 어떤 것을 설정하는가

 제 2절은 예정이 예정하는 자 안에 놓여있는지(pōnō), 아니면 예정되는 자 안에 놓여있는지의 물음을 취급한다. 아퀴나스는 전자를 선택하는데, 이는 예정이 그 일부를 이루는 섭리가 신의 “지성 안에 있는 어떤 개념”이기 때문이다(co.). 이러한 문답을 통해 아퀴나스는 예정을 정의하기 위해서 당장 실존하는 이성적 피조물의 예정-당함이 요구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예정은 이성적 피조물의 사정과 독립적으로 신의 예정-함만으로 충분히 정의될 수 있다. 그리하여 예정은 이를테면 결심과도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도 실천될 수 있으며(ad 2), 전적으로 “작용자 안에 머무는 행동”으로(ad 1) 그리고 이성적 피조물의 예정-당함 이전에도 신에 의해 준비될 수 있는 계획으로(ad 3) 규정된다.

 요컨대 실존하는 이성적 피조물은 예정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물론 예정-당할 수 있지만, 이 예정-당함이 예정-함 자체의 필요조건인 것은 아니다. 이는 신의 예정-함이 이루어지는 초시간적 차원과 이성적 피조물의 예정-당함이 이루어지는 시간적 차원을 구분하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독해는 시간 속에서 부여되는 은총을 시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예정의 본질에 귀속시키지 않는 대목으로부터도 뒷받침된다(ad 4).

 초시간성과 시간성 사이의 구분은 제 3절에서 이루어지는 배제에 대한 논의를 예비한다. 아퀴나스는 구원으로부터의 배제를 이성적 피조물이 시간 속에서 저지른 과오의 탓으로 돌려야 하는 동시에, 배제의 이전에는 구원의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주장, 즉 신은 일의 진행을 모두 지켜본 다음에야 비로소 구원의 여부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배격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제 3절: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배제하는가

 제 3절은 예정으로부터 배제되는 자가 존재하느냐는 물음을 취급한다. 이에 아퀴나스는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배제한다”고 단언한다(co.). 섭리는 섭리가 지정한 목적으로부터의 이탈을 섭리의 일부로서 허용하기 때문이다.

 신은 심지어 배제에 대한 예지뿐만 아니라 의지까지도 갖고 있다. 배제의 의지는 신의 보편적인 사랑과 충돌하지 않는다. 신은 모든 피조물에게 어떤 좋음만큼은 실현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에게 모든 좋음이 그것이 무엇이든 전부 실현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성적 피조물에게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좋음이 실현되지 않으며, 그 경우가 배제라고 불리는 것이다(ad 1).

 배제는 일종의 단죄이다. 예정이 구원을 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배제가 죄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배제를 야기한다. 그런데 죄는 이성적 피조물이 향유하는 결정의 자유가 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ad 2), 신은 이성적 피조물이 피할 수 없었던 것—곧 결정의 자유에 달려있지 않은 것—의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다. 배제된 자가 구원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사태는 철저히 조건적이다. 만일(if) 누군가 죄를 저지른다면, 그 경우(then) 그가 구원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제된 자는 죄에 떨어진 것에 대해 자신이 책임이 있다.”(ad 3)

 바로 이 대목에서 아퀴나스의 예정설이 지니는 표면상의 모순이 처음으로 돌출된다. 상술한 조건이 성립하기 이전, 즉 죄가 저질러지기 이전에는 배제의 원인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의 결과로서의 배제 역시 아직 이루어져있어선 안 될 것만 같다. 이는 사과를 떨어뜨리기 전에는 사과가 떨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배제는 예정의 부정태이자, 예정의 부재로서 예정과 함께 이루어지는 무엇이다. X와 ¬X 가운데 X를 선택했다면 모순율에 의거해 ¬X는 동시적이고 자동적으로 배제된다. 그러므로 배제는 죄가 저질러지기 이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만 같다. 이 딜레마를 해소하는 아퀴나스의 대응책은 제 2절에서 그 단초가 마련된 초시간성과 시간성 사이의 구분이다. 시간적 차원에 거하는 이성적 피조물의 관점에서 보면, 배제는 그가 죄를 저지른 이후에야 자신의 운명의 가능성 중 하나로 성립한다. 반면 초시간적 차원에 거하는 신의 관점에서는 그 사정이 상이하다. 이와 관련한 아퀴나스의 가능한 변은 제 6절에 가서야 구성된다.

제 4절: 예정된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는가

 제 4절은 예정이 일종의 선택을 내포하느냐는 물음을 취급한다. 이에 아퀴나스는 신이 무차별적으로 모두를 위해 어떤 좋음을 원하는 경우와 차별적으로 피조물의 일부만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경우를 나눈다. 어떤 좋음은 모두를 위하여 제공되며,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성을 분유 받지 않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ad 1). 그러나 구원이라는 특수한 좋음은 그렇지 않다. “예정은 개념상 선택을 전제”하며(co.), 이 선택은 신이 제시하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이성적 피조물에 한해 이루어진다(ad 3). 그리고 선택으로서의 예정은 제 2절에서 해명된 것처럼, 선택된 대상의 실존 여부와 독립적으로 성립한다. 여기서 다시금 시간상의 존재에 구애되지 않는 신과 그렇지 못한, 그리하여 선행하는 선택지의 실존과 후행하는 선택 의지 사이 존재의 순서를 고려해야만 하는 이성적 피조물 사이의 시간론적 구분이 작동한다(ad 2).

제 5절: 공로에 대한 예지가 예정의 원인인가

 제 5절은 배제가 이성적 피조물의 과오를 원인으로 갖듯 예정(이라는 결과) 또한 이성적 피조물의 공로(에 대한 예지)를 원인으로 갖지 않겠느냐는 물음을 취급한다. 이에 대한 아퀴나스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어떤 이성적 피조물이 배제되었다면, 그것은 그의 탓이지만, 그가 구원 받았다면 이는 그의 덕이 아니라 신의 선성의 덕이다. 구체적인 주장에 앞서, 아퀴나스는 “예정하는 자의 작용 편에서의 원인”과 “예정의 결과 편에서”의 원인 사이를 구분한다(co.). 신의 의지는 원인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전자는 논의의 주제로부터 배제된다(cf. q. 19, a. 5 co.). 한편 후자를 통해 아퀴나스가 묻는 것은 예정이라는 결과가 의지될 때, 그것이 특정한 원인, 특히 공로를 원인을 가지는 것으로서 의지되느냐는 물음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아퀴나스에게는 모든 원인 또는 근거가 결과에 선행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상술한 물음은 (i) 예정에 후행하는 공로와 (ii) 예정에 선행하는 공로를 구별하여 물어져야 한다. (i) 전자는 공적을 세울 것으로 예상되는 이성적 피조물에 대하여, 그에게 공적을 세울 은총이 주어진 한에서 구원이 예정되었기에 공로가 예정에 후행하는 경우이다. 이는 은총으로부터 예정이 따른다는 생각에 입각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부조리하다. 은총은 예정의 결과이지, 예정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cf. ad 1). 이로부터 예정의 근거가 되는 것은 예정의 결과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 곧 예정의 근거와 예정의 결과는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부각되어 (ii) 후자가 예정의 근거가 되는 경우 역시 거부되기에 이른다. 섭리를 따라 “제2원인으로부터 오는 것과 제1원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구분되지 않”아야 하듯이 “결정의 자유에서 오는 것과 예정에서 오는 것[예정의 결과]은 구분되지 않”아야 하는데, 예정에 후행하는 공로는 ‘결정의 자유에서 오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co.). 그리하여 (i)의 경로든, (ii)의 경로든 공로는 예정에 인과적으로 기여할 수 없다.

 물론 ‘결정의 자유에서 오는 것’ 역시 예정의 결과라고 해서—즉 만사가 예정에 입각한다고 해서—예정의 결과가 이성적 피조물에게 있어 별도의 결과를 낳는다는 말이 언제나 성립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개별적인 예정, 이를테면 누군가가 공적을 세운다는 예정이 별도의 개별적 예정, 즉 그의 영광에 대한 예정을 낳는다고는 충분히 말해질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예정, 곧 예정 일반에 포섭되지 않는 별도의 결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cf. ad 2). 그렇기 때문에 예정의 유일한 근거로 선언되는 신의 선성은 “제 1동자”가 된다(co.).

 그런데 여태까지 입증된 것은 공로가 예정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혹자는 여전히 (그러한 사실과 독립적으로) 공로가 예정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할 수도 있다. 실제로, 선별로서의 예정이 공평하기 위해서는 구원이 예정된 이가 죄인과 동등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차이만이 구원이 예정된 이의 선별을 정당화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구원이 예정된 이가 죄인과 동등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그의 공적을 통해서이고, 따라서 예정은 이성적 피조물의 공적을 근거로 가져야 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아퀴나스에 따르면 동등한 자에게 동등하지 않은 것을 제공하는 경우에도 신의 정의로움은 결핍되지 않는다. 피조물로부터 그의 몫을 빼앗는 것이 아닌 한, 은혜를 설령 동등한 자들에게라고 할지라도 상이하게 분배하는 것은 신의 의지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자신의 선성을 다양하게 표현하려는 의지만으로도 이러한 상이성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하다(ad 3). 이로부터 아퀴나스가 구원을 일종의 시혜로 규정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시혜의 적용과 미적용, 각각의 경우에 있어 어떤 구속력 있는 조건을 제시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시혜자의 의지에 달려있다. 제 3절에 의하면 시혜의 미적용, 즉 배제의 경우에는 이성적 피조물이 죄를 짓는다는 특정한 조건이 제시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혜의 적용, 즉 구원이 예정되는 경우에도 공로라는 특정한 조건이 제시될 필요는 없다. ‘공로 → 구원, 과오 → 배제’라는 구도는 인간에게 익숙한 사유의 경로일 뿐, 신이 준수해야 할 원리는 아니다.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도, ‘P→Q’라고 해서 ‘¬P→¬Q’일 필요는 없다.

제 6절: 예정은 확실한가

 제 6절은 신에게 예정을 취소할 힘이 있기 때문, 또는 예정되었던 이가 배제의 원인이 되는 과오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 등의 이유로 예정은 취소될 수 있는 불확실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취급한다. 이 같은 의문에 아퀴나스는 일종의 오류 불가능성(infallibilitas)으로서 예정의 확실성과 결정의 자유를 제거하는 것으로서 예정 결과의 필연성을 구분함으로써 반박한다. “예정은 확실하게 그리고 틀림없이 그 결과를 얻는다. 그러나 예정은 그 결과가 필연성에 의해 발생하게 되는 그런 필연성을 부과하지 않는다.”(co.) 편의상 이 테제를 CCPL이라고 부르자.

CCPL(Compatibility between Certainty of Predestination and Liberum Arbitrium): 신에 의한 예정의 확실성은 이성적 피조물이 지니는 결정의 자유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런데 CCPL은 즉각적인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한편으로 이성적 피조물에게는 결정의 자유가 있기에, 그는 과오를 저지를 수도 있고 저지르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과오는 배제의 원인이 된다는 제 3절의 주장을 상기한다면, 그는 죄의 유무에 따라 구원으로부터 배제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해 그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열려있다. 그러나 예정은 오직 한 가지 가능성에 대한 예정인 데다, “하나님의 의지의 불변성”을 생각한다면 일회적인 사건이다(ad 3). 그렇다면 어떻게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있는 동시에 한 가지 가능성이 틀림없이 예정되어있을 수 있는가? 아퀴나스는 이러한 모순에 맞서 CCPL 테제를 어떻게 구제해낼 수 있는가?

 가능한 반론들에 대한 답변의 내내 아퀴나스는 (i) 제 1원인의 질서(=섭리)와 (ii) 제 2원인의 질서를 구분함으로써 CCPL을 변호한다. (i)과 (ii) 사이의 구분은 예정이 그 일부를 이루는, 그리고 오류 불가능한 것인 “섭리에 종속되는 모든 것이 필연적이지는[결정의 자유와 무관하지는]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corp). 그러나 (i)과 (ii) 사이의 구분은 CCPL의 파생적인 가능조건일 뿐이다. 왜냐하면 오류 불가능한 섭리가 우연을 허용할 수 있게 해주는 보다 근원적인 가능조건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신이 거하는 초시간적 차원과 이성적 피조물이 거하는 시간적 차원 사이의 구분이다. 제 3절에서 이미 돌출된, 그리고 제 6절에서 반복되어 부각된 모순은 ‘죄가 저질러지기 전에는 아직 배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와 ‘죄가 저질러지기 전에 배제가 이미 이루어졌다’ 사이의 모순이었다. 그런데—그의 관점을 풀이함에 있어 ‘시점’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된다면—신에게는 죄가 저질러지기 이전의 시점(t1)과 죄가 저질러지고 난 시점(t2)이 동일한 시점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이성적 피조물 R에게는 결정의 자유가 있어, t1에는 배제를 야기하는 충분조건이 되는 죄 P를 그가 지을 것이 결정되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R은 t2에 이르러 죄 P를 저지른다. 신은 t2에 이르러서야 R의 배제를 확정하기 때문에, 해당 피조물이 배제된다는 신의 지식은 오류 불가능하다. 그런데 초시간적 차원에 거하는 신에게 t1과 t2는 동시적이다. 따라서 신에 의한 예정의 확실성은 이성적 피조물이 지니는 결정의 자유를 배제하지 않는다. 즉, CCPL은 성립한다.

제 7절: 예정된 사람들의 수는 확정적인가

 제 7절은 구원이 예정된 자들의 수가 과연 확정적인지의 물음을 취급한다. 아퀴나스는 이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뿐만 아니라 누가 그 머릿수를 채울지, 나아가 왜 특정한 수가 선택되는지 역시 확정적이라고 주장한다. 신은 “전 우주의 관점에서” 자신이 섭리 하에 지정한 목적에 가장 적합한 수를 선택하기 때문이다(co.). 단, 구원이 예정된 자들의 수는 “우주의 좋음 사이의 비례”를 기준으로 정해지지만, 구원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수는 예정된 자들에게 가닿을 좋음을 기준으로 정해진다(ad 2). 한편 “자연의 일반적인 상태”에서는 선이 선의 결함보다 자주 성립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연의 일반적인 상태를 초월하는 선”의 경우 그 현현이 그 부재보다 드물기 때문에, 예정자의 수가 배제자의 수보다 많은 것은 부조리하지 않다(ad 3). 

제 8절: 예정은 성인들의 기도에 의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

 제 8절은 예정에 있어 기도가 효용이 있느냐는 물음을 취급한다. 한 극단에서 (i) 기도는 예정의 여부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다른 극단에서 (ii) 기도는 예정의 여부를 변경할 수 있다. 이에 아퀴나스는 예정의 확실성에 입각해 (ii)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i)이 성립하는 의미를 한정한다. 한정을 위해 그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 그 자체와 그 결과”를 구분하는데, 이 새로운 구분은 제 6절에 대한 분석에서 제시된 초시간성과 시간성 사이의 구분의 반복에 불과하다(co.). 초시간성의 차원에서 섭리로 미리 정해진 바는 (i)에서 제시된 것처럼 기도가 어찌할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러나 시간적 질서 하에서 예정이 결과로 실현될 때엔 기도가 없었더라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방식(¬P→¬S)으로 사태가 흘러간다. 이는 누군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기도한 것이라는 의미(S→P)이지, 기도가 구원의 충분한 원인이 된다는 의미(P→S)는 아니므로 “미리 정하심 자체에 관한 한 예정이 성인들의 기도에 의해 도움을 받지 않”는 것과 양립 가능하다(ad 1). 그러나 충분한 원인이 아닐 뿐, 기도는 “원인성의 품위”를 나눠받음으로써 섭리의 실현을 도울 수 있다(ad 2). 이때의 도움은 능력이 부족한 이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의미에서의 도움이 아니라, 전능한 이의 일을 대신 수행해준다는 의미에서의 도움이다. 이 같은 대리적 수행은 시간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물론 초시간적 섭리를 방해할 수 없다. “제2원인들은 보편적인 제1원인의 질서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ad 3).

3. 나가며

 아퀴나스에게 예정이 초시간성과 시간성 사이의 구분을 그 가능조건으로 가질 때, 예정에 대한 지식 체계인 예정설은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한다. 초시간성은 시간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인간의 제한된 관점은 서로 다른 시점 사이의 동시성과 같은 것을 이해하기에 역부족이다. 심지어는 신의 관점이 동시성의 언어로써 규정된다는 생각조차 한갓된 추측에 불과해 보인다. 그렇다면 아퀴나스는 어떻게 초시간성에 대해 의미 있게 규정할 수 있는가? 시간적 질서를 초월한 앎과 의지, 예지와 결단이 유한자인 우리에게 불가피하게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때, 아퀴나스의 예정설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려는 시도인 것처럼 보인다. 예정, 나아가 섭리 일반은 믿음의 주제이지, 이해의 주제는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이 드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