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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서문

M. Merleau-Ponty, trans. by Colin Smith, Phenomenology of Perception, Routledge & Kegan, 1962. 메를로-퐁티가 얼마나 후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지가 처음부터 드러난다. 모든 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

인기가 많아 도서관에 마지막으로 남은 책을 빌렸다.


서문(Preface)

 메를로-퐁티는 후설 현상학에 내재한 모순들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현상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사태로 글을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후설의 현상학은 의식의 본질에 대한 학인 동시에 인간의 현사실성(facticity)으로부터만 탐구를 시작하고, 자연적 태도의 상관자로서의 세계에 대한 정립을 중지하는 동시에 "세계가 항상 반성이 시작되기 전에 '언제나 거기' 있"음을 잊지 않는다(vii). 엄밀한 철학을 요구하는 동시에 삶의 세계를 탐방하며*, 심리적 발생에 대한 설명을 배척하지만 발생적 현상학적 탐구를 수행한다. 현상학은 이러한 양면성으로 인해 혹자에게는 한갓된 신화이거나, 유행(fashion)에 불과해 보일 수 있다.

*Q. 이 둘은 왜 상충하는가? 생활세계를 엄밀하게 탐구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를로-퐁티는 그러한 "신화의 명성과 유행의 기원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헤겔과 키에르케고르,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에게서 이미 현상학이 시작되어있었다고 말한다(viii).* "[...] 현상학은 사유의 방식 또는 양식으로서 수행되고 식별될 수 있다. [이 사유 양식은] 철학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인지(awareness)에 이르기 전에 운동(movement)으로서 실존했다."(viii) 여기서 메를로-퐁티는 철학사 이전에 인간적 삶 자체가 현상학을 고대해왔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인간적 삶이 기존의 철학사를 현상학적 운동으로 읽게 만들었다고도 독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후설과 하이데거의 독자는 "새로운 철학을 만나기보다 그들이 기다려왔던 것을 발견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viii).

*Q. 근거가 궁금하다.

 이어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현상학을 탁월하게 요약한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학문은 관점적 주관성이나 생활세계에 비하면 이차적인 것이다. '나'는 기존의 실증학문이 파악하는 "자연적 또는 역사적 과정의 생산물들"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ix). '나'는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나를 위한, 나에 대한 세계를 비로소 존재케하는[세계에 그것의 존재의미를 비로소 부여하는] "절대적 원천"이다(ix). 그리고 내가 지탱하는(sustain), 그리고 처음부터(from the outset) 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있던 이 [생활]세계야말로 모든 학문의 근원이다. 달리 말해, 생활세계에 비하면 "모든 학문적 도식화는 추상적이고 파생적인 기호-언어"이며, "사태 자체로의 귀환"은 이러한 지식 이전의 생활세계에 대한 기술을 뜻한다(ix).*

*해당 문단에서 메를로-퐁티는 자아의 절대성과 생활세계의 선행성 사이에 모순을 발견하지 않고 있다.

 데카르트와 칸트에 의한 "분석적 반성"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 그 경험과 구분되는 가능조건으로서의 주체에게 돌아가면서 그것 없이는 세계도 없을 포괄적 종합[의 과정]을 드러내준다."(ix) 그러나 "나의 반성은 반성되지 않은 경험과 결부되어있다(bears upon an unreflective experience). 나의 반성은 [...] 주체가 그 자신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주체에게 주어지는 세계를 알아보아야 한다. 실재는 기술되어야 하지, 구축되거나 형성되어선 안 된다. 이는 내가 지각을 판단, 작용 또는 술어화에 의해 대변되는 종합들과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없음을 뜻한다."(x) 메를로-퐁티는 지각되는 실재가 "'표상들'의 내재적 일관성"에 의해서만 창출되는 것이 아님을 지각의 정확성을 근거로 논증한다(x). 지각은 "의도적인 입장 취함"(x-xi)이 아니라 "모든 작용들이 그로부터 부각되는(stand out) 배경이며, 그것들에 의해 전제된다."(xi) 마찬가지로 세계는 지각들의 배경이지, 특정한 작용의 대상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과 같은 순전히 "내적인 인간(inner man)"은 없다(xi). 인간 세계 속에 있는 인간이다.

 메를로-퐁티는 저 세계-속에-있음에 대한 발견이 곧 초월론적 의식으로 귀환하는 절차인 현상학적 환원의 진의를 가리킨다고 표현한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세계는 서로 다른 주관들, 그것도 선인격적인(pre-personal) 주체들에 의해 공유되는 것이다. 분석적 반성은 의식의 힘을 과신하면서 타인이나 세계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특히 타인을 "실존보다 타당성"을 지니는 것으로 폄하하는 반면, 후설의 현상학에서는 "타인의 문제가 있으며, 타자적 에고(alter ego)는 역설이다."(xii) 타인의 현출 및 그와의 소통은 (내가 볼 수 있는 남의 것과 남이 볼 수 있는 나의 것인) 신체 그리고 상황 덕분에 가능하다. 이때의 자아는 절대적인 강자가 아니어서 반드시 다른 자아들 사이의 자아로 자기인식된다.

"Hithherto the Cogito depreciated the perception of others, teaching me as it did that the I is accessible only to itself, since it defined me as the thought which I have of myself, and which clearly I am alone in having, at least in this ultimate sense. For the 'other' to be more than an empty word, it is necessary that my existence should never be reduced to my bare awareness of existing, but that it [xiii] should take in also the awareness that one may have of it, and thus include my incarnation in some nature and the possibility, at least, of a historical situation. The Cogito must reveal me in a situation, and it is on this condition alone that transcendental subjectivity can, as Husserl puts it, be an intersubjectivity."(xii-xiii)

 저 자아는 환원 이후에도 코기타치오네스의 지평으로서의 현상학적 세계 내에서 위치를 가진다. 자아와 세계 사이의 이와 같은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현상학적 환원인 셈이다. 환원은 세계로부터 물러나기 위함이 아니라, 세계를 경이롭게 바라보기 위한 조치이다. 칸트는 경이를 가지고 초월자로 향해가는(towards) 주체의 작용들을 놓쳤기 때문에 세간적인 초월적 연역에 머물렀다. 세계에 대한 소박한 수용을 중지하는 환원 이후에 남는 것은 "동기부여되지 않은 세계의 융기[고조](unmotivated upsurge)"뿐이다(xiv). [이 경이를 이유로] 메를로-퐁티는 환원을 [세계를 주체에 귀속시키고, 주체에게 대상의 지배권을 양도하는] 관념론이 아닌 [주체가 자신이 대상세계 속에 상황지어질 수밖에 없음을 발견할 뿐인] 실존철학의 소관으로 규정한다.

 "The most important lesson which the reduction teaches us is the impossibility of a complete reduction. This is why Husserl is constantly re-examining the possibility of the reduction. If we were the absolute mind, the reduction would present no problem. But since, on the contrary, we are in the world, since indeed our reflections are carried out in the temporal flux on to which we are trying to seize (since they sich einströmen, as Husserl says), there is no thought which embraces all our thought. The philosopher [...] is a perpetual beginner, which means he takes for granted nothing [...] radical reflection amounts to a consciousness of its own dependence on an unreflective life which is its initial situation, unchanging, given once and for all. [...] phenomenological reduction belongs to existential philosophy: Heidegger's 'being-in-the-world' appears only against the background of the phenomenological reduction."(xiv)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형상 또는 본질의 개념을 언급하면서 논의를 이어간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지각은 세계의 [존재] 정립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바로 그 이유로 현존의 사실은 "세계 속에의 관여(involvement)"라는 현존의 본성을 지시한다(xiv). 세계와 우리의 실존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 긴밀해서 저 관여의 사실을 포착할 수 없을 정도이며, 따라서 "그것[관여]에 대해 알게 되고 그것의 사실성을 압도하기(prevail over) 위해 이념성의 장"이 요구된다(xv). 언어를 매개로만 존재자의 경험이 가능하다고 믿는 비엔나 서클의 논리실증주의에서와 달리, 후설은 우리가 언어의 지시체와 직접 접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 경험이 언어의 근원이며 본질에 대한 경험이 특히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후설에게서는 마치 언어와 선언어적 경험이 분리되듯 본질과 사실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본질에 대한 학은 이를테면 의식이라는 사실과 단어, 그 개념이 의미하는 근원을 탐구하는 학이다. 여기서 본질이란 결국 '사실의 무엇임'이기에, 형상적 환원은 우리가 세계의 사실에 몰두해버리기 전에 그것의 의미를 규정하고자 하는 조치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은 진리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세계는 (그에 대해 불필요하게 회의할 필요 없이) 우리에게 지각된 것 [자체]이며, 우리는 실제로 진리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같은 [명증적인] 세계 경험을 넘어서 경험의 절대적인 가능근거를 찾고자 한다면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내가 [그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통해 살아가는 것이다."(xvi-xvii) 세계의 현존은 의심되지 않으며, 그에 대한 경험의 가능성 또한 무한하다. "형상적 방법은 가능한 것을 실재하는 것에 기반하는 현상학적 실증주의의 방법이다."(xvii)**

*사실과 본질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 어렵다. 내가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이 인용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본질 직관 또는 형상적 환원에 대한 후설의 서술에서는 실재와 가능한 것 사이에 위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후설의 지향성 개념은 그것이 선이론적 세계지평의 통일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주체-대상 상관관계와 차별화된다.* 의식에 대한 후설의 목적론적 해설은 의식이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투사"임을, 세계를 이미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늘 그것에 향해져있음을 말해준다(xvii). 이 선객체적이고 통일적인 세계는 모든 인식의 목표이다. 이로써 현상학은 "참되고 불변하는 본성"에 대한 전통적인 지성적 활동을 넘어 기원에 대해 탐구할 수 있게 된다(xviii). 현상학자는 대상이 가리키는 것뿐만 아니라 대상이 지향성 속에서 드러내는 실존의 양상들을 이해한다. [현상학자의 눈에] 모든 말과 행동은 아무리 무의미해보이는 것일지라도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의미들은 상대들에게서 고립되어있지 않은 채로 발생의 역사를 가진다.**

"Because we are in the world, we are condemned to meaning, and we cannot do or say anything without its acquiring a name in history."(xix)

*⟪판단력 비판⟫을 읽지 않았어서 이해하지 못했다.

**특정한 경험의 미시적 역사뿐만 아니라 거시적 역사 자체가 주제화되고 있는 것 같은데,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중간에 왜 헤겔이 인용되어있는지도 자세하게는 모르겠다.

 메를로-퐁티는 역사에 대한 논의를 끝맺은 뒤 합리성에 대한 논의로 넘어간다. 합리성의 존재는 상이한 관점들이 섞일 수 있고 지각들이 서로를 승인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합리성은 절대 정신에도, 실재론적인 세계에도 위치해있지 않고, 상호주관성이 자리하는 현상학적 세계에 있다. 이 현상학적 세계는 [철학 이전에] 미리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철학으로써 비로소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철학은 기존에 존재했던(pre-existing) 진리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마치 예술처럼, 진리를 존재로 가져오는 작용이다."(xx)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세계 속에서 합리성을 발휘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 이 세계와 이 합리성 너머의 무엇은 없다. 또한 어떤 학적인 해[해결법](solution)으로써 이 세계와 이 합리성을 완전히 설명하고 고갈시킬 수도 없다.

"All knowledge is sustained by a 'ground' of postulates and finally by our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as primary embodiment of rationality. [...] The unfinished nature of phenomenology and the inchoative atmosphere which has surrounded it are not to be taken as a sign of failure, they were inevitable because phenomenology's task was to reveal the mystery of the world and of reason."(xx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