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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현상학적 정신병리학> 옥스포드 핸드북 일부 요약

G. Stanghellini, M. R. Broome, A. V. Fernandez, P. Fusar-Poli, A. Raballo, R. Rosfort (ed.), The Oxford Handbook of Phenomenological Psychopath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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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현상학에 대한 비평과 받아들임 - 데리다, 푸코, 들뢰즈(Federico Leoni)

 데리다, 푸코, 들뢰즈는 공통적으로 순수 주관의 불가능성, 곧 "초월론적인 것의 불순성"을 내세워 후설을 비판한 바 있다(88). 우선 데리다는 후설의 현상학을 가능케 하는 인간적 경험의 생동하는 현전도, 그에 대한 직접적(first-hand), 즉각적 기술도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생동하는 현전은 현존하지 않으며, 더욱이(a fortiori) 현상학적 기술의 대상이 될 수조차 없다."(89) 후설의 개념 가운데서 파지의 개념이 이미 이와 같은 불가능성을 지시한다. 시간의식에 대한 후설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는 오직 파지를 혜성의 꼬리처럼 자신에게 부착함으로써만 경험된다. "현재의 진정한 의미가 과거와의 이 관계에 의존하며 [...] 그러면 아무 것도 실은 정말로 현재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는 절대 근원적인 소여가 아니다: 태초에는 현전이 아니라 파지가, 또는 더 낫게는, 현전과 기원의 흔적이 있었다."(89) 현재가 과거로 오염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신체도 "타자성과 간헐성의 망" 속에 파묻혀있다(89).* 이처럼 모든 토대(foundation)가 자신에게 이질적인 것을 지시할 수밖에 없을 때, 초월론적 주관성 역시 순수한 토대일 수 없다. "초월론적인 것은 그 속에서 부재가 현전이기도 하고 현전이 부재이기도 한 부조리하고(senseless) 분별할 수 없는 메커니즘으로 대체된다."(89) 이 결론을 정신병리학에 전유하면, 광기 역시 "경험의 구조적 토대이지, 그것의 우연한 붕괴가 아니다."(90)

*부연이 필요할 것 같은데, 딱히 추가적인 설명이 없다.

 한편 푸코는 주관성이 정말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인식과 존재의) 궁극적 근거냐고 묻는다. (궁극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초월론적인 것은 주관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실천들의 분리불가능한(inextricable) 망, 지식과 권력을 구체적 규칙과 의미, 진리, 억압의 구체적 효과들에 따라서 결합시키는 익명적이고 지배적인 담론들과 문화적 구조물들"이다(91).

 들뢰즈는 ⟪시네마⟫의 '운동-이미지'에서 베르그송과 후설을 대비시키며--영화는 그 중에서도 베르그송적인 예술 형태인데--후설에게 의식은 언제나 특정한 대상에 대한 지향적 의식인 반면 베르그송에게 의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물(thing)이라고 주장한다(91). 전자는 경험을 주관의 특수한 발산기능에 근거 지우고, 후자는 "의식의 활동 속에 의미의 일차적 원천이 놓여있지 않은 주체 없는 경험"을 가리킨다(92). 이와 같이 경험을 주체로부터의 방출이 아닌 (그 자체로 온전한) 영구한 운동으로 규정하게 되면,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적 전제가 깨져 초월의 가능근거로서의 초월론적인 것을 상정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그송의 전략은 후설의 "초월성"의 전략에 반해 "내재성"의 전략이며, 스피노자적 "비인격적 경험"을 가능케 한다(92).


29장 현상학과 해석학(René Rosfort) 현상학과 해석학은 탐구 대상*과 역사적 기원**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밀접하고도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철학적 전통으로서의 해석학을 수행한 학자들은 현상학을 자신의 뿌리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고, 현상학 자체가 해석학으로부터 전해져내려온 개념들(의미, 상상력 등)을 운용한다(235). 실제로 "해석, 자아성(selfhood), 인격적 동일성"과 관련된 문제들을 중심으로 해석학과 현상학을 결합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져왔다(236).

*반성 이전의 직접적 소여 vs 언어적 반성을 거친 텍스트

**헤겔/후설 vs 호머 및 성경에 대한 주석

 해석학은 자아를 자신의 생물학적 특성, 문화, 윤리 등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며 [그처럼 주관외적인 요소에 의거해] 스스로를 해석하는 역동적인 존재로 규정한다(236). 경험이 해석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모든 개인이 세계를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관성과 주관주의 사이의 구분"을 제창함으로써 개인의 세계 해석이 특정한 지각적, 시간적 본질구조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현상학의 공로이기 때문이다(236).

 자아성에 대한 해석학은 반성 이전에 작동하는 자아성의 구조 분석에 머무르는 현상학을 넘어, 자신의 '누구임'에 대한 무지와 그에 따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기반성을 구체적으로 주제화한다. 폴 리쾨르에 따르면 해석학만이 나의 존재의 절대적 확실성이라는 데카르트적 명증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되는 불확실성을 동시에 취급할 수 있다(237). 우리는 우리 자신 내부에 완전히 [내것으로서] 파악되지 않는 타자적 속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타자성(otherness)은 내 실존[현존]을 방향짓는(orient) 생물학적 구성, 문화적 유산, 그리고 사회적 규범들로 [...] 이루어져있다."(237, 강조는 필자) 이러한 비주관적 요소들은 자아에게 현상하지 않기에 현상학으로는 분석할 수 없고, 해석학에 의해 비로소 주제화된다.

 요컨대 해석학자는 이와 같은 "자기의식의 연약성(fragility)"*에 주목하며 우리 자신에 대한 투명한 앎과 무지 사이의 변증법에 주목한다(238). 현상학을 최초로 해석학적으로 전유한 학자는 하이데거다. 그는 엄밀학에 대한 후설의 이념과 정동적(affective) 경험에 대한 경시를 문제삼으며, 지식이 아닌 기분 속에 피투된 실존을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생물학적, 사회적, 윤리적 요인 등등으로 인해) 내가 아닌 것 같다는 경험, 내가 타자인 것 같다는 경험이 이 연약성을 구성한다. 이 타자성을 해석함으로써 내 안에 흡수해야만 온전한 인격으로 존재할 수 있다(245).

 "In other words, whereas Husserl--or at least the early Husserl--is primarily interested in producing a scientifically rigorous account of the subjective structures of experience, Heidegger--or at least the early Heidegger--is interested in making sense of the existential concerns of a concrete self-in-the-world."(238)

 한편 가다머는 하이데거보다 더 전통적인 해석학에 가까운 작업을 수행하면서 역사와 언어 현상에 집중한다. 그의 초점은 "인간 해석의 역사적이고 언어적인 조건들"에 맞춰져있다(240). 그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전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역동적 역사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내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간다. 해석(또는 경험의 해석적 성격)은 이 근본적 불안정성, "근본적 소외"에 대응하게 해주는 기제다(240, 강조는 필자).

 마지막으로 폴 리쾨르는 실존에 대한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을 유지하되, 그의 해체적인 방법론을 건설적으로 소화하면서 해석학적 현상학을 가장 정교하게 전개한 철학자다(240-241). 그는 특히 인격적 정체성(personal identity)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데 주력했다. 리쾨르에게 주체는 후설에게서와 달리 모든 경험의 시작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역동적인 일종의 과정이다.* 자아는 "누군가로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되고 싶다는 것의 쉼없고(restless) 연약한 의미"이며, "초월론적이거나 구성적인 사실이라기보다 하나의 실존적 문제"다(241). 나아가 자아가 문제적이라는 성격은 그 자체로 "경험의 주관적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경험의 선반성적 구조는 경험주체의 실존적 고민들에 대해 면역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세계의 무매개적 소여[도] 그것이 그 속에서 경험되는 인격적, 역사적, 또는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고립되어있지도 않다."(241, 강조는 필자)

*하이데거와 리쾨르는 후설이 "선반성적 경험과 무매개적 자기의식"을 중시하며 주관성을 경험의 토대로 인식함으로써 인간 현존의 실존적 면모--감정, 의지, 타인의 문제--를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물론 이 비판은 후기 후설에게는 부당한 것이 될 터이다.

"As we have seen with Heidegger, this existential interpretation complements the descriptive focus on experiential features of subjectivity in Husserlian phenomenology with an ontological concern that brings out the problems of existing as a self. One way to put it is that while phenomenology concentrates on the how of human experience, hermeneutics is concerned with what I experience and why I experience it in the way that I do."(241)

 "There are no stable or readily identifiable answers to the question of who we are. We can only hope to make sense of our identity through a long detour of interpretations. [...] Ricoeur goes on to argue that we can indeed use texts and literature as an exercise in self-understanding and as a model for making sense of personal identity."(242)*

*텍스트와의 만남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며, 기존의 자신과 거리를 두게 해줌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자기이해의 가능성을 연다. 독서에서 작동하는 "거리두기와 전유의 변증법"은 "자아성의 허구적 성격"을 해명해준다(242). 그리고 이 허구성은 다시금 인격의 연약함과 연결된다. 우리는 "끊임없는 해석적 노력"을 통해 정체성/동일성을 획득해내야 한다(243). 

 요컨대 우리가 누구이고, 왜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고 이러저러한 감정을 느끼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험의 소여구조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 해석학은 현상학적 분석을 정신병리에 대한 다른 과학적 분석과 연결시켜주는 역햘을 수행한다(244). 정신적 고통 속에는 정체성의 문제가 반영되어있기 때문이다(245).


31장 현상학과 인지과학(Shaun Gallagher) 1인칭의 반성을 활용하는 현상학과 3인칭의 설명을 활용하는 인지과학은 "상호적으로 배타적인 접근"으로 여겨져왔다(262). 그러나 현상학이 인간 심리, 특히 정신병리에 대한 이해에 기여할 수 있는 바는 결코 적지 않다. Gallagher는 환자의 1인칭 보고를 얼마나 신뢰해야 하는가, 현상학이 정신병리학의 인지적 설명들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중심으로 두 학문 사이의 상호적인 발전 가능성을 헤아리고자 한다. 예를 들어 특정한 생각의 행위자성(내가 해당 생각을 산출했다는 의식)과 소유의식(해당 생각은 내 생각이라는 의식) 사이의 현상학적 개념 구분은 사고 삽입(thought insertion)을 겪는 조현병 환자의 보고를 분석하는 데도, 관련된 인지과학적 이론을 개발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45장 양심(Marcin Moskalewicz) 지나치게 약하거나 꼼꼼한[깐깐한](scrupulous) 양심은 정신병리를 낳을 수 있다(398).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을 치료함에 있어서 윤리적인 차원을 고려하는 것은 결코 '악이 병을 낳는다'는 식의 낡은 관념으로 퇴보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기준에 따른 의식적 자기반성을 일으키는 심리적 양심과 달리, 현상학적 양심은 선반성적인 차원에서 은폐된 채로 작동한다. "현상학적 양심을 통해 주어지는 가치들은 우리가 그에 대해 반성하는 무언가가 아니다--그것들은 우리들 자신이다(Frankl 1992)."(398-399) 쉽게 말해 현상학적 양심은 무언가에 대한 양심이 아니며,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예컨대 하이데거의 양심은 구체적인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잠재성"으로 주체를 불러낼 뿐이다(402). "양심은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그것은 [주체] 자신을 무규정적(indefinite) 미래를 향해 개방시켜줄 뿐이다."(402) 그러나 이 "무(nothingness)에 대한 개방성"(402), 예측 불가능성과 예상의 빗나감을 견뎌내는 힘이 곧 정신건강이다(403).

*Q. '현상학적 양심'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Retreat into obsessive conscientiousness or an antisocial disregard of the moral dimension of life are both a means to avoid true conscience. Controlling oneself or the other covers the underlying nothingness and substitutes an open, undetermined future with a predictable pattern. On the other hand, living in existential truth can facilitate mental health (Yalom 198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