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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루돌프 베르넷, <현상학적 환원과 주체의 이중적 삶> 요약

T. Kiesel & J. van Buren (ed.), Reading Heidegger from the Start - Essays in His Earliest Thought,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4, pp.245-267

나중에 다른 챕터도 읽어보고 싶다.

14장 현상학적 환원과 주체의 이중적 삶 (Rudolf Bernet, Trans. by François Renaud)

 '현상학적 환원은 대체 무엇을 드러내주는가?'라는 질문에 현상학자들은 상이한 반응을 보여왔다(245). 후설은 초월론적 주관과 세계 사이의 구성적 상관관계를, 하이데거는 [인간적] 현존재의 실존에서 마주치는 존재를(e.g. 도구존재), 장-뤽 마리옹은 어떤 호소, 요구, 부름의 소여(givenness[donation])를 대답으로 제시했다. 한편 앙리는 현출의 의미가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면서, 초재의 현출보다 더 근원적인 원시적 자기촉발의 개념과 현출의 이중성의 개념을 제안한다. 베르넷 역시 주관적 삶의 이중성을 중심으로 이처럼 프랑스에서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현상학적 환원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독해에 뛰어들고자 한다.

 "We want to bring to the fore the double life of the transcendental subject and of Dasein as it becomes manifest in the phenomenological reduction and in turn seems to pursue a double objective. [...] If phenomenological reduction does indeed introduce a split or separation, then it has to do less with an alleged opposition between the rationality of phenomenological phenomena and the irrationality of ordinary phenomena than with the phenomenological phenomenon itself, namely, with the manifestation of the transcendental subject or Dasein."(247, 강조는 필자)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 드러나는 동일한 초월론적 주관의 이중성 자체는 현상학에서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핑크와 후설은 (초월론적 태도 하에서도) 세계를 구성적으로 성취하는 주체와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하면서 그 구성을 관찰하는 주체를 구분했고,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비본래적 실존과 본래적 실존을 구분했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환원은 전자에게는 도구들의 손-안에-존재와 세계의 의미를, 후자에게는 "세계의 의미가 붕괴할 때 현출하는 대로의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를 드러내준다(247).

 "In these instances of phenomenological reduction, Dasein becomes manifest to itself differently and does so in different ways: on the one hand, as involved in the world and, on the other, as exiled from the world; on the one hand, in the loss of itself and, on the [248] other, in a return to itself that looks very much like an auto-affection."(247-248, 강조는 필자)

Q. 'auto-affection'이 정확히 어떤 사태인지 모르겠다.

 베르넷은 이러한 실존적 분열, "[...] 실존의 애매성, 자신의 존재의 진리의 이중적 개시(disclosure)로서 맞닥뜨려지는 이 이중성"이 특정한 존재론적 문제를 야기한다고 지적한다(248). 그러나 후설과 하이데거에게서 발견되는 존재론적 애매성의 양상은 매우 상이하다. 베르넷은 우선 후설적 초월론적 주관의 이중적 삶을 살펴보기 위해, 핑크의 ⟪제 6데카르트적 성찰⟫에서의 논의를 끌어온다. 그에 따르면 세계 내 주관과 초월론적 주관 사이의 구분보다도, 초월론적 주관 내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초월론적 주관과 그런 구성을 (그에 참여하지 않고) 관찰하기만 하는 환원의 수행자 사이의 '대립'이 훨씬 첨예하다(248). 환원을 통해서 드러나는 이 구분 또는 대립은 구성하는 존재(Vor-Sein)와 구성된 존재 사이의, 그리고 구성적 의식의 존재와 현상학하는 관찰자의 존재 사이의 "존재대립"(Seingegensatz)이다(251). "현상학적 환원의 목표는 그러므로 퍽 존재론적이다."(250-251, 강조는 필자)*

*Q. 정말 그러한가? 

 이처럼 베르넷은 핑크의 서술을 토대로 후설이 구성적 의식의 존재에 관심이 없었다는 하이데거의 비판을 거부한다(255). 그는 선존재와 존재에 대한 핑크의 구분을 받아들인 뒤, 이 존재대립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거듭 묻는다. 핑크에 따르면, 초월론적 의식은 익명적일 수 있지만--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익명적이지만--초월론적 의식을 관찰하는 현상학적 환원의 수행자, 현상학하는 관찰자는 그렇지 않다. 현상학하는 관찰자는 (초월론적 의식과 달리) 세계의 구성에 전혀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초월론적 의식의 세계화하는 자기통각을 취소하고 초월론적 의식과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드러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 이러한 사태는 "구성하는 의식의 자기관계(Selbstbezug)가 이질성 또는 타자성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을 함축한다."(252) 풀어 말해, 초월론적 의식은 세속화되어있기 때문에 현상학하는 관찰자 없이는 스스로를 인지할 수 없다. 따라서 초월론적 의식에게 반성하는 의식(관찰자)과 반성되는 의식은 이질적이다. 반면 현상학하는 관찰자는 [비세계적 존재이므로] 스스로의 존재를 직접/스스로/자신의 힘만으로 인지할 수 있다. 현상학하는 관찰자에게는--설령 반성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할지라도--반성하는 의식과 반성되는 의식이 동질적인 것이다(253).

 요컨대 현상학하는 관찰자는 초월론적 의식과 달리 자기의식을 위해, "관찰자로서의 자신의 활동에 대한 반성"을 위해 자기 자신 외에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252). 게다가 현상학하는 관찰자는 자연적 삶에서 결코 미리 존재하지 않으며, 환원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존재 또는 활동에 대해 모를 수 없다[투명하게 안다](256). (초월론적 의식과 달리) 현상학하는 관찰자의 존재는 현상학이 수행되는 한, 은폐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후설은 핑크가 두 초월론적 삶들 사이에 심연(Kluft)을 설정하는 데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현상학하는 관찰자가 세속적인 것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다는 핑크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후설에 따르면 현상학하는 관찰자는 "초월론적 의식 내 세계의 기원"에 명백한 관심을 가진다(253). 

 **그러나 관찰의 유무와 관계 없이 초월론적 의식은 계속해서 세속화되어있는 채로, 스스로를 망각하는 채로 세계를 구성해나간다. 

 "Fink constantly repeats that it is, above all, the absence of any interest in the world which distinguishes the life of the phenomenological spectator from every other form of life. This spectator lacks the 'tendency to being' (Seinstendenz), as well as the 'finality of a realization of and in the world' (Finalität der Weltverwirklichung) that inhabits all constituting consciousness [...] This spectator is driven by a completely different tendency, which, instead of being directed toward the world's being, prompts the spectator to become interested in [...] the pre-being of the transcendental consciousness that constitutes the world."(253, 강조는 필자)

 관심사 외에도 초월론적 의식과 현상학하는 관찰자의 존재를 차별화하는 기준이 있다. 바로 둘의 과제와 그 수행의 방식이다. 전자는 상호주관적으로, 즉 다른 초월론적 의식들과 함께 세계를 구성하지만, 후자는 반드시 홀로 활동--현상학적으로 분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핑크는 두 존재 사이의 동일성을 강조한다.

 "Being neither mere constituting consciousness nor mere phenomenological spectator, the transcendental subject is necessarily both. It emerges from the world to become manifest to the phenomenologist's gaze, while remaining in other respects immersed in the world. The identity of this subject is a composite unity. It can be itself only by being itself in various ways. When it knows itself, it at the same time does not know itself. When it becomes manifest, it is always manifest only in one of its two faces."(254)*

*Q. 현상학하는 관찰자와 구성적 주관을 동시에 반성할 수 없다는 뜻인가?

 한편 하이데거 역시 후설적인, 또는 핑크적인 환원을 운용한다. 도구적인 일상세계 속에 퇴락해있는 현존재는 최초의 현상학적 환원 격인 "자연적 삶의 역기능(malfunctioning)"을 통해 "현존재의 (비본래적인 또는 고유하지 못한) 실존과 그것이 지시하는 친숙한 세계 사이의 상관관계"를 처음 깨닫는다(256). 비본래적 실존 내에서 이루어지는 이 최초의 현상학적 환원의 개념은 ⟪존재와 시간⟫ 16-17, 22, 26-27절에서 암시된다(259). 다른 한편 두 번째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리고 핑크의 존재대립과 유사한 사태를 야기하는 하이데거적 개념은 바로 불안이다. 불안의 경험을 통해 현존재는 세계 속에 퇴락해있는 자신뿐만 아니라 본래적이고 "고유한 존재를-위한-잠재성"과도 마주한다(256). 이때 베르넷은 (세계에 무관심해진) 불안을 경험하는 고독한 자아가 곧 핑크적인 현상학하는 관찰자에 대응된다고 보고 있다(265).

 그러나 초월론적 의식이든 현상학하는 관찰자이든, 후설과 핑크에게 그들의 존재는 특정한 종류의 지향적 대상일 뿐이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는 "현상의 현상성에 대한 새로운 탐구에 착수한다."(257) 물론 후설과 [전기] 하이데거는 유사한 개념들을 운용하며(e.g. 자연적 태도-일상적 삶, 지평-세계/환경, 대상과 세계 사이의 차이), 세계-내-대상과 구성적 주관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에 이른다(257-258).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차이는 "이 상이한 존재의 양상들과 그들의 구체적 의미가 개시되게 해주는 현상학적 접근 [...] [즉] 현상학적 환원과 그것이 수행되는 양식"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258). 

 "For Husserl and Fink, the phenomenological reduction [...] requires a 'leap' (Sprung). But this leap out of natural life is ventured, dared by the subject who wants to know more, who wants to have a clear mind, who wants to give a verdict in the name of scientific evidence. There is nothing of this sort in Heidegger. The disclosure of being is a giving that [259] offers itself in a givenness (Gegebenheit) that is out of the ordinary. Concernful Dasein receives the disclosure from the readiness-to-hand (Zuhandenheit) of equipment, and Dasein is subjugated to the sudden illumination of its own being. While there is in Heidegger a double reduction (one that is carried out within inauthentic life and another that provides access to the authentic understanding of Dasein's being), these two reductions [...] are both the result of an event that imposes itself upon Dasein unexpectedly and in a 'no-place.' Moreover, in both cases being manifests itself against a backdrop of absence. [...] The being of a thing reveals itself when this thing is defective, and being-with others manifests itself most clearly when the others turn out to be missing. It is only through their absence that beings come to manifest their being."(259, 이탤릭체는 저자, 강조는 필자)

cf. 세계의 친숙성 및 소급지시관계들의 망각(259-260). 사물의 고장, 긴급한 필요, 방해로 인한 도구의 존재 및 소급지시관계의 탈은폐(260), 도구존재 및 사물들의 소급지시관계에 대한 단서로서 돌출되는 '표지(sign)'(261), 도구의 부재가 비로소 돌출시키는 (기존엔 친숙한 나머지 은폐되어있던) 영역(Gegend)의 개념(262), 익명적 현존재인 세인들의 상호주관적 세계공간(262), 고독 가운데서도 준수되는 실존의 형식으로서의 공동존재(Mitsein)의 개념(262)

 베르넷은 염려[신경씀, 마음씀](Sorge)를 달고 사는(concernful) 현존재는 사물과 타인의 부재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이전에 그것들과[그것들의 존재와] 얼마나 친숙하게 연결되어있었으며, 그것도 아무런 자각 없이 그 연결망 속에 퇴락해있었음을 깨닫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저 부재의 경험들이 현상학적 환원과 동일한 효과를 가진다고 주장한다(263). 비본래적 현존재에게 "존재론적 개시(ontological disclosure)는 도구의 사용 가능성과 현존재의 염려의 매끄러운 기능의 상실을 대가로 발생한다."(263)

 그러나 불안을 매개로 발생하는 두 번째 현상학적 환원은 일상적 염려[신경씀, 마음씀]의 역기능 자체와는 무관하다. 불안은 현존재에게 도구나 타인의 존재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본래적 존재를 개시해준다. 동시에 자신의 기존의 실존이 비본래적이었다는 자각까지 가능케 한다. 환경은 더 이상 친숙하게 손-안에-있는 것[들의 연결망/소급지시관계]로 다가오지 못한다. 불안이 여는 아토포스적 상황 속에서 현존재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세계에 의미를 지정하는 기준임을 깨닫는다.

 "One can therefore say that the second phenomenological reduction incorporates the ontological lessons of the first by deepening them. By confronting Dasein not only with a piece of equipment that is no longer in its proper place, but also with a world in which Dasein no longer feels 'at home' (Un-zuhause) (SZ 189/233), the second reduction goes deeply into the sense of this atopia*, of this no-place where being can manifest itself in its truth. It effects a new type of sight and a new 'care' (Sorge) that brings Dasein 'before itself' (vor sich selbst) (SZ 182/226), and measures the being of things and of the familiar world, as well as Dasein's concernful existence, by the standard of the authentic disclosure of Dasein's proper being."(264)

*Q. 부재가 장소성과 관련지어 소화되는 게 부자연스럽다. 이 '아토피아'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베르넷은 이 두 번째 환원 역시 "현존재와 부재 사이의 대면의 결과"라고 분석한다(264). 그러나 첫 번째 환원에서와 달리, 두 번째 환원에서는 단순히 개별적인 도구나 사람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친숙한 세계 속의 전체 유의미성(Bedeutsamkeit)의 붕괴"가 초래된다. 현존재는 세계에 무관심해지며, 그에 따라 세계는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난다. 세인과도 멀어져 오로지 자기 자신과만 대면한 현존재가 "자신의 실존의 불가해한 [현]사실성과 더불어 죽음으로의-존재"를 깨닫기 때문이다(264). 이 불안 속의 고독*은 양심의 부름이 일어나는 자리이자 존재의 의미를 묻게 해주는 기반이다(264).

Q. "This time it concerns not the absence of a tool, but the absence of this being ready-to-hand that the absence of the tool had already made manifest. Thus anxiety is the experience of a redoubled absence, the disclosure of this radical nothingness that Heidegger calls 'the nothing ready-to-hand' (Nichts von Zuhandenheit) (SZ 187/232)."(264, 강조는 필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후설의 '원초적 환원(primordiale Reduktion)' 개념과 비교해보면 재미있겠다.

"Does not Dasein's recognition of its own being remind us of the way in which the phenomenologizing spectator extracts constituting consciousness from its immersion in the world in order to disclose it to itself?"(266)

 베르넷은 불안을 경험하는 하이데거적 현존재와 현상학하는 핑크적 관찰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전자는 "스스로를 자기 자신의 시선의 대상으로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하이데거가 '기분'(Befindlichkeit)이라고 부른 느낌의 특수한 양상 속에서 스스로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경험한다. 불안은 그 속에서 현존재가 비교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성격으로서의 자신의 개인성을 경험하는 자기촉발(self-affection)"이다(265). 나아가 이 현존재는 현상학하는 핑크적 관찰자와 달리 세계와의 모든 연관을 끊은 것이 아니다. 불안은 공동존재와 세계-내-존재의 지속 가운데서만 발생한다. 다만 세계가 '세계로서' 최초로 드러날 뿐이다(265). 양심의 부름 가운데서 현존재는 세인에 의해 휩쓸려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선택으로써 스스로의 [세계적] 삶을 꾸려나갈 것을 요구받는다(265). 양심의 부름은 일종의 '(세인으로부터) 자기의 되찾음'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게 본래적 존재는 비본래적 존재의 변양물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참된 자기와 그렇지 못한 자기로 이중적으로 분열되어있다. 그러나 이 분열은 핑크적, 후설적 주관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 초월론적 주관 역시 반성되는 초월론적 주관과 현상학하는 관찰자로 이중적으로 분열되어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순수한 현상학하는 관찰자"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266).* 현존재와 초월론적 주관은 결코 자기 자신과 온전히 일치할 수 없다. 그리고 현상학적 환원은 결코 순수한, 오염되지 않은 [단일한 종류의] 현상을 드러내줄 수 없다.**

*Q. 이것은 베르넷의 고유한 주장인가, 후설의 주장인가, 핑크의 주장인가? 베르넷과 후설의 주장이고, 핑크의 주장은 아닌가? 아니면 후설의 주장도 아닌가?

*'세계성과 비세계성 사이의 필연적 변증법'이라고 불러도 될까.

 "For Dasein, as for the transcendental subject, 'being' means 'being otherwise' or 'being always different from itself,' in short, never coinciding with itself. If difference is thus inherent in the being of the transcendental subject and of Dasein, it follows that the phenomenological reduction, called upon to make this being manifest, will forever be incapable of exhibiting a 'pure' phenomenon."(266)

  물론 후설과 하이데거 사이 존재의 드러남/현출(manifestation)에 대한 견해 차는 유지된다. 후설에게 드러남/현출(manifestation)이란 지향적 시선 앞에서의 현전함이다. 반면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존재는 절대 스스로를 관찰자 앞에서 총체적으로(in its entirety) 현시될 대상으로 부여하지 않는다."(267) 현존재의 존재는 직관의 대상이 아니며, "자신의 투명성을 배신하지 않고도 드러난다."(267) 나아가 수면 위로 드러나있는 비본래적 존재와 은폐되어있는 본래적 존재 사이의 분리 불가능성, 장-뤽 마리옹의 표현을 빌리면 둘 사이의 '유희'가 잊혀서는 안 된다.*

*Q. 아까는 후설에게서도 순수 자아는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째서 갑자기 이 유희가 하이데거적 주관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되는지?

A. 핑크의 현상학하는 관찰자가 순수하게 비세계적이라는 주장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