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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번역

에드문트 후설, <생활세계> 25번 유고 ''세계'라는 존재토대의 필증적 확실성의 일부로서의 내 인간적-신체적 존재의 필증적 확실성. 데카르트적 회의-시도로의 소급지시' 번역

E. Husserl (Hrsg. von R. Sowa), Die Lebenswelt: Auslegungen der vorgegebenen Welt und ihrer Konstitution. Texte aus dem Nachlass 1916-1937, Springer, 2008 (Hua XXXIX), s. 251-258, 모든 강조는 필자.

 초월론적인 탐구를 처음 개시했을 무렵 후설은 데카르트의 성찰들을 따라 세계 존재의 비필증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랬던 그가 후기에 와서는 여러 유고들에서 세계의 존재가 경험의 끊임없는 수정 가운데서도 얼마나 확고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전제되는지를 반복적으로 피력한다.* 자연적 태도에서의 인식이 어떤 의미에서 절대적 정당화를 결여하고 있는지로부터, 동일한 인식이 어떤 의미에서 믿음직스러운지로 탐구의 초점이 옮겨간 셈이다. 물론 객체의 자체적인 타당성이 아닌 객체의 소여 방식을 탐구한다는 모토는 초중기 현상학에도 일관적으로 적용된다. 하지만 같은 주제를 세계에 대한 모든 상대적, 비필증적 믿음을 전복하는 세계-보편적 필증적 비판 없이도, 이를테면 현상학적 심리학을 통해 아니면 적어도 초월론적 소박성 하에서 충분히 탐구할 수 있다는 전제가 새로이 생겨났다. Overgaard (2002) 등이 어째서 필증성이라는 범주가 초월론적 문제의식에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이제는 조금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세계의 견고함을 여기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이 유고의 결론과 달리 아예 초월론적 환원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세계가 이토록 견고하다면, 그것의 타당성을 임의로 중지시키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후설은 여러 곳에서 초월론적 환원 또한 인간의 세속화된 심리적 작용 중 하나라고 언급한다. 환원 또한 다른 모든 심리적 작용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립을 위해 암묵적으로 작동하는 어두운 지평을 필연적으로 함께 몰고 올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작용들은 가지지 못한 능력을, 자신의 그림자를 지우는 능력을 후설은 환원에 특권적으로 부여하는 것일까? 아니면 혹시, 횡설수설에 가까운 이런 장황한 유고들이야말로 환원의 배타적 특권에 대한 후설의 자기의심을 대변하는 것일까? 왜 후설은 초기의 자신, 세계의 소여 구조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지적했던 모습과 후기의 자신이 보이는 모습 사이의 명명백백한 괴리에 대해 침묵하는 걸까? 내 석사논문아!!! 어디로 가니???


[251] '세계'라는 존재토대의 필증적 확실성의 일부로서의 내 인간적-신체적 존재의 필증적 확실성. 데카르트적 회의-시도로의 소급지시(1937년 5월)

 나는 미리 전제한다(이것은 모든 이후의 고민들의 토대가 되는 확실성이다. 그와 같은 것으로서 노골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세계 속에서--[이와 같은] 표현에 이미 내가 세계를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고[확실시하고] 있다는 점이 놓여있다--나는 저마다가 보편적인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자리(공간상의 그리고 시간상의 자리)를 가지는 다른 사물들 가운데서의 인간이다. 인간으로서의 나에게는, 다른 모든 인간들에게 그러는 것처럼, 내가 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세계의 다른 사물들에 대한 경험을, 상세하게는(näher) 지각을 의식으로서, 무매개적으로-나를-위해-거기[-있음]의 확실성[의 의식]으로서 가진다는 점이 속한다. 과거의 사물들에 대해서 나는 그것들이 지각되었던 대로 그리고 확실하게 나를 위해 그 자체로 거기 있었던 것으로서 기억한다. 구체적으로는(und zwar) 그 속에서 내가 자체로-거기-있었음-을 직접적으로 마치 다시 보는 것과 같은, 그것을 그 자체로 다시 '현전화하는' 그런 확실성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직관적인 기억 속에서 [그렇게 기억한다.] 나는 또한 내가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또는 그렇지 않으면 그에 대해 현재적인, 지나간, 또는 다가올 것으로서 자기현전화와 같은 방식들에서 무매개적으로 경험된 확실성을 가지는, 그에 대해 직접적인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사물들에 대해서도 미리 그것들을 확실하게 생각한다. 나는 현실적으로 경험된 것들로부터 경험되지-않은-것, 그에 대해 내가 우선 흐릿한, 다소간 불명료한, 공허한 선현전화를 가지는 그런 것으로의 접근로를 찾을 수 있다. 나아가 나는 내가 이 모든 것 속에서 때때로(mitunter) 존재확실성을, 경험된 것 그리고 간접적으로, 미리-붙잡으면서 사념된 것에 대해서 내가 가지는 그런 존재확실성을 견고하게 붙잡지(festhalten) 못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 존재확실성은 의심으로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비존재 또는 그렇게-존재하지-않음의 확실성으로 변양된다. 이때 또한 미리 자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내가--내가 아직 의심하지 않을 때조차 그리고 그렇게 일반적으로--검토의 존재확실성을 수행하면서(?), 그때 표상된 것의 존재와 그렇게 존재함을 의문에 부치고 [252] 확증하는 또는 확증을 벗겨내는 의심 불가능한 결정으로의 방법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것도] 다음과 같은 것 [중 하나를] 미리 확실하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표상된 것과 나에게 여태까지 존재로서 타당[했던] 것이 '진리' 속에 있거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지가, 말하자면 최종적으로(endgültig), 마지막까지(ein für alle Mal) 결정 가능하든지, 아니면 [나에게 여태까지 존재로서 타당했던 것이] 최종적으로 결정 가능하게 존재하는 것과 충돌하는 것으로서 최종적으로 그렇지 않은지 중 하나를.

 살아가면서 나는 이와 같은 모든 자명성들에 대해 길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나는 그 자명[한 앎들]을 여전히 처리하고 대부분의 경우 단지 함축적으로 암시하면서 그로부터 개별적인 [말]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데, 내가 이를테면 [무언가에 대해] 의심스러워질 때와 같이 [나는] 말한다: "저기에[저것은] 뭔가가 안 맞아--무엇이 저것을 반박하지?"(내 확신, 내 기억 [가운데] 어디서 아마도 이 지각과 충돌하는 걸까? -- 그리고 그러면 당연히 본래적으로 지각된 것을 넘어서 현존하는 사물, 사건 등등의 통각에서 함께 타당한 것에 입각해서.) 세계삶 속에는 지속적으로 자명성들의 토대, 조용한 확신들의 토대가 거기 있다. 더 자세히 숙고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명료하다. 내가 중단되지 않는 삶의 그때그때마다의 변동(Wechsel) 속에서 현존하는 것으로, 세계를 이루는 것으로 타당하게 가지는 모든 실재들, 사물들이 있는 세계, 그리고 세계가 현실적인, 결정 가능한 진리에서 존재하는 사물의 우주라는 안심(Sicherheit)이 드는 그런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존재확실성은 내가 일찍이 매우 불완전한 방식으로 진술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진술들에서 분석적으로 분해되어있다(auseinanderlegen). 이제 또한 다음과 같은 것이 명백하다. 그와 같이 내가 가지는 세계확실성을 해석하는[밖으로 꺼내는](auslegen) (그러므로 순전히 '분석적인') 진술과 필연적으로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다음과 같다는 것이 말이다: 현실적인 세계에 속하는 것은 나에게 그때그때마다 오직 작은 범위에서만 알려져있고, 그 외에는 무한하게(ins Endlose) 미지이며, 이미 알려진 것의 주변[범위](Umkreis)이 비자발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임의로] 계속해서 확장되더라도 마찬가지다. [...] 이러한 주변[현행적으로 경험된 것의 범위]는 모든 경우들에 나의 인간적인, 나의 신체적-인격적 현존재를 경험소여들 가운데서 가지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있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이뿐만이 아니다]. [253] 내가 다른 것에 대해서와 같이 나의 인간적 존재에 대해서도 양쪽의 관점으로(?) 속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신체와 영혼의, 일반적으로 세계 속의 내 인간적 존재의 현실성을 의심하는 쪽 등등으로 기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내가 경험하는 다른 사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환상들로, 현실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밝혀질 수 있는 사물들과 충돌하는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그러나 내 신체와 인격적 존재, 인간으로서의 나의 존재가 처음부터 끝까지(ganz und gar) 가상으로 산출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 나에게 참되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타당한 세계의 토대 위에서 [그렇게 산출된다는 것은]. 나의 인간적 존재에 대해 나는--이러한 토대 위에서--필증적인 확실성을 가진다. 이는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과 연관되어있다. 세계의 모든 다른 실재들에 대한 경험이 불가분한(unablösbar) 방식으로 모든 그와 같은 경험에 관여된 신체-감성(Leibessinnlichkeit)을 전제한다는 사실, 그러므로, 명시되어있지 않을 때조차, 나의 신체에 대한 확실성을 모든 사물경험들에서 기능하는 것으로서 전제한다는 사실과 말이다. 그러나 더 자세히 보면 이러한 함께-기능함은 육체적 사건이 다른 경우에서 경험되는 것처럼 경험되지 않고, 도리어 특수한 방식으로 주관적으로 경험되는데, 말하자면: 나는 나의 신체를 완전히 독특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내가 그 속에서 키네스테제, 그것을 함께 따라가면서(in deren Mitfolge) 사물의 면들이 경과하는 등등의 그런 키네스테제를 지휘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더 자세한 해석은 적지 않은 번거로움(Umständlichkeit)들로 [우리를] 이끈다. 이러한 경험연관과 타당성연관에로 시선을 소급하여 이끄는 것으로 그리고 이때, 단지 대강(im Allgemeinen) 그리고 잠재적으로라도 다음과 같은 것을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단적인 자기경험에서 주어지는 [바로 그]것과 같은 [내] 고유한 신체-영혼적 존재가 가상으로 변화할 가능성에 착수하기를 시도하는 일은 전체 세계를 하나의 가상으로 변화시킬 것임에 틀림 없다--우리가 이러한 모든 해석들에서 세계를 그것이 자연적인 빠져-삶(Dahinleben)에서 우리에게 의문의 여지 없이 타당한 것처럼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토대가 되는 확실성으로서 가지는 동안에 말이다. 이러한 존재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나는, 경험하는 자, 인식하는 자, 가치평가하는 자, 행위하는 자, 줄여서: 생동하는[살아있는] 인간, 끊임없이(immerfort) 중심인 [그런 인간이다.] 세계는 끊임없이 나의 경험세계이고 필연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방향설정되어있다--[이런 사실은] 아무튼 다시금 [또 다른] 해석들의 커다란 표제를 표기한다.

 [254] 우리가 우리의 세계삶 속에서 세계의 이러한 존재를 선소여성으로서, 또는 더 자세하게는 내 인간적 삶의 선소여성으로서 순수하게 분석적으로 해석하면서 명료하게 만들었으면, 그리고 -- 그 인간적 삶 속에 포함된 것으로서 -- 이 세계의 분석적 존립요소에는 인간으로서의 내가 속하고, [내가] 나에게 세계 한가운데서 직접적으로 미리 주어지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행위하는--세계 속에서--등의 인간으로서 미리 주어진다는 것을 명료하게 만들었으면, 데카르트의 진행(Vorgang)을 따라서 순수한 나와 순수한 의식을, 그로부터 무엇보다도 모든 사물들의 현실적 존재와 그렇게 존재함에 대한 토대로서 필증적 확실성 속에서 획득하게 되었어야 할, 그리고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완결됐어야 할 그런 고찰의 방식이 우리에게는 매우 의문스러워진다(bedenklich). 여기서 완결됨이란 순수한 자기인식이 엄밀하게 근거 지울 수 있는 모든 세계인식들의 궁극적 전제들임을 [뜻한다.] 데카르트는 보편적인 것 속으로 뻗어나가는(ausgespannt) 회의들의 방법을 통해 순수한 에고와 그의 순수한 의식삶을 획득한다. 그는 의심 가능한 것의 우주를 구성하고 그 동일한 것이, 총체적으로 포착됐을 때, 현존하지 않는다는 가설에 착수한다. 그는 그로써 세계의 비존재 가능성을, 나에게, 인식하는 자에게 그때그때마다 소박하게 확실한 그런 세계의 비존재 가능성을 산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대조되어, 그 속에서 세계가 소박하게 확실시되는 세계의식삶의 주체로서의 자아(Ich)의 필증성이 드러난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아도, 나는 존재할 것이다. 내가 전체 세계를 그것의 존재와 관련하여 의심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나는 그렇게 의심할 수 있는데, 세계가 나에 의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으로 나에 의해 인정되어야 할 때, 그러면 내가 의심한다는 것,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래도 의심할 수 없다. 세계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나는 존재한다.

 한편 비존재의 가능성들로서의 의심 가능성들에 호소함(Rekurs)은 처음부터 세계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 삶의 자연적 태도에서 나에게 지속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의 세계의 존재 자체에는, 세계에 대한 분석적 해석이 보여주듯, 내가, 세계를 지속적으로 타당하게 생각하는 내가 세계 자체에 필연적으로 귀속된다(zugehören)는 점이 속한다. 나는 세계를 확실시하고, 나를 확실시하며, 구체적으로 세계의 실재들의 존립요소에 필연적으로 속하는 것으로서 나를 확실시한다. 필연적으로 그러한데, 왜냐하면 여기서 말해지고 있는, 나를 위해서[나에 대해서, 나에게 대자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나를 위해 의미와 타당성을 가질 수 있고, 내가 나의 자연적 관심삶을 반성으로써 넘어서면서 숙고의 주제로 만들 수 있는 세계는 일찍이 그리고 끊임없이(vorweg und immerfort) 나에게 그 존재가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그리고 고찰에 관계된 모든 것에서 고찰하는 자, 숙고하는 자, 판단하는 자 등등이다. 그러나 나는--나는 이를 즉시 그리고 필증적인 명증에서 보는데--인간으로서 그러한 존재자이며, 그러한 필증적 명증 자체에 귀속되는 그런 인간이다. 나에게 언제나 실재하는 것으로서 확실시되는 것은, 그것이 순수한 육체[물체]가 아닐 때조차, 시간과 공간에서의 자리[위치]로서 자신의 물체성을 가진다. 그리고 나의 감성적-신체적 기능함 없이는 아무 것도 나를 위해 물체로서 경험될 수 없고, 동시에 나는 나의 작용들에서 내 물체적 신체성과 분리 불가능하다. 나는 [내] 신체와 영혼에 따라서 인간이다. 그리고 영혼의 관점에서 나는 세계 속의 육화된(verleiblicht) 자아로서 그리고 모든 경험된 것의 주체로서 존재한다. 나아가 나는 이때 나를 변동 속에서 세계의 상이한 사물들을 경험하면서뿐만 아니라, 스스로 경험된 것을 귀납하면서, 기대하면서 등등 [그러면서] 나 [자신을] 확실시할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도 확실하게 생각한다. [즉] 모든 의식, 실재에 대한 모든 나에게-타당함은 불완전하며 오직 상대적으로 완전해진다는 것, 구체적으로 내가 (언제나 나에게 그 존재가 확실한 것으로서의) 모든 개별적인 사물적인 것들에 있어서 그에 대해 필연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의 지평을, 아직 규정되지 않은 특성들을 규정되지 않은 것으로서, 그러나 규정 가능한 것으로서 함께 확실시하며 가지는 방식으로 그렇다는 것도 말이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경험의 전진 [과정]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려진 것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 가운데서 의심이 산출되고, 종국에는 존재타당성이 가상으로 변화하는 등등의 일이 가능하다. 그와 같이 나에게 하나의 사물에 대해 그리고 다른 모든 사물들 가운데서의 사물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종국에는 사물들의 우주로서의 세계에 대해 타당한 모든 것이 의문스럽다(fraglich). 나는 끊임없이 개별성들, 다수성들, 관계들 등등과 관련하여 '현실적'-존재와 그렇게-존재함이 어떠한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나는 확증하고 확증을 벗겨내는 방법들을 시도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끊임없이 세계확실성을 가지지만, 그럼에도 그 세계확실성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의문스럽다. 그러나 이때 내가 또한 모든 의문들은 [그에 대한 답변이] 결정 가능하다는 것을 확실시하면 -- 그리고 이러한 확실성은 여기에(dazu) 본질적인데 -- 그러면 의문스러운 존재확실성에 대한 모든 확증(그리고 반증)이 필연적으로 존재확실성의 토대를 전제한다는 것이 명료해진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물이 의심스러워지면, 다른 사물이 나를 위해서 중단되지 않는 존재확실성 속에서 나에게 타당해지는 방식으로 전제된다. 모든 확증 또는 반증은 사물들을 위해서 다른 사물들의 존재를, 그러므로 종국에는 세계의 존재를 전제한다. 어떻게 그러한지는 더 상세하게 [256] 연구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별적 사물이 의심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은 세계의 총체가 의심 가능하다는 것과 동등하지 않다. 그것의 모든 개별적인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그렇게 존재하는 것의 관점에서 나를 위한 세계의 유효성(Gültigkeit)이 지속적으로 상대적임은 나를 위한 세계의 존재의 유효성을 취소시킬 수 없다. 모든 의심은 의문스러운 것에 반해서, 여태까지 중단되지 않은 이런저런 것의 존재타당성에 반해서 나에게 그때[때마침] 완전히 확실시된 다른 것[대안]에 의해 항의가 제기되는 사태 속에 근거 지워져 있다.

 내가 세계 속에서 깨달은 것(sich finden)으로서 [무언가를] 분석적으로 해석하면, 는 나 자신을 세계를 표상하는 존재로서 발견하며, 구체적으로 세계로부터 나에게 타당한 모든 개별적인 것을 의문에 부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로 발견한다. 그리고 나의 세계인식은 필연적으로 상대성 속에, 필연적인 그리고 결코 취소될 수 없는 불완전성 속에 있다는 것 [역시] 발견한다. 이로써(derart, dass) '세계'라는 표제 하에서 나에게 확실시된 것은 사물들의 우주라는 의미를 가지며 그 사물들의 존재와 그렇게 존재함은 결코 미리 결정되어있지 않고, 존재양상성들과 정정들의 모든 변동을 거쳐서도 총체적인 존재타당성이 끊임없이 복원되는(restaurieren) 것으로서 남는다: 세계[의 존재타당성이.] 자세하게 숙고하면, 이러한 방식으로 세계의식을 가지는 나를 위해서[나에 대해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표상되는 일은 단도직입적으로 불가능하다. [...] 세계의 비존재는 오직 가설적으로만 정립해볼 수 있다. 마치 이치에 어긋나는 것을 그래도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해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식하는 자가 그에 대해 불완전한,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의문스러움 속에 있는, 마찬가지로 알려져있음과 알려져있지-않음의 상대성 속에 있는 개별적 확실성을 순결하게(lauter) 가지는 그런 세계로서의 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은 필증적이다. 나는 세계 속의 인간이다. 그러나 세계에 대해 탐문되고 인식될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주체로서의 나에게 소급된다. 왜냐하면 다른 주체들은 오직 내 경험, 내 생각, 내 물음 그리고 자기결정을 근거로 해서만 나에 대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에 대해서 [던져지는,] 일상적인 실재적 의미에서의 존재와 비존재에 관련된 모든 질문은 세계의 존재를 전제한다. 즉 모든 의문은 의문스럽지 않게 타당한 것을, 의문-토대를 전제한다. 그러면 세계는 필연적으로 타당한 사물들의 우주다--의문스러움 속의 존재자들로서[의 사물들], 그러나 의문에 부쳐지는 모든 것이 의문에 부칠 수 없는 것을 전제하는 방식으로.

 당연히[자연적 태도에서] 나는 필증적 세계타당성을 이루는 것을, 열린 미규정성과 늘(offen) 가능한 정정으로부터 [기인하는] 그에 귀속되는 모든 상대성들과 함께 가진다. [이는] 바뀔 수 없는데, 내가 바로 나의 여태까지의 세계삶 속에서 이러한 개입을 [감행]한 것을 예외로 치면 그렇다. 이 개입은 내가 나의 세계삶을 더 이상 낡은 방식으로 진척시키지 않고, 중지시킨다는 것(멈춤) 속에 존립한다. 나의 존재타당성들과 존재양상성들의 수행 가운데서 항상적으로(fortgesetzt) 사는 대신, 이를테면 나에게 단적인 경험 속에서 현존하는 것으로 타당한 것에 대해 나로 하여금 [그것을] 먹도록 동기부여하는 요리와 같은 것을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하게 두는 대신, 그리고 그렇게 일반적으로 나의 자연적 관심삶을 이어나가는 대신 말이다. 존재타당성의 수행을 저지하는 금지(Inhibieren)는 전체 자연적 삶의 방식(Lebensweise)을 저지한다. 이러한 수행-밖에-둠이 한 번 보편적으로, 존재타당성들의 총체적 지평을 포괄하는 한에서, 그것은 실제로 ('그' 세계[에 대한]) 존재 정립에 그것의 고유한, 개별적 사물의 존재정립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그러나 개별적 사물의 존재정립과 관련되어있는 의미를 부여하는 [바로] 그것을 포괄한다. 이제 그로써 무엇이 성취되며 성취될 수 있는지, 그것이 자아 자체와 그의 삶의 취소를 의미하지는 않는지를 숙고해야 한다. 

 본질적인 것은 내가 세계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면서 회의적인 혼란에 빠지고 모든 것을 회의하면서(de omnibus dubitandum) 존재자들의 총체로서의 세계의 존재에 대한 의심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니다. 내가 혼란 속에서, 이를테면 정신적 착란 속에서 의심에 휩싸이고 심지어는 2+1이 1+2와 같다는 것도 부정할 수 있는 일이 충분히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그와 같은 의심 가능성은, 내가 그것을 통해서 비존재의 가능성을 통찰하는, 또는 의심된 것이 현실적으로 의심스러워지고 또는 나에게 그 존재가 확실한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이러한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달리 말해] 아마도 무매개적인 지각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비존재의 가능성을, 의심스럽게-됨의 가능성을 아프리오리하게 열어둔다는 그런 의심 가능성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 후자의 경우가 여기서 의문시되는데, 그것은 필증성에 대한 의문[물음]이다. 모든 사물경험에는 그것이, 아무것도 사실적으로 그것의 존재타당성에 반대해서 [권리를] 말하지 않을 때조차, 비존재의 가능성들이 열려있다는 점이, 그러므로 경험의 전진에서 경험된 것이 (나에게 확고하게 타당한 다른 존재확실성들의 입장에서의 항의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단념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증적으로 속한다. 이 같은 것은 [다음을] 말해준다: 사물경험 일반의 본질에는, 그것의 존재타당성 자체가 필증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 필증적으로 속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비필증성]이 모든 각자의 것에 타당하고 그렇게 나에게 다른 존재확실성들을 위한 사실적인 의심의 토대로서, 그러나 또한 의문스러움, 개연적임 등등의 토대로서 봉사하는 모든 각자의 것에 대해 타당하면, 그래도 세계확실성은 파괴 불가능한(unzerbrechlich) 것으로 남는다.*** 그것이 언제든 나를 위해 존립하는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지속적인 경험운동과 인식운동 속에서, 방금은 아직도 완전히 타당[했던] 것의 개별적인 의문스러움과 삭제(Durchstreichung)들의 새로운 침입들 속에서, 현실적이고 미리 필증적으로 가능한 정정이 필증적 필연성 속에서 언제나 다시 확고한 타당성의 우주를, 모든 것에 대한 개별적 의심, 정정을 배제하지 않는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서는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gelegentlich) 개별자들의 무리들을 위해 언제나 또한 [존재에 대한] 기대가 허용되는 방식으로 확고한 그런 우주를 밝혀준다(ergeben). 

 그렇게 반성은 개별적 실재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세계확실성을 가리켜준다. 이때 세계확실성 속에는 바로 세계확실성이 개별적인 확실한 또는 확실성으로 가져와질 실재들의 총체라는 점이 놓여있다. 그 어떤 임의도[의지도] 이러한 세계확실성의 형식에서 무언가를 변경할 수 없다. 우리의 임의를 통해 [관철]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가, 내가, 세계를 나에게 타당한 것으로 고려하는 내가 세계타당성과 관련하여 보편적 에포케를 수행하고, 그러므로 암시된 경험운동과 인식운동, [에포케가 없었으면] 나의 세계삶의 나아가는 운동과 손을 맞잡았을 그런 경험운동과 인식운동의 무한한 지평과 관련하여 [보편적 에포케를 수행하는 일이다.] -- 그 속에서 내가 미리 모든 존재타당성, 이러한 운동에서 총체로서(totaliter) 등장하고 등장하게 될 모든 존재타당성을 삼가고 그로써 나를 내 세계-내-삶의 지속적 토대로부터 해방시키는 에포케.


*문제는 세계의 저 확고한 존재 또한 '필증성'의 언어로써 피력된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 존재의 비필증성에 대한 최초의 성찰들과 명백한 모순을 빚기 때문에, 후설은 (i)세계의 존재가 필증적이지 않다는 초기의 주장을 후기에 와서 철회했거나, (ii)'필증성'의 의미를 바꿔 사용하고 있다. 전자의 해석은 데카르트적 초월론적 환원의 길이 결함이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유효하다는 후기 후설의 언급들과 상충한다(Hua XXIX, 425-6 등지).** 그러므로 후설에게서 '필증성'의 의미는 초기와 후기에 상이하다고 결론 짓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 존재 여전히 비필증적이에요!'라고 후설이 후기에 와서 단언해주는 대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언명은 대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후설에게 세계의 존재는 (엄격한 의미에서) 필증적인가, 비필증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