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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번역

에드문트 후설, <위기 보충판> 22번 유고 4절 '세계의 초월론적 발생으로서의 초월론적 자기숙고' 번역

E. Husserl (Hrsg. von R. N. Smid),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3 (Hua XXIX), s. 266-271, 모든 강조는 필자.

 후설이 (이전엔 잘 쓰지 않았던) '표상'이라는 표현을 유독 많이 쓰는 것이 돋보이는 유고다. 국가에 대한 언급들이 흥미롭다. 결론부에 이르러 별다른 근거도 없이 평화를 이성적 존재의 이념이라고 상정한 것은 조금 나이브하다. 하지만 후설이 이 유고를 썼을 당시 처해있었던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가 자신의 시대를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표상했는지, 어째서 이 유고들의 결산이 '위기'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는지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으로 두드러진다.


[266] 세계의 초월론적 발생으로서의 초월론적 자기숙고

 그런데 그러면 문제가 있다. 이러한 세계에 대해, 그것이 현실성 속에서[현실에서] 즉자적으로 존재하며, 그와 관련해서 그때그때마다 타당한 생활세계들은 한갓된 현출들[일 뿐]인 그런 참된 존재를 자신 안에[그 자체로] 가진다고 주장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세계의 존재가 흐름 속에서 필연적으로 의심 불가능하게 타당할 뿐만 아니라, 근거지움(Begründung)의 의미에서, 진리의 의미에서 또한 의심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론적인 프락시스를 포함해 모든 프락시스는 그 양식이 필증적으로 불변하는 흐름과 소박하게-타당한 세계를 전제한다. 세계와 관련된 모든 사념은 흐름의 필증적 구조를 전제하며 그 흐름 속에서 그에 따라 소박하게-타당한 세계를 토대로서 전제한다.

 이 토대 위에서 보편적인 이론적 프락시스가 의미를 가지고, 가능하며 성공적이라는 것을, 타당하고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타당한 세계를 진리-주제로 가진다는 것은 어떻게 해명돼야 하는가?

 그런데 세계의 참된 존재에 대한 물음은 주관적 삶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경험된, 지속적으로 사념된, 지속적으로 사실적으로 보존된 세계[의 주관적 존재]와의 차이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저 세계가 지속적으로 그리고 필증적인 필연성 속에서, 나의 삶 속에서 나에게, 그리고 나의 삶 속에서 나름대로 이 같은 것[내 삶] 속에서 구조들에 따라 경과하는 사실성으로부터 나를 위한 존재타당성을[--]이러한 사실적으로 생성되는 그리고 앞으로도 생성될 존재타당성[을 가지는] 세계의 존립요소로서[--]획득하는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 세워질(dastehen) 때 말이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세계는 우선 나의, 우리의 표상된[내가, 우리가 표상하는] 사념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미 근거지움인가?[이것으로서 근거지움은 완결되는가?] 사념된 세계는 현실적인가? 끝에 가면 사념된 세계는 실존하지(existieren) 않고, 그 어떤 세계도 실존하지 않는다(?). 내가 나의 삶에서 필증적 필연성 속에서[필증적으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사념을 가지고, 내가 이러한 사념을 지속적으로 고집해야(festhalten) 한다는 동기 속에서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사념의 개별적 내용물의 변동과 [사념] 방식의 변양(Wandel) 속에서 사념은 새로운 사념과 주관적으로 일치한다. [그 결과] '세계'라는 존재사념의 통일체가 필연적으로 [267] 자라난다. 이것은 필증적으로 통찰가능할 수 있지만, 단지 사념으로, 언제나 사념으로만 남는다. 이러한 사념이 옳은 사념이 되려면, 나는 그 사념을 비판적 숙고 속에서 그리고 이론적 근거지움의 명증 속에서 옳은 것으로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여태까지의 숙고들에서 나는 나의 지속적인, 흐르는, 흐름들 속에서 변양되는 세계표상들, 나의 습성적 타당성들 그리고 이에 관련된 이러한 자아습성의 통일성구조로서의 세계표상들의 '세계'라는 주제를 가졌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동기부여된 그리고 필연성 속에서[필연적으로] 계속해서 동기부여된 '그' 세계의 존재타당성의 방식을 숙고한다. 이 세계는 내가 나의 표상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나의 것[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세계(각주: 사념된 세계와 참되게 존재하는 세계)는 이러한 종합적으로 통일적인 표상함 속에서 지속적으로 사념된 존재의미다. 이 존재의미 속에는 필연적인 상대성이 놓여있다. 이 존재의미는 지속적으로 변양의 운동 속에, 표상-형성 그리고 재형성, 계속되는 형성으로서의 표상하는 삶의 필연적 동기부여구조로부터 존재한다.

 이것이 세계, 타당한 의미존립요소[가 나타나는] 그때그때마다의 상황(Jeweiligkeit) 속에서 내가 지속적으로 가지는 세계, 즉 대상성들의 세계다. 그곳에서는 나를 위한 모든 대상적인 것이 타당한 것으로서 존재한다.

 나는 이제 물을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필증적으로 경과하는, 자기구성하는 존재사념에 대해 무언가가 변경될 수 있는가? 당연히[자연적 태도에서], 내가 '그' 세계를 확신하고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그것을 존재우주로서, 그 속에서 내가 다른 인간들 가운데서의 인간인 등등의 존재우주로서 확신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것도 변경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무엇이 세계의 현실적 존재는 그 다음에(danach) 비로소 근거 지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동기부여할 수 있고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세계의 존재가 근거 지워져야 한다는] 동기는 내가 우선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배제되는지 여부에 대해서 먼저 확신했어야 한다는 데 놓여있었을 것이다. 또는 무엇인가가 현실적이라는 가능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세계', 하나의 세계라고 명명하고 싶다면--다만 나의 순전히 주관적인 세계로서 그리고 상대성의 운동 속에서, 내가 세계에 보편적 구조들에 필연적으로 할당해야 하는 모든 것과 함께, [그와 같은 방식으로] 타당한 세계로서의 생생하게 사념된 전체 세계 그리고 부분적으로 경험된 세계가 현실성 속에서[현실에서] 존재하는 객관적인 존재자[의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두도록, 그리고 그것[존재자 또는 세계]이 이러한 현실성 속에서[현실에서] 어떤 상태에 있고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보존할 수 있는지의 물음을 [답변되지 않은 상태로] 열어두도록 그렇게 해야 한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무의미한 것 속으로--충분히 숙고되면 부조리한 [것으로 드러나는] 신화로 빠지지는 않는가?

 [268] 세계표상은 내 표상들 가운데 [순전히] 하나의 표상[일 뿐]인 것이 아니다. 이는[세계표상은] 내 모든 표상들의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보편적 운동과 종합이다. 이 종합은 표상된 모든 것이 서로에게 타당한 것으로서 하나의 세계의 통일체로 모아지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내 모든 표상들의 언제나 생성되어가고 생성되어온 통일체의 상관자--내가 가지고 있고, 가졌고, 가지게 될 표상들.

 그러나 초월론적 에포케, 그 속에서 내가 표상타당성의 총체성을,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총체를 수행 밖에 두고 그 과정에서 표상들을 새롭게 형성하는 초월론적 에포케는 가능하다. 나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는(in ihren Auswirkungen) 나의 삶의 관심들을 그와 같은 에포케를 통해 한동안(zeitweise) 중단시킬 수 있지만, 나는 나로서 [여전히] 존재하며(aber ich bin, der ich bin), 그 삶의 관심들은 나의 관심들이고, 세계관심들인데, 그 세계관심들이 중단되지 않은 타당성 속에 있는 한 나는 자의적으로 그것들에 대해 무언가를 변경할 수 없다. 에포케는 타당성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타당성의 수행을 또는 오히려 타당성 속에 있는, 선호된 어느 누군가[의 존재론적 지위]를 변경한다.

 (관심-삶의 질서라는 문제. 모든 관심들에 자신의 권리를 허락해야 한다는 문제.) 관심들에는 그 근원이 있다. 초월론적 관심은 나를 나의 그때그때마다의 관심[을 가지는] 나로서 전제하는 동기 속에 그 근원이 있다. 그러므로 초월론적 관심은 하나의 동기로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내가 이제 '세계'라는 존재타당성을 그 속에 정초된 모든 관심들과 함께 에포케 속에 유지시키는 효과를 발동하는 사이(auswirken)--한동안, 그러나 필연적으로 또한 다시금 자연적, 세계적 관심-삶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제 모든 방해들을 관통해 통일적인 보편적 자기이해(Selbstverständigung)을 수행한다. 이 자기이해에서 나는 명증적으로 이 자기이해가 나에 의해 활성화된 초월론적 자기부여의 보편적 생활방식을 그리고 그 후로는 본질필연성 속에서 '자연적' 세계삶[으로의] 돌아감[귀환](Rückkehr)을 전제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 세계삶은, 내가 [이미] 인식하듯, 필연적으로 모든 '철학'에 선행하는 소박성이다. 철학적 삶의 확립 이후로 자연적인 [세계삶]의 계속됨(Fortsetzung)은 [모종의] 돌아감[귀환]으로서 남는다. 자연적인 것은 그의 낡은 의미구조와 존재구조의 보전(Erhaltung) 하에서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경험할 뿐이다. 철학하는 자인 내가 ([나와] 함께 철학하는 모든 이들 가운데서) 초월론적 [탐구의] 결과들이 이전의 소박하게 통각된 주관성 속으로 흘러들어감을 통해 '내면성'을 보전한다는 변화 말이다. 이로써, 그러므로 세계 속의 영혼적 존재는 그의 의미내용물과 관련하여 변화된다. 이 의미내용물은 이전에 소박한 삶에서 지평상 가졌고 가질 수만 있었던, [269] 그러나 내가 초월론적인, 현상학하는 자아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가질 수만 있었던 의미내용물이다. [바로] 초월론적, 현상학하는 전환(Wendung)과 나의 능동성 속에서 세계의 신종의 초월론적 발생이 수행되고 또는 낡은 것, 내가 되돌아 추적할 수 있는 발생의 낡은 운동이 소박성 속에서의[소박한] 발생으로서 의미확장들의 새로운 차원에 관여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 속에서 '세계'가 자신의 발생을 그것이 나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존재한다는 그런 존재의미에 따라서 가지는 의미운동과 타당성운동은 이 운동의 초월론적 시간성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경과하는데, 그 속에서 세계가 앞으로도 조화에 도달하는, 또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수정하면서 조화를 생산하는 그런 의미내용물을 풍부하게 하면서 [그렇게 경과한다.] 다른 한편으로 전진 속에서의[전진하는] 이 운동은 동시에 되돌아가-붙잡는(zurückgrefeind) 운동이기도 하다. 낡은 의미지평은 새로이 풍부해진 내용들(die neuen Bereicherungen)을 받아들인다.

 초월론적 소박성 속에서의 세계는 상세규정함, 달리-규정함, 존재-정정함의 지속적인 운동 속에서 주관적이며, 이러한 운동은 마찬가지로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되돌아가-붙잡는다. 이에 더해 우리는 우리의 세계표상의 발생을 향한 태도에서 자아의 개인적인 발전을, 나의 성숙의 발전으로서 또는 세계표상의 성숙의 발전으로서 발견하고, 동시에 (생활세계의) 세계표상의 역사적 발전을 그리고 그때그때마다의 세계표상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세계삶(관심-삶)의 역사적 발전 또한 발견한다--세계의 열린 무한성의 첫 번째 형태는 근원적으로 국가적인 전통[이다]. 그 자체로 닫힌 세대적 전체성(나티오)의 전통, 그리고 이에 더해 그러면(und dazu dann) 그와 같은 국가는 다른 국가들 가운데서 살아간다: 현실적 보편적 통일화가 없는 국가적 세계들, 국제적인 것의 신형태(Neugestalt)에로[.] 그리고 모든 지구적인 것(irdischen), 서로 무매개적으로 그리고 매개적으로 공동체 속에 살아가는 국가들을 포괄하는 세계표상의 전체성 또는 표상된, 타당한 세계의 전체성, 초국가적인(übernational), 국가적 전통성 위로 고양되는 태도 속에서.

 성숙의 개인적인[개별적인](individuell) 발전 속에서 우리는 우선 아이들의 함께-있음과 성인들 아래의 아이들과 상호주관적으로 이 공동체 속에서 존재하는 이의 교육[훈련](Ausbildung) 그리고 그에 관련된 정정[교정]의 운동을 가진다. 모든 존재자는 국가적 지평성격(Horizonthaftigkeit)을 자신의 타당성 속에 가진다[타당하게 여긴다].

 (고차원적인 공동체의 교육에서 또는 [270] 서로, 곁에서 그리고 대립해서 살아가는 국가들의 공동체화(Vergemeinschaftung)로부터 가장 낮은 토대 위에서 한갓된 이해공동체가 자라난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국가들(Menschennationen), 그리고 상이한 국가적 세계표상들에 대한 상호적인 이해에서(사념하면서), 이러한 모든 세계들 속 하나의 공동의 핵심: 인간의 존재 외에 동물들의 존재, 하늘과 지구, 사물들의 존재 그리고 국가적으로 상이한 의미와 함께 모든 것, 철회되지 않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방식으로 동일화된 핵심존립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잔존하는 그런 상이성?]. 경향성 그리고 인정될 수 있는 것(ein herauszuerkennendes), 모두를 위해 다시 인식될 수 있는 것 그리고 보존되는 존재에 대한 의도: 자연의 존재, 인간의 존재, 인간적 목적들의 존재, 상호작용하는[교환하는](wechselnd) 인간들의 개인적인[개별적인] 것들로서--각자가 자신의 것들을, 사실적으로.)

 개인적[개별적] 공동삶, 사랑의 공동체, '평화'의 공동체라는 이념 하에서의 사회성(Gesellschaftlichkeit), 관심-삶의 이념, 목적 속에서의 의지-삶의 이념이란 다음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각 관심 속에서 모든 동지들(Genossen)의 관심이 의지적으로 긍정되고, 의지적으로 함께 받아들여지고, 그때그때마다의 관심을 행위로 실현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방해될 때[--]이러한 관심은 행위하는 인격들의 관심으로서 필연적으로 현실적인데[--]일종의 행위 규제의 이념[이 따른다.] 이상적으로 모든 행위들에서 다른 행위들에 대한 가능한 고려가 취해진다는 규제, 그러나 외부적인 강제적 규제로서가 아니라 의지-신조(Willensgesinnung) 속에서 그로부터 이미 파생된[주도된] 것과 같이 받아들여진 것으로서--전체 삶에 대한 그리고 모든 다른 이의 삶에 대한 긍정 속에서의 각자의 전체 삶을 향한 모두의 의지성격(Willentlichkeit), 하나의 공통관심 속에서. 국가들의 총체성의 지평 속 국가들의 함께-삶 속에서: 국가적 의지, 국가전체적(allnationale) 사랑-신조(Liebesgesinnung)--각 나라의 내부에서 세대적이고 역사적인 구조물(Gliederung) 속에 이미 유사한 것[이 있는데], 국가적 목적들, 가족의 목적들 등등[이 있는] 한에서.)

 인간성의 현존의 사실성에는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271] 평화공동체의 이성이념이 그러나 필연적으로 속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서로 맞는 목적들을 가진 하나의 제국, 모두가 긍정할 수 있는 하나의 인간세계[가 필연적으로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