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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번역

에드문트 후설, <수동적 종합> §27 '근원적 시간의식의 종합' 번역

§27 연상적 종합의 전제: 근원적 시간의식의 종합(모든 볼드처리는 필자의 것이다.)

 [125] 이제 연상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 새로운 장이 어떻게 깊이 파고드는(tiefschürfend) 현상학적 탐구 속에 취해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당연히 모든 연상이 전제하는 기초적인 것들을 가지고 시작하는 하나의 체계적인 [현상학적 탐구 속에 어떻게 취해질 수 있는지를] 숙고해보자. 우리가 그 무엇보다 최초인 시작을 찾을 필요는 없다. 자명하게 전제된 것은 근원적 시간의식 속에서 연속적으로 성취되는 종합이다. 그때그때마다의 구체적으로 완전한, 흐르는 삶-현재(Lebensgegenwart) 속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의 특정한 소여양식 속에 통일된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를 가진다. 그러나 주관성이 어떻게 자신의 지나간 그리고 다가올 삶을 그것[삶] 속에 놓여있는 지향적 내용들과 함께 의식하게 되는지의 이러한 방식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것[이 지향적 내용들]은 만일 그 어떤 일깨움(Weckung)도 없다면 나를 위해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파지들은 공허하고 심지어는 무차별한 파지적 배경 속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예지적인 미래는 더더욱(erst recht) 공허하게 의식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작 없이는 그 어떤 전진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의식되는(bewußtwerdend) 대상성과 존재하는 것으로서 독자적인 주관성의 구성의 ABC에서 여기 A가 놓여있다. 그것[구성의 시작, A]은 하나의 보편적 형식적 틀 속에, 하나의 종합적으로 구성된 다른 모든 가능한 종합들이 그에 관여하고 있는 형식 속에 존립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요약] 후설은 주관성의 과거인식 및 미래인식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모든 구성 및 종합의 가장 근본적인 형식이 무엇인지 찾고자 하고 있다.

 하나의 주관성(그런데 오직 발생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주관성)의 발생을 위해 필증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서의*, 특수한 의미에서 초월론적인 것은 종합들의 몇몇의 다른 방식들인데, 이 종합들은 말해진 것처럼 모든 대상성들의 시간형식을 구성하는 종합과 하나되어 경과하며 그와 함께 시간내용, 시간으로써 형식화된(zeitgeformt) 대상적 내용물과도 함께 관계되어있어야(mitbetreffen) 한다. 이미 칸트가 거의 압도적인 천재성(그가 현상학적 문제설정과 방법들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곧 압도적인 [천재성])으로 비판의 초판[A판]의 초월론적 영역에서 초월[126]론적 종합의 최초의 체계를 윤곽지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때 시야 속에 오직 공간세계적, 의식초월적 대상성의 구성이라는 고차원적인 문제만 가지고 있었다. 그의 물음은 그러므로 오직, 자연의 사물들 그리고 하나의 자연 일반이 현출할 수 있게 되기 위해 종합들의 어떤 방식들이 주관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가다. 그러나 [칸트의 한정된 문제군보다] 더 깊이 놓여있고 본질적으로 선행하는 것은 내적인, 순수하게 내재적인 대상성의 문제와 소위 내면세계(Innenwelt)의 구성의 문제다. 내면세계의 구성이란 곧, 그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모든 존재의 장으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주체의 체험류의 구성이다. 공간세계가 의식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달리 말해] 공간세계가 오직 내재 속에서 수행되는 특정한 종합들을 통해서만 우리를 위해 단지 현존하는 것 그리고 좌우간(irgend) 표상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것이 명백하다. [바로] 필연적인, 가장 보편적인 구조들 그리고 내재의 보편적으로 가능한 종합적 형태들에 대한 교설이 구성적 세계문제의 전제라는 것이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 내재 속에는 원칙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종합들이 찾아질 수 있다. 말해진 것처럼 특별히 초월론적 시간종합들을 넘어서는 내용적인 종합들(über die transzendentale Zeitsynthese hinausreichend), 그리고 그 종합들의 보편적인 방식에 따라 초월론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통찰 가능한 그와 같은 것으로서의 종합들이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합들을 찾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가 된다.

[요약] '어떤 종합들이 곧 주관성의 발생을 가능하게 하는가? 달리 말해, 어떤 종류의 종합이 내재적 대상성을, 내면 일반을, 주관의 체험류를 구성하는가?'와 같은 물음에 답하는 것은, 초월적 세계의 구성과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전제가 된다. 왜냐하면 초월자는 내재의 구성(되어있음)을 경유해서만 의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에 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시간을 구성하는 종합 하에서는 모종의 시간대상 자체와 전체(für sich und im ganzen)에 귀속하는 대상의 파지와 예지의 종합만이 고찰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완전한 삶-현재 역시 그것[삶-현재]을 포괄하는 종합으로부터의 통일체라는 점을 말이다. 나아가, [하나의] 삶의 계기에서 [다른] 삶의 계기로 앞으로-흘러감 속에서 거듭 하나의, 그것도 하나의 고차원적인 종합이 수행된다는 점을 말이다. 이러한 종합들을 통해 보편적으로 구성되는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내재적 대상들의 공존과 연쇄라는 표제 하에 알려져있다. 삶의 모든 계기에서 우리는 모종의 시간적 대상성들을 구성된 것으로서 가지며, 모든 시간대상성은 당장의 지금을 당장의 파지적 과거(Gewesenheit)의 지평과 당장의 예지적 [127] 지평과 하나로서 가진다. 이러한 당장의(momentan) 구조는 흐름 속에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종합적으로 하나이며, 바로 그것에 의해(dadurch) 이러한 시간대상을, 예를 들어 하나의 지속하는 음을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서[동일자로서] 구성하면서 그러하다. 그러나 삶의 동일한 구체화 속에서, 항상(je und je) 동일한 삶의 계기 속에서 그리고 그 삶의 계기의 앞으로-흐름 속에서 또 다른 대상들이, 예를 들면 하나의 다른 음, 색깔 등등이 모두 하나의 평행하는 구성적 구조를 통해 구성될 수 있다. 이와 함께(hierbei) 필연적으로 동시성이 구성된다. 그와 같은 모든 자료 [각각을] 위해 하나의 시간성 자체가, [마치 그것이] 다른 것의 시간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구성되는 것은 하나의 지금, 하나의 그리고 다른 자료들의 지금을 동일성통일성(Identitätseinheit)으로 가져와주는 그런 하나의 지금이다. 그리고 양편의 자료들을 위한 주관적인 시간양식의 전체 형식구조도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러므로 동일한 지금으로부터 구성되는 모든 자료들을 위한 [주관적인 시간양식의 전체 형식구조도] 동일성 합치 속에 존재한다--다겹의 근원인상들은 하나의 근원인상과 연결되며, 이러한 분리 불가능하게 하나인 것은 하나로서 흐르는데, 그래서 모든 특수인상들은 하나의 절대적으로 동일한 템포로 흘러야 하도록 그렇다. 이는 많은 대상들에 많은 시간들이 상응하지 않으며, 도리어 다음의 명제가 성립하도록 한다: 대상들의 모든 시간경과가 그 속에서 경과하는 단 하나의 시간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지금에는 하나의 보편적인 종합, 그를 통해 하나의 보편적인 구체적 현재, 그 안으로 모든 떨어져있는(abgesetzt) 개별자들이 편입되는 현재가 구성되는 종합이 상응한다. 나아가: 시간적 방향지음(Orientierung) 속 지금의 흐름은 동시에 구성하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추가적인 보편적인 종합, 그를 통해 경과하는 현재들이 하나의 연쇄의 통일성으로 의식되는 종합에 대해 가르쳐준다.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잇따르는 것으로서 근원적으로 의식되는 것은, 그러므로 근원적으로 종합적인 통일성으로부터 동시적으로 그리고 연쇄적으로(suksessiv) 존재하는 것으로서 구성된다.

[요약] 개별적 시간대상(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삶 전체가 "모든 내재적 대상들의 공존과 연쇄" 그리고 동시성과 잇따름을 구성하는 근원적 종합의 산물이다. 이렇게 종합되는 시간은 수적으로 유일하다.

 이것이 가장 보편적이고 무엇보다 최초인 종합이다. 이 종합은 수동성 속에서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의식되어 생성해가는 특수한 모든 대상들을 [...] 필연적으로 결합시켜준다. 우리는 이때 우리의 주목하는 시선을 다음에 향하게 했다. 모든 차별화된 그리고 차별화 가능한 대상들에 필연적으로 시간적 통일성을 주는 것에: 함께함(miteinander)에. 시간의식의 종합은 그러나 당연히 (128) 자신 안에 또한, 그 속에서 하나의 대상을 동일하게 하나인 것으로서 또는 (대등한 것인데) 지속하면서 하나인 것으로서 흐르는 다양체들 가운데서 구성하는 종합을 이미 가능한 공존들과 연쇄의 전제로서 품고 있다.

[요약] 시간의식의 종합은 모든 자기동일적 대상성들이 하나의 시간 속에서 함께 흘러가도록 해주는 "가장 보편적이고 무엇보다 최초인 종합"이다.

 이제 시간의식이 동일성통일성의 또는 대상성의 구성의 근원장소(Urstätte)라면, 그것은 그러나 단지 생산적인[산출하는] 의식의 하나의 보편적 형식일 뿐이다. 한갓된 형식은 물론 하나의 추상이다. 그래서 시간의식과 그것의 성취에 대한 지향적 분석은 처음부터 추상적인 것이다. 그 분석은 오직 모든 개별적 대상들과 대상다양성들의 필연적 시간형식에만, 또는 그에 상관적으로 시간적인 것을 구성하는 다양체들의 형식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만 포착한다. 대상은, 의식적으로 이렇게 그리고 저렇게 구성되는 것으로서 지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은 그것의 내용의 지속이며, 대상이 그것의 내용의 지속이라는 점, 이 대상에서는 내용적으로 이러하고 저 대상에서는 내용적으로 저러하다는 점은 의식 자체 속에서 구성되며 그러지 않았더라면 의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더 많은 대상들이 내용적으로 차별화되어 거기 있는 한, 또는 하나의 대상이 내용적으로 나뉘어져있거나 나뉘어질 수 있는 한, 우리가 개별적인 대상을 가지거나 우리에게 개별적인 대상이 자라나는 한, 공존과 연쇄의 관계들 속 뒤섞임/함께함(untereinander)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때그때마다의 대상에 내용적 통일성을 주는 것, 하나의 대상 그리고 다른 대상의 차이를 내용적으로 성립시키는 것, 나아가 의식을 위해서 그리고 의식의 고유한 구성적 성취로부터 [부분으로] 나눔과 부분관계를 의식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것 등등--시간분석만으로는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줄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분석은 바로 그 내용적인 것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da sie[Zeitanalyse] ja eben von dem Inhaltlichen abstrahiert). 그래서 시간분석은 모종의 방식으로(irgendwie) 내용의 특수성과 관계하는, 흐르는 현재의 그리고 현재의 체험류의 필연적인 종합적 구조에 대해 아무런 표상도 부여하지[제공하지] 않는다.*

[요약] 그러나 시간은 인식의 형식일 뿐이기에 시간분석만으로는 인식 대상의 내용에 대해 알 수 없다. 

*발생적 현상학이라고 해서 내용을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정적 현상학만이 형식을 취급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현상학적 접근을 통해 수행되든지 간에 시간 분석은 형식적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