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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각주들

편집부 책망, ⟪어느 대학원생 x의 책망⟫


 편집부 책망의 ⟪어느 대학원생 x의 책망(2024)⟫의 필진에 '철학과 x'로서 참여했습니다. 철학과 대학원생으로서의 즐거움과 애환을 담은 글입니다. 본가에 오랜만에 들른 나머지 실물을 너무 늦게 받아보았네요. 배포가 완료된 독립출판물이라 (일부 수정된 최종적) 전문을 업로드합니다.


초침과 손과 당신의 얼굴에 대하여

 선택의 이유는 선택 자체보다 앞서야 한다고들 생각된다. 어떤 이유가 먼저 떠오른 다음 뒤따라 선택이 이루어진다. 또는 어떤 이유가 있으므로, 그에 의거해 선택이 이루어진다. 시간적으로 이해되든, 논리적으로 이해되든 이유의 선행성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와 같은 사소한 선택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직업이나 배우자의 선택, 윤리적인 결단과 같이 삶의 경로를 비틀 수 있는 큰 선택에 있어서는 더더욱 이유가 미리 마련되어있어야 할 것 같다. 이유 없이 또는 이유에 대한 뚜렷한 인지가 없이 그처럼 중대한 선택에 이르러버린다는 것은 삶에 대한 무책임함을 넘어 무관심인 양 비쳐진다. 그러므로 니힐리즘을 피하기 위한 전략은 최대한 많은 선택들에 대하여 최대한 많은 이유들로 무장해두는 것이 된다.

 하지만 사람은 이유를 생산하는 기계 이상이다. 합리적으로만 돌아가는 삶은 역설적으로 실존의 부품 중 한 개가 고장나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에 우리는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곤 한다. 찾지 못할 뿐더러, 이유가 찾아지는 편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애인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속성 x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을 조건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오히려 관계의 빛깔을 퇴색시킨다. 차라리 한참을 사랑에 빠져있다가 어느 날 함께 맞게 된 햇살 한 줌, 비 한 방울에 불현듯 아, 이 사람은 좋은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 깨닫게 되는 쪽이 사랑의 본모습에 가깝다. 사랑을 합리성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권역으로 설정하는 우리네 상식에는 일리가 있다. 사랑은 이유의 선행성이 아니라, 기껏해야 이유의 후행성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내게는 지혜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철학을 제대로 공부해보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의 내게 거창한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무지막지한 애증 같은 것이 있었지, 이유는 없었다. 지금과 달리 딱히 철학의 덕분에 강렬하게 행복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다만 책을 읽다가 카페의 유리창에 의해 굴절된 빛이 ⟪이념들⟫ 1권의 하얀 종이 위에 무지개 색깔로 펼쳐진 어느 순간, 내 삶은 방금의 한 순간만으로도 충분히 정당화된 게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도 자신 있고 떳떳하게. 언어적인 표현에서는 모순인 것, '근거 없는 정당화’와 같은 것이 너무나 생생하게 체험될 때,  어쩌면 세계가 근원적으로는 명제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말은 사건에 이차적으로 덧붙여지는 데 그치지만,  사건과 말 사이의 이음새를 최대한 매끄럽게 만드는 것이 철학자의 직업 활동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철학자로서 철학을 공부하는 생활에 관해 조심스럽게 말해볼까 한다. 생활은 행동이 아닌 생각의 연속체로도 정의될 수 있다. 이어지는 글은 따라서 내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에 대한 리포트 정도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인간의 조건,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라는 현상의 가능조건에 대한 앎 비스무리한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앎 비스무리한 것의 재료를 갖추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것은 물론 당장에 이르러 시작점을 돌아보니 설핏 떠오른 생각이다. 마치 한참을 탐닉하다 그제야 욕망을 발견한 사람처럼.


 (i) 시간성에 대하여. 사람의 기억이 특정한 기간마다 리셋되지 않는다는 것은 축복이거나 비극이기 이전에 존재의 건조한 전제와 같은 것이 아닐까? 나의 기억은 나의 위장이나 간만큼이나 나라는 생명의 작동에 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지, 정, 의라는 고전적인 구분에 기대도 괜찬다면—기억 없이는 지각이 성립하지 못한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저 연분홍 색의 무언가가 ‘꽃’으로 지각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감각과 특정한 개념 사이의 반복적 연상, 심지어는 통일에 대한 기억이 요구된다. 기억 없이는 감정도 성립하지 못한다. 그 자체로 특정한 감정과 반드시 연결되는 사건은 없다. 감정을 산출하는 함수는 사건 자체의 성질에 더해 나의 고유한 성격 역시 독립변수로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성격은 내 기억, 기억 속의 사건들이 형성하는 무엇이다. 셋째, 기억은 당장의 이런저런 행동을 단발적인 몸짓이 아니라 그 의미가 시간의 흐름을 관통해 지속되는 행위로 승화시켜준다. 그렇게 행위는 (반드시 과거로부터의 지속성을 전제하는) 성격, 미학적이거나 도덕적인 커미트먼트 등을 육화해 보인다.

 그러나 존재는 뒷면뿐만 아니라 앞면 역시 가지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꿈이 있기 때문에 내 지각은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순수이성비판⟫은 칸트 전공자와 라면 받침을 찾는 사람에게 각각 상이한 의미로 지각될 것이다. 달리 말해 지각은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그것을 관장하는 특정한 기획 하에서만 자신의 자리를 할당 받는다. 한편 내 감정의 종류와 강도를 결정하는 나의 성격은 내가 어떤 꿈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달리 규정된다. 마지막으로 내 행위는 내 꿈의 표현이다. 그 어떤 꿈도 표현하지 않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는 익명적인 데 그친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억과 꿈 사이에 부유하는 어느 물질과 같은 것이다. 과거의 기억 쪽으로 기울 수도, 미래의 꿈 쪽으로 내달릴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 둘의 경계 내부만을 도는 운동을 우리는 현재라고 부른다. 이 운동은 자유로울 수도,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 기억과 당장의 운동 그리고 꿈이 통일된 서사를 이루는 사람만이 자유를 향유한다. 반대로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단절되어있는 삶, 이를테면 추억과 기획의 즐거움에 무감한 삶은 자유가 결핍된 삶이다. 철학사에서 흔히 자유는 외적인 강제의 유무와 관련해서 정의되어왔다. 그러나 ‘강제의 부재’는 자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가리키는 데 그친다.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내 내면의 삶과 내 삶의 외면 사이 매개 없고 단층 없는 합일의 사태에 있다. 기억과 꿈으로 이루어진 나의 내면이 당장의 실천으로 이루어진 나의 외면에 의해 직접적으로 표현될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롭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 숙명 하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는 숙명이나 우연성이 아닌 표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ii) 육체성에 대하여. ‘몸을 쓰다’라는 표현에는 어딘가 어폐가 있다. 마치 몸이 몸의 주인—그게 무엇이든지 간에—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도구인 양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육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육체이다. 몸을 움직여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서 책을 읽는다. 몸을 움츠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서 밤을 통과한다. 나는 나의 몸이며, 나의 몸이 곧 나다. 그렇기 때문에 실은 ‘몸을 쓰다’라는 표현뿐만 아니라 ‘나’와 ‘나의 몸’의 지시체를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하는 대부분의 철학적 표현들은 사태를 왜곡하고 만다. 그러나 몸의 철학에서 이러한 왜곡은 피할 수 없다. 내가 비육체가 아닌 육체이기 때문에 비로소 겪는 현상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나의 육체됨이 나에게 특별히 미치는 영향을 기술해야 할 텐데, 이는 불가피하게 ‘나의 육체’와 ‘나’가 마치 서로 다른 사태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분명 어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인 문장들이 있다. 예컨대 ‘나는 오직 나의 육체를 매개로 해서만 대상과 관계 맺고 세계 내에 존재한다.’

 육체는 내게 귀속된 또는 내가 배워낸 모든 능력의 가능조건이다. 육체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은 바보 같은 짓이며, 이 이상 논증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육체는 내 능력의 한계이기도 하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공간, 내가 출 수 없는 춤, 별안간 몰려드는 피로 등을 통해 나는 나의 유한성을 확인한다. 육체로서 존재하는 한 나는 문자 그대로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내가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그것도 내 세계의 주인조차 아니라는 것이 육체의 교훈이다. 그 규칙성으로 인해 이 교훈을 가장 날카롭게 각인시키는 현상이 바로 PMS나 생리통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성인 나는 한 달의 최대 절반은 집어삼키는 불편감과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진통제를 먹는 것은 고통을 달래는 행위이지, 고통에 저항하는 행위가 아니다. 저항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생리통과 달리 일회적이지만 저항의 불가능성, 순응의 강제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은 죽음이다. 능력과 무력 모두의 근원으로서 육체는 나로 하여금 시간을 경험하게 해줌과 더불어 그 시간의 끝을 지정한다.

 (iii) 타자의존성에 대하여. 카뮈는 시지프의 서사를 개시하면서 철학에서 이를테면 그 어떤 형이상학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자살에 대한 탐구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자살의 문제만큼이나 철학적 탐구를 요하는 현상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짝사랑이다. 짝사랑은 타자에 대한 경험의 아주 특수한 유형이 맞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타자경험을 대변한다. 짝사랑을 통해 타자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잔인함을 동시에 알려오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자신의 아름답기-때문에-잔인함과 잔인하기-때문에-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알려오는데, 흥미롭게도 이 두 속성은 타자 일반의 속성이다.

 아름다움과 잔인함은 권력 없이는 체현되지 못한다. 타자가 권력을 가지는 이유는 내게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를 오직 그만이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는 인정이며, 인정은 다름아닌 현실성의 근원이다. 내 눈에는 보이는 어떤 사람의 형체를 믿을 만한 다른 사람 모두가 보지 못한다고 하자. 만약 그렇게 아무도 내 지각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첫째, 내 감각을 의심해야 하거나 아니면 둘째, 현실 바깥의 존재자, 그러니까 유령을 보는 것이다. 타인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만의 현실을 가지는 일은 광기라 낙인 찍히며, 한때 광기로 여겨지던 것이 더 이상 광기로 여겨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도 역시나 타인의 인정이다. 인간에게 현실은 결코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타자의 인정을 거쳐 간접적으로만 주어진다. 달리 말해 현실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획득되어야만 하는 무엇이다. 타자의 아름다움은 현실을 제공할 수 있는 힘에, 잔인함은 현실을 박탈할 수 있는 힘에 기인한다. 지나치게 끈질긴 구애는 수락될 경우에만 겨우, 정말이지 겨우 사랑이 되고, 거절 당할 경우 아예 사랑의 지위를 상실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철학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지식에 해당하는 인간의 시간성, 육체성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의존성이 모두 철학의 한계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철학을 날것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실천의 집합으로 정의할 경우, 시간과 육체, 타자는 모두 오류의 근원으로서 철학의 목적 자체를 좌초시킨다. 과거는 왜곡되어 전해지고, 미래는 그에 관한 지식은커녕 이따금 정보조차 허락하지 않는 불확실성으로 점철돼있다. 육체는 인간의 감성과 지성 모두를 한정된 관점 하에서만 작동하도록 제약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비인간의 세계를 결코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며, 과학과 공감의 힘으로 아무리 무장한다 한들 휴머니즘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타인의 존재 또한 비극적 오류를 낳는데, 나는 타인의 현존에 대해 내가 희망하는 만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나에게 해석의 대상이지 앎의 대상이 아니며, 그 해석마저 내 자아라는 아주 특수한 체계에 입각해서만 이루어진다. 타인의 마음에 대한 경험을 자아가 내적으로 경험해온 바에 대한 유비로 설명하는 후설의 타인경험Einfühlung 이론에 가해지는 주된 비판 가운데 하나는 그와 같은 이론이 타자를 자아에 흡수시켜버린다는 것이다. 타자를 타자로서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테면 자아의 분신으로서 여기게 된다는 레비나스 식 논리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타자를 타자로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 오히려 오만한, 따라서 비윤리적인 입장이다. 타자가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그가 나의 인식의 한계 하에서만 경험될 수 있음은 아무리 불만족스러울지언정 겸허하게 수용해야 할 인간적 현실이다. 저 한계로부터 전적으로 탈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나됨의 경계를 확장하고자 마음을 개방하는 일, 그런 헛된 정열이야말로 공동체적 삶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과 육체, 그리고 타자를 철학의 적으로 간주하는 것만큼 비철학적인 태도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진리가 전적으로 드러나버리는 일을 막음으로써 세계의 신비를 수호하는 바리케이드와 같다. 절대지를 소유한 신이 지상에로 내려와, 너희가 궁금해 해온 모든 걸 내가 알려줄게, 우주에 시작과 끝이 있는지, 인식과 실재가 일치하는지, 정의와 자비가 공존할 수 있는지 내가 다 가르쳐줄게, 이렇게 유혹한다 해도 초대에 응할 철학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자 하는 만큼이나 모르고자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존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을수록 삶은 놀라운 것, 심지어는 종교적인 것이 된다. 지혜에 대한 사랑을 겉으로 내세우지만 은밀하게는 무지에 대한 사랑을 키우며 사는 것이 철학자의 사생활이 아닌가 싶다. 진리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과 불가능성에 대한 긍정 사이의 진자운동, 그러니까 한없이 위를 향하는 점프가 아닌 무한한 스윙의 즐거움 때문에 내가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게 아닐까. 멀미조차 즐겁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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