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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자크 데리다, <목소리와 현상> 서론 요약

Jacques Derrida, trans. By Leonard Lawlor, Voice and Phenomenon: Introduction to the Problem of the Sign in Husserl’s Phenomenology,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11, pp. 3-14 요약 및 발제

Introduction

 데리다에 따르면 ⟪논리연구⟫에서 작동하는 전제들은 ⟪이념들⟫ 1권, ⟪형식논리학과 초월론적 논리학⟫, 심지어 말년의 ⟪위기⟫에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논리연구⟫는 형상적 환원*과 초월론적 환원**을 통해 비로소 성립하는 후설 철학의 핵심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저서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 1논리연구는 기호(Zeichen, sign)의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면서 시작된다. 후설에 따르면 기호는 ①표현(Ausdruck, expression)을 가리킬 수도, ②지시(Anzeichen, indication)를 가리킬 수도 있다. 후설은 이와 같은 ‘본질적 구분’이 사태 자체의 기술에 불과하며, 모든 전제—형이상학, 심리학, 자연과학적 전제—로부터 철저히 자유롭다고 자신한다. 심지어는 언어와 같은 기호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마저 그에 대한 판단이 중지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러한 ‘무전제성(Voraussetzungslosigkeit, absence of presupposition)’의 원칙이 ⟪논리연구⟫의 시작에서부터 이미 위반되어있음을 꼬집는다. 데리다의 눈에 후설은 줄곧 그리고 암묵적으로 특정한 형이상학적 전제를 운용하고 있으며, 해당 전제는 비단 ⟪논리연구⟫뿐만 아니라 현상학의 핵심을 구성한다. 해당 전제는 바로 후설이 “모든 가치의 원천이자 보장”으로 제시한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명증성****, 충만하고***** 원본적인 직관에서 주어지는 현재 혹은 의미의 현전(presence)”(이 정당화의 최종적이고 믿을 만한 원천이라는 확신)과 관련되어 있다(4).****** 후설은 자신의 현상학적 기획이 형이상학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사태 자체에 대한) 인식(knowledge, Erkenntnis)의 이념을 활용한다는 것, 나아가 (사태 자체에 입각한) ‘진정한’ 인식이론(Erkenntnistheorie, theory of knowledge)을 지향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특정한 형이상학에 사로잡혀 있는 행태다. 쉽게 말해 형이상학에 대한 인식 비판이라는 그의 현상학적 기획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형이상학이다.

*eidetic reduction(eidetische Reduktion, Wesensanschauung) i.e. 자유변경의 가운데서 본질을 직관하는 방법론

**transcendental reduction(transzendentale Reduktion) i.e. 세계 일반의 존재 정립에 대한 판단중지를 통해 자연적 태도로부터 탈피하여 초월론적인 경험의 영역에로 진입하는 방법론

***originary(originär) i.e. 회상과 같은 재현의 산출물은 갖고 있지 않은,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눈앞에’ 직접 현전하는 어떤 원본의 특징. 원본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사태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evidence(Evidenz) i.e. 진리에 대한 체험으로서, 넓은 의미에서는 경험 일반을 가리킨다. 단, 후설의 체계 내에서 상상의 경험마저 명증성을 가지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full(cf. Fülle) i.e. 비어있고 공허한(leer) 지향과 대비되어 ‘충만한(voll)’, 곧 충족된(erfüllt) 지향이 가지고 있는 특징. 예를 들어 남산 타워를 단순히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작용과 남산 타워를 직접 지각하는 작용을 비교해보면, 전자의 지향은 남산 타워에 대한 직관이 결여되어 있어 공허하지만, 후자의 지향은 남산 타워라는 사태 자체에 대한 직관에 의해 ‘채워져’, 곧 충족되어 있어 충만하다. 후설은 모든 인식을 충만성에 가닿고자 하는, 직관을 향한 일종의 노력으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지향은 노력의 발함이고, 충만성은 그와 같은 노력에 상응하는 성과이다. 한편 직관에 가닿지 못하는 지향은 ‘한갓된(bloß)’ 지향으로 이해된다.

******the principle of all principles(das Prinzip aller Prinzipien): ⟪이념들⟫ 1권의 24절에 따르면 “[무언가를] 원본적인 방식으로 부여하는 각 직관이 지식의 정당한 원천이고, “직관”에서 원본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 자신의 현실성에서 몸소) 스스로를 현전시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단순히 스스로를 부여하는 것 [자체로] 취해져야 하며, 그러나 오직 거기서 그것이 자신을 부여하는 한계 내에서만 그렇게 되어야[취해져야] 한다.”(Hua III/1, 51)

 물론 후설은 ⟪데카르트적 성찰⟫에서 현상학이 ‘진정한’ 형이상학, 즉 존재에 대한 궁극적 지식을 제공하는 학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명시한다. 후설이 표방하는 진정한 형이상학은 구체적 직관을 도외시하고 사변에 골몰하는 ‘보통의’ 형이상학과 대비된다. 보통의 형이상학은 데리다가 “이념성(ideality)의 진정한 양태, 존재하는 것(that which is), 그것의 현전의 동일성 속에서 무한정하게 반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바에 대한 도외시로 특징지어진다(5). 이것은 “살아있는 현재의 현전”(5) 또는 “초월론적 삶의 자기현전”(6)이라고도 불리는 바인데, 이는 그 대상이 자연적이고 세속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전하면서 반복적으로 확증 가능한 명증을 제공해주는 초월론적 경험(의 연쇄)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진정한 형이상학은 초월론적 태도에서 (순수하게) 주어지는 노에마**가 무엇을 알려주느냐에 입각해 성립해야만 하고, 오직 그로부터만 정당화될 수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후설의 주장은 ‘순수한 현전’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에 특히) 시간화와 상호주관성의 구성에 대한 후설의 기술에는 “[현전으로] 환원 불가능한 비-현전”이, “[초월론적] 삶[이]-아님”이, “살아있는 현재가 자신에게 귀속되지-않음”이, “비-원본성”이 도사리고 있다(6). (쉽게 말해, 후설이 말하는 현전은 불순하다.***)

*이 대목에서 데리다는 형상의 성격과 초월론적인 것의 성격을 혼동하고 있다. 그러나 후설에게서 형상은 자연적 태도에서도 성립할 수 있는 것이며, 모든 초월론적인 것이 형상적인 것도 아니다(‘초월론적 사실’이 있다). 

**noema i.e. 의미대상(Sinnesobjekt) 또는 대상적 의미(gegenständlicher Sinn)로, 초월론적 경험의 대상적 상관자(cf. 서부 연안학파와 동부 연안학파의 노에마 논쟁)

***데리다는 ⟪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에서 이미 기원으로서의 초월론적인 것의 불순성, 즉 그것의 세속화 또는 오염을 꼬집은 바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모든) 기원 속에는 파생물이 이미 내재되어있으며, 그렇다면 (모든) 기원은 이미 오염되어, 이미 세속화되어 있기에 “초월론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구별은 붕괴되고, 이와 함께 철학의 모든 근본적 토대의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붕괴될 것이다. [...] 이 무한한 모순이 현상학적 시도의 동기인 동시에 최종 의미일 것이다(자크 데리다, 심재원 • 신호재 옮김, 『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 그린비, 2019, p. 23).”

 현전의 불순성은 특히 두 가지 계기에서 나타난다. 첫째는 그 정체성이 반복적으로 확증 가능한 시간적 대상의 구성 속에서 파지가 재현(현전화, re-presentation, Vergegenwärtigung)으로 넘어가는 지점이고* 둘째는 파생현전(appresentation, Appräsentation)을 통해 타 자아가,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상호주관성을 통해 객관성이 성립하는 지점이다.** 이 두 지점들을 특징짓는 재현과 파생현전은 현전의 변양태(modification, Modifikation)로서 (비-현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전을 조건 짓는다. 달리 말해 궁극적인 정초의 역량을 가진다는 현전이 사실은 (순수하게 근원적인 것이 아니며) 비-정초적인 것(non-foundation)에 의해 규정된다(decide). 이 사실을 특권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후설의 기호 개념이다.

*재현(현전화, re-presentation, Vergegenwärtigung): 회상(과 데리다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상상에서와 같이, 현전이 아닌 것이 마치 현전인 것처럼 의식에 주어지는 작용

**(타 자아의) 파생현전(부대현전, appresentation, Appräsentation): 타 자아의 신체의 직접적 현전에 의해 신체 속에 깃든 영혼이 간접적이고 파생적으로 현전되는 작용

 기호와 관련하여 물어져야 할 질문은 “기호에 대한 반성을 논리학에 종속시키는 결정을 우선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나아가 “만일 기호의 개념이 논리학적 반성에 선행한다면 […] 기호의 개념 자체는 어디서 오는가?”이다(6). 이는 인식이론이 (기호로서) 언어의 본질과 근원에 대해 말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의 문제에로까지 이어진다. 후설은 인식이론을 통해 또는 논리학이나 합리성의 지평 안에서(만) 언어를 탐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너무나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해당 믿음의 결과로 후설은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구 일반을 도외시하게 되었으며, 초월론적인 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세속성이라는) 문제를 주제화하지도 않았다.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동원하던 기존의 언어와 현상학의 혁신적 언어는 (후설의 자신감 또는 바람과 달리) 분리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해당 믿음의 결과로, 즉 “현전으로서의 존재의 텔로스”와 동일한 “언어의 텔로스의 정상성으로서의 논리성으로부터 시작함으로써” 후설은 언어의 본질을 사실상 미리 (독단적으로) 규정해버리고 만다(7). 쉽게 말해, 언어의 목적이자 귀속처를 현전으로 잘못 두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후설이 천착하는 바가 (언어에 해당하는) 순수 문법과 순수 논리학 사이의 (차이 및) 관계라는 문제 그리고 말뜻(Bedeutung)의 구성이라는 문제, 나아가 의미있고 부조리하지 않은 대화/담론을 가능케 하는 규칙들의 체계로서의 문법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과제라면, 그로써 탐구되는 문법의 아프리오리(한 법칙)은 언어의 아프리오리(한 법칙)의 전부가 아니다. 후설이 천착하는 바는 “순수한 논리적 문법”에 그칠 뿐, 언어 전체의 본질을 포착하는 데는 실패한다(7).

 한편 후설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칸트적 이념이자 텔로스로서의 현전의 개념을 복권시킨다. 이러한 개념 하에서 현전하는 대상은 의식에게 무한정한 반복 가운데서 동일자로 확증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념적 대상으로서의 노에마가 이념적 의식으로서의 초월론적 의식에게 (있는 그대로) 현전할 수 있다. 이때 현전하는 것, 곧 노에마는 (자연적) 세계 내에 현존하는 무엇도, 의식에 내실적으로(reell)* 내재하는 무엇도 아니면서, 무한정한 반복 또는 그것의 가능성을 통해 이념으로 격상되는 무엇이다. 데리다는 이념화를 가능케 하는 그와 같은 반복이 현존자와 그것의 죽음이 맺는 관계와 관련되어있음을 암시한다. 이에 따라 “언어는 정말로 현전과 부재 사이 이 유희의 매체”로서 대두된다(9).** 데리다에 따르면 언어야말로 (세속적) 삶과 (초월론적) 이념성이 그 속에서 통일될 수 있는 무엇이다. 이 테제를 파고들기 위하여 우선, 이념성과 현전을 포착해주는 살아있는 음성(phonē)으로서의 표현 또는 기호작용(signification) 그리고 삶에 대한 철학, 곧 생의 철학으로서의 현상학 일반의 성격이 탐구되어야 한다.

*reell i.e. 어떤 것이 부분으로서 실재하는 성격. 이를테면 코기타치오네스로서의 작용은 의식에 내실적으로 실재하지만 코기타툼으로서의 대상은 의식에 (내재하되) 내실적으로 실재하지 않고 지향적으로 내재한다. 이로부터 노에마의 본성은 ‘초월적 내재’라는 흥미로운 테제가 따라나온다.

**Q. 이 대목만 읽어서는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후설의 철학이 생의 철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서 죽음과 세속성에 대한 기호작용이 단순히 우연적이고 경험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미의 원천 일반이 언제나 살아있는 사물의 작용으로서, 살아있는 존재자의 작용으로서, 생동성(Lebendigkeit)으로서 규정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9) 생동성은 삶(Leben), 체험, 살아있는 현재, 정신성과 같은 현상학의 핵심 개념과 관계되어있으며, 무엇보다도 생은 경험적 삶과 초월론적 삶의 통일체로서 초월론적 환원의 손아귀 안을 벗어난다. 이 경우, 두 삶이 완전히 이질적일 수 있는지가 문제시된다. 여전히 단일한 생의 개념이 둘 사이에 공통적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설이 순수 심리적인 것과 순수 초월론적인 것 사이의 ‘평행관계(parallelism, Parallelismus)’이라고 표현한 바에 대한 심화된 탐구가 필요한 이유다.

 모든 체험의 본질을 탐구하되 (자연적 태도에서 이루어지는 세속학인) 현상학적 심리학*과 초월론적 현상학 사이의 차이, 둘을 각각 개시하는 현상학적 심리학적 환원과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 간의 차이도 더불어 의문시된다. 후설은 두 학문의 영역이 완전히 겹침에도(coincide) 불구하고 둘 사이에 궁극적인 차이가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만일 이 차이, 초월론적 질문을 가능케 하고 그리고 (초월론적인 것에로 향할) 자유의 토대가 되어줄 그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때 저 차이는 존재론적인 것이어도, 자연적인 것이어도 안 된다. 예를 들어 초월론적 자아와 세속적 인간 자아는 존재론적으로 동일하고 자연적으로도 일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월론적 자아는 세계화하는 자기통각(verweltlichende** Selbstapperzeption) 또는 자기객관화(Selbstobjektivierung)을 통해서만 비로소 세속적 인간 자아가 될 수 있다. (쉽게 말해, 두 자아는 같되, 같지 않다.)

*Phenomenological Psychology(phänomenologische Psychologie): “현상학적 심리학은 심리적인 것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사실학이 아닌, 사실뿐만 아니라 사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도 타당하게 적용되는 아프리오리를 탐구하는 본질학이다. […] 또한 현상학적 심리학이 심리적인 것의 아프리오리를 탐구하는 방법론은 본질 직관 및 지향적 분석이다. 요컨대 현상학적 심리학은 심리적인 것 또는 정신에 대한 영역적 존재론으로서 개인적인 정신이든, 공동체의 의사로서 집단적인 정신이든, 자연적 물체에 문화적 의미로서 깃든 정신이든지 간에 어떤 것이 정신으로서 성립하기 위해 갖춰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주체성의 본질에 대한 앎이야말로 기존의 자연과학적 심리학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자, 자연과학적 심리학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열쇠이다. 그런데 후설은 심리적인 것에 대한 귀납적이고 경험적인 접근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자신의 목표와 의미, 타당성의 규범을 심리적인 것의 본질이 아닌 물리적인 자연의 본질로부터 길어온다는 메타바시스의 문제를 지적할 뿐이다. 후설은 현상학적 심리학이 확립되면 심리적인 것에 대한 귀납적, 경험적 탐구들은 규범적 토대를 획득함으로써 자신이 나아가야 할 옳은 방향을 찾게 된다고 주장한다. […] 현상학적 심리학이 부상한 배경과 그것이 영역적 존재론으로서 가지는 정체성이 확고해지고 나면, 그에 따라 그것의 구체적인 설립의 과정을 이해해볼 수 있다. 앞서 우리는 현상학적 심리학이 지향적 분석을 활용해 심리적인 것 일반을 탐구한다고 밝혔다. 지향적 분석이란 “어떻게 심리적인 삶이 그리고 특별히 인식하는 자가 자신 안에 그리고 자신의 아프리오리한 본질적 종류에 따라 지향적 성취들을 수행하는지”에 대한 기술이다(Hua IX, 40). 그러나 지향적 분석은 우리의 작용삶(Aktleben)에 대한 한갓된 내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내성과 달리, 지향적 분석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아와 대상 사이의 의식적 관계를 실재로서의 자아와 실재로서의 대상 사이 “실재적 관계”로 규정하는 습성적인 경향으로부터 탈피해야 하기 때문이다(Hua VI, 238). 지향성은 자아와 대상 그 어느 쪽의 실재성과도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실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환각도 지향적 대상을 가지는 작용이며, 개념상 객관적 시공간에 구속받지 않을 신마저 만일 그가 존재한다면 지향성에 의거해 사유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심리학의 수행은 한갓된 내성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상술한 습성적 경향을 억제해줄 수 있는 방법론적 조치를 지향적 분석에 앞서 요구한다. 정신과학을 정초하고자 하는 인식이론가로서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고자 하는 진정한 심리학자가 탐구를 위해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인식을 이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Overgaard(2002), 213 참조). […] ‘객관적인 것을 보는 일에만 수련되어있’는 시선을 ‘순수한 내면성’으로 돌려주기 위해 필요한 저 조치는 판단중지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지향성의 고유한 성취를 포착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심리학은 자아, 대상, 둘 사이의 의식적 관계 중 어느 하나라도 객관적으로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판단들을 중지해야 한다. 이처럼 현상학적 심리학적 탐구를 가능케 하는 현상학적 판단중지의 방법론이 현상학적 심리학적 환원의 절차를 이룬다.”(이하영 2022: 88-90)

**enworlding(Verweltlichung): 초월론적 환원의 반대작용으로, 초월론적 경험/자아/생 등으로 하여금 자연적 경험/자아/생이 되게 하는 과정. 후설의 조교였던 오이겐 핑크에 따르면 세계화는 자동적인 것으로, 초월론적 자아마저 사실은 세계로부터 탈피할 수 없다. 그에 따라 핑크는 세계에 속박된 초월론적 자아와 그와 같은 초월론적 자아를 바라보는(onlook) 비세계적, 비존재적(me-ontic) 초월론적 관찰자를 존재론적으로 구분하는 독창적인 현상학을 펼쳐나간다.

 현상학적 심리학적 환원으로는 결코 빚어질 수 없고, “세계의 총체성이 그 현존에 있어 중립화되고 그것의 현상으로 환원”되게 만드는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서만 빚어진다고 후설이 주장하는 저 차이는 어디서 자라나는가?(11) 데리다(의 올바른 해석)에 따르면 현상학적 심리학은 초월론적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본질학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밝혀내는 본질들은 영혼(psychē)이라 불리는 세속적 영역의 현존을 전제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상 비세속적인 초월론적 자아를 세속적인 영혼과 동일시하는 처사는 초월론적 심리학주의를 낳는다. 그러나 비세속적인 초월론적 자아와 영혼 사이의 차이는 어떤 실재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데리다의 표현으로는 ‘무(nothing)’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세속적인 것과 초월론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언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언어만이 둘 사이의 차이를 표현해줄 수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언어는 언어 [자신]을 감시하는 차이를 감시한다.”(12)

*데리다는 이와 관련해 익살스럽게도 “This war of language against itself is the price that we have to pay in order to think sense and the question of the origin of sense”라고 말한다(12). 이는 오이겐 핑크의 성찰과 맞닿는 부분이다. ⟪제 6데카르트적 성찰⟫의 §10-11을 통해 오이겐 핑크는 비-존재적인 것을 기술하는 언어가 필연적으로 자기-세계화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핑크는 세속적 언어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초월론적인 것에 대한 이해가 적절한지를 보장해줄 수 있는, 존재의 관념에 대한 추가적인 환원을 요구한다. 반면 후설은 단순히 인간적인 언어로부터 초월론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해주는 (인간적) 언어로의 변화란 주제적인 환원 없이 현상학적 작업의 과정에서 현상(에 대한 직관)을 통해 자연스럽게 획득된다고 생각한다(Ronald Bruzina, “Translator's Introduction” to Eugen Fink’s VI. Cartesianische Meditation. Teil I (The Sixth Cartesian Meditations), 1995, Indiana University Press, p. lviii).

 반복해 강조하건대 초월론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차이는 환원에 앞서며 환원으로부터 자유로운 단일한 생의 개념—자기관계(self-relation)—앞에서 무너진다. 만일 저 생이 기존의 언어로써 명명될 수 없다면 그를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현상학은 실제로 발화(speech)에 굉장한 조심성을 보이며, 그것을 세심하게 통제하고자 한다. 이 통제는 로고스와 음성을 본질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아무리 후설이 체험의 선언어적인 층위를 기술하고자**, 데리다의 표현으로는 ‘침묵하고자’ 노력했다 하더라도, 자기의식과 언어의 가능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게다가 의식에 의한 구성작용이 오로지 역사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둘 사이의 분별-불가능성(indiscernability)을 더욱 공고히 만든다. 이 분별-불가능성은 곧 자기현전의 한가운데 “비현전과 차이(매개성, 기호, 지시, 등)”를 도입하고 만다(13). 여기서 비롯하는 어려움에 대응해주는 것이 바로 목소리이다.**** 후설은 (기존의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를 따라) 음성을 특권화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에 내재하는 현전의 불순성 문제를 타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후설이 활용하는 음성은 자연적 신체(Körper)의 음성이 아니라 정신적 신체(Leib)의 현상학적 목소리이다.***** 현상학적 목소리는 세계의 부재 한가운데서 자기 자신에게 현전하며,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자기 자신의 소리를 듣는다. 물론 목소리에 해당하는 바는 글자(word)에도 해당하게 된다. 글자는 기호화하는(signifying) 음성에 기호화된(signified) 개념을 용접시켜주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자에 대한 후설의 안일한 취급은 “형식주의의 순수성”과 “직관주의의 급진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키는 데 실패했다(14).******

*(사견) 로고스=말, 음성=말-아닌-것이라는 구도 하에서, 해당 연결은 언어를 통해 선언어적 체험을 기술하는 현상학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후설에게 단순한 지각은 그에게 아무 언어화가 개입되어있지 않은 선술어적인, 데리다의 표현으로는 ‘침묵하는’ 체험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후설이 선술어적이라고 단언하는 체험들에마저 언어가 개입되어있다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Q. 해당 주장의 정확한 근거는 무엇인가?

****Q. ‘목소리가 음성언어의 역사에 의거해 현전에 대한 감시를 모방한다’는 테제를 이해하지 못했다(“the voice simulates the “keeping watch” over presence”, 13).

*****Leib(보통 ‘the lived body’로 번역됨) vs. Körper(보통 ‘bodily thing’로 번역됨): 여기서 데리다는 자연적 태도 하에서의 몸을 ‘Körper’와, 초월론적 태도 하에서의 몸을 ‘Leib’과 잘못 동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설은 그와 같은 동일시를 결코 의도하지 않았다.

******Q. 어떤 긴장을 일컫고 있는가? 이해하지 못했다.

 데리다는 마지막으로 “의식으로서의 현전의 [잘못된] 특권은 […] 목소리의 탁월성을 수단으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요약한다(14). 그리고 이러한 특권은 (후설의 첫 현상학적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논리연구⟫의 제 1논리연구에서부터 이미 작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