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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2부 요약 및 발췌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Max Niemeyer Verlag Tübingen, 1967. (별도의 메모가 없는 한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참고: Martin Heidegger, trans. by Joan Stambaugh, Being and Time, SUNY press, 2010. &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2014(이하 ⟪강독⟫)

2 현존재와 시간성

§45.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 기초분석의 결과와 현존재에 대한 근원적이고 실존론적인 해석의 과제

 이제까지의 분석은 존재 일반의 의미 및 그것의 탐구 가능성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자 하였다. 이는 “그 속에서 존재 일반과 같은 것이 이해 가능해지는 지평[Horizont]의 노출[Freilegung]”에 대한 시도이기도 했는데, 지평의 노출과 더불어 현존재에게 본질적으로 속하는 능력인 존재이해의 가능성이 함께 해명된다(231). 그런데 현존재의 존재이해에 대한 철저한[radikal] 해명은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이때 ‘근원적’이라는 표현은 부연을 요한다.

 “모든 해석은 그것의 미리-가짐, 미리-봄 그리고 미리-붙잡음을 가진다.”(232) 이 세 종류의 ‘전제들’의 총체[Ganze]를 하이데거는 해석학적 상황[die hermeneutische Situation]이라 부른다. 해석이 특정한 연구의 과제가 되는 경우, 해석의 전제로서의 해석학적 상황이 근본경험[Grunderfahrung]을 통해 미리 밝혀지고 확보되어야 한다.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현존재의 현상적 성격이 미리-가져져야 하고,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미리-보아져야 하며, “그 속에서 모든 존재구조가 솟아날[부각될] 개념성”이 미리-붙잡아져야 한다(232).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존재론적 분석은 해석학적 상황을 현상적으로 적합하게 확보해야 할 뿐만 아니라 현존재의 전체[Ganze]를 미리 가져야만 한다. 이와 더불어 미리 보는 시선은 현존재의 구조계기의 통일성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염려에 대한 기존의 분석은 현존재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포착하지 못했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염려하는 현존재는 “실존하는 한, 가능존재로서 언제나 무언가가 아직 아닌 것으로 존재[seinkönnend je etwas noch nicht sein]”하는데, 이는 현존재를 전체로서 미리-가질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233, 강조는 하이데거).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이해하는 가능존재라는 기존 분석에서의 실존의 이념은 형식적인 것으로서,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 사이의 차이에 대해 무차별했다. 더욱이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에 주목한 뒤로는 비본래적 실존만이 분석되었다. 실존의 이념이 “본래적 가능존재의 실존론적 구조”까지를 포함하지 않는 이상,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은 근원적인 것이 될 수 없다(233).

“In der Vorhabe stand immer nur das uneigentliche Sein des Daseins und dieses als unganzes. Soll die Interpretation des Seins des Daseins als Fundament der Ausarbeitung der ontologischen Grundfrage ursprünglich werden, dann muß sie das Sein des Daseins zuvor in seiner möglichen Eigentlichkeit und Ganzheit existenzial ans Licht gebracht haben.”(233)

 이로써 현존재의 ‘전체로서-존재할-수-있음[Ganzseinkönnen]’에 대한 물음이 개진된다. 현존재는 존재하는 한 아직 무엇인가가 더 될 수 있고, 또 그런 무언가가 될 것이다. 이를 마치 현존재가 그의 삶에서 추후 회수해야 할 미회수금[Ausstand]이 있는 상황으로 (부적절하게나마 일단) 표상해볼 수 있다. 이러한 미회수금에는 세계-내-존재의 끝[Ende], 곧 현존재의 죽음이 포함된다. 죽음은 현존재의 전체성을 규정해주는 무엇이다. 실존론적으로 볼 때, 현존재의 죽음은 현존재가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일 때만 의미를 가진다/성립한다[sein]. 죽음을 향한 존재의 구조가 곧 전체로서 존재할 있는 현존재의 존재구조이다.

 그런데 현존재의 전체로서-존재할-수-있음은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으로 나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의 본래적인 전체로서-존재할-수-있음은 양심을-가지고자-원함 속에 놓여있다. 현존재의 본래적인 전체로서-존재할-수-있음 역시 염려의 양태로서 가시화되기 때문에,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해석—전체적, 본래적 현존재에 대한 해석—을 위한 현상적 토대는 이미 마련되어있다.

 현존재의 존재에 해당하는 염려의 분절된 구조를 통일적이고 근원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론적 근거는 바로 시간성[Zeitlichkeit]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설명되었던 구조의 계기들은 시간성과 관련해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일상성 [자체도] 시간성의 양상으로 드러난다.”(234) 이러한 재이해로써 현존재의 역사성 그리고 현존재가 역사학[Historie]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가 밝혀진다. 염려 가운데서의 시간 계산[Zeitrechnung]이 일상적인 시간이해, 나아가 전통적인 시간의 개념으로 발전한다는 것도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존재 일반의 의미의 기투는 시간의 지평 속에서[만]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해질 것이다(235).

 

1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존재(Ganzsein) 죽음을 향한 존재

§46. 현존재에 걸맞은 전체존재를 존재론적으로 포착하고 규정하는 일의 표면적 불가능성

 기존의 분석은 현존재의 전체를 미리-가지지 못했으므로, “해석학적 상황의 불충분함”에 맞닥뜨려 있었다(235). 그런데 현존재의 존재인 염려가 ‘자신을-미리-앞질러[Sichvorweg]’의 계기를 포함할 때, 즉 현존재가 언제나 자신이 장래에 무엇이 될 수 있을지를 염려하는 가능존재일 때 그의 전체를 미리-가지는 일이 가능하기는 한가? “현존재 속에는 언제나 무엇인가, 그 자신의 잠재성으로서 아직 ‘현실적이’ 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더 회수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있”는데 말이다[daß im Dasein immer noch etwas aussteht, was als Seinkönnen seiner selbst noch nicht »wirklich« geworden ist.](236). 이러한 현존재의 본질을 하이데거는 “지속적인 미완결성[ständige Unabgeschlossenheit]”이라고 부른다(236, 강조는 하이데거). 더 이상 회수할 것이 남아있지 않게 되자마자 현존재는 더 이상 현존재가 아니게 되며, 그의 세계-내-존재를 상실한다. 따라서 “존재자로서는 그것[현존재의 전체]은 결코 경험 가능하지 않다.”(236) 쉽게 말해 현존재는 완결되지 못한 자신을 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이다.

“Die Unganzheit bedeutet einen Ausstand an Seinkönnen. […] Solange das Dasein als Seiendes ist, hat es seine »Gänze« nie erreicht.”(236)

 현존재의 전체존재를 경험하고 존재론적으로 규정하는 일의 (표면적) 불가능성은 인식능력의 불완전성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의 구조상 현존재의 존재 자체에 뿌리박혀 있는 사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존재의 전체 존재를 포착하는 일이 진정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직 현존재가 될 수 있는 바들이 남아있다고 해서 그 전체의 포착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현존재를 (여러 눈앞의-존재자로 이루어진/이루어질) 눈앞의-존재자로 치부하는 것이다.* ‘아직-아님[Noch-nicht-sein]’과 ‘미리-앞서’를, 나아가 ‘(현존재에게 있어서의) 죽음’을 실존론적으로 포착할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Q.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때의 눈앞에-있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Cf. “Wenn schon das Dasein überhaupt nie zugänglich wird als Vorhandenes, weil zu seiner Seinsart das Möglichsein in eigener Weise gehört […]”(248)

A. 미래를 가지지 않는, 기투/기대하지 않는 무시간적 존재자. 반면 현존재는 미래를 늘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으로 앞질러 가볼 수도 있다.

A2. 눈앞의-존재자: 시시각각 계속해서 변화해나가는 하나의 동일자. 따라서 그 변화무쌍함으로 인해 전체를 볼 수 없음. t1에 z, t2에 y, t3에 x일 뿐(H씨).

A3. 눈앞의-존재자: 관찰자의 눈에 있는 그대로만 다가옴.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전체의 포착 불가. 끝을 알려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게 됨(J씨).

A4. ‘눈앞의-존재자는 될 수 있는 바가 남아있을 경우, 미결일 경우 전체 포착이 불가능하다’는 정식이기 때문에 A3은 이상하다. ‘미결’=어떤 것이 계속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는 상태. 따라서 단면 고정이 아니라 생성 때문이다(H씨).

A5. 눈앞의-존재자: 가능존재가 되는 것과 그것의 전체에 대한 포착이 논리적 모순이 되는 존재자. 현존재의 아직-아님과 눈앞의-존재자의 아직 아님(완결되지 않으면 전체를 알 수 없음)이 구별된다. 전자는 죽음을 향한 존재, 후자는 다만 미완결된 존재. 전자의 끝은 죽음, 후자의 끝은 단순소멸? 현존재를 눈앞의-존재자로 비본래적으로 파악할 경우, 미래가 없는 게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쪽으로 파악된다(H2씨).

 

§47. 타인의 죽음의 경험 가능성과 전체 현존재의 포착 가능성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전체를 죽음을 통해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타인의 죽음을 통해 현존재 일반의 끝을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는 있어 보인다. 그러나 타인의 죽음에 대한 경험 역시 현존재의 전체성을 규정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죽은 자는 순수 사물로 화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추모의 의식 등에서 고인으로서 배려된다. 하지만 고인은 엄연히 세계를 상실한 자로서 더 이상 현존재가—배려의 대상이—아니다. 이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간접 경험이 죽은 이 자신의 직접 경험과 상이하다는 점을 가리켜준다. 따라서 타인의 끝에-도달함[Zu-Ende-kommen]에 대한 체험(이를테면 애도의 경험)을 심리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실존론적 의미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Wir erfahren nicht im genuinen Sinne das Sterben der Anderen, sondern sind höchstens immer nur »dabei«. […] Die Frage steht nach dem ontologischen Sinn des Sterbens des Sterbenden als einer Seinsmöglichkeit seines Seins und nicht nach der Weise des Mitdaseins und Nochdaseins des Verstorbenen mit den Gebliebenen.”(239)

 나아가 타인의 죽음을 통해 현존재의 끝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현존재가 다른 현존재에 의해 임의로 대체 가능하다는 잘못된 전제 위에서 성립한다. 물론 일상적인 염려의 상황에서 한 현존재는 다른 현존재를 대신할 수 있다[vertretbar]. 현존재는 심지어 종종 자신 또는 타인이 하는 일로써 그를 대신 이해하며, 이 대리가능성은 일상에서의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구성한다. 그러나 죽음의 경우, 누구도 다른 이를 대신해 죽어줄 없다.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경우에도 그 타인은 언젠가 자신만의 죽음을 맞는다. 죽음은 본질적으로 각자의 것이며, 그 자신만의 존재가 문제시되는 특유한 존재가능성으로 일종의 실존주이다.

“Im »Enden« und dem dadurch konstituierten Ganzsein des Daseins gibt es wesensmäßig keine Vertretung. Diesen existenzialen Tatbestand verkennt der vorgeschlagene Ausweg, wenn er das Sterben Anderer als Ersatzthema für die Analyse der Ganzheit vorschiebt.”(240)

 다른 한편, 세계-내-존재의 상실로서 현존재의 죽음과 다른 생물의 죽음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러한 구별이 선행되지 않으면, 현존재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위한 적합한 실마리[Vorgabe]를 취할 수 없다.

 

§48. 회수되지 않은 것이 남아있음(Ausstand, outstanding), 그리고 전체성

 하이데거에 따르면 끝과 전체성에 대한 존재론은 궁극적으로 존재 일반의 이념을 해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 존재론이 목표하는 바와 그것이 완수되기 위해 필요한 바가 겹치는 어려움이 생긴다. 현존재의 끝과 전체성은—형식적으로는 같은 ‘끝’, ‘전체’라고 할지라도—다른 존재방식을 가지는 존재자의 끝과 전체성과는 다르게 개념화되어야 한다. 탐구되고 있는 영역에 적합한 개념화, “끝과 전체성의 실존주로서의 변양”에 대한 개념화가 이루어져야만 죽음의 실존론적 의미가 해명될 수 있다(242).

*Q. 이 부분에서 하이데거의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따지면 궁극적으로 존재 일반의 이념을 해명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존재론이 있을 수 있는가?

A. 2부가 1부보다 근원적인 존재론이다(H씨).

요약: “Das bisher über den Tod Erörterte läßt sich in drei Thesen formulieren: 1. Zum Dasein gehört, solange es ist, ein Noch-nicht, das es sein wird – der ständige Ausstand. 2. Das Zu-seinem-Ende-kommen des je Noch-nicht-zu-Ende-seienden (die seinsmäßige Behebung[지양, 회수] des Ausstandes) hat den Charakter des Nichtmehrdaseins. 3. Das Zu-Ende-kommen beschließt in sich einen für das jeweilige Dasein schlechthin unvertretbaren Seinsmodus.”(242)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하나의 ‘비전체’이다. 그의 삶에는 그가 아직 아닌 것이 본질적으로 속한다. 이렇게 ‘그가 아직 아닌 것’을 일종의 미회수금처럼 이해해도 좋은지 하이데거는 묻는다. 회수되지 않은 것이 남아있음[Ausstehen]이란, “함께 속하는 것이 아직 모이지 않음[Nochnichtbeisammensein des Zusammengehörigen]”을 뜻한다(242). 이때 회수되지 않은 것이 남아있는 그 존재자는 손안에-있는 존재자이며, 저 ‘함께’란 일종의 총합[Summe]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도구적 존재자가 아닌 현존재에 그리고 말하자면 그의 미래에 적용될 수 없다. 현존재의 미래는 경험을 마치 도구인 양 기존의 경험들에 새로이 더함으로써 조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익지 않은 과일이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자신에게 덧붙임으로써 익게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현존재의 아직-아님은 (완성된/죽은) 전체 현존재가 아니라 지금의 현존재를 직접 구성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그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이미 그의 아직-아닌-것[sein Noch-nicht]이다.”(244)

 나아가 현존재의 남은 ‘부분’은 달의 차지 않은 면처럼 단순히 지각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아직 없는 것이다. “현존재는 스스로 그 자신이 아직 아닌 것이 되어야, 곧 그것으로 존재해야 한다[Das Dasein muß als es selbst, was es noch nicht ist, werden, das heißt sein.].”(243)

 그러나 과일의 성숙에서와 달리 현존재의 끝은 죽음이며, 죽었다고 해서 삶이 완성되는[vollenden, fulfill] 것도 아니고—오히려 삶의 가능성들은 죽음에서 박탈당하는 것 같다—죽지 않았다고 해서 삶이 꼭 미완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현존재의 끝으로서의 죽음”은 대체 어떻게 개념화되어야 하는가?(244) 중지[Aufhören]도, 종결[완결, Fertigsein]도, 소멸[Verschwinden]도 현존재의 죽음에 적합한 규정이 되어줄 수 없다. 이들은 모두 눈앞에- 또는 손안에-있는 존재자의 끝을 가리킬 뿐이기 때문이다.

“Was am Dasein die »Unganzheit« ausmacht, das ständige Sichvorweg, ist weder ein Ausstand eines summativen Zusammen, noch gar ein Noch-nicht-zugänglich-geworden-sein, sondern ein Noch-nicht, das je ein Dasein als das Seiende, das es ist, zu sein hat.”(244)

 이에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그가 아직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이미 자신의 끝으로 존재한다는 데—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죽어간다는 데—착안한다. 죽음의 실존론적 개념은 현존재의 끝 자체보다는 그의 “끝을 향한 존재[Sein zum Ende]”에 대한 것이다(245).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떠안아야 하는 존재의 방식이다.”(245) 현존재의 아직-아님과 끝, 죽음, 전체성은 이제 (미회수금의 비유가 아닌) 염려를 실마리로 삼아 실존론적으로 분석된다.

 

§49. 죽음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을 [해당] 현상에 대한 다른 가능한 해석들로부터 분리시키기

 죽음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생명현상이다. 현존재 역시 순수한 생명으로 볼 경우, 그의 죽음을 생물학적, 생리학적으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며, 그로써 인간적 죽음의 유형과 원인 등이 학적으로 탐구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물학적-존재적[경험적] 탐구는 생명 일반에 대한 특정한 존재론을, 삶과 죽음에 대한 다소간 투명하거나 불투명한 개념들을 전제로 삼고 이루어지는 것이며, 생명 일반의 존재론은 현존재 존재론에 존재론적으로 후행한다. 그러므로 끝을 향한 존재에 관한 존재론은 죽음에 대한 다른 가능한 모든 해석—생물학적-역사학적 그리고 인류학적-심리학적인, 형이상학적이고 윤리학적인 해석, 심지어는 사후세계에 관한 탐구—의 기초이다. 현존재는 다른 동식물과 달리 단순히 끝장나거나[verenden] 생을 점점 빼앗기기보다[ableben]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죽는다[sterben]. 이러한 죽음을 향한 존재의 존재론이 바로 이어질 탐구의 과제이다.

 

§50. 죽음의 실존존재론적 구조 미리 그려보기

 “죽음으로서의 끝을 향한 존재는 현존재의 기초존재론, 즉 염려 개념*에 입각해 해석되어야” 그 해석으로써 현존재의 전체성을 실존론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249). 죽음과 관련해서 염려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im Sich-vorweg die Existenz, im Schon-sein-in... die Faktizität, im Sein bei... das Verfallen.”(249-250)

 죽음으로서 “끝은 현존재의 코앞에 닥쳐서있다[bevorstehen ↔︎ ausstehen].”(250) 그러나 이때 현존재의 코앞에 닥쳐있는 죽음은 (일상에서 현존재의 코앞에 닥치는 다른 사건들, 즉) 눈앞의 또는 손안의-존재자와 교섭하면서 “주변세계적으로 만나지는 사건” 중 하나 정도로 여겨져선 안 된다(250).

 또한 죽음은 타인과의 교섭에서 일어나는 존재 가능성과도 차별화된다. “죽음은 각 현존재가 스스로[홀로] 인수해야[übernehmen] 하는 존재가능성이다.* 죽음과 함께 현존재는 스스로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잠재력, Seinkönnen]의 코앞에 닥쳐서게 된다. 이러한 가능성 속에서 현존재는 그의 단적인 세계-내-존재를 문제 삼는다. […] 그의 속에서 다른 현존재와의 모든 관계들은 해소된다. […] 죽음은 단도직입적인 현존재-불가능성[Daseinunmöglichkeit]의 가능성이다. 그렇게 죽음은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인[unbezüglich], 능가할 없는[unüberholbar] 가능성으로 드러난다.”(250, 강조는 하이데거) 이제 각각의 성격들을 규정하는 작업이 죽음을 향한 존재의 존재론을 이룬다.

*다른 행위와 달리, 타인의 죽음을 보고 나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R씨).

★“Als solche ist er[Tod] ein ausgezeichneter Bevorstand. Dessen existenziale Möglichkeit gründet darin, daß das Dasein ihm selbst wesenhaft erschlossen ist und zwar in der Weise des Sich-vorweg. Dieses Strukturmoment der Sorge hat im Sein zum Tode seine ursprünglichste Konkretion.”(250-251)

 죽음은 때때로 현존재에게 영향을 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는 실존하는 한 언제나 죽음의 가능성에 내던져져 있다. 죽음에의 피투성은 불안의 심정성을 통해 근원적이고 절실하게[eindringlich, 강력하게] 개시된다.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불안의 대상은 세계-내-존재 자체이며, 문제시되는 것은 현존재의 단적인 존재-가능[Sein-können]이다. 요컨대 “사망[Sterben]의 실존론적 개념은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인, 능가할 수 없는 존재가능[Seinkönnen]으로의 내던져진 존재로 명시화”되며, 단순한 소멸과 차별화된다(251). 그리하여 현존재는 언제나 죽음에 대해—그러므로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해 개시되는) 그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존재에 대해서도—특정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현존재가 퇴락한 상태에서 죽음을 비본래적으로 대하고자,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존재로부터 […] 도피”하고자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252). 이제 현존재가 퇴락한 일상에서 어떻게 죽음을 향한 존재자로서 존재하는지 상세히 파헤쳐봄으로써, (죽음을 향한 존재에 대한 형식적인 분석을 마치고) 죽음을 향한 존재와 염려 사이의 구체적인 연관을 알아보자.

*Q. 앞서 제시된 불안은 죽음 앞에서의/죽음에 대한 불안과 동일한가?

A. 그럴 것 같다. 둘다 그 ‘Wovor’가 세계내부적 존재자가 아니므로(J씨).

Das Sterben gründet hinsichtlich seiner ontologischen Möglichkeit in der Sorge.”(252, 강조는 하이데거

 

§51. 죽음을 향한 존재와 현존재의 일상성

 현존재의 일상의 주인인 세인이 죽음에 대해 늘어놓는 빈말[가십, Gerede]과 그에 깃든 심정성은 “일상적 현존재가 자신의 죽음을 향한 존재를 어떻게 스스로 해석하는지”를 보여준다(252). 세인은 죽음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마주침[Begegnis, 해프닝]”으로, “잘 알려진[,] 세계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대하며 죽음과 비본래적으로 마주한다(252-253).* 이로써 죽음은 마치 고장나지 않은 망치처럼 두드러지지 않는[unauffällig] 것이 된다. 이때 세인이 죽음에 대해 내리는 해석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사람은 언젠가는 끝에 다다라 사망한다. 그러나 우선 그 자신은 영향 받지 않는 채로 남는다[그러나 당장의 나는 아니다, man stirbt am Ende auch einmal, aber zunächst bleibt man selbst unbetroffen].”(253) 죽음은 어딘가에서는 일어난 일이지만 나 자신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253).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겠지만 그는 실질적으로는 아무도 아닌 것으로, 그러므로 죽음은 누구에게도 실질적으로 귀속되지 않는 것으로 평면화되어[nivelliert] 생각되는 것이다. 이로써 죽음은 도처에서 일어나는 단순사건[Fall]이 되어 (모두에게 닥치는) 가능성으로서의 그 성격이 은폐되고 만다. ‘세인은 죽지만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빈말의 애매성은 현존재가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존재로부터 도피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한 마디로, 현존재는 세인으로부터 죽음을 향한 존재를 위장하고 그로부터 도피할 유혹을 받는다.

*“그가 보기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무섭고 끔찍한 의식을 그저 어쩌다가 발생한 불쾌한 사건, 품위가 떨어지는 일 정도로(마치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응접실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을 대하듯이) 격하시켰다. 그가 평생토록 지키려 애썼던 <품위>라는 게 고작 그런 것이었다. 그도 알다시피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그의 처지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레프 똘스또이, 석영중•정지원 옮김,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열린 책들, 2021, p. 85(이하 ⟪죽음⟫))

 이 유혹이 현존재의 일상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은 바로 죽어가는 이에게 주변 사람들이 그가 곧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으리라 ‘위로하며’ ‘배려하는’ 장면이다. “세인은 그와 같은 형태로 죽음에 대한 지속적인 안주를 고려한다[Das Man besorgt dergestalt eine ständige Beruhigung über den Tod].”(253)* 그러나 죽음은 간과된 것과 달리 위로자들에게도 임박해있는 무엇이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거짓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모두가 묵인하고 있는 거짓말, 그는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플 뿐이다, 그러니 잠자코 치료를 받으면 좋아질 거라는 그 거짓말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앞으로 뭘 어떻게 하든 병에서 회복될 수 없으며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고통과 죽음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죽음⟫, p. 84)

 일반적으로 죽음은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잘 회자되지 않는 불편한 주제이며, 공공의 세계는 죽음으로부터 흡사 보호받는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겁쟁이의 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세계로부터의 음울한 도피로 여겨진다. 세인은 죽음이 어떻게, 어떤 심정성에서 대해져야 하는지를 암묵적으로 관장하며, “죽음 앞에서의[죽음에 대한] 불안을 가질 용기”를 저지한다(254). 사람들은 자신의 능가할 수 없는 가능성에 대한 책임을 용감하게 직면하는 대신 다른 세계내부적인 사건들에 대한 불안으로 눈길을 돌린다.* 죽음에 무심한 것은 도리어 강자의 덕목이 되어, 그렇게 현존재는 그 자신의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가능존재로부터 소외된다. 이는 “유혹, 안주 그리고 소외가 퇴락의 존재방식을 특징짓는” 데 상응한다(254). 그러나 이러한 무심한 (또는 적극적인) 도피조차, 현존재가 언제나 이미 죽음을 향해있는 존재임을 입증할 뿐이다. 이어 하이데거는 도피의 대상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현상학적으로 완전한 분석을 시도한다.

*“앨범을 정리하고 나자 앨범이 놓인 탁자를 꽃나무가 있는 다른 쪽 구석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하인들을 불렀으나, 아내와 딸이 도움을 준답시고 와서는 그러지 말라며 뜯어말렸다. 그는 화가 나서 그들과 대판 싸웠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적어도 그러는 동안만큼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고 죽음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죽음⟫, p. 77-78)

“Das alltägliche Sein zum Tode ist als verfallendes eine ständige Flucht vor ihm. Das Sein zum Ende hat den Modus des umdeutenden[재해석된], uneigentlich verstehenden und verhüllenden Ausweichens vor ihm.”(254, 강조는 하이데거

 

§52. (Ende, 종말) 향한 일상적 존재와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개념

 죽음 앞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실존의 단적인 불가능성” 앞으로 데려와지지만 일상에서는 그가 죽음과의 본래적인 대면을 회피한다는 것을 앞서 보았다(255). 하이데거는 일상에서의 죽음을 향한 존재에 대한 상술한 구체화를 통해 이제 “죽음에 대한 완전한 실존론적 개념”에 이르고자 한다(255).

 ‘언젠가 사람은 죽지만, 당장은 아직 아니다’라는 세인의 해석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확실성은 죽음에 대한 진정한 확신에서의 확실성과는 다른, 애매한 것이며, 오히려 죽음의 진의를 은폐하는 데 기여하는 비본래적인 확실성이다.

 무언가에 대해 확실하게 생각한다는 것[gewiß-sein]은 그 무언가를 진리로 생각한다는 것, 즉 발견되고 개시된 것을 근거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확실성은 그런데 진리 속에 근거지워져 있거나 그것에 등근원적으로 귀속된다.”(256) 하이데거에 따르면, 확실성이라는 표현은 진리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일의적이지 않다. 한편으로 확실하게 생각함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존재가 그에 대해 확실하게 생각하는 [손안의 또는 눈앞의] 존재자 역시 ‘확실한 것’이라고 불린다.”(256)

 “확실성의 한 양상이 확신[Überzeugung]이다.”(256) 확신 또는 진리로-생각함[Fürwahrhalten]은 사태 자체에 대한 발견으로부터 비롯하며, 무엇이 어떻게 개시되느냐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진다.* 죽음에 대한 확실하게-생각함은 “탁월한 현존재확실성”이다(256).

★*“In ihr läßt sich das Dasein einzig durch das Zeugnis der entdeckten (wahren) Sache selbst sein verstehendes Sein zu dieser bestimmen. Das Für-wahr-halten ist als Sich-in-der-Wahrheit-halten zulänglich[adequately], wenn es im entdeckten Seienden selbst gründet und als Sein zu so entdecktem Seienden hinsichtlich seiner Angemessenheit an dieses sich durchsichtig geworden ist. […] Die Zulänglichkeit des Fürwahrhaltens bemißt sich[is measured] nach dem Wahrheitsanspruch, dem es zugehört. Dieser empfängt sein Recht aus der Seinsart des zu erschließenden Seienden und der Richtung des Erschließens. Mit der Verschiedenheit des Seienden und gemäß der leitenden Tendenz und Tragweite des Erschließens wandelt sich die Art der Wahrheit und damit die Gewißheit.”(256)

Q.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진리의 기준과 후설이 높이 사는 직관적 확실성 사이의 차이가 별로 없어 보인다. 둘은 모두 사태 자체와의 무매개적 만남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후설의 명증이론을 어떤 이유로 비판하는가?

cf. Daniel Dahlstrom, Heidegger's Concept of Truth,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In fact, his use of the term ‘naturalism’ is dif­ferent from common contemporary construals of it as a program of in­terpreting all phenomena according to the methods and findings of natural sciences. Heidegger is referring instead to what he regards as HusserI’s effort to […] absolutize itself by se­curing unimpeachable evidence and certainty in the form of princi­ples. Heidegger thus faults Husserl for orienting phenomenology toward the idea of an absolutely certain science and construing consciousness, its basic theme, too much in conformity with epistemologi­cal and psychological approaches [of the natural science] to it (EpF 52f, 58f). The entire con­text of Husserl’s inquiry is theoretical, Heidegger charges; it is supposed to establish a new discipline “in place of natural science,” without asking “whether such a discipline makes any sense at all” (EpF 81f).”(124-125) ➔ 이론적 필증성의 이념에 대한 염려에 짓눌려 인간 실존에 무관심해짐(135). 이를테면 죽음은 필증적 명증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보다도 근원적으로 ‘확실한’ 것이다.*

*cf. 비트겐슈타인: 경험적인 확실성 vs 경험적인 확실성을 가능케 하는 (초월론적) 확실성(e.g. 외부세계의 존재 등).

 그토록 확실한 죽음에 대한 일상적인 외면은 현존재가 비진리 속에 있다는 기존에 제시된 테제를 뒷받침해준다. 퇴락한 현존재가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확실성’은 “의심의 의미에서 불확실성”은 아니지만 “부적합한[unangemessen] 진리로-생각함”이다(257). 그가 죽음에 대한 세인의 해석에 머무르는 한, 그가 가지는 확실성은 아무리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경험사실[Erfahrungstatsache]’”인 것으로 시인해도 죽음을 향한 존재에로 겨눠질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진정한 확신은 현존재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인 존재가능성에 대해서 확실하게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퇴락한 현존재는 죽음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한 결과, 그것을 단지 경험적으로만 확실하게 생각하며, 개연적이지[wahrscheinlich] 이론적 지식과 같이 필증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쉽게 말해, 그는 자신이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죽는 것이 필연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단단히 오해한 결과다. 그와 같은 비본래적인 확실성이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의 수단으로 쓰이고 다른 사소한 걱정거리보다 현존재의 우선순위에서 뒤쳐진다는 사실은 “죽음이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인, 능가할 수 없는, [본래적으로] 확실한 가능성으로 개념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히려 보증해준다(258, 강조는 하이데거). (도피의 대상이 바로 저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죽음에 대한 일상적인 태도는 (죽음에 대한 본래적 존재로부터만 보여지는) 현존재의 전체 존재를 보여줄 수도 없다.

 현존재가 어떤 이론을 펼치든 간에 그는 죽고, 아무리 젊은 현존재도 매 순간 죽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는 (죽음이라는 미회수금을 남겨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비로소 전체 존재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죽음을 향한 비본래적 존재는 죽음을 향한 본래적 존재를 그 근거로 가진다. 만일 이 주장이 성립하려면, 죽음을 향한 본래적 존재는 단순히 공허한 실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가능성이어야 할 것이다.

 

§53. 죽음을 향한 본래적 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기투

 만일 현존재가 우선 그리고 대개 죽음에 대해 비본래적인 존재자라면, 죽음에 대한 본래적인 존재는 어떻게 ‘객관적으로’ 특징지어져야 하며, 단순히 “시적이고 자의적인 구축”으로 남지 않을 수 있는가?(260)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현존재의 존재론에 포섭시킬 수 있는가? 이제까지 죽음에 대해 비본래적인 존재는 ‘무엇이 아닌지’의 형식으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그를 실마리로 ‘그렇다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파헤쳐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본래적인 존재는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무연관적이며 능가할 수 없는 가능성인 죽음을 회피하지 않는 가능성을 뜻한다. 죽음을 본래적으로 대하는 존재자는 죽음의 의미를 은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오직 게라심만이 그에게 그 어떤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점에서 볼 때, 게라심 하나만이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으며, 다만 점차 쇠잔해 가는 나약한 주인을 가엾게 여기고 있었다.”(⟪죽음⟫, p. 85)

 무엇보다 죽음은 현존재의 여러 존재가능성들 중 하나의 탁월한 가능성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가능성을 향한 존재는 (죽음을 향한 존재 외의 경우에서) 일반적으로 “실현[Verwirklichung]의 고려로서 [그] 가능성을 찾아나섦[Aussein]”으로 특징지어진다(261). 이 경우 해당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특정한 손안의-존재자가 소비되어 무화된다. 그러나 이처럼 도구가 관여된 현존재의 다른 가능성들과 달리, 죽음의 가능성은 죽음을 소비해서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죽음은 무언가를 위한 용도로 특징지어지지 않기 때문에, 현존재가 죽음을 다른 목적을 위하여 찾아나선다고 볼 수는 없다. 죽음이 도구처럼 이용될 경우 현존재는 자신의 끝을 불러일으키는[Ableben herbeiführen] 셈이고, “현존재는 죽음을 향한 실존적인 존재의 바로 그 토대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261) 이때 활용되고 있는 가능성의 개념이 “주제적-이론적 고찰”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261).

 요컨대 죽음의 가능성은 실현의 대상으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향한 존재를 “그것의 가능성과 관련해 끝에 머무름[sich aufhalten bei dem Ende in seiner Möglichkeit]”으로, 죽음에 대해 그것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생각함으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261). 그 경우 죽음은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면 피해질 수 있는 (현실적인) 것으로 계산되어, 죽음이 가지는 가능성으로서의 성격이 도리어 약화되기[abschwachen]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기대[Erwartung] 역시 죽음의 가능성으로서의 성격을 약화시키며, 그것을 단지 기대에 걸맞게 현실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반면 죽음을 향한 본래적 존재는 죽음의 가능성을 가능성 자체로 남겨두어야 한다. 

 (가능성 일반에 대하여) 가능성을 가능성 자체로 남겨두려면, 현존재는 해당 가능성으로 선구해보아야[vorlaufen] 한다. 따라서 죽음을 향한 본래적 존재는 ‘죽음으로의 선구’이다. 선구를 통해 죽음은 현존재에게 가까워지지만[nähern], 죽음의 가능성은 실현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며, 현실성과도 최대한 멀어진다. 그로써 “실존 일반의 불가능성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죽음의 성격에 대한 본래적인 이해가 도모된다(262).*

*Q. 죽음에 대한 기대 및 걱정과 죽음으로의 선구 사이 실질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A. 죽음을 가능한 현실로서 생각하는 것 vs 죽음을 가능한 것 자체로 생각하는 것. 단순한 ‘메멘토 모리’가 아니다.

 죽음으로의 선구는 현존재에게 그의 가장 본래적인 존재가능성을 “가장 본래적인 실존의 가능성으로서” 드러내주는 가능성 개시의 기능을 수행한다(263). 이제는 죽음으로의 선구가 가지는 구체적인 구조를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무연관적이며 능가할 수 없는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것으로서 확정지어야 한다.*

*Q. 죽음의 가능성과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은 명백하게 다른 것인데, 혼용되는 것 같아 혼란스럽다.

A. ‘죽음에 대한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본래적으로 실존하기 위해서라도 현존재는 본래적으로 실존해야 한다.

“Zu beachten bleibt, daß Verstehen primär nicht besagt: begaffen eines Sinnes, sondern sich verstehen in dem Seinkönnen, das sich im Entwurf enthüllt.”(263)

 첫째,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263)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존재는 현존재를 세인으로부터 떨어뜨리면서 그에게 그의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을 개시해준다. 이로써 일상에서 그가 세인-자기 속에 현사실적으로 상실되어있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드러난다.

  둘째, “그 가장 고유한 가능성은 무연관적인 것이다.”(263) 죽음으로의 선구는 그 누구도 대신 인수해줄 수 없는 존재가능성이다. 죽음은 현존재를 모든 손안의-존재자와 타인으로부터 떨어뜨려 단독자로 만들어주며, 그만의 ‘거기’를 개시해준다. (비본래적인) 물론 “고려와 배려의 실패[das Versagen]”에도 현존재는 여전히 고려하고 배려하는, 즉 실존하는 존재자로 남는다.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현존재 역시 특정한 도구들 곁에서 그것들을 고려하며 타인들을 배려하며 살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세인의 해석들에 내던져지지 않을 뿐이다. 죽음의 무연관성이 현존재로 하여금 그만의 가장 고유한 존재를 인수하게 해준다.

Q. 첫 번째 계기와 두 번째 계기가 충분히 상호배타적인가? 두 계기들은 어떻게 다른가?

A. 첫 계기: 죽음은 ‘나’의 죽음이다. / 두 번째 계기: 타인과 배제된 ‘나'의 죽음이다(H2씨).

 셋째, “가장 고유하고, 무연관적인 [이] 가능성은 능가될 수 없다.”(264)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이 능가-불가능성에 자유롭게 내어준다[gibt sich frei für sie]. 죽음은 죽음 이전의 현사실적 가능성들이 본래적으로 이해되고 (자유롭게) 선택될 있도록 해준다는 의미에서 현존재를 해방시켜준다. (죽음으로 선구한 현존재는 더 이상 세인의 공공연한 해석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자기포기를 통해 현존재는 자신과 타인의 성취들에 얽메이지 않게 되고, 그것들의 유한성[Endlichkeit]과 능가-가능성을 자각하게 된다. 이로써 타인과의 함께-있음이 더더욱 이해 가능해진다. 현존재는 비로소 자신의 전체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Q. 두 초점들이 어떻게 만나는지 모르겠다. cf. “Als unbezügliche Möglichkeit vereinzelt der Tod aber nur, um als unüberholbare das Dasein als Mitsein verstehend zu machen für das Seinkönnen der Anderen. Weil das Vorlaufen in die unüberholbare Möglichkeit alle ihr vorgelagerten Möglichkeiten mit erschließt, liegt in ihm die Möglichkeit eines existenziellen Vorwegnehmens des ganzen Daseins, das heißt die Möglichkeit, als ganzes Seinkönnen zu existieren.”(264)

A. 단독자화됨으로써 타인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오히려. 그리고 단독자화됨으로써 전체존재를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가장 고유하고 무연관적이며 능가할 수 없는 가능성은 확실한 것이다.”(264, 강조는 하이데거) 죽음에 대한 확신의 방식은 그에 상응하는 진리가 개시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죽음으로의 선구는 현존재의 본래적 가능성(그의 진리) 가능케 한다[ermöglichen]. 눈앞의-존재자처럼 만나지는 죽음의 사례들에 대한 생각*은 “순수 사태[reine Sachlichkeit], 즉 필증적 명증의[필증적 명증이 가지는 것과 같은 실존적인] 무차별성”**에 이르게 해줄 뿐, 그런 본래적인 확신을 가능케 해주지 못한다.

*Q. 여기서의 ‘눈앞의-존재’는 어떤 의미인가?

A. 1인칭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그는 키제베터 논리학에서 배운 삼단논법, 즉 <카이사르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는 카이사르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자신에게는 절대로 해당될 리 없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카이사르는 인간, 즉 일반적인 인간이니까 삼단 논법이 적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 즉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었고, 항상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분되는 특별한,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죽음⟫, p. 73)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본래적 확신의 확실성이 필증성보다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죽음에 대한 본래적 확신의 확실성]은 대개 눈앞의-존재자들의 명증들의 위계질서[Abstufungsordnung]에 일반적으로 속하지 않는다.”(265) 죽음에 대한 확신은 특정한 실천이 아니라 그의 실존의 본래성 일반, 세계-내-존재 일반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에, “세계내부적으로 만나지는 존재자나 형식적 대상들과 관련된 모든 확실성보다 근원적이다. […] 그러므로 체험의 무매개적 소여, 자아, 그리고 의식에 대한 명증은 필연적으로 선구 속에 포함되어 있는 확실성보다 뒤떨어짐에 틀림없다.”(265) 이는 그 확실성에 대한 포착이 엄밀해서가 아니다.*

*Q. 엄밀한 직관에 의거한 필증성의 획득이라는 후설의 이념을 비판하고 있는 부분, “sondern weil sie grundsätzlich nicht das für wahr (erschlossen) halten kann, was sie im Grunde als wahr »da-haben« will”(265)를 이해하지 못했다. 원한다고 해서 죽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닌데도 죽음을 단순히 경험적 확실성으로 보는 후설적 명증이론을 비꼬는 것인가?

 그럼에도 죽음은 무규정적인[unbestimmt] 것으로서 확실한 것이다. 현존재는 그리하여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가능한 가능성으로 어떻게 선구하는가? 이 선구에서 현존재는 ‘거기’ 자체(실존의 본질)로부터 비롯하는 “지속적 위협[Bedrohung]”에 노출된다(265). 현존재는 이 위협 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머물러야 하며, 무규정성을 완성해나가야[ausbilden]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불안의 심정성이다. 불안에서 현존재는 무의 앞에, “실존의 가능한 불가능성”과 (홀로) 직면한다(266). 죽음으로의 선구 속 단독자화된 현존재의 자기이해에는 불안이 구조적, 본질적으로 속해있다.*

*Q. “Die untrügliche, obzwar »nur« indirekte Bezeugung dafür gibt das gekennzeichnete Sein zum Tode, wenn es die Angst in feige Furcht verkehrt und mit der Überwindung dieser die Feigheit vor der Angst bekundet.”(266)을 이해하지 못했다.

A. 불안을 두려움으로 치환하지 말라는 이야기 같다.

 그러나 여전히 죽음에 대한 본래적인 존재는 실존의 이념에 불과한 것처럼, 실존론적 공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본래적인 존재가 현존재의 실존적인[현실적인] 존재가능성으로서 입증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 죽음에 대한 본래적인 존재 및 본래적 실존 일반은 가능한가? 심지어, 그것은 현존재 자신의 존재를 근거로 요구되는가?

 

2 본래적 존재가능(Seinkönnen, --있음, 잠재성) 대한 현존재에 걸맞은 증명(Bezeugung) 개시성

§54. 본래적인 실존적 가능성의 증명이라는 문제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이 가능하다는 데 대한 증명은 그의 존재구성틀에 의거해야 한다. 현존재의 자기됨, 본래적인 자신이---있음[Selbstseinkönnen]이란 실존의 한 방식으로, 본래적인 자기됨은 세인의 실존적 변양물이기 때문이다. 세인은 현존재에게 그가 무엇을 과제로, 규칙으로, 기준으로 생각할지를 대신해서 미리 결정해놓는다. 이로써 세인은 현존재에게 그의 존재가능성들에 대한 선택의 부담을 덜어주며,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을 은폐하기까지 한다. 이에 따라 “누가 ‘본래적으로’ 선택하고 있는지는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268) 세인에 의해 선택권을 잃고 비본래성으로 끌어들여진[verstrickt] 현존재는 그 자신의 힘으로만 이제껏 간과되었던[versäumen, neglect]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할 수 있다. 세인으로부터 본래적 자기로의 실존적 변양은 “선택을 되찾기[Nachholen]”를 통해, 즉 “선택에 대한 선택함[선택을 선택함]”을 통해 이루어진다(268).

“Im Wählen der Wahl ermöglicht sich das Dasein allererst sein eigentliches Seinkönnen.”(268)

 이렇게 자기를 되찾는 일의 가능성에 대한 증명은 “양심의 목소리[Stimme des Gewissens]”에 대한 해석으로써 성립한다(268). 일상적으로 양심의 소리는 애매하게, 다의적으로 해석되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현존재의 기초존재론에 의거했 때 현존재의 근원적인 현상 ( 하나)로 해석되어야 한다. 양심의 실존론적 기초 및 구조에 대한 현상학/해석학/존재론은 양심에 대한 심리학, 생물학, 신학의 해석보다 앞서는[vorliegen] 것이다.

 양심의 ‘사실성[Tatsächlichkeit]’을 보여주는 ‘귀납적 경험적 증명’에 대한 요구는 양심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양심은 다른 눈앞의-존재자처럼 때때로 모습을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는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확정되어있고 확정된 사실”이다(269).

Q. ‘양심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을 어떻게 논증의 형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까?

A. 양심은 현존재의 기초존재론에 속하는 현상이다. 기초존재론에 속하는 현상은 경험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고, 존재론적 해석을 요구한)다. 따라서~

 “양심은 ‘무언가’를 이해[력]에 부여한다[Das Gewissen gibt »etwas« zu verstehen]. 양심은 개시한다.”(269, 강조는 하이데거) 양심은 말의 양태인 부름[Ruf]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양심의 부름은 현존재를 그의 가장 본래적인 자기가-될-수-있음으로 소환하며[anrufen, summon], 그의 본래적인 죄스러움[Schuldigsein] 앞으로 호명한다[aufrufen, summon].

이어질 논의의 요약: “Daher bedarf die existenziale Interpretation der Bewährung durch eine Kritik der vulgären Gewissensauslegung. Aus dem herausgestellten Phänomen kann erhoben werden, inwiefern es ein eigentliches Seinkönnen des Daseins bezeugt. Dem Gewissensruf entspricht ein mögliches Hören. Das Anrufverstehen enthüllt sich als Gewissenhabenwollen. In diesem Phänomen aber liegt das gesuchte existenzielle Wählen der Wahl eines Selbstseins, das wir, seiner existenzialen Struktur entsprechend, die Entschlossenheit nennen.”(269-270)

 

§55. 양심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

 양심은 개시 기능을 가진 현상으로서, “개시성으로서 거기[Da]의 존재를 구성한다.”(270) 양심에 대한 해석은 따라서 현존재의 본래성의 관점에서 심정성, 이해, 말 그리고 퇴락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포착을 가능케 한다.

 내던져진 현존재에게는 (우선 대부분의 경우) 그의 존재가능성들이 이미 규정되어있다. 현존재가 규정들에로 내던져져있다는 진실은 현존재의 심정성, 기분에 의해 개시된다. 그런데 기분은 이해와 등근원적이기에, 현존재는 자신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woran es mit ihm selbst ist, where it stands]를 어느 정도는 ‘알고’, 즉 그에 대한 선이해를 어느 정도 미리 가지고 있다. 이 미리-가짐은 현존재가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현존재는 세인의 공공연한 해석들과 빈말에 귀 기울이면서[hinhören, listen to], 본래적인 자기의 목소리는 넘겨듣는다[überhören, fail to hear]. 현존재가 세인에게의 경청을 관두려면, 경청을 중단시키는[unterbrechen, interrupt] 또 다른 들음 즉 “무매개적 소환됨[unvermittelte Angerufenwerden]”의 가능성이 현존재에게 주어져야 한다. 현존재를 소환하는 목소리는 세인의 목소리와 달리 소음이 아니어야 하고, 애매하지 않아야 하고, 호기심을 충동질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부르면서 이해를 부여하는 것이 양심이다.”(271) (양심은 침묵 속에서 일의적으로, 호기심과 무관하게 현존재를 불러낸다.)

 양심의 소환은 칸트적인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소환의 과정에서 실제로 어떤 청각적 소리[Verlautbarung]가 들려오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부름은 일종의 말이며, 양심의 ‘목소리’란 이해[]-[무언가를-]부여함[Zu-verstehen-geben, giving-to-understanding]을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양심의 목소리는 갑작스러운 충격[Stoß]의 성격을 가진다.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고, 멀리 있는 것을 가리킨다. “부름과 관계되는[betroffen] 것은 [지금은 멀리 떨어져있지만] 되찾아지기를 원하는 누군가이다.”(271)

*Q. 칸트적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A1. 이성의 소환에 의한 자기 자신과의 대화. 훨씬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자기의식적 구조(R, H씨). 

A2. 칸트에게서 양심의 소환은 자기검토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며, 타인에게 소통될 수 있다(H씨).

A3. 칸트에게 법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이때 양심은 “영혼의 능력 중 하나, [기존에 개념화된] 이해력[Verstand, 지성], 의지 또는 느낌” 또는 그 혼합물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271). (이는 양심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방해할 것이다.)

Q. 하이데거의 논의는 아무 내용도 지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무책임하다?(R씨)

A. 이론적 취사선택. 각자성을 살리려면 어쩔 수 없다.

 

§56. 양심의 부름성격(Rufcharakter)

 양심의 부름에서 말해지고 소환되는 것은 현존재 자신이다. 양심은 일상적 현존재의 “언제나-이미-이해한-채임[Sich-immer-schon-verstehen, always-already-understanding]”을, 즉 고려하고 배려하는 세인-자기를 겨냥한다[betreffen](272).

 다음으로, 소환된 현존재는 무엇을 향해[woraufhin, to what] 소환되는가? 바로 그의 본래적인 자기이지, 퇴락한 현존재가 아니다. 부름은 세인과 그의 공공연한 해석들을 지나침으로써[übergehen] 그것들을 무의미하게[bedeutungslos] 만든다. 그렇게 “세인-자기는 자기에로 소환된다.”(273) 본래적 자기는 판단의 ‘대상’도 아니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내면의 삶[Innenleben]’도 아니고, 영혼의 ‘분석적인’ 응시[Begaffung, staring at]주체도 아니다. “세인-자기 속에서의 자기로의 소환은 그로써 ‘외부세계’가 그로부터 차단되는 방식으로 내면적인 자기[ein Inneres]에로 자기를 소환하지 않는다.”(273)* 요컨대 본래적인 자기는 여전히 세계--존재이다.

*후설의 초월론적 환원 개념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후설의 환원 개념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심의 부름에서 말해지는 은 무엇인가? “엄밀하게 말해—아무것도 [말해지지 않는다].”(273) 양심의 부름은 세계의 사건에 대한 그 어떤 정보[Auskunft]도 제공하지 않는다. ‘자기와의 대화[Selbstgespräch]’를 개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현존재를 에로 불러내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모습을 마주하게 할 뿐이다. 나아가 양심의 부름은 심판[Verhandlung]이 아닌, 존재의 가능성에로의 부름이다.**

*Q. 이 선택지는 왜 배제되는가? 왜 자기와의 대화는 세인에 의해 이루어지는가?

cf. “Die »Täuschungen« entstehen im Gewissen nicht durch ein Sichversehen (Sichver-rufen) des Rufes, sondern erst aus der Art, wie der Ruf gehört wird – dadurch, daß er, statt eigentlich verstanden zu werden, vom Man-selbst in ein verhandelndes[협상하는, 시험하는] Selbstgespräch gezogen und in seiner Erschließungstendenz verkehrt[그릇된] wird.”(274)

A1. 이미 세인에 의해 얼룩진 자기이기 때문에, 그와 대화해봤자 세인의 해석을 강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잡담’이다.

A2. 자기와의 대화는 침묵이, 부름이 아니다(K씨).

A3. 양심은 특수한 내용을 제시해주는 소리가 아니기에 자기와의 대화와 다르다(R씨).

A4. 양심의 목소리는 순간적인 깨달음이기 때문에, 자기와의 대화는 그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J씨).

**Q. 심판과 양심의 부름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양심의 부름은 그 어떤 단적인 말소리도 포함하지 않지만, 불투명하거나 무규정적이지 않다. “양심은 단지[einzig] 그리고 지속적으로 침묵의 양태로만 말한다.”(273) 그렇기에 양심의 부름은 인지의 대상이 아니며, 소환된 현존재 자신도 침묵에 사로잡히게 된다. 본래적 자기에 대한 이해는 타인과의 소통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양심의 부름에서 개시되는 것은 일의적이다. 그 내용은 현존재의 이해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 타격방향[Einschlagsrichtung]이—현존재 그 자신으로—확실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양심이 자신이 불러야 할 존재자를 부르지 못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양심의 부름에서 잘못이, ‘기만’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부름이 아니라 청취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제는 양심에서 불리는 자와 부르는 자가 누구인지를,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지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57. 염려의 부름으로서의 양심

 불려진 자기의 내용은 규정되어있지 않다. 부름은 현존재가 기존에 가졌던 모든 해석들을 지나쳐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부르는 자가 누구인지 역시 현저하게 무규정적이다. 그는 기존의 세속적인 현존재이해에 낯설다. 그는 고찰이나 대화[Bereden, talk], 수다의 대상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장되어있지 않고, 그 자신으로 들려지고 싶을 뿐이다. 실존적으로는 (개별 현존재의 경우마다) 부르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규정이 이루어져야겠지만, 실존론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는 (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현존재 자신이 부르는 자인 동시에[zumal, at the same time] 불리는 자라는 대답은 존재론적으로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둘은 과연 같은 현존재일까(를 묻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양심의 부름은 우리가 계획하거나 미리 준비하거나 의지적으로 불러일으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Es]’이, 기대들과 심지어 의지들에 반해 부른다.”(275)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닌 타인이 부르는 자일 수는 없다. “부름은 나로부터 오지만 나를 넘어서 온다.”(274) 부르는 자를 외부의 힘으로 해석하는 생물학적 설명도, 신으로 해석하는 신학적 설명도 상술한 현상을 간과하며, “눈앞의-존재로서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에 의거한다(275).** 문제의 해결은 현존재의 존재론에 의거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Heinemäa(2002)는 이로부터 하이데거의 환원 개념이 후설과 달리 수동적이라고 지적한다.

**Q. 어째서 그러한가? 이때의 눈앞의-존재란 무슨 의미인가?

A. 비실존하는 존재자.

 부르는 자는 여전히 현존재에 걸맞은 존재자이다. 실존하는 현존재는 현사실적인 피투 가운데서 스스로를 기투함으로써 눈앞의 존재자와 구분된다. 심정성을 통해 드러나는 피투성은 현존재에게 “그가 존재하며 그 자신인 존재자로서 될-수-있으면서[seinkönnend]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개시해준다(276).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피투성의 기분은 [가능성들을] 닫는다[verschließen].”(276) 현존재는 세인이 거짓되게 약속하는[추정적인, vermeintlich] 자유로 도피한다. 현존재는 불안이라는 근본심정성에 의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가능성 앞에 선다. 이렇게 “근본적으로[im Grunde] 그의 집에-없는-듯함[Unheimlichkeit] 속에서 심정을 가지는[sich befindend] 현존재”가 곧 양심의 소리를 부르는 자이다(276).

 이렇게 부르는 자의 누구임은 기존의 세계성에 입각해서는 규정되지 않는다. 그는 섬뜩해하는 현존재[das Dasein in seiner Unheimlichkeit]로서, 세계의 아무것도-아님 앞에서 벌거벗(고 단독자화된, 내던져진) 존재의 사실 자체[를 섬뜩해한]다[das nackte »Daß« im Nichts der Welt].* 그렇게 그는 그만이 가지는 존재가능[잠재성] 앞으로 빗나감 없이[unverwechselbar, unmistakable] 불리게 된다.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과 그에 대한 기투의 책임이 침묵하는—세인의 빈말로부터 동떨어진—부름의 내용을 이룬다. 이렇게 세인 속으로 현존재가 상실된 사태는 집에-없는-듯함에 의해 위협받게 된다. 

*레비나스의 존재론을 예지하는 부분이다.

“Unheimlichkeit ist die obzwar alltäglich verdeckte Grundart des In-der-Welt-seins. Das Dasein selbst ruft als Gewissen aus dem Grunde dieses Seins. Das »es ruft mich« ist eine ausgezeichnete Rede des Daseins. Der durch die Angst gestimmte Ruf ermöglicht dem Dasein allererst den Entwurf seiner selbst auf sein eigenstes Seinkönnen. Der existenzial verstandene Gewissensruf bekundet erst, was früher lediglich behauptet wurde: die Unheimlichkeit setzt dem Dasein nach und bedroht seine selbstvergessene Verlorenheit.”(277)

 이로써 현존재가 부르는 동시에 불린다는 명제의 공허한 형식성은 내용으로 채워졌다. “양심은 염려의 부름으로서 스스로를 열어낸다[sich offenbaren]”고 이제는 말해야 한다(277).* “부르는 자는 피투성(이미-…-내에-있음) 속에서 그의 존재가능에 대해 불안해 하는 현존재다. 불리는 자는 바로 그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에로 호명된(자신을-앞질러 …) 바로 이 현존재이다. 그리고 호명된 것은 소환을 통해 세인 속에서의 퇴락(고려된 세계 곁에-이미-있음)으로부터 빠져나온 현존재이다.”(277) 그러므로 양심의 존재론적 가능성은 현존재가 염려하는 존재자라는 데 놓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을 분석하기 위해 현존재 이외의 힘에 의지할 필요도 없고, 인격적 의식을 가진 주관의 개념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이 부분이 하이데거를 유아론으로 빠뜨리지 않는 것 같다. 염려는 기본적으로 공동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공동존재로부터 출발해 양심의 부름을 거쳐 다시 공동존재로 되돌아간다(H씨). 윤리적으로 무책임하지 않은 하이데거를 기대할 수 있다(R씨). vs. 과도한 기대 아닌가?(J씨) 적어도 이 부분에서 그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퇴락적인 염려로부터 빠져나오는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 (H2씨)

**“Warum Auskunft bei fremden Mächten suchen, bevor man sich dessen versichert hat, daß im Ansatz der Analyse das Sein des Daseins nicht zu nieder eingeschätzt, das heißt als harmloses, irgendwie vorkommendes Subjekt, ausgestattet mit personalem Bewußtsein, angesetzt wurde?”(278)

 부르는 자를 다시금 ‘객관적으로 현존하는[objektiv Vorfindlichen] 자’로, 즉 눈앞의-존재자로 생각하는 것은 양심의 진의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양심은 단순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며, ‘객관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보편적으로 구속력을 가진 목소리란 세인의 목소리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은 근본적으로 각자적인 , 즉 저마다의 것이다. 양심의 목소리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또 혹자는 양심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이 ‘자연적 경험’으로부터 지나치게 유리되어있으며, 단순히 혼내고[rügen] 경고하기만[warnen] 하는 소환자가—즉 기존의 것을 부정하기만 하는 존재자가—어떻게 현존재를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 앞으로 실질적으로[positiv] 그리고 구체적으로[konkret] 소환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양심에 대한 일상적인 해석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양심을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에 대한 증명으로 밝혀내는 기초존재론적 작업이다.

Q. 어째서 이러한 반론들이 무효화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A1. 내용의 구체성은 부름이 아니라 들음에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또 불리는 것 자체는 응답되든 무시되든 긍정적인[실질적인] 결과를 낳는다.

A2. 양심은 염려의 부름이기 때문에, 양심의 소리의 규정적 내용은 염려에 걸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 규정성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공동존재로 되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인륜적인 규준이 제시되고 있다(H씨).

 부름의 내용을 충분히 구체화하고 일의적으로 확정짓는 것은 부름에 상응하는 들음, 부름에잇따르는현존재의 본래적인 이해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규정되고 나서이다. 소환에 대한 현존재의 반응으로서의 이해가 곧 양심에 대한 완전한 체험을 완성한다. 설령 양심의 소리가 무시되고 그에 따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는 현존재의 규정된 존재가능성 가운데 하나로서, 현존재의 존재방식에 대해 알려주는 바가 있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모든 양심경험과 양심해석은 양심의 ‘목소리’가 어떤 방식으로 책임[Schuld]’에 대해 말한다는 점과 하나이다.”(280)

 

§58. 소환함(Anruf, 불러냄) 대한 이해와 책임(Schuld)

 본래적 자기가 세인-자기를 소환해냄이란 “고려하는 세계-내-존재 및 타인과의 공동존재”인 현존재를 그의 (단독자적인) 존재가능[--있음]으로 불러내는 이다. 소환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은 개별적인 실존의 (실존적) 가능성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모든[je] 현사실적-실존적 될-수-있음의 가능성의 실존론적 조건에 무엇이 속하는지”에 대한 탐구이다(280, 강조는 하이데거).

cf. 본래적 자기로 소환/불러냄/앞으로-부름(Anrufen/Vorrufen) + 비본래적 자기로부터 호명/불러들임/뒤로부터-부름(Aufrufen/Rückrufen) “Der Anruf ist vorrufender Rückruf, vor: in die Möglichkeit, selbst das geworfene Seiende, das es ist, existierend zu übernehmen, zurück: in die Geworfenheit, um sie als den nichtigen Grund zu verstehen, den es in die Existenz aufzunehmen hat.”(287)

 (1) 부름에서 이해에 주어지는 것은 무엇이며, 그와 같은 (2) 소환에 대한 본래적인 이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제시되었다. “부름은 현존재를 그의 될-수-있음을 향해 앞으로 가리켜보이고 집에-없는-듯함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부름으로서 그렇게 한다.”(280) 부르는 자는 무규정적이지만, 그는 “내던져진 단독자성[Vereinzelung]의 섬뜩함”을—보편적 이상이 아닌, 그때그때마다의 현존재의 섬뜩함을—근원[Woher]으로 가진다. 부름의 개시기능은 그것이 “앞으로 불러내면서 뒤로부터 불러들임[vorrufenden Rückruf, a calling back that calls forth]”(280)으로 이해할 때 완전하게 규정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부름의 내용이 우리가 일상적인 양심경험에서 듣거나 듣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입각해 파악될 수 있는지 자문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양심이 우리에게 ‘죄책이 있다[schuldig, guilty]’고 말하거나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곤 한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경험마다 그리고 해석마다 너무나 상이하게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상이한 해석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현존재의 존재 이해에 입각한 죄책[Schuldigsein, guilt, 책임있음] 실존론적 이해는 일상적 양심경험에 대한 이해로써 이루어질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론적 죄책의 본질은, 그것이 알려질 수 있다면, (일상적) 현존재에게(조차) 이미 암묵적으로 이해되어있어야 한다. 따라서 죄책(, 양심, 그리고 죽음) 본질을 탐구함에 있어 실마리는 “현존재에 대한 일상적인 해석이 그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이다.”(281) “모든 잘못-봄[Fehlensehen] 속에서는 현상의 근본적인 ‘이념[Idee]’에 대한 가이드라인[Anweisung, directive]이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281).

 일상적으로 ‘죄책있음’[das gerufene »schuldig«, the call of “guilty”]은 우선 ①누군가에게 빚을 졌기에 무언가를 돌려줘야 함으로 이해된다. ①‘빚을 ’의 의미는 이를테면 ‘훔침’에서와 같이 현존재를 고려하고 배려하는 존재자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죄책있음은 고려 가능한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282, 강조는 하이데거) 다른 곳에서 ‘죄책있음’은 ②무언가를 야기한 장본인[Urheber]이므로 그에 대해 책임이 있음으로 이해된다. ‘죄책 있음’의 첫 번째 의미와 두 번째 의미를 합치면 ③스스로를 책임 있는 자로 만듦이라는 의미가 도출된다. 현존재는 죄를 짓고 규칙을 어김으로써 스스로를 책임 있는 자, 고로 처벌되어야 하는 자로 만든다. 한편 현존재는 타인의 존재가능성(e.g. 타인의 몰락)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될 수 있다. 이러한 ‘타인에 대해 책임 있음[Schuldigwerden an Anderen]’은 ④‘ 현존재의 결핍의 이유가-[Grundsein, being-the-ground]’을 의미하게 된다. 이 경우 현존재 자신에게도 어떤 결핍이 귀속되는데, 그는 타인과의 공동존재가 요구하는 바를 만족시키지 못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륜적[sittlich] 요구 위반함[Verletzung] 역시 ①, ②, ③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존재의 한 존재방식이다. 이것들을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아니라 ‘성질*[Qualität]’로 이해하는 것은 ①, ②, ③, ④ 각각을 존재론적으로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덕적 죄책에 대한 기존의 이해는 그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해를 결여하고 있어, 도덕적 죄책을 단지 처벌받아-마땅함의 이념이나 빚을-짐과 관련해 이해함으로써 “권리주장들 사이를 비교하는 계산함의 의미에서의 고려함”의 권역으로 밀어냈다[abdrängen](283).

*선함, 악함 같다.

 법의 위반 및 빚과 관련되지 않은 죄책현상의 [근본적] 이해는 죄책있음이 현존재의 존재방식에 입각해 개념화될 때에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법의 위반 및 빚과 관련된 내용이 배제되도록[ausfallen, drop out], 즉 죄책이 고려의 한계 내에서 이해되지 않도록 그리고 특정한 위반행위 이후에 잇따르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도록 죄책있음의 이념을 형식화시킬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피하고자 하는 죄책에 대한 일상적/그릇된 이해는 눈앞의-존재자의 결핍과 결부되어있는 반면, 죄책있는 현존재는 눈앞의-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에서는 본질적으로 아무 것도 결핍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한다(283).

 ★실존론적인 죄책에는 결핍 대신 아님[Nicht, 비]의 성격이, 그리고 (기존에는 실존론적으로 무차별적으로 표현되었던) 무엇을 위한 이유가-됨[존재근거가-됨]의 성격이 있다. 그러므로 “아님을 통해 규정된 존재의 존재근거가 됨 — 즉 아님[Nichtigkeit, 아님성격 비성] 존재근거가 ”이 곧 실존론적 죄책의 형식적 이념이다. 죄책을 이렇게 이해할 경우, 현존재는 눈앞의-존재자처럼 결핍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죄책은 어떤 죄지음으로부터 비로소 따라나오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죄지음이 근원적인 죄책있음 근거로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284) 이 진실은 어떻게 현존재의 존재방식으로부터 실존론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가?

*“Es kann nicht schlechthin von einem daseinsmäßig »verursachten« Mangel, der Nichterfüllung einer Forderung, auf die Das Grundsein für... braucht nicht denselben Nichtcharakter zu haben wie das in ihm gründende und aus ihm entspringende Privativum. Der Grund braucht nicht erst seine Nichtigkeit von seinem Begründeten zurückzuerhalten.”(284)

 염려하는 현존재는 기투하도록 내던져진 존재자이지, 자기 자신의 의지로거기 스스로 현존재가 아니다. 달리 말해, ‘그가 존재하며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은 단지 주어져있는 무엇이며,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준 것이 아니다. 이 부여는 또한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실적인 사건이 아니라, 염려하는 현존재의 지속적인 실존(론)적 조건이다. 그는 이 조건의 무게 속에서 살아가며, 기분은 이 조건을 으로서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들을 짊어져야 한다. 이것이 “내던져진 것으로서 실존”함, 또는 근거로[①근거로부터/②근거로서]-존재함[Grundsein]의 의미이다(284).

cf. ①과 ② 모두에서의 ‘근거’ = 선택한 게 아닌 것(H씨) / cf. 현존재의 근거 = Abgrund(R씨)

“Der eigene geworfene Grund zu sein, ist das Seinkönnen, darum es der Sorge geht. […] Es ist nie existent vor seinem Grunde, sondern je nur aus ihm und als dieser.”(284)

 ①현존재의 존재는 그의 마음대로 통제될 있는 아님 피투성의 실존론적 의미를 이룬다. “현존재는 근거로-존재하면서 자기 자신의 아님[Nichtigkeit, nullity]이다.”(284) (이로써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유한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처럼 현존재는 도리어 자신의 근거에 의해/근거로부터 통제되지만, 동시에 ②그 근거를 짊어지고 (특정 존재가능성들을 통해) 살아내는 은 현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근거로서 존재하는 존재자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가능존재로서의] 현존재는 실존하면서 [ 자신] 근거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285).** 실존하는 현존재는 매 순간 하나의 존재가능성만을 기투할 수 있으며, 이는 그가 다른 존재가능성은 ‘아닌’ 것으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기투는 근거로-존재함의 아님성격에 의해 규정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기투 자체가 본질적으로 무화의 실천이다. 이 무화가 곧 현존재가 자유를 발휘하는 존재방식이다.***

*Q. 이 ‘아님’은 그렇다면 문학적 비유인가? 현존재가 현존재가 아니라는 명제는 논리법칙에 위배된다. 아니면 여기서 다시금 실존의 법칙이 논리의 법칙보다 우위에 오는가?

A. 언제나 자신의 궁극목적에 입각해 살기 때문에,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가능성에 입각해 산다. 그러므로 저 궁극목적이 근거이며, 이 근거가 무인 이유는 무세계적인 목적이기 때문에(J씨).

A2. 시간적으로 흐르는 존재다.

**현존재를 통제하는 근거와, 현존재 자신의 근거 사이의 통일성이 흥미롭다.

***“Die gemeinte Nichtigkeit gehört zum Freisein des Daseins für seine existenziellen Möglichkeiten. Die Freiheit aber ist nur in der Wahl der einen, das heißt im Tragen des Nichtgewählthabens und Nichtauchwählenkönnens der anderen.”(285)

 피투와 기투 모두에 본질적으로 깃든 아님의 성격본래성, 곧 퇴락의 가능근거이다. “염려 자체가 본질적으로 철두철미 아님에 의해 관통되어있다.”(285) 그러므로 염려란 다른 말로 “(무화하는[nichtig, null]) 아님의 근거로-존재함”이며, 이것이 현존재에게 죄책이 있다는 실존론적 사태의 의미를 가리킨다(285). 반복하건대 죄책이란 아님의 근거로-존재함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존론적인 아님이 일종의 이상에 비한 결여/결핍 또는 박탈, 실패인 것은 결코 아니다. 현존재는 특정한 이상에 도달하는 데 실패하든, 성공해서 진보하든 상관없이 모든 기투에 앞서아닌’[무화하는] 존재이다.

 아님/무의 존재론적 의미가 불투명한 것은 “무의 존재론적 본질 일반”에 의해 어쩔 수 없다(285). 그러나 아님/무를 부정태[Negative] 또는 결여 또는 긍정에서 부정으로의 ‘이행’*으로 보는 견해는 아님/무에 대한 존재론을 수행하지 않은 산물이다. 아님/무의 존재론적 근원은 존재의미에 대한 해명으로부터 비로소 가능하다.

*헤겔 저격이다(H씨).

 가장 헛된 시도는 현존재에게 부과되는 죄책의 개념을 선의 결여로서의 악의 개념으로부터 도출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현존재를 눈앞의-존재자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는 언제나 이미 죄책이 있다는 것이 곧 “‘도덕적’ 선과 악의 실존론적 가능조건”이다(286). 우리는 파생적 현상인 도덕으로부터 근원적 현상인 실존적 죄책을 이해할 수 없다.

*Q. 왜일까? cf. “Am allerwenigsten ist dem existenzialen Phänomen der Schuld näherzukommen durch die Orientierung an der Idee des Bösen, des malum als privatio boni. Wie denn das bonum und die privatio dieselbe ontologische Herkunft aus der Ontologie des Vorhandenen haben, die auch der daraus »abgezogenen« Idee des »Wertes« zukommt.”(286)

A. 실체-속성 관계로 현존재를 보기 때문이다.

Q. 그러면 ‘모자를 씀’도 현존재에게 못 붙는가?

Q. 실존하는 현존재에게는 도덕적 술어가 붙을 수 없는가?

A. 파생적으로 붙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실존론적 죄책은 어떻게 경험되는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실존적 죄책은 그것이 (퇴락의 상태에서) 알려지지 않는다는 데서 도리어 알려진다. “그리고 오직 현존재가 그의 존재를 근거로[이유로] 죄책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내던져진 퇴락하는 자로서 스스로를 그 자신으로부터 닫기 때문에 [도리어] 양심은 가능하”다. 양심의 부름이 이해에 부여하는 내용은 현존재의 실존론적인 죄책있음이다. (불안에서의) 섬뜩함이 곧 퇴락한 현존재를 “그의 위장되지 않은 아님[Nichtigkeit, nullity]” 앞으로 데려오면서 그의 본래적 존재가능성을 가리켜보인다(287). 쉽게 말해, 양심의 불러냄과 불러들임을 통해 현존재에게 세인의 해석 속의 자기상실을 만회할 책임이 있다는 진실이 개시된다. 요컨대 양심의 부름은 현존재에게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Kenntnis, knowledge]” 부여하며, 이에 따라 부름에 상응하는 현존재의 들음이란 자신이 죄책이 있다는 사실의 인식[Kenntnisnahme, taking knowledge]이다(287).

 혹자는 죄책이 있다는 사실에로 소환함은 현존재를 악으로 소환함[악한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문은 여전히 부름의 의미를 실존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파생적으로, 즉 특정한 행위나 의무를 수행하지 않음에 입각해 이해하는 것이다. 죄책있음으로 소환함의 진의는 현존재의 (본래적인) 존재가능성에로의 불러냄, 그것에 대한 이해에 있(지, 악한이 되는 것에 있지 않)다. 자신의 본래적 존재가능성에 대한 이해로써 현존재는 부름에 개방된다[freiwerden, 열려있게 된다]. 이 개방은 “소환될-수-있음에 준비돼-있음”을 뜻한다(276). “그의 가장 본래적인 죄책있음”에 개방된 현존재는 이제 자신을 선택한다(288). 반면 세인은 여전히 손안에 있는 규칙과 공적 규범에 대한 위반/준수의 이분법에 갇혀있다.

“Das Dasein ist rufverstehend hörig seiner eigensten Existenzmöglichkeit. Es hat sich selbst gewählt.”(287)

 “부름을-이해함[Rufverstehen]은 선택이다.”(288)* 물론 양심 자체는 현존재의 실존적 조건으로서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선택되는 것은 “가장 본래적인 죄책있음에 개방됨으로서의 양심을-가짐”이다(288). 그리하여 “소환을-[본래적으로-]이해함은 양심을-가지고자-원함[Gewissen-haben-wollen] 뜻한다.”(288) 즉, 죄책있음에 개방된 현존재는 자신의 죄책있음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본래적 존재가능성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한다.* 자기 자신의 가장 본래적인 존재에 대한 책임을 토대로 현존재는 공동존재에서 타인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이로써 ‘선하게’ 존재하는 것도 비로소 가능해진다.**

*“Das Gewissen-haben-wollen ist vielmehr die ursprünglichste existenzielle Voraussetzung für die Möglichkeit des faktischen Schuldigwerdens. Rufverstehend läßt das Dasein das eigenste Selbst aus seinem gewählten Seinkönnen in sich handeln. Nur so kann es verantwortlich sein.”(288)

**Q. 나의 이해가 맞는가? 왜 하이데거는 이 대목에서 ‘양심이 없다’는 표현을 사용하는가? cf. “Jedes Handeln aber ist faktisch notwendig »gewissenlos«, nicht nur weil es faktische moralische Verschuldung nicht vermeidet, sondern weil es auf dem nichtigen Grunde seines nichtigen Entwerfens je schon im Mitsein mit Andern an ihnen schuldig geworden ist. So wird das Gewissen-haben-wollen zur Übernahme der wesenhaften Gewissenlosigkeit, innerhalb der allein die existenzielle Möglichkeit besteht, »gut« zu sein.”(288)

 양심은 “아무런 지식을 주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단순히 비판적인 것이 아니다. 양심실질적인[positiv]” 부름을 통해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가능에 대한 증명을 제공한다. 이제 남은 작업은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가능성을 실존론적으로 구체화하는 것, 그리고 양심에 대한 여태까지의 접근법과 기존의 양심 개념을 연결하는 것이다.

 

§59. 양심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과 통속적(vulgär) 양심해석

 여태까지 수행된 양심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은 통속적 양심해석, 즉 세인의 양심해석과 즉각 연결되지 않고 심지어는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통속적 양심해석은 현존재를 손안의-존재자로, 지배하고[verwalten, 관리하고] 계산하는 존재자로 이해하기 때문에, 두 해석은 연결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처럼(—오히려 연결되지 않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속적인 양심경험 또한 [본래적 양심에 대한] 현상에 어떤 방식으로[irgendwie]—선존재론적으로—이르러야[treffen, get at] 한다.”(289) 나아가 양심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은 통속적 양심해석이 왜 (존재론적으로) 빗나가는지, 그리고 왜 진실을 은폐하는지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통속적 양심해석은 양심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에 대해 크게 네 가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1. 양심은 본질적으로 비판하는 기능을 가진다[가져야 한다]. 2. 양심은 언제나 규정된 수행된 또는 의지된 행위[Tat]에 상대적으로 말한다. 3. 목소리는 경험에 따르면[erfahrungsmäßig] 현존재의 존재와 그렇게 뿌리깊게[wurzelhaft, radically] 관계되어있지 않다. 4. 그 해석[양심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은 현상의 근본형식들인 악한선한’, ‘혼내는[rügen, reprimand]’경고하는양심을 고려하지 않는다.”(290)

 ④ 통속적인 양심해석에서 양심은 일차적으로/우선적으로 ‘나쁜’, ‘악한’ 양심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렇게 양심에 대한 체험이 죄지음에 잇따르는 체험으로 이해될 경우, 그것은 무엇으로의 호명/불러들임[Aufruf, (Rückruf)]이 아니라 눈앞의-사건인 죄에 대한 기억에, 즉 반쪽짜리 소환/불러냄[Vorruf, (Anruf)]에 불과하게 된다. 이 경우 현존재는 눈앞의-사건들의 계열연관[Abfolgezusammenhang]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계열연관 속 눈앞의-사건은 경과한[abläufen] 다음 사라지지만, 삶의 실존론적 조건은 그렇지 않다. 현존재는 실존하는 존재자이지 (직선적인) 눈앞의-사건들의 계열연관이 아니다. 따라서 실존론적으로 해석된 양심은 ‘죄’ 이전에도 현존재를 불러들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쭉 다 이미 결정되어있음.

“Der Rückruf ruft aber zugleich vor auf das Schuldigsein als in der eigenen Existenz zu ergreifendes, so daß das eigentliche existenzielle Schuldigsein gerade erst dem Ruf »nachfolgt«, nicht umgekehrt. Das schlechte Gewissen ist im Grunde so wenig nur rügend-rückweisend, daß es eher vorweisend in die Geworfenheit zurückruft. Die Folgeordnung ablaufender Erlebnisse gibt nicht die phänomenale Struktur des Existierens.”(291)

 양심을 ‘좋은’ 양심으로 보는 해석도 마찬가지로 존재론적 오류룰 범한다. 일단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나는 선하다’고 입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좋은 양심’의 개념 자체가 양심이 사실은 죄책있음임을 입증한다. ‘좋은 양심’은 ‘나쁜 양심’의 결여라는 해석도 문제적이다. 이 경우 좋은 양심을 가진다는 것은 죄짓지-않음, 그리하여 불러내지지-않음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여’는 어떻게 ‘체험’되는가?”(291) 좋은 양심의 체험은 결국 부름의 체험이 아니게 되어, 양심현상의 범주에 속하지 않게 된다.* 부름의 부재 가운데서 양심은 오히려 망각되어, 현존재는 불러내질-수-있음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렇다면 현존재는 더 이상 양심을-가지고자-원하지 않는 것이며, 본래적이고 지속적인 죄책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양심은 자립적인 양심형식도 정초된 양심형식도 아니다. 즉 그것 자체가 양심현상이 아니다.”(292)

“Die alltägliche Auslegung hält sich in der Dimension des besorgenden Verrechnens und Ausgleichens von »Schuld« und »Unschuld«.”(292)

*③에 대한 대답을 미리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cf. 바리새주의=율법주의=(자신이 규정한 것이 아닌) 율법을 지킨다는 이유로 선이 확보된다고 주장. 도덕적 자율성의 공간이 없음.

 여기서 다시금 “앞으로-지시하면서-경고하는 양심과 뒤로-지시하면서-혼내는[처벌하는] 양심 사이의 구분”이 확인된다(292). 그러나 경고하는 양심에 대해 말할 때조차, 경고의 방향성이 특정하게 의지된 행위의 방지에 기울여져 있을 경우에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③ 세 번째 이의에 따르면 “일상적인 양심경험은 죄책있음으로 호명됨과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nicht kennen, be not familiar with].”(29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르는 목소리가 종종 없는) 일상적인 양심경험이 양심경험을 잘 탐구할 수 있게 해주는 본래적인 접근법과 존재론적 지평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양심경험은 “완전히 무규정적인 체험들의 계열 또는 심리적 사건들’” 하나로, 그것도 심판과 책망의 사건으로서 그에 대해 현존재가 계산적으로 처신하는사건이 된다(293). 도덕적인 법칙의 이념에 입각해 양심을 일종의 법정으로 해석한 칸트 역시 현존재를 고려되어야 할 존재자(비실존자)로 간주하는 존재론을 전제하고 있었다.* 이때의 고려란 “‘가치의 실현’ 또는 규범의 충족”을 의미한다(293).

*현존재는 도덕법칙의 손안의-수단/도구가 된다. 양심이 있다는 것은 현존재가 그런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K씨). ➔ 비실존자=자유/무규정성이 없는 존재자

*“Auch die Werttheorie, mag sie formal oder material angesetzt sein, hat eine »Metaphysik der Sitten«, das heißt Ontologie des Daseins und der Existenz zur unausgesprochenen ontologischen Voraussetzung.”(293)

 이로써 ② 양심은 언제나 규정된 수행된 또는 의지된 행위에 결부되어있다는 두 번째 이의도 함께 반박된다. 부르는 목소리가 특정한 행위에 결부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종류의 특수한 부름경험[Ruferfahrung]이 부름을 완전하게[völlig] 해명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는 눈앞의-사건으로서 (자신의 행위가 낳은) 빚을 처리해야 하는 ‘가정[Haushalt]’이 아니기 때문이다.*

*“Gleich als wäre das Dasein ein »Haushalt«, dessen Verschuldungen nur ordentlich ausgeglichen zu werden brauchen, damit das Selbst als unbeteiligter Zuschauer »neben« diesen Erlebnisabläufen stehen kann.”(293)

 ① 양심이 무언가를 ‘실질적으로’ 규정해주는 것이 아님은 실존론적 해석에서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필연적으로 ‘부정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부름의 내용이 무규정적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것의 실질성을 인정해주지 않는 이유는, 양심이행위 이용 가능하고 계산 가능하며 확실한 가능성을 제공해주리라는, 어떤 유용성에 대한 우리의 기대 때문이다. 이 기대 하에서 현존재의 삶은 다시금 일종의 비즈니스가 된다. 그러나 양심이 현존재를 소환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에게 실용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일의적으로 계산 가능한[verrechnenbar] 행동준칙[Maxim]” 제공은실천의 가능성[die Möglichkeit zu handeln]” 현존재에게서 빼앗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294).

 양심의 실존론적 해석이 통속적 양심해석이 원하는 만큼 ‘실질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은 통속적 양심해석이 말하는 ‘부정하는’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 “부름은 고려 가능한 것으로서 실질적이거나 부정적일 수 있는 무언가를 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름은 실존이라는,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를 겨냥하기[meinen] 때문이다.”(294) 양심의 부름은 현존재에게 그의 가장 본래적인 존재가능성을 지시해 보인다는 점에서 충분히 실질적이다. 그리고 부름을 본래적으로 듣는 현존재는 가능성을 구체적인/규정된 현사실적인 실천으로써 (실현한다.)

Q. 현존재가 눈앞의-존재자로서가 아니라 실존하는 존재자로서도 충분히 (죄악 후) 행동지침을 요구하고, 그것의 유용성/이득을 계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A1. 양심의 부름사건은 계산으로써 해치워야 할 사건이나 수행해야 할 투-두-리스트가 아니라, 존재에 입각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일어날 수 있는) 무엇이다.

A2. 본인이 본인의 할 일을 규정했을 경우 퇴락하지 않은 것이다.

Q. 행동 지침이 주어지고 그에 순종하는 것만으로 현존재가 눈앞의-존재자가 되는가?

A1. 그 경우 현존재에게 자유가 없다.

A2. 퇴락해있는 존재자=눈앞의-존재(나 다름없이 자기 실존을 보는)자(H2씨).

 요컨대 통속적 양심해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이해될 경우 양심의 실존론적 해석을 자신의 근원으로서 가리키게 된다. (현존재의 존재를 눈앞의-존재로 파악하는 것은 실존으로 파악하는 것의 파생태이기 때문이다.) 통속적 양심해석은 현존재에 대한 세인의 자기해석에서 (체계적으로) 비롯하는 것이지, 우연적으로 산출된 것이 아니다. 한편, 통속적 양심해석에 대한 존재론적 비판[Kritik]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세인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아님이 강조돼야 한다.

 

§60. 양심에서 증명된 본래적 존재가능(--있음) 실존론적 구조

 이로써 양심이 현존재의 본래적인 존재가능성을 부름을 통해 지시한다는 것(, 그리하여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부름에 대한 현존재의 본래적인 들음—양심을-가지고자-원함—역시 현존재의 존재양태로서, 그것은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의 번째 현상적 내용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제 양심을-가지고자-원함의 실존론적 구조가 밝혀져야 한다. 양심을-가지고자-원함은 근본적으로 개시의 일종으로서, 이해, 심정성 및 말에 의해 구조화된다.

*Q. X가 이루어지는(이루어질 수 있는) 특정한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X의 존재가 입증되지는 않는 것 같다.

A.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양심의 부름체험이 있는데, 그것이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 가능성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우선 “실존적 이해세계----있음의 가장 본래적인 현사실적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기투함을 의미한다.”(295) 이제 하이데거는 어떤 기분이 실존적 이해에 상응하느냐고 묻는다. “양심을-가지고자-원함은 불안에 준비되어있음[Bereitschaft]”에, 즉 단독자로서 섬뜩해-에 상응한다(296).

 나아가 실존적 이해는 부름 자체가 말이라는 점에서 말과도 결부된다. 그러나 부름으로서의 말은 그에 대한 말대꾸[Gegenrede, counter-discourse]가 불가능하다. 이는 현존재가 어떤 신비한 힘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양심의 부름을 본래적으로 들은 현존재에게 부름의 내용은 위장되지 않은 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양심을-가지고자-원함에 속하는 분절하는 말의 양태는 침묵[Verschwiegenheit, reticence]이다.”(296, 강조는 하이데거) 양심의 부름 자체도 소리없이 이루어지며, 부름을 듣는 현존재도 세인의 잡담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고요 속으로 돌아갈 있게 된다. 반면 세인은 침묵하는 양심을 불확정적인[nicht feststellbar] 것으로, 들리지 않기에 눈앞에-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세인은 자신이 양심의 부름을 넘겨듣는다는 사실, 그리고 굉장히 제한된 청취의 능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Q. 이 비은폐성으로부터 침묵이 따라나오는가? 어째서 진리에 대한 체험은 침묵에 이르는가?

A.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서의 침묵이 아니라 ‘잡담하지 않음’으로서의 침묵 같다.

**요약/(자기 자신에 대한) 현존재의 본래적 개시: “Die im Gewissen-haben-wollen liegende Erschlossenheit des Daseins wird demnach konstituiert durch die Befindlichkeit der Angst, durch das Verstehen als Sichentwerfen auf das eigenste Schuldigsein und durch die Rede als Verschwiegenheit. Diese ausgezeichnete, im Dasein selbst durch sein Gewissen bezeugte eigentliche Erschlossenheitdas verschwiegene, angstbereite Sichentwerfen auf das eigenste Schuldigsein – nennen wir die Entschlossenheit.”(296-297)

 양심의 부름을 통한 현존재의 본래적인 개시는 결의성[Entschlossenheit]이라고 불린다. “결의성은 현존재의 개시성의 탁월한 양태이다.”(297) 그런데 개시성은 근원적인 의미의 진리다. 근원적 의미에서의 진리는 판단의 성질이 아니라* “세계-내-존재 자체의 본질적인 구성자[Konstitutivum]이다.”(297) ‘현존재가 진리 속에 있다’는 명제에 대한 존재론적 해명은 현존재의 결의실존의 본래적인 진리에 해당한다는 것을 밝혀준다. “이러한 본래적인 개시성은 […] 그것 속에 정초된 »세계« 피발견성과 타인의 함께-거기-있음의 개시성을 변양한다.”(297) [결의를 통해] 손안에-있는 »세계«의 내용 또는 타인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 자신의 고려하고 이해하는 존재가 그의 (궁극목적이 된) 본래적 존재가능성에 의거해 다시 규정된다.

*‘Logical prejudice’(Dahlstrom(2001))

 중요한 것은 결의가 현존재를 본래적 자기로 되돌려준다고 해서 그를 세계로부터 떨어뜨리는 것, 그를 자유롭게-부유하는 고립된 자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존재는 다만 본래적으로 세계--존재하게 될 뿐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기로 결의한 자기로서 손안의-존재자를 고려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그것도 타인의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 역시 함께-개시하는[miterschließen] 방식으로 배려한다. “결의성의 본래적인 자기됨으로부터 무엇보다도 먼저[allererst] 본래적 서로-함께-있음이 발원한다.”(298)

 또한 결의는 현사실적인, 즉 내던져진 채로 기투하는 현존재의 결의이다. 그리하여 결의의 개시기능은 현존재의 자기결정을 향해[aufhin] 이루어진다. 한편, 결의가 특정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권유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결의성에는 필연적으로 무규정성이, 모든 현사실적으로-내던져진 현존재의 될-수-있음을 특징짓는 무규정성이 속한다.”(298) 그러나 실존의 차원에서는, 실존론적으로 무규정적인 결의가 실존적 규정을 얻는다.*

*기투는 언제나 “규정된[특정한, bestimmt] 현사실적 가능성”에 대한 기투이기 때문이다(299).

 현존재는 우선 대부분의 경우 비진리 속에 있기 때문에, 결의하지-못한-상태[Unentschlossenheit]에 놓인다. 퇴락한 현존재는 세인의 해석대로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반면 “결의성은 세인 속에서의 상실로부터 스스로를-호명되도록-[Sich-aufrufen-lassen]을 의미한다.”(299) 그렇다고 해서 결의가 현존재의 현실성을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결의는 현존재에게 오히려 현사실적 가능성들을 [다만 무규정적으로] 드러내준다. “모든 가능한 결의된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규정성은 여태까지 지나쳐온[아직 분석되지 않은] 실존론적 현상, 우리가 상황[Situation/Lage]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구성적 계기들을 포함한다[umfassen].”(299) (쉽게 말해, 결의는 상황을 개시한다.)

 상황 또한 현존재의 ‘거기’에 속하기에, 일종의 공간성이 그에 귀속된다. 그러나 이 공간성은 세계-내-존재의 구성틀에 입각한 실존론적 공간성이지, 그 안에서 눈앞의-사건이 일어나는 (통속적인) 공간성이 아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상황의 기초가 결의성이다. “상황은 결의성 속에서 개시된 모든 거기, 실존하는 현존재가 거기 있는 []으로서의 거기이다.”(299)

Q. 어째서 본래적 결의만이 상황을 개시하는가?
A1. 현존재의 상황이란 특정한 현존재에게 고유한 피투의 양상과 기투의 한계이다. 그러한 고유성을 알려면 결의가 요구된다(나).

A2. 본래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확신하는 처지(J씨)

A3. ‘나만의’ 상황. 사정이나 우연은 나의 결단에 의해 처해지게 되는 처지가 아니다(H씨).

A4. ‘내가 누구인지’, 나의 고유한 피투/기투가능성을 개시해주는 처지(H씨). ➔ 그걸 보기로 결의한 자만에게 보여지는…

 하이데거는 상황과 (그릇된 존재론에 입각해 말해지는) 사정/우연[Umstand/Zufall] 구별한다. 결의의 상황 속에 있는 덕분에 현존재에게는 “사정의 그때그때마다의 현사실적 용도성격[Bewandtnischarakter]”이 비로소 개시되는 것이다(300). “그에 반해 세인에게 상황은 본질적으로 닫혀있다[개시되지 못한다].”(300)* 그는 우연한 기회들을 계산적으로 맞닥뜨리느라 바쁘다.

*Q. 왜인가?(R씨)

A. 상황은 본래적 실존을 가능케 해주는 처지.

 요컨대 “결의성은 거기의 존재를 그의 상황적인 실존 속으로 가져온다[Die Entschlossenheit bringt das Sein des Da in die Existenz seiner Situation].”(300) 그리하여 양심의 부름 역시 상황 속에서의 부름이지, (습관[Habitus]이나 단순한 바람[Velleität]이 그러는 것처럼) 양심의 부름으로써 상황이 비로소 표상되는 것이 아니다.* “결의한 채로 현존재는 이미 행동하고 있다[handelt das Dasein schon].”(300)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신이 ‘행동[Handeln]’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피해왔다고 지적한다. 능동성은 수동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결의가 이론적인 능력과 대비되는 실천적인 능력으로 오해되는 일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염려는 이론과 실천의 대비 이전에 있는 이며, “결의성은 염려된 염려 속에서 그리고 염려로서 가능한 […] 자기의 본래성”이다(301). 이로써 “현존재의 본래성[과 전체적 존재는] 이제 공허한 표제도 발명된 이념도 아니다.”(301)

cf. 실존론적 인간학 “Die faktischen existenziellen Möglichkeiten in ihren Hauptzügen und Zusammenhängen darzustellen und nach ihrer existenzialen Struktur zu interpretieren, fällt in den Aufgabenkreis der thematischen existenzialen Anthropologie.”(301)

 

3 현존재의 본래적인 전체존재가능(Ganzseinkönnen) 염려의 존재론적 의미로서 시간성

§61 본래적으로 현존재에 걸맞은 전체존재에 대한 확정(Umgrenzung)에서 시간성의 현상적 발견(Freilegung)으로 [이행하는] 방법적 단계들 윤곽 짓기

 하이데거는 이어, 본래적인 전체존재의 방식인 선구와 “현존재의 본래적 --있음”에 해당하는 결의성 사이의 연관에 대해 묻는다(302). “[한편으로] 죽음과 [다른 한편으로] 행위의 ‘구체적 상황’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302)* 이러한 물음은 본래적인 결의성으로서 (죽음으로) “선구하는 결의성”이라는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으로 이끈다(302). 이러한 이행은 실존의 이념을 따라 행해졌을 때 비로소 자의적인 구축물이 아니게 된다.

*둘 사이의 “외적인 합침”은 그 자체로 금지된다(302).

 이러한 이행은 또한 실존론적 해석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바가 있다. 특정한 존재자를 탐구하는 진정한 방법론은 탐구 대상이 되는 존재자의 존재방식 또는 존재구성틀에 대한 선이해를 담지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염려의 존재론적 의미는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 입각해 해석되어야 한다. 현존재는 실체도, 주체도 아닌 실존하는 자기로서 그의 ‘자립성[Selbständigkeit]’을 존립요소[Bestand]로 가진다.

 염려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물음은 시간성의 발견에로 이끈다. “시간성은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존재에서, 선구하는 결의성* 현상에서 현상적으로 근원적으로 경험된다.”(304) 실존의 모든 가능성은 시간성의 시간화(그리고 시간화의 다양한 방식) 근거한다. 시간성 일반 가운데서도 선구하는 결의성의 시간성은 시간성의 탁월한 양상이 될 것이다.

*Q. 그렇다면 ‘(죽음으로 )선구하지 않는 결의’가 있다는 것인가?(H2씨)

A. 결의는 계속 본래적인 것이고, 다만 그것이 현존재의 것임에 주목하면 죽음과의 관련성을 얻는다는 게 아닌가?(나)

“Zeitlichkeit kann sich in verschiedenen Möglichkeiten und in verschiedener Weise zeitigen. Die Grundmöglichkeiten der Existenz, Eigentlichkeit und Uneigentlichkeit des Daseins, gründen ontologisch in möglichen Zeitigungen der Zeitlichkeit.”(304)

 시간성에 대한 통속적 이해 및 기존의 철학적 이해는 시간성에 대한 근본적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시간성에 대한 근본적 이해에 먼저 이른 뒤, 그로부터 시간성에 대한 통속적 이해 및 기존의 철학적 이해가 어떻게 파생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러한 이해들이 지배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탐구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우선 현존재의 근본적인 구조 전체가 시간적이며 시간화의 양상들임을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태까지의 현존재 분석은 (이미 시간성의 윤곽을 짓고 있지만) 시간성에 입각해 반복되어야 한다.

 

§62 선구하는 결의성으로서 현존재의 실존적으로 본래적인 전체존재가능

죄책은 항상적인 것 “Im eigenen Sinne der Entschlossenheit liegt es, sich auf dieses Schuldigsein zu entwerfen, als welches das Dasein ist, solange es ist. Die existenzielle Übernahme dieser »Schuld« in der Entschlossenheit wird demnach nur dann eigentlich vollzogen, wenn sich die Entschlossenheit in ihrem Erschließen des Daseins so durchsichtig geworden ist, daß sie das Schuldigsein als ständiges versteht. Sie[결의성] birgt das eigentliche Sein zum Tode in sich als die mögliche existenzielle* Modalität ihrer eigenen Eigentlichkeit. Diesen »Zusammenhang« gilt es phänomenal zu verdeutlichen.”(305)

*Q. 왜 실존론적이지는 않은가?

A. 죽음으로의 선구가 단순히 존재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결의라는 실존적 존재가능성을 통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임이 증명된다. 일종의 초험논증이다. 결의는 죽음으로의 선구를 요구하는데, 결의가 현실적이므로, 죽음으로의 선구도 현실적이다.

“Die Entschlossenheit wird deshalb erst als vorlaufende ein ursprüngliches Sein zum eigensten Seinkönnen des Daseins.”(306)

결의를 통해 개시된 것에 대한 확신=죽음에 대한 자기개방(Sichfreihalten) “Was bedeutet dann die solcher Entschlossenheit zugehörige Gewißheit? Sie soll sich in dem durch den Entschluß Erschlossenen halten. Dies besagt aber: sie kann sich gerade nicht auf die Situation versteifen, sondern muß verstehen, daß der Entschluß seinem eigenen Erschließungssinn nach frei und offen gehalten werden muß für die jeweilige faktische Möglichkeit. Die Gewißheit des Entschlusses bedeutet: Sichfreihalten für seine mögliche und je faktisch notwendige Zurücknahme.*”(307-308)

*Q. 여기서 ‘다시-취함’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현사실적으로 필연적인가? 죽음인가, 본래적 존재가능으로의 귀환인가?

A. 죽음으로의 선구로서의 본래적 존재가능으로의 귀환 같다.

cf. “Solches Für- wahr-halten der Entschlossenheit (als Wahrheit der Existenz) läßt jedoch keineswegs in die Unentschlossenheit zurückfallen. Im Gegenteil: dieses Für-wahr-halten als entschlossenes Sich-frei-halten für die Zurücknahme ist die eigentliche Entschlossenheit zur Wiederholung ihrer selbst.”(308)

“Das zur Entschlossenheit gehörende Für-wahr-halten tendiert seinem Sinne nach darauf, sich ständig, das heißt für das ganze Seinkönnen des Daseins freizuhalten. Diese ständige Gewißheit wird der Entschlossenheit nur so gewährleistet, daß sie sich zu der Möglichkeit verhält, deren sie schlechthin gewiß sein kann. In seinem Tod muß sich das Dasein schlechthin »zurücknehmen«.”(308)

진정한 기쁨 “Mit der nüchternen Angst, die vor das vereinzelte Seinkönnen bringt, geht die gerüstete Freude an dieser Möglichkeit zusammen. In ihr wird das Dasein frei von den »Zufälligkeiten« des Unterhaltenwerdens, die sich die geschäftige Neugier primär aus den Weltbegebenheiten verschafft.”(310)

★“Philosophie wird ihre »Voraussetzungen« nie abstreiten wollen, aber auch nicht bloß zugeben[add, admit] dürfen. Sie begreift die Voraussetzungen, und bringt in eins mit ihnen das, wofür sie Voraussetzungen sind, zu eindringlicherer Entfaltung.”(310)

 

§63 염려의 존재의미 해석을 위해 획득된 해석학적 상황과 실존론적 분석학 일반의 방법적 성격

실존론적 분석은 세인의 일상적 해석에 폭력을 가한다. 모든 해석은 기투[윤곽지음]이며, 실마리와 규칙을 가진다. “Die existenziale Analyse hat daher für die Ansprüche bzw. die Genügsamkeit[소박한 안주] und beruhigte Selbstverständlichkeit der alltäglichen Auslegung ständig den Charakter einer Gewaltsamkeit. Dieser Charakter zeichnet zwar die Ontologie des Daseins besonders aus, er eignet aber jeder Interpretation, weil das in ihr sich ausbildende Verstehen die Struktur des Entwerfens hat. Aber gibt es hierfür nicht je eine eigene Leitung und Regelung?”(311-312)

Q. 모든 해석은 기투[윤곽지음]라는 주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A. 선이해를 낱말로 오게 한다(J씨). 표면화. / ~로서의 이해이므로.

Q. 왜 모든 해석이 기투이기 때문에 폭력적인가?

A1. 기투로서의 해석=탈은폐. 은폐하고자 하는 성향에 폭력을 가함. 수면 아래에 있던 것을 끄집어낸다면 충분히 폭력적.

A2. 하나의 -로서는 다른 -로서를 배제(R씨).

존재론적 해석은 존재적 가능성들을 토대로, 그것들을 그것들의 존재론적 가능성에로 기투하는 데 자리한다.* “Wenn das Sein des Daseins wesenhaft Seinkönnen ist und Freisein für seine eigensten Möglichkeiten und wenn es je nur in der Freiheit für sie bzw. in der Unfreiheit gegen sie existiert, vermag dann die ontologische Interpretation anderes als ontische Möglichkeiten (Weisen des Seinkönnens) zugrundezulegen und diese auf ihre ontologische Möglichkeit zu entwerfen?”(312)

*Q.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A. 존재적 가능성(e.g. 한 개체의 양심적 부름)을 존재론적 가능성으로서 해석해내는 것

선이해된 전제의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Ist nicht schon alles, wenngleich dämmerig, erhellt durch das Licht der »vorausgesetzten« Existenzidee? Woher nimmt sie ihr Recht? War der sie anzeigende erste Entwurf führungslos? Keineswegs. […] Die angesetzte Existenzidee ist die existenziell unverbindliche[not binding] Vorzeichnung der formalen Struktur des Daseinsverständnisses überhaupt.”(313)

★우리는 존재의 의미 일반을 지평으로서 전제한 채 현존재를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재 분석을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에 이를 수 있다. “Aber selbst diese formale und existenziell unverbindliche Existenzidee birgt doch schon einen bestimmten, wenn auch ungehobenen ontologischen »Gehalt« in sich, der ebenso wie die dagegen abgegrenzte Idee von Realität eine Idee von Sein überhaupt »voraussetzt«. Nur in deren Horizont kann sich die Unterscheidung zwischen Existenz und Realität vollziehen. Beide meinen doch Sein. Soll aber die ontologisch geklärte Idee des Seins überhaupt nicht erst gewonnen werden durch die Ausarbeitung des zum Dasein gehörenden Seinsverständnisses? Dieses jedoch läßt sich ursprünglich nur fassen auf dem Grunde einer ursprünglichen Interpretation des Daseins am Leitfaden der Existenzidee. Wird so nicht endlich ganz offenkundig, daß sich das aufgerollte fundamentalontologische Problem in einem »Zirkel« bewegt?”(314)

“Oder hat dieses Voraus-setzen den Charakter des verstehenden Entwerfens, so zwar, daß die solches Verstehen ausbildende Interpretation das Auszulegende gerade erst selbst zu Wort kommen läßt, damit es von sich aus entscheide, ob es als dieses Seiende die Seinsverfassung hergibt, auf welche es im Entwurf formalanzeigend erschlossen wurde?”(314-315)

Q. “Die Rede vom »Zirkel« des Verstehens ist der Ausdruck der doppelten Verkennung: 1. Daß Verstehen selbst eine Grundart des Seins des Daseins ausmacht. 2. Daß dieses Sein als Sorge konstituiert ist.”(315) 현존재가 이해하는 존재자임을 알게 되면 왜 순환에 대해 자비로워지는가?

A1. 탐구 대상의 특수성이 순환을 허락한다(J씨).

A2. (현존재를 해석하는) 우리가 현존재이기 때문에, 이해하는 존재자로서 선이해를 가지고 순환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H2씨).

A3. 32절의 앞서-가짐의 구조.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할 때 순환의 구조를 취할 수밖에 없다(R씨).

A4. 염려 부분은, 이해는 현존재의 염려에 속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H2씨).

★“Nicht zu viel, sondern zu wenig wird für die Ontologie des Daseins »vorausgesetzt«, wenn man von einem weltlosen Ich »ausgeht«, um ihm dann ein Objekt und eine ontologisch grundlose Beziehung zu diesem zu verschaffen.”(315-316)

 

§64 염려와 자기성(Selbstheit)

염려는 현존재의 전체존재의 가능조건이다 “Die Sorgestruktur spricht nicht gegen ein mögliches Ganzsein, sondern ist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solchen existenziellen Seinkönnens.”(317)

“Die Aufklärung der Existenzialität des Selbst nimmt ihren »natürlichen« Ausgang von der alltäglichen Selbstauslegung des Daseins, das sich über »sich selbst« ausspricht im Ich-sagen.”(318)

“Wenngleich Kant strenger als seine Vorgänger den phänomenalen Gehalt des Ich-sagens festzuhalten sucht, so gleitet er doch wieder in dieselbe unangemessene Ontologie des Substanzialen zurück, deren ontische Fundamente er theoretisch dem Ich abgesprochen hat.”(318-319)

동일하고 지속적인 눈앞의-존재자로서의 칸트적 자기. (자기다움과는 무관함)  “Das Positive an der Kantischen Analyse ist ein Doppeltes: einmal sieht er die Unmöglichkeit der ontischen Rückführung des Ich auf eine Substanz, zum anderen hält er das Ich als »Ich denke« fest. Gleichwohl faßt er dieses Ich wieder als Subjekt und damit in einem ontologisch unangemessenen Sinne. Denn der ontologische Begriff des Subjekts charakterisiert nicht die Selbstheit des Ich qua Selbst, sondern die Selbigkeit und Beständigkeit eines immer schon Vorhandenen. […] Das Sein des Ich wird verstanden als Realität der res cogitans.”(319-320)

cf. 칸트: (니체가 비판한) 주술문법을 여전히 따름. 표상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종합해주는 배후의 주어를 (데카르트처럼) 요구함(H2씨).

cf. 자기반성적 주체를 상정한 데카르트에 비해 그래도 칸트는 지향성에 다가섰다. 주체가 주체로서 종합되기 위해 (대상적) 잡다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다만 주체와 잡다/표상 사이의 결합 방식을 존재론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K씨).

“Diese Vorstellungen[나는 생각한다라는 표상형식에 덧붙는 다른 표상] aber sind für ihn das »Empirische«, das vom Ich »begleitet« wird, die Erscheinungen, denen es »anhängt[부착]«. Kant zeigt aber nirgends die Seinsart dieses »Anhängens« und »Begleitens«.”(321)

자아의 지향성이 그를 고립으로부터 꺼낸다 “Denn auch der Ansatz des »Ich denke etwas« ist ontologisch unterbestimmt, weil das »Etwas« unbestimmt bleibt. Wird darunter verstanden ein inner-weltliches Seiendes, dann liegt darin unausgesprochen die Voraussetzung von Welt; und gerade dieses Phänomen bestimmt die Seinsverfassung des Ich mit, wenn anders es soll so etwas sein können wie »Ich denke etwas«. Das Ich-sagen meint das Seiende, das je ich bin als: »Ich-bin-in-einer-Welt«. Kant sah das Phänomen der Welt nicht und war konsequent genug, die »Vorstellungen« vom apriorischen Gehalt des »Ich denke« fernzuhalten. Aber damit wurde das Ich wieder auf ein isoliertes Subjekt, das in ontologisch völlig unbestimmter Weise Vorstellungen begleitet, zurückgedrängt. Im Ich-sagen spricht sich das Dasein als In-der-Welt-sein aus.”(321)

자기=염려하는 자기=실존하는 자기 “Für das Aufgehen in der alltäglichen Vielfältigkeit und dem Sich-jagen des Besorgten zeigt sich das Selbst des selbstvergessenen Ich-besorge als das ständig selbige, aber unbestimmt-leere Einfache. Ist man doch das, was man besorgt. […] Das Ich meint das Seiende, das man »in-der-Welt-seiend« ist. Das Schon-sein-in-einer-Welt als Sein-bei-innerweltlich-Zuhandenem besagt aber gleichursprünglich Sich-vorweg. »Ich« meint das Seiende, dem es um das Sein des Seienden, das es ist, geht.”(322)

(본래적) 자기성=자립성*=결의성 “Wenn die ontologische Verfassung des Selbst sich weder auf eine Ichsubstanz noch auf ein »Subjekt« zurückleiten läßt, sondern umgekehrt das alltäglich-flüchtige Ich-Ich-sagen aus dem eigentlichen Seinkönnen verstanden werden muß, dann folgt hieraus noch nicht der Satz: Das Selbst ist dann der ständig vorhandene Grund der Sorge. Die Selbstheit ist existenzial nur abzulesen am eigentlichen Selbstseinkönnen, das heißt an der Eigentlichkeit des Seins des Daseins als Sorge. Aus ihr erhält die Ständigkeit des Selbst als vermeintliche Beharrlichkeit des Subjektum seine Aufklärung. Das Phänomen des eigentlichen Seinkönnens öffnet aber auch den Blick für die Ständigkeit des Selbst in dem Sinn des Standgewonnenhabens. Die Ständigkeit des Selbst im Doppelsinne der beständigen Standfestigkeit ist die eigentliche Gegenmöglichkeit zur Unselbst-ständigkeit des unentschlossenen Verfallens. Die Selbst-ständigkeit bedeutet existenzial nichts anderes als die vorlaufende Entschlossenheit. Die ontologische Struktur dieser enthüllt die Existenzialität der Selbstheit des Selbst.”(322)

*자기상주성(⟪강독⟫): 자기 자신으로 머무르는 성격.

염려가 자기에 속하는 것(모든 염려는 주체의 염려라는 식, 주체가 염려의 눈앞의-근거라는 식)이 아니라, 염려 속에 자기성이 자립성/비자립성으로서 포함된다 “Die Sorge bedarf nicht der Fundierung in einem Selbst, sondern die Existenzialität als Konstitutivum der Sorge gibt die ontologische Verfassung der Selbst-ständigkeit des Daseins, zu der, dem vollen Strukturgehalt der Sorge entsprechend, das faktische Verfallensein in die Unselbst-ständigkeit gehört. Die vollbegriffene Sorgestruktur schließt das Phänomen der Selbstheit ein.”(323)

 

§65 염려의 존재론적 의미로서 시간성*

*미리 요약: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간이 염려의 분절된 계기들을 통일시켜주며 선구하는 결의자로서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상적으로 알려준다. “마음씀이라는 구조의 근원적 통일은 시간성에 있다. ‘자신을 앞질러[실존]’는 장래에 근거한다. ‘이미 …… 내에 있음[현사실성]’은 그 자체로 기재성을 시사하고 있다. ‘……에 몰입해-있음[퇴락]’은 현전화에서 가능해진다.”(⟪강독⟫, 418) 근원적인 시간성을 이루는 “장래, 기재, 현재는 ‘자기를 향해’, ‘……으로 돌아와’, ‘……을 만나게 함’의 현상적 성격들을 가리킨다. […] 시간성은 근원적으로 - 자체이다.”(⟪강독⟫, 419) 이때 근원적인 시간성은 “죽음으로 선구하면서 기재를 반복하는 순간”인 본래적 시간성과 “예기하면서 간직하는(기재를 망각하는) 현전화”인 비본래적 시간성으로 나뉜다(⟪강독⟫, 420-421).

 염려와 자기성 사이의 연관은 현존재의 전체적인 구조를 현상적으로 포착하게 해준다. “염려의 본래성”의 양태로서 선구하는 결의에서 현존재는 말하자면 자신의 ‘본질’을 구현하며, “근원적인 자립성전체성”을 보여준다(323). 그런데 이로써 염려의 의미가 존재론적으로 (적합하게) 알려진다고 말할 때, ‘의미’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이데거에게 의미란 “[무언가] 그 자신이 명시적이고 주제적으로 시선 속에 들어오는 일 없이[도] 무언가에 대한 이해가능성이 성립되는 곳[worin]”(으로, 내 식으로 요약하자면 가능성의 가능근거)이다(324). “의미는 일차적인 윤곽지음[기투] 목표하는 [Woraufhin]을 의미하는데, 이 윤곽지음으로부터 무언가가 그 자신인 것으로서 그 자신의 가능성 속에서 개념화될 수 있다. 윤곽지음은 가능성들, 즉 윤곽지음이 가능케 하는 것들 개시한다.”(324)* 그렇다면 염려의 의미를 해명하는 작업은 현존재의 실존에 대해 윤곽을 지어주(고, 그로써 현존재의 존재가능성들을 가능케하는 근거를 이해하)는 작업이다. 이제 “무엇이 염려 자체로서의 존재의 이러한 구성 가능케 하는지”, 즉 서로 분절되어있는 염려의 구조계기들을 통일적 전체일 수 있게 해주는지 물어야 한다. (이 물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답은 시간이다.)

“Streng genommen bedeutet Sinn das Woraufhin des primären Entwurfs des Verstehens von Sein. […] Diese Entwürfe aber bergen in sich ein Woraufhin, aus dem sich gleichsam das Verstehen von Sein nährt.”(324)

*Alexander Schnell, Phänomenbegriff und Phänomenologische Konstruktion bei Husserl und Heidegger, Studies in Contemporary Phenomenology, 2012, Vol.6, pp. 43-54.

 ‘존재와 시간’의 7절에서 하이데거는 현상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내비친다.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적인’ 현상의 개념이란 "현출함[das Erscheinen]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51). 현상학적 현상은 현출의 의미와 근거를 이룬다. 이때 현출의 의미와 근거를 이루는 것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소여에서 소여의 근거로 시선을 옮긴다. ‘근거지움’을 주제화함에 있어 하이데거는 가능성과 (가능성을) 가능케-[가능화, Vermöglichen]에 주목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상학자들이 가능성에, 가능성의 조건에, 가능성의 근거에 주목하는 이유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현존재 자신이 될-수-있음, 가능-존재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능성에 대한 탐구는 “가능성의 가능성 자체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이중적 질문에로 이끌기 때문이다(52).

 Schnell(2012)은 하이데거에게서 분석되는 가능화 개념의 사례를 든다. 첫째는 죽음으로의 선구에 대한 분석에서 나타난다. 현존재는 눈앞의-존재가 아니라 무엇인가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 즉 될-수-있음으로 성격규정된다. 이 때문에 현존재의 모든 가능성은 선구하는 가능화[vorlaufenden Vermöglichung]에 의해 근거 지워진다. 둘째는 근원적 시간성에 대한 분석에서 나타난다. “현존재의 모든 존재기투는 시간성의 자기기투를 전제한다”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53).

Q. “Wenn wir sagen: Seiendes »hat Sinn«, dann bedeutet das, es ist in seinem Sein zugänglich geworden, das allererst, auf sein Woraufhin entworfen, »eigentlich« »Sinn hat«. Das Seiende »hat« nur Sinn, weil es, als Sein im vorhinein erschlossen, im Entwurf des Seins, das heißt, aus dessen Woraufhin verständlich wird. Der primäre Entwurf des Verstehens von Sein »gibt« den Sinn. Die Frage nach dem Sinn des Seins eines Seienden macht das Woraufhin des allem Sein von Seiendem zugrundeliegenden Seinsverstehens zum Thema.”(324-325)를 이해하지 못했다. 존재에 대한 선이해가 의미를 가능케 한다는 논지인가?

A1.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존재가 개시되었음을 뜻한다. 존재는 기투함/됨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즉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드러내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이해의 일차적 기투가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의미에 대한 물음은 모든 존재의미의 토대에 놓이는 존재이해를 주제화할 수밖에 없다.

A2. 존재가 개시됨=존재에 대해 이해함=존재의 기투함/됨 — (선이해로서) 근거 지움 —> 존재의미를 이해함

 다시 묻자면, 무엇이 스스로를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곡해하며 실존하는 현존재의 존재, 염려를 가능케 하는가? 나아가 무엇이 (그와 더불어) 선구하는 결의라는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를 가능케 하는가?

*Q. 두 질문이 거의 동일시되고 있는 것 같은데—즉, 염려의 의미에 대한 이해에서 본래적인 염려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우위를 가지는 것 같은데—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선구하는 결의가 가장 탁월한 존재가능성이기 때문인가?

A. 선구하는 결의에서 존재의 가능근거가, 곧 시간의 현상이 가장 은폐됨 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비본래적 현존재는 자신에게 다가올 본래적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자신의 있어왔음/피투성을 깨닫지 못하며, 손안의-/눈앞의-존재자를 현전시키는 게 자기인 줄 모른다.

 ①선구하는 결의가 가능하려면 현존재는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을 구현한 자신이 (당장의)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두어야/스스로 허락해야[Sich-auf-sich-zukommen-lassen, letting-it-come-toward-itself] 한다. “가장 탁월한 가능성을 붙잡고-유지시키는[aushalten] ”, 그것이 “다가옴[장래, Zukunft]의 근원적 현상”이다(325). 현존재가 죽음을 향해 본래적으로 선구하거나 비본래적으로 선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가 다가올[장래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상 이미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본래적 선구란 자신의 탁월한 존재가능성이 당장의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허락하는 기투이고, 비본래적 선구란 자신의 탁월한 존재가능성이 당장의 자신에게 다가옴을 불허하는 기투이다.) 여기서 ‘다가옴[장래]’란 아직은 현실적이 되지 않은 지금, 그리하여 언젠가 지금으로 존재하게 될 무엇—통속적인 미래—을 가리키지 않고, “[die Kunft], 그 속에서 현존재가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런 옴”을 가리킨다(325).

 ②“선구하는 결의성은 현존재를 그의 본질적인 죄책있음에 입각해[죄책있음 속에서]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책임있음을 떠안는 것, 아님의 내던져진 근거로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325) 그러나 이처럼 내던져져있음 또는 피투성을 인수하는 사태는 “현존재가 그가 언제나 이미 있었던 대로[in dem, wie es je schon war, in the way that it always already was] 본래적으로 존재함”을 뜻한다(325). 이러한 일종의 존속이 가능한 이유는 그가 그의 있어왔음[Gewesen, having-been]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나는 있어-왔다[ich bin-gewesen]’는 방식으로 존재하며, 그런 덕분에 장래의 현존재는 그 자신에게 다가올, 곧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현존재가 있어오지[기재하지] 않았더라면 장래의 현존재가 돌아올 곳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적 선구는 “가장 본래적인 있어왔음[기재]에로 이해하는 돌아옴”이다(326).*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적 있어왔음은 현존재가 장래적인 존재자, 그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기재성[있어왔음]은 […] 장래[다가옴]로부터 발원한다.”(326)

*선구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마치 데카르트의 신이 세계를 영구히 창조하듯 매 ‘순간’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임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적 기재가 본래적 장래를 가능케 한다. + 나아가 기재는 장래를 제한한다(H2씨).

Q. 어째서 미래가 과거보다 우선적이어야만 하는가? 장래의 우위는 단순히 설명적이 아닌가? 이에 상응해, 어째서 염려에서 실존적 기획투사가 가장 중요해야 하는가?(J씨)

A1. 현재의 맥락은 본래적인 선구 중에 다가올 존재자가 편입되는 ‘과거’의 의미로 있어왔음이 쓰이고 있다. 그 경우 선구의 목표인 장래의 존재자가 기재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A2. 미래는 과거와 현재가 될 수는 있지만, 과거가 현재와 미래가 될 수는 없다. (비가역성, R씨)

 ③“선구하는 결의성은 그때그때마다의 상황”을 개시해주는데, 이 상황에서 실존하는 존재자는 주변세계적 손안의-존재자를 둘러보며 고려한다(326). 이러한 “주변세계적으로 현전하는-[Anwesenden] 행위하며 [자신과] 만나게-”은 “이러한 존재자의 현전시킴[Gegenwärtigen, 현전케-, 현전화]에서만 가능하다.”(326) 행위하면서 현존재가 그를 향해 손을 뻗게 되는 존재자들을 현전시키는 것이 현재[Gegenwart]의 (근원적) 의미이다.*

*최초의 선구적 결의 이후에도=선구하는 결의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도구적 존재자와 교섭한다. (다만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은 채로 교섭할 뿐이다.)

 “있어왔음은 미래로부터 발원하는데, 있어온(더 낫게는 있어오고-있는) 다가옴이 현재를 그 자신으로부터 방출시키는[aus sich entlassen, release from itself] 식으로 그러하다.”(326) 이러한 “있어오면서-현전시키는 다가옴으로서 통일적인 현상”이 곧 “시간성[Zeitlichkeit]”이며, 본래적 염려의 의미를 이룬다.

“Nur sofern das Dasein als Zeitlichkeit bestimmt ist, ermöglicht es ihm selbst das gekennzeichnete eigentliche Ganzseinkönnen der vorlaufenden Entschlossenheit.”(326)

cf. 하이데거의 시간론은 후설이 개념화한 파지-근원인상-예지 구조를 연상시킨다. 후설에게서 시간화의 담지자/주체인 절대의식은 파지를 통해 과거를 붙잡으면서 그것을 현재와 연결시키고, 예지를 통해 곧 현재가 될 미래의 무엇을 미리 붙잡는다. 즉 현재 안에서 (특히 가까운) 과거와 미래는 통합되어있다. 예지가 그것의 특수충족/일반충족으로써 현재적 근원인상 및 파지를 가능케 한다는 베르나우 원고(1917-1918)에서의 주장이 특히 장래에 우위를 주는 하이데거의 시간론과 겹쳐보인다. (하이데거는 1928년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을 편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눈에 후설의 시간론은 현존재 존재론을 경유하지 않은, 여전히 전통에 기대는 이론으로 보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시간론이 통속적 시간개념 일체, 심지어는 [후설의] 객관적/주관적 시간 또는 초월적/내재적 시간의 구분과도 차별화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간이해는 비본래적이고 파생적이다. 여기서 다시금 하이데거의 주장은 기존의 존재론적 해석에 폭력을 가한다. (존재론과 시간론은 새로이 결합되어) 염려의 현상은 이제 염려를 가능케 하는 시간성의 한 양태로 이해된다. “자신을-앞질러[자신보다-미리]다가옴에 근거한다. 이미-…-내에-있음은 있어왔음 속에서 자신을 알려온다. (당장-)…-곁에-있음[(당장-)…에-몰두함]은 현전시킴에 의해 가능해진다.”(327) 만일 저 ‘미리’, ‘이미’, ‘당장’을 통속적인 시간개념에 입각해 이해한다면 현존재는 (벽돌과 같이 조합되는) 지금들의 연속적 계열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곧 시간적으로 경과하는 눈앞의-존재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는 실존하는 존재자다. (그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단절되어있지 않고 서로 결합되어있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으며, 미래 역시 아직 없는 무엇이 아니다.)

 ①‘미리’로 표현되는 다가옴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문제삼을 수 있게 하고, 자신의 궁극목적을 향해 스스로-기투할 수 있게 해준다. “실존성의 일차적 의미는 다가옴이다.”(327) ②‘이미’라는 표현도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이미 내던져진” 존재자라는 실존론적 의미를 가진다(328). 우리는 “현존재는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는 ‘한’, 결코 과거가 되지 않는다[ist es nie vergangen]”고 말해야 한다(328). 왜냐하면 (통속적인) ’과거’란 더 이상 눈앞에-없는 것을 위한 칭호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를 특정한 방식으로 내던져진 존재자로 표상시켜주는) 심정성이 곧 현존재가 더 이상 눈앞에-없는 무엇이 아니라 이미 있어온 존재자임을 잘 알려준다. “현사실성의 일차적 실존론적 의미는 있어왔음 속에 놓여있다.”(328) ③한편 …-곁에-있음은 그 자체로 퇴락을 가리켜보여줄 시간적 표현을 가지지 않는다(‘당장’은 필자가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퇴락을 근거 지우는 현전시킴이 다가옴과 있어왔음 속에 포함되어있음을 말해준다. “결의한 채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퇴락으로부터 되돌려-데려왔다. “순간” 속에서 개시된 상황 위에 보다 본래적으로 ‘거기’ 있기 위해서 말이다.”(328)

*“Daher kann sich das Dasein existierend nie als vorhandene Tatsache feststellen, die »mit der Zeit« entsteht und vergeht und stückweise schon vergangen ist. Es »findet sich« immer nur als geworfenes Faktum.”(328)

★“Die Zeitlichkeit ermöglicht die Einheit von Existenz, Faktizität und Verfallen und konstituiert so ursprünglich die Ganzheit der Sorgestruktur.”(328)

 염려의 계기들은 벽돌을 조합하듯 결합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염려를 가능케-하는 시간성은 결코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시간화하는 것이다[Sie ist nicht, sondern zeitigt sich].* 시간성의 시간화가 곧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이라는 근본가능성을 가능케 하는 근거이다(328).

*cf. “Warum wir gleichwohl nicht umhinkönnen zu sagen[cannot avoid saying]: »Zeitlichkeit ‘ist’ – der Sinn der Sorge«, »Zeitlichkeit ‘ist’ – so und so bestimmt«, das kann erst verständlich gemacht werden aus der geklärten Idee des Seins und des »ist« überhaupt.”(328)

Q.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를 시간화한다는(sich zeitigen, 시숙하다) 것은 어떤 의미인가?

A. 시간은 염려(=현존재의 존재)의 의미(=가능성의 가능근거)이다. 존재를 비로소 가능케 해주는 그 무엇이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의 시간화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묘사될 수 있는가?

①시간의 시간화란 단순히, 존재를 가능케-, 말하자면 생성을 의미한다.
William Blattner, Heidegger’s Temporal Ideal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Heidegger uses the verb "to temporalize" (zeitigen) to pick out the manner in which time obtains. Heidegger argues that time belongs to the being of entities, that it falls on the being side of the Ontological Difference, the difference between being and entities. Being is not an entity, and neither is time. Thus, Heidegger can write neither "being is" nor “time is." Instead of "being is," he writes, "it gives being" (es gibt Seiri), or later "being obtains" (das Sein ereignet sich). Instead of "time is," he writes, "it gives time," "time temporalizes" (die Zeit zeitigt), or "time temporalizes itself" (die Tjeitzeitigt sich): "Time cannot at all be occurrent; it does not have any sort of being - rather, it is the condition of the possibility that it gives [es gibt] such a thing as being (not entities). Time does not have the sort of being of some other thing, but rather, it temporalizes" (LFW, p. 410).”(Blattner 1999: 29)

②시간의 시간화란, 만일 하이데거가 후설의 시간론의 영향을 받았다면, 있어왔음과 현전시킴과 다가옴의 통일(통일체 형성)을 가리킨다.

(1) “나아가 이러한 근원연상은 시간적 통일체를 형성한다. 가령 근원인상과 파지의 종합은 동시적근원융합이고 나아가 이러한 동시적 융합들의 연속들 자체도 다시 종합된다.(Hua Mat VIII, 82)”, 김태희(2014), ⟪시간에 대한 현상학적 성찰⟫, 필로소픽, p.244에서 재인용

(2) “수동적 발생의 대표적인 예로는 모든 대상을 구속하는 시간형식 자체의 종합이 있다. 후설에 따르면 초월적 대상의 구성은 그런 대상이 주어질 수 있는 “내면세계”, 곧 내재적이며 본질적으로 시간적인 “체험류[체험의 흐름]”가 먼저 구성되어있지 않다면 불가능하다(Hua XI, 126). “공간세계는 오직 내재[적인 권역] 속에서 수행되는 특정한 종합들을 통해서만 우리를 위해 단지 현존하는 그리고 좌우간 표상되는 것이 있기 때문에 […] 내재[적인 권역]의 보편적으로 가능한 종합적 형태들에 대한 교설이 구성적 세계문제의 전제”이다(Hua XI, 126). 초월론적 주관은 자신의 내재적 권역인 체험류 속에 흐르는 여러 질료적 자료들에 ‘(서로) 동시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거나, 잇따른다 의미를 부여한다. 다수의 자료들을 동시적이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에 잇따르는 것으로서 종합해냄으로써 초월론적 주관은 동시적 공존과 연쇄라는 시간적 형식을 발생시키고, 자료들은 그 형식 하에 질서 있게 배치된다. 상술한 발생의 과정이 있기에 “시간의식은 동일성-통일체(Identitätseinheit) 또는 대상성 구성의 근원장소”가 된다(Hua XI, 128). 초월론적 주관의 체험류 속에 질료들이 동시성 또는 연쇄의 형식 하에 배치되어 일단 흐르고 있지 않았더라면, 질료의 다양체를 하나의 대상성에 귀속하는 것으로 파악해 객체를 완성시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의 종합은 객체가 구성되는 역사 속에 최초의 사건으로서 포함되어있으며, 이후에 이어지는 모든 구성을 동기부여한다.”, 이하영(2022), 갓 구운 빵처럼 따끈따끈한 석사논문

③시간의 시간화란, 현존재의 활동성을 통해 시간이 의미있어짐을 가리킨다. 하이데거는 ‘No Dasein, no time’의 원칙을 고수한다.

Scott, D. (2006). The "concept of time" and the "being of the clock": Bergson, einstein, heidegger, and the interrogation of the temporality of modernism. Continental Philosophy Review, 39(2), 183-213. “As Heidegger describes it, it temporalizes itself in its being lived through temporally.”(Scott 2006: 184) / “Past, present, future as those ‘‘ecstatic’’ [ekstatisch] modes through which it is given, acquire meaningfulness only because they are the means through which time extemporizes itself through the activity of Da-sein.”(Scott 2006: 185)

 ★그런데 다가옴, 있어왔음, 현전시킴은 단적인 엑스터시[ekstatikon, Ekstasen]이다. “시간성은 근원적인, 즉자대자적 ‘자신-바깥[내가-아님]’이다[Zeitlichkeit ist das ursprüngliche »Außer-sich« an und für sich selbst].”(329) 통속적 시간개념에서 채택되는 연속적 지금[Jetzt-folge]의 모델은 시간성의 엑스터시적 성격을 평면화하지만, 그 자신도 비본래적 시간성에 근거해있다. 비본래적 시간은 하이데거 자신이 역설하고 있는 ‘근원적[ursprünglich, primordial]’ 시간의 파생태이다.

Q. 다가옴(Zukunft, 장래), 있어왔음(Gewesen, 기재), 현전시킴(Gegenwärtigen, 현전화)이 ‘엑스터시(Ekstasen, 탈자태)’라는 주장은 어떤 의미인가?

A. 다가오는 것은 당장의 자기가 아니라 당장의 자기의 보다 본래적인 모습, 말하자면 당장의 자기가 지니는 이상이다. 있어온 것 역시 당장의 자기가 아니라 자신이 있어온 상황이다. 현전시킴에서 현전되는 것 또한 당장의 자기가 아니라 당장의 눈앞의-/손안의-존재자이다.

 다가옴, 있어왔음, 현전시킴의 엑스터시적 통일체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다가옴이다.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은 본래적 다가옴으로부터 스스로를 시간화하는데, 이는 다가옴이 장래적으로 있어오면서 무엇보다도 현재를 일깨우는[wecken] 으로 그렇다.”(329) 이러한 다가옴의 우위는 통속적 미래 개념에서도 반복된다.*

*Q. 어떻게?

 염려란 단적인 불가능성의 가능성인 죽음을 향해 존재함이다. 달리 말해 현존재는 죽음에 내던져져있다. 현존재는 언젠가 단순히 멈추는[aufhören] 것이 아니라, “유한하게 실존한다.”(329) 달리 말해 다가옴에는 본질적으로 끝이 있다[endlich]. 그러나 내가 죽어도 시간은 ‘계속되지’ 않던가? 하고 하이데거는 자문한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근원적 시간성 자체는 유한적인 것이며, 죽은 현존재는 더 이상 자신에게 다가올 수 없다. 다가옴이 닫혀있다는 것, 그것은 현존재로 하여금 자신의 아님성격을 실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Das ursprüngliche und eigentliche Auf-sich-zukommen ist der Sinn des Existierens in der eigensten Nichtigkeit.”(330) ➔ 자신이 계속해서 자신이 아닌 존재자가 되어가며 실존한다는 사실을, 자신이 절대적으로 ‘아니게-되는’ 죽음의 상황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뜻 같다.

 현존재의 유한성이 아프리오리하지는 않다는 식, 즉 시간은 단적으로 무한하다는 식의 오해*는 비본래적 시간이해에서 발원한다. 애초에 ‘시간’ 속에 있다는 것, 나아가 ‘시간’이 무한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은 어떻게 근원적으로 유한한 시간성으로부터 무한한 시간이 시간화되느냐는 물음을 통해 찾아진다.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 입각해 현존재의 의미가 시간성이라는 테제를 구체화시킬 필요 역시 남아있다.

*“Demnach kann das transzendentale Leben und kann das transzendentale Ich nicht geboren werden, nur der Mensch in der Welt kann geboren werden. Ich als transzendentales Ich war ewig. Ich bin jetzt, und zu diesem Jetzt gehort ein Vergangenheitshorizont, der ins Unendliche aufwickelbar ist. Und eben das besagt: Ich war ewig.”(Hua XXXV, 143)

★요약: “Zeit ist ursprünglich als Zeitigung der Zeitlichkeit, als welche sie die Konstitution der Sorgestruktur ermöglicht. Die Zeitlichkeit ist wesenhaft ekstatisch. Zeitlichkeit zeitigt sich ursprünglich aus der Zukunft. Die ursprüngliche Zeit ist endlich.”(331)

Q. 시간성은 정말 염려를 통일했는가? 염려는 여전히 다가옴, 있어왔음, 현전시킴으로 분절되어있지 않은가? ‘있어오면서-현전시키는 다가옴’은 어떤 의미에서 특별히 통일적인가?

A. 셋 모두 시간화/시숙의 양태다. 

Q. 염려의 세 양태라고 말하면 왜 안 되는가?

★A. 시간은 염려(존재)의 가능조건이다. 현전시키기 때문에 현전시킨 것에 퇴락하고, 있어오기 때문에 피투할 상황이 마련되고, 다가오기 때문에 미래를 생각한다.

 

§66 현존재의 시간성과 그로부터 발원하는 실존론적 분석의 보다 근원적인 반복의 과제*

*미리 요약: “[…] 둘러보면서-헤아리는 고려에 의해서 우선 시간이 발견되며 시간이 계산된다. 둘러봄의 고려하는 발견은 시간을 계산하면서 도구적인 존재자와 눈앞의 사물을 시간 속에서 나타나게 한다. 이와 함께 세계내부적인 존재자가 ‘시간 안에 있는’ 것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하이데거는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가 갖는 이러한 시간성을 시간 내부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시간 내부성에서 발견되는 <시간>이 ‘지금이라는 시점들의 연속’이라는 통속적이고 전통적인 시간 개념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강독⟫, 423)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의 가능성을 시간성 위에 근거 지우는 상술한 작업을 시간적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시간적 해석 이후에 이어질 작업은 비본래적 현존재의 존재가능성과 그에게 특유한 시간성이 무엇인지 짚어내는 일이다. 시간성이 가장 먼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은 선구하는 결의에서이지만, 개시는 우선 대부분의 경우 그처럼 본래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개시의 시간성에 대한 탐구는 퇴락한 일상적 현존재의 시간성에 대한 탐구로 이끌리며, 그로써 궁극적으로는 시간성의 시간화 구조현존재의 역사성에 대한 시간적 해명에로 이끌린다. 이때 현존재의 역사성은 역사적 이해 및 역사학의 근거가 되어준다.*

*정신과학을 체계적으로 정초하고자 하는 딜타이의 문제의식을 이어받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먼저 일상성/비자립성의 시간적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염려는 둘러보는 고려함”이다(333). 이에 따라 현존재는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자신의 궁극목적을 위해 사용하며[verbrauchen],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로서의 시간을 ‘가져온다[brauchen]’.* 고려 가운데서 시간은 계산되며, 시간의 계산은 세계-내-존재를 구성하게 된다. 둘러보는 시선에 의해 손안의-존재자와 눈앞의-존재자들은 (계산된) 시간 속에서 존재하고 현존재와 만나는 것으로서 발견된다. “세계내부적 존재자들의 시간규정”이 곧 “시간내부성”이다(333). 시간내부성에 의해 근거지워지는 ‘시간’은 통속적이고 전통적인 시간개념을 형성하지만, 사실 이 개념은 근원적 시간성으로부터 발원한 것이다. 

*Q. 이 ‘가져온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간에 대한 계산 행위와 시간을 지금들의 연속체로 보는 관점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Q. 베르그송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의 요지는 무엇인가? “Die Zeit als Innerzeitigkeit aber entspringt einer wesenhaften Zeitigungsart der ursprünglichen Zeitlichkeit. Dieser Ursprung sagt, die Zeit, »in der« Vorhandenes entsteht und vergeht, ist ein echtes Zeitphänomen und keine Veräußerlichung einer »qualitativen Zeit« zum Raum, wie die ontologisch völlig unbestimmte und unzureichende Zeitinterpretation Bergsons glauben machen will.”(333) 하이데거에 따르면 베르그송은 시간을 시간 자체로 사유하지 않고 외화되기 이전의 공간으로서 사유했다?

A. 베르그송에게는 시간이 질적으로 양화되면 공간인데, 하이데거 입장에서는 양화된 시간도 공간이 아니라 비본래적 시간이다. 

Q. “Das Sein des Daseins empfängt[수용하다] daher seine umfassende ontologische Durchsichtigkeit[투명성] erst im Horizont des geklärten Seins des nicht-daseinsmäßigen Seienden, das heißt auch dessen, was, nicht zuhanden und nicht vorhanden, nur »besteht«.”(333)을 이해하지 못했다. 현존재가 눈앞의-존재자도, 손안의-존재자도 아니라는 주장에서 현존재가 실존하는 존재자라는 주장 사이의 과도기적 주장을 표현하는가? 이러한 주장이 ⟪존재와 시간⟫에서 등장했던가?

A. 현존재의 존재를 말하는 방식들의 변양(Abwandlung), 그 방식들 사이의 얽혀있음(Verwicklichung)을 지적하는 맥락에서 나온 문장이다. 해당 인용문은 SZ §10*에 제시된 바 있는, 현존재의 존재를 생명체의 그것으로 규정하는 존재관을 소개하면서, 그러한 존재관 역시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선이해를 전제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4 시간성과 일상성

§67.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의 근본적 구성요소(Grundbestand) 그에 대한 시간적 해석 미리-그려보기

 현존재의 염려가 지니는 전체적인 구조는 본질적으로 마디지어져있는[gegliedert] 다양체이다. 그것의 존재론적 근원을 파고드는 일은 보다 강력한[mächtig] 것에로 귀환하는 작업인데, “존재론적 장에서 모든 ‘발원함’은 쇠퇴[Degeneration]*”이기 때문이다(334). 근원의 정체는 자명하지 않고, 도리어 기존에 자명했던 모든 것을 물음에 부친다.

*이는 가치중립적인 파생(Derivation)으로 읽어야 마땅할 듯하다.

Q. 정말 그러한가?(J씨, H2씨) 따옴표 ‘발원’은 Entlaufen과 얽혀있다(H2씨). 파생된 것은 한 차원 추상된 것이므로 가치중립적이지 않다(J씨). 

A. 확실히, 앞의 ‘강력한'을 생각해보면 이 쇠퇴는 힘의 약화를 가리키는 것 같다. 

 염려에 대한 분석은 세계내존재(특히 세계성)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되었었다. 그 결과로 세계성의 구조에 해당하는 (도구적 용도연관의) 유의의성[Bedeutsamkeit]은 현존재의 이해가 기투하는 그곳, 즉 그의 존재가능성으로서의 궁극목적[Worumwillen]과 결합되어있음이 밝혀졌다. 이때 (기분에 젖어있으며 세계 속에서 말로써 분절된) 이해 및 기투는 존재를 개시하는 존재자로서 염려하는 현존재의 개시성을 구성하는 계기였다. 그에 따라 하이데거는 일상적 현존재에 대한 시간적 해석을 개시성을 구성하는 구조계기들, 즉 이해, 심정성, 퇴락 그리고 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구체적으로 하이데거는 방금 나열한 현상들을 시간화의 양태들(=시간에 의해 가능해진 존재계기들)로 간주함으로써 세계내존재 일반의 시간성을 규정하고자 한다.

 상술한 규정은 퇴락한 채로 둘러보는 고려에 의해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의 시간성은 둘러봄으로부터 응시함, 나아가 관조함/이론적으로 인식함으로의 변양을 가능케 하며, 현존재의 공간성—거리두기[Entfernung]와 방향잡기[Ausrichtung]—의 시간적 구성에 대해서도 해명해준다. 이로써 “현존재의 비본래성을 존재론적으로 근거지우는 시간성의 시간화 가능성” 및 일상성의 시간성이 밝혀지고 기존의 분석들의 불완전성이 보완될 것이다(335).

 

§68. 개시성 일반의 시간성

cf.

  본래적인 시간화 양태 비본래적인 시간화 양태
다가옴(Zukunft) ➔ 이해(Verstehen)/자기기투(Sichentwerfen) 가장 탁월한 존재가능성에로 선구함(Vorlaufen) 예상함(Gewärtigen) ➔ 기대함(Erwarten)
있어왔음(Gewesen) ➔ 심정성(Befindlichkeit)=에로 다시-데려옴(Zurückbringen auf …) 기존의 자신을 인수하고 반복함(Wiederholen), 그 반복가능성에로 스스로를-되돌림(Sichzurückbringen) 기존의 자신을 망각함(Sichvergessen) ➔ 기억함(Erinnern)
현전시킴(Gegenwärtigen)  ➔ 퇴락(Verfallen) 순간(Augenblick)에 열중함(Entrückung) (자신이 그에 몰두할 존재자들을) 현전시킴(Gegenwärtigen) cf. 현재의 돌출/튀어나옴(Entspringen)

 

a) 이해의 시간성

 앞서 이해는 이를테면 (딜타이 식으로) 설명과 대비되는 인식의 한 방식도 아닌, 주제적인 포착도 아닌 하나의 실존주(=실존의 조건)로서 규정되었다. 현존재는 이해를 근거로 하여 (도구들을) 둘러보거나 (눈앞의-존재자를 이론적으로) 응시하면서 (우선 대개 비본래적으로) 실존한다. 이해의 개념을 보다 상세히 규정하면, 이해란 “언제나 그것을 위해 현존재가 실존하는 그런 하나의 될-수-있음[존재가능성]을 향해 기투하면서[스스로를 던지면서/윤곽-지어보면서]-존재함”이다(336).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신이 그의 고유한 존재가능성과 관련해서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는지를 암묵적으로나마 ‘알고’ 있다. 이러한 앎은 특정한 사실에 대한 발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존적 가능성 속 스스로를-붙잡아둠[das Sichhalten]”에 해당한다(336). 무지 또한 이해의 부재가 아닌 이해의 결여태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처럼 이해를 통해 현존재의 실존이 개시되어 있어야 자기 자신의 비/본래적 실존에 대한 성찰도 가능하다.

 상술한 성찰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그때그때마다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에게로-다가옴으로서”의 다가옴[장래]이다(336). 다가옴이 비로소 이해를 가능케 한다. 우리는 다가올 우리의 모습(에 대한 윤곽)에 입각해서만 특정한 존재가능성에 스스로를 투신하기[기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우리를 단독자로 만들어주는 저마다의 고유한 존재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성이 늘[ständig] 본래적 다가옴으로부터 시간화되지는 않는다.”(336) 이는 다가옴이 부재할 수도 있어서가 아니라, 변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적 다가옴은 (본래적인 실존적 가능성을 향한) 선구함[Vorlaufen]으로 규정되었었다. 본래적 다가옴은 현재로부터 (시간적으로 ‘전진’함으로써)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본래적 다가옴으로부터 구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비본래적 다가옴예상함[Gewärtigen, awaiting, 예기]으로 규정된다. 비본래적인 현존재 역시 염려하는 존재자로서, 본질적으로 언제나 이미 자기-자신을-앞질러 실존한다. 그러나 이때 그는 (그의 본래적인 존재가능성이 아닌) 그가 고려하는 것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계획 따위를 세운다. 풀어 말해 그의 기투는 일상적인 분주함 속에 매몰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의 자신에게로-다가옴은 고려된-것에 몰두되어[beim Besorgten]—즉 예상으로써—이루어진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상이 비로소 (비본래적으로) 고려하는 자기이해 일반을 가능케 하며, 나아가 기대와 기다림을 가능케 한다. 이는 예상이 기대의 지평과 그 경계를 개시 및 획정하기 때문이다.

 이해는 일차적으로 다가옴과-관련된[장래적인] 것이지만, 다가옴이 (이해로써) 시간화되기 위해서는 있어왔음[Gewesenheit, 기재] 및 현재와 더불어 함께 규정되어야만 한다. (시간성은 어디까지나 세 탈자태들의 통일체이기 때문이다.) 선구함의 경우에서는 현재가 결의에 걸맞은 상황을 개시한다. 그리하여 현재가 고려된-것이 만들어내는 산만함으로부터 되찾아지고[zurückholen], 다가옴과 있어왔음이 (이를테면 명멸하는 현재로부터 고립되지 않고) 유지되며[gehalten werden], 그로써 비로소 본래적인 현재, 곧 (다가옴 및 있어왔음과 연속성을 가지는) 순간이 성취된다. 탈자태로서의 순간은 (다가올 본래적 존재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그리고 있어온 본래적 존재가능성을 잊지 않는 이루어지는) 상황 속 고려-가능한 가능성들에 대한 열중[Entrückung, raptness, 황홀경]을 가리킨다.

 본래적 현재로서의 순간은 내부시간성으로서의 ‘지금’과 혼동되어선 안 된다. ‘지금’은 눈앞의-존재자 및 사건이 생성소멸하는 자리인 반면 “‘순간에는’ 아무 것[일]도 일어나지 않고, 본래적인 마주-대함[Gegen-wart]로서 손안의-또는 눈앞의-존재자로서 ‘시간 속에’ 있을 수 있는 것과 순간이 최초로 만나게 [된]다.”(338)

 순간과 배척되는 것은 (비본래적 현재로서의) 현전시킴[Gegenwärtigen]이다. 현전시킴은 퇴락과 고려된 »세계« 속에서 실존론적으로 유의미해진다. 비본래적 이해는 “현전시킴으로부터 시간화”되지만, “그에 반해 순간은 반대로 본래적 다가옴으로부터 시간화된다.”(338)

 비본래적 이해를 가능케 하는 현전시키는 예상함은 물론 그에 상응하는 있어왔음의 양태도 가지고 있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 결의에서 이루어지는 본래적 자기에로의 귀환을 살펴보자. 결의에서의 본래적인 있어왔음반복[Wiederholung]으로 특징지어진다. 결의한 현존재는 그가 이미 그것인 그런 자기 자신을 (잊지 않고 반복 가능한 가능성으로서) 인수하기 때문이다. “선구함에서 현존재는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에 입각해] 다시금-앞으로-데려와진다[sich vor-wieder-holen].”(339)

 반면 비본래적인 자기기투 및 현전시킴은 현존재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내던져진 존재가능[성에 입각해 여태껏 있어온] 스스로를 망각했기[vergessen] 때문에만 가능하다.”(339) 망각은 기억의 결여태가 아닌, 있어왔음의 ‘실정적인[긍정적인]’ 탈자태이다. 망각에서의 엑스터시* 또는 황홀경[Entrückung]은 반복으로부터의 물러남[Ausrücken], 반복의 가능성을 차단함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비본래적으로 존재하는 현존재에게 과거란 이미 지나가버린 데 불과한 것, 이를테면 다시 참고하거나 복구할 필요가 없는 무의미로 간주되는 것이다.) 현존재가 자신이 그 속으로 내던져진 [과거의] 존재를 망각함으로써, 예상하는 현전시킴 및 그렇게 현전되는 세계내부적 존재자들이 보유된다[behalten].

*하이데거가 “Die Ekstase(Entrückung)”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Ekstase’를 ‘엑스터시’로 번역할 좋은 근거가 된다(339).

 기대가 예상으로부터 가능해지듯, 기억도 망각으로부터 가능해진다(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비본래적 있어왔음으로서의 망각은 현존재가 기억해낼 수 있는 지평을 한계 지우기 때문이다.

 요컨대 “망각하면서-현전시키는 예상함”이 그에 걸맞게 “비본래적 이해가 그의 시간성과 관련하여 시간화”되는 그런 통일체로서, 결의하지-못함의 가능조건이다(399). 비본래적 이해가 현전시킴을 통해 규정되기는 해도, “이해의 시간화가 일차적으로 다가옴 속에서 수행된다”는 점은 여전하다(399). (비본래적 이해는 근원적 이해의 변양태이기 때문이다.)

b) 심정성[Befindlichkeit, attunement, state-of-mind] 시간성

 이해는 언제나 심정적인 이해이다. 심정성은 현존재로 하여금 그의 피투성을, 적어도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wie einem ist]’를 알려준다. “기분은 그 속에서 내가 언제나 일차적으로 내던져진 존재자인[bin] [그런] 방식을 재현한다[repräsentieren].”(340) 그렇다면 심정성 또는 기분의 시간적 구성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심정성일차적으로 있어왔음 속에서 시간화된다.”(340, 강조는 하이데거) 기분이란 비본래적으로 사는 현존재를 위해서든, 본래적으로 사는 현존재를 위해서든 “고유한 피투성이라는 사실 앞으로의 데려옴[vor das Daß … Bringen]” 또는 “[자기] 자신인 그 내던져진 현존재 앞으로 데려옴”, 일종의 “자기-[]찾기[das Sich-finden]”인데*, 이는 현존재가 여태껏 지속적으로 있어왔음으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340). 기분 역시 어떤 다가옴과 현재에 속하지만, 기분의 다가옴과 현재는 있어왔음에 상응하여 (말하자면 이차적으로) 변양되는 것이다.

*Q. 기분을 느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일차적으로 자기-되찾기일까? 본래적인 기분인 불안이 자기다움을 되찾을 수 있게 해줘서인가?

 기분이 피투성을 개시해줄 수 있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 간과되었다. 기분은 영혼을 말하자면 색칠해주는 덧없는 체험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온 것이다. 이에 따라 체험으로서의 기분이 ‘시간 속에서’ 경과한다는 사실은 존재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사소하게 받아들여졌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의 과제는 “기분에-젖어있음[Gestimmtheit]의 존재론적 구조를 그것의 실존론적-시간적 구성 속에서 제시하는 것”이다(340). 있어왔음의 양태로서 “기분의 실존론적 근본성격은 에로 다시-데려옴[Zurückbringen auf …]이다.”(340) 이때 주의할 것은 기분이 시간성으로부터 연역되거나 시간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을 근거로 해서 가능해질 뿐이라는 점이다.

 이어 하이데거는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시간적 분석에 착수한다. 비본래적 심정성으로서의 두려움의 시간성은 어떻게 특징지어지며, 어떤 의미에서 있어왔음에 의해 가능해지는가? 두려움이란 도구연관 속에서 현존재에게 유해할 수 있는 위협적인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일상적인 둘러봄의 방식으로 위협적인 것을 개시한다.”(341) 하이데거는 그렇다면 두려움은 도래할[ankommend] 불운에 대한 기대가 아니냐고, 그러므로 (있어왔음이 아니라) 다가옴에 의해 근거지워지지 않느냐고 자문한다. 물론 저 위협적인 것은 ‘시간 속에서’ ‘미래’에 도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래할 위협적인 것에 대한 기대가 [꼭]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341). 그 위협적인 대상이 여태껏 있어온 현존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위협적인 대상이 현존재의 있어왔음 및 그의 세계내존재에로 돌아올 수 있는[zurückkommen] 그제야 위협적인 것은 어떤 예상의 대상이 된다.

 두려움은 언제나 무엇을 위한/무엇으로 인한[um, for the sake of] 두려움이기 때문에, 그것의 시간적 의미는 자기망각[Sich-vergessen]으로 특징지어진다.* 나아가 두려움에서의 자기망각은 현재와 장래의 시간화 역시 그에 걸맞게—“예상하면서-현전시키는 망각”으로(342)—변양시킨다.

*공포에 질린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상실하기 때문 같다.

 이어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두려움을 어떤 의기소침한 혼란으로 규정한 데 동조한다. 두려운 현존재는 자신의 피투성을 잊는 방식으로 자신의 피투성에로 되돌아온다. 달리 말해 특정한 존재가능성으로부터 그것을 피하고 자신을 구제하는 데 급급해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본래적 존재가능성을 망각한다. 구체적으로, 두려움에 떠는 현존재는 그 어떤 존재가능성도 붙잡지[ergreifen] 않는 채 이 가능성에서 저 가능성으로 널뛰기만 한다. 이때 불안에서와 달리 존재자들은 사라지기는커녕 현존재의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러므로 “두려움 속에서의 자기망각에는 [두려움을 피하게 해줄] 가까운-최선의-것에 대한 이러한 혼란스러운 예상함이 속한다.”(342)

“Was überdies zum Phänomen gehört, bleibt ein »Gefühl der Lust oder Unlust«.”(342)

 반면 불안은 근본심정성으로서 “현존재를 그의 가장 고유한 내던져져-있음에로 데려오고 일상적으로 친숙한 세계-내-존재의 섬뜩함을 탈은폐한다.”(342) 불안의 경우, 그것의 대상[das Wovor]과 그것이 ‘걱정’하는 것[das Worum]은 모두 현존재 자신, 그의 세계내존재이다. 불안의 대상은 특정한 눈앞의- 또는 손안의-존재자가 아니라—그것들은 불안 가운데서 의미와 용도를 상실한다—발가벗은 세계내존재 자체이다. “내가 그 속에서 실존하는 세계는 무의의성[Unbedeutsamkeit, 무의미]에로 가라앉았고, 그렇게 개시된 세계는 존재자를 용도-없음[Unbewandtnis]의 성격에서만 내어준다.”(343)* 불안에서는 기대될 것도, 예상될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다가옴을 통해 구성된다.**

*“Das Nichts der Welt, davor die Angst sich ängstet, besagt nicht, es sei in der Angst etwa eine Abwesenheit des innerweltlichen Vorhandenen erfahren. Es muß gerade begegnen, damit es so gar keine Bewandtnis mit ihm haben und es sich in einer leeren Erbarmungslosigkeit[무자비함] zeigen kann.”(343)

**Q. 심정성은 일관되게 있어왔음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닌가? ‘기존의’ 세계가 무의미해지는 것이 불안을 가능케 하지 않는가? 어째서 갑자기 장래가 불안을 가능케 하는가?

A1. 본래적 자기의 전령인 양심의 부름이 불안을 일으키기 때문 아닐까?

A2. 다른 대목들을 보면 기재가 여전히 우위이다(H2씨). cf. “An der eigentümlichen Zeitlichkeit der Angst, daß sie ursprünglich in der Gewesenheit gründet und aus ihr erst Zukunft und Gegenwart sich zeitigen, erweist sich die Möglichkeit der Mächtigkeit, durch die sich die Stimmung der Angst auszeichnet.”(344)

A3. 도래가 우위인 대목도 있다(J2씨). cf. “Obzwar beide Modi der Befindlichkeit, Furcht und Angst, primär in einer Gewesenheit gründen, so ist doch im Hinblick auf ihre je eigene Zeitigung im Ganzen der Sorge ihr Ursprung verschieden. Die Angst entspringt aus der Zukunft der Entschlossenheit, die Furcht aus der verlorenen Gegenwart, die furchtsam die Furcht befürchtet, um ihr so erst recht zu verfallen.”(344-345)

 불안에서 고려-가능한-것들은 아무것도-아닌-것[Nichts]으로 드러나고, 그것들을 향한 자기기투 역시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불가능성은 도리어 본래적인 존재가능성을 밝혀준다. 이러한 밝혀냄 또는 탈은폐는 반복가능성에로 데려옴[vor die Wiederholbarkeit bringen]” 또는 다시-데려옴[Zurückbringen]이라는 시간적 의미를 가진다(343). 불안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이 단독자로서 고유하게 내던져져있다는 순수한 사실에로 되돌려진다. 이로써 불안은 기억이나 자기망각이 아니라 “결의 속에서의 실존의 반복하는 인수”이다(343). 그는 있어온 자신을, 즉 그의 피투성을 반복 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의 탁월한 존재가능성은 이러한 반복 속에서만 도래할 자리—내던져진 거기—를 가진다.

 두려움에서 스스로를 망각한 현존재가 이런저런 세계내의 가능성들 사이를 고삐-풀린-마냥[ungehalten] 부유하는 반면, 불안에서 자신의 내던져져있음을 반복적으로 인수하는 현존재는 “고유한 피투성에로 스스로를-되돌려옴에 닻을-내린다[붙박여있다, gehalten ist].”(344) 그런데 본래적인 있어왔음이 자신을 되찾는 일에 붙박여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속에서 결의가 시간화되는 순간의 성격”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344). “불안은 [현존재를] 오직 가능한 결의의 기분 속으로 데려올 뿐이다.”(344) 그러나 피투성의 반복적 인수는 현존재를 그의 순간을 위해 준비시켜준다[피투성의 반복적 인수는 현존재의 순간을 위한 도움닫기이다, auf dem Sprung].”(344)* 그렇기 때문에 불안은 특유한 효능감[Mächtigkeit]을 가능케 한다. 현존재는 섬뜩함에 심취하지만[benommen ist], 그렇다고 해서 그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취하지는[nehmen] 않는다.

*Q. “Eigentlich aber kann die Angst nur aufsteigen in einem entschlossenen Dasein.”(344)와 어떻게 양립 가능한가? 불안과 결의 사이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두려움이든 불안이든 이 기분들은 (후설이 말하는 것처럼) 체험류에서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이해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두려움은 세계내부적 존재자로부터 오며, 불안은 현존재 자신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재적인 의식적 흐름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러나 두려움과 불안 사이에 있는 차이는 두려움이 퇴락으로 인해 “잃어버린 현재”로부터 발원하는 반면, 불안은 “결의성의 다가옴[장래]”으로부터 발원한다는[entspringen] 것이다(345).*

*Q. 여기서 ‘가능케-한다[ermöglichen]’과 차별화되어야 할 ‘발원한다’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려움과 불안 외 희망, 기쁨, 고양, 쾌활함, 우울, 슬픔, 혼란[Verzweiflung] 등의 시간적 의미 역시 있어왔음에 의해 근거 지워진다. 희망과 같은 소위 미래지향적인 정동조차, 희망에서 희망되는 미래가 영향을 미칠 기존의 자신이 없다면, 희망되는 미래에로 데려갈 기존의 자신이 없다면 희망으로 규정될 수 없을 것이다. 희망함은 “스스로를-획득했음[Sich-gewonnen-haben]을 전제한다.”(345)

“Daß die Hoffnung gegenüber der niederdrückenden Bangigkeit erleichtert, sagt nur, daß auch diese Befindlichkeit im Modus des Gewesenseins auf die Last bezogen bleibt.”(345)

 한편 아무-기분-없음[무감동, Ungestimmtheit]은 일상적인 자기망각을 가장 뼈아프게[eindringlich] 보여주는 현상이다. “모든 것을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하게 두는’ 빠져-삶[das Dahinleben]은 망각하면서 피투성에 스스로를-넘겨줌[Sichüberlassen]*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비본래적인 있어왔음에 근거한다(345). 부산함에서 오는, 모든 것이 무차별한 듯한 기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순간적인 결의에서 발원하는 평정과 구분되는 비본래적인 심정성이다.

*Q. ‘망각하면서 피투성에 스스로를-넘겨줌[Sichüberlassen]’은 어떤 사태를 의미하는가?

A. 고려된 존재자에 완전히 몰두한 자기망각 상태를 일컫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하이데거에 따르면 스스로를 어떤 기분에 처해있는 존재자로 발견하는 현존재만이, 즉 있어왔음을 존재의미로 가지는 현존재만이 촉발될 수 있다. 있어왔음이 성립해야만 촉발되어 되돌아올 자리가 마련되기 때문이다(346).*

*시간화가 촉발의 가능조건이라는 주장은 후설에 의해 이미 제기된 바 있다. 후기 시간론에서 후설은 근원인상과 파지의 종합을 ‘선촉발적 근원연상’ 중 하나로 개념화한다. 그러나 이때 시간화가 종합의 가능조건이냐, 아니면 종합의 산물이냐는 물음이 대두된다.

c) 퇴락의 시간성

 마지막으로 퇴락의 실존론적 의미 현전시킴 속에 놓여있다.* 하이데거는 가십과 애매성의 경우 말과 해석의 시간적 분석을 전제하기도 하거니와, 호기심에서 퇴락의 구체적인 시간성이 가장 쉽게 드러나므로 호기심**에 대한 분석에 집중한다. 호기심은 손안의 또는 눈앞의 존재자를 ‘몸소[leibhaftig]’ 만나게 해주는—현전시키는—시선의 일종이다. 그러나 호기심은 존재자 곁에 머무르면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시선이 아니라 단지 보기 위한 시선이다.

*“The everyday view of time is usually that in which the present is seen as the locus of significance and reality. Such a view of the present makes the happening and occurrence of events a series of actual facts which can be indifferently observed. […] Unfortunately […] [t]hose inter­pretations of time that center upon the actual rather than the possible provide the ontological ground for falling. Thus the ontological ground of the present is, in terms of falling, that present which is made up of actual entities; the authentic present (moment of vision) sees the present in terms of possibilities freely chosen and determined. The ontological ground of the past in terms of falling is, similarly, a view of the past that sees it in terms of a series of no-longer-actual events (forgetting) rather than authentically as still significant possibilities (repetition). The onto­logical ground of futuristic falling is likewise restricted to actual not-yet events (waiting) rather than possible projections of one's ability-to-be (anticipation).”(Gelven 1989: 189, 강조는 필자)

**“[…] its essence lies in seeing things from the indifferent and ‘objective’ point-of-view of one who looks at actual entities or facts […]”(Gelven 1989: 189-190)

 호기심에서의 현재는 그에 상응하는 다가옴과 있어왔음의 양태와 탈자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호기심은 아직-보지-못한 것에 대한 예상을 성급하게 제거하는[entziehen] 방식으로 다가옴과 관계한다. 호기심은 가능성을 현실적인 것으로 부산스럽게[ungehalten, 고삐-풀린-마냥] 바꿔버리는 데, 다가올 가능성으로부터 달아나는[entlaufen] 관심이 있다. 이에 따라 하이데거는 호기심에서의 현전시킴이 예상으로부터 ‘튀어나온다[도망간다, 돌출된다, entspringen, arise]’고 표현한다. 다른 한편 예상은 (달아나는) 현전시킴을 단지 뒤따라-뛰어든다[쫓아간다, nachspringen, pursue]. “예상은 흡사 자신을 포기”하고 그저 현전시킴에 뒤따르는 것이다(347). 예상이 실질적으로 없어지는 이와 같은 현상이 존재론적으로 호기심의 산만함[Zerstreuung, distraction]을 가능케 한다.

 또한 호기심은 하나의 사태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음 사태로 눈길을 옮긴다. 계속해서 튕겨져나오는 이 운동이 존재론적으로 호기심의 안절부절-못함[머무를--모름, Unverweilen]을 가능케 한다.

 호기심에서 현재는 다가옴과 있어왔음으로부터 고립됨으로써 산만한 안절부절-못함에 그치지 않고, 순간과 가장 대비되는 체류-불가능성[Aufenthaltslosigkeit, never dwelling anywhere]에로 이른다. 체류할 줄 모르는 현존재는 특정한 상황에 집중하지 못하고, “도처에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347) 호기심은 직전에 자신이 열광했던 그 화제를 곧바로 망각해버린다.*

*“Daß die Neugier immer schon beim Nächsten hält und das Vordem vergessen hat, ist nicht ein Resultat, das erst aus der Neugier sich ergibt, sondern die ontologische Bedingung für sie selbst.”(347)

 앞서 퇴락의 성격으로 규정되었던 유혹, 안주, 소외 그리고 자신에게-사로잡혀-갇힘[Sichverfangen]의 시간적 의미 역시 (미래로부터) 튀어나오는[도망가는]’ 현전시킴이 다가옴과 있어왔음으로부터 고립되는 으로 간주될 수 있다. 퇴락한 현존재는 (자신을 유혹하는) 거듭해서 새로운 것에 의해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가능성으로부터 소외되며, 자기망각의 상태에 안주한다. 그러나 현재의 ‘튀어나옴’조차 근원적으로는 유한한 시간에 의해 근거지워진다. 퇴락은 (유한한 시간에 의해 가능해지는) 죽음을 향한 본래적 내던져져있음에로 향하는 우회로일 뿐이다.

 현존재는 자신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내던져졌는지 모르는 채로 내던져져있다. 이는 단순히 사실적인 무지가 아니라 현존재의 본질적인 현사실성에 따르는 것이다. 현존재의 근거는 없다[무다, nichtig]. 현존재는 세계내부적 존재자들에 휩쓸려 우선 대부분의 경우 이를 망각한다. 그는 본래적인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없어짐, 곧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한계상황’”에 직면한다(349).

Q. 직면한 상황에 대한 열중으로서의 순간과 죽음을 향한 존재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A. 선구함으로부터 순간에 대한 열중이 발원하는 방식으로.

cf. 호기심이 다른 비본래성(e.g. 한갓된 기대)보다 더 비본래적인 것 같다. 비본래성에는 정도차가 있다(H2씨). “Je uneigentlicher die Gegenwart ist, das heißt, je mehr das Gegenwärtigen zu ihm »selbst« kommt, um so mehr flieht es verschließend vor einem bestimmten Seinkönnen, um so weniger kann aber dann die Zukunft auf das geworfene Seiende zurückkommen.”(347)

d) 말의 시간성

 말은 이해, 심정성, 퇴락으로 구성되는 ‘거기[da]’의 개시성을 분절시켜준다. 그렇기 때문에 말의 시간화는 특정한 탈자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말은 대부분의 경우 고려되는 존재자에 대한 언어로 표현되므로, “현전시킴이 하나의 선호된 구성적 기능을 가진다.”(349)

 말의 시간성은 말이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자 또는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또는 말함이 ‘시간 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시제[Tempora]의 필요성을 통해 알 수 있듯) 말은 그 자체로 시간적이며, 통속적인 언어학은 이를 보여주기에 역부족이다. 그러나 말의 시간성은 진리와 존재 사이의 연관이 시간적으로 이해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해명 가능하다.*

*“If language itself is struc­tured on ‘tenses’ like past, present, future, past perfect, present perfect, etc., then the very structure of language reveals the ultimate temporal na­ture of our consciousness and the manner in which we are aware of our­ selves and the world.”(Gelven 1989: 190)

 하이데거는 절을 마무리하면서 비록 자신이 개시성의 각 구조계기를 하나의 시간화 양태와만 짝지었으나, “시간성은 모든 탈자태에서 전체적으로 시간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350). “시간성의 그때그때마다의 완전한 시간화의 엑스터시적 통일체 속에 […] 염려의 전체구조의 전체성이 근거지워져있다.”(350) 이때 각 탈자태들은 서로를 뒤따르는[nacheinander] 것이 아니다. “다가옴은 있어왔음보다 나중이 아니고 있어왔음은 현재보다 일찍인 것이 아니다. 시간성은 있어오면서-현전시키는 다가옴으로서 시간화된다.”(350)

“Die Erschlossenheit des Da und die existenziellen Grundmöglichkeiten des Daseins, Eigentlichkeit und Uneigentlichkeit, sind in der Zeitlichkeit fundiert.”(350)

 

§69. 세계--존재의 시간성과 세계의 초월성이라는 문제

현존재=염려에 의해 밝혀지는 존재자 “Das Licht, das diese Gelichtetheit des Daseins konstituiert, ist keine ontisch vorhandene Kraft und Quelle einer ausstrahlenden, an diesem Seienden zuweilen vorkommenden Helligkeit. Was dieses Seiende wesenhaft lichtet, das heißt es für es selbst sowohl »offen« als auch »hell« macht, wurde vor aller »zeitlichen« Interpretation als Sorge bestimmt.”(350)

Q. 존재가 존재자를 밝혀준다는 말, 밝혀줌이라는 동사가 어떤 의미인가?

A. 현존재를 이해시켜주는 것=염려

세계가 초월적이라는 테제의 의미는 무엇인가? “[…] in welcher Weise ist so etwas wie Welt überhaupt möglich, in welchem Sinne ist Welt, was und wie transzendiert die Welt, wie »hängt« das »unabhängige«, innerweltliche Seiende mit der transzendierenden Welt »zusammen«?”(351)

a) 둘러보는 고려함의 시간성

고립된 하나의 도구는 없으며, 도구적 실천은 이미 개시된 도구연관으로서의 세계로부터 도구의 익숙한 의미에로 귀환하는 것이다. “Das Gebrauchen und Hantieren mit einem bestimmten Zeug bleibt als solches orientiert auf einen Zeugzusammenhang. […] Alles »zu Werke Gehen« und Zugreifen stößt nicht aus dem Nichts auf ein isoliert vorgegebenes Zeug, sondern kommt aus der je schon erschlossenen Werkwelt im Zugriff auf ein Zeug zurück.”(352)

용도를 가지게-함(유관하게-함[Bewendenlassen, letting something be relevant])의 가능조건은 시간성이다. 궁극목적 및 사용의 의도에 입각한 도구연관의 이해는 예상에 의해 근거 지워진다. 현존재는 해당 예상에 입각해 자신이 보유해온 도구연관에로 되돌아온다. 이로써 도구의 구체적인 현전시킴이 가능해진다. “Das Verstehen des Wozu[intention], das heißt des Wobei[context] der Bewandtnis, hat die zeitliche Struktur des Gewärtigens. Des Wozu gewärtig, kann das Besorgen allein zugleich auf so etwas zurückkommen, wobei es die Bewandtnis hat. Das Gewärtigen des Wobei in eins mit dem Behalten des Womit der Bewandtnis ermöglicht in seiner ekstatischen Einheit das spezifisch hantierende Gegenwärtigen des Zeugs.”(353)

퇴락적 고려를 위한 자기망각의 필요성 “Um an die Zeugwelt »verloren« »wirklich« zu Werke gehen und hantieren zu können, muß sich das Selbst vergessen.”(354)

고장난 도구의 발견도 탈자적 통일체로서의 시간성이 가능케 하는 것이다. 연상의 연속으로서의 시간관은 (도구연관에 대한 예상과 보유를 모르므로) 이러한 일을 해낼 수 없다. “Wäre der besorgende Umgang lediglich eine Abfolge von »in der Zeit« verlaufenden »Erlebnissen«, und wären diese auch noch so innig »assoziiert«, ein Begegnenlassen des auffälligen, unverwendbaren Zeugs bliebe ontologisch unmöglich.”(355)

고려는 순수한 현전시킴이 아니며, 파지와 예상과 더불어 개념화되어야 한다. “Auch wenn das Besorgen auf das Dringliche des alltäglich Benötigten eingeschränkt bleibt, so ist es doch nie ein pures Gegenwärtigen, sondern entspringt einem gewärtigenden Behalten, auf dessen Grunde bzw. als welcher »Grund« das Dasein in einer Welt existiert. Deshalb kennt sich das faktisch existierende Dasein auch in einer fremden »Welt« immer schon in gewisser Weise aus.”(356)

b) 둘러보는 고려함이 세계내부적으로 눈앞에-있는-것에 대한 이론적 발견으로 변양됨의 시간적 의미

학문적 탐구/이론적 태도의 가능조건과 학문의 실존론적 개념(실존의 한 양태로서의 학문) “Nach der ontologischen Genesis der theoretischen Verhaltung suchend, fragen wir: welches sind die in der Seinsverfassung des Daseins liegenden, existenzial notwendigen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afür, daß das Dasein in der Weise wissenschaftlicher Forschung existieren kann? Diese Fragestellung zielt auf einen existenzialen Begriff der Wissenschaft.”(357)

(용도에 입각한 생활세계적) 프락시스의 소멸 “das pure Hinsehen auf das Seiende entsteht dadurch, daß sich das Besorgen jeglicher Hantierung enthält. Das Entscheidende der »Entstehung« des theoretischen Verhaltens läge dann im Verschwinden der Praxis.”(357) / cf. “Entschränkung der Umwelt”(362) ➔ 그러나 학문도 나름의 둘러보는 프락시스를 가지고 있음 “Wenn nur[if only] nicht an dieser Trivialität deutlich würde, daß es keineswegs am Tag liegt[be obvious], wo denn nun eigentlich die ontologische Grenze zwischen dem »theoretischen« Verhalten und dem »atheoretischen« verläuft!”(358) ➔ 실천의 지평을 한꺼번에 떠나는, 실존적인 결단과 무관한, 실존적 조건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의미에서 무전제적인 초월론적 환원 불가능하다는 귀결(H씨)

일반적인 고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적 도구가 필요한지 고민(überlegen). 이를 위해서는 사물에 대한 (선)술어적 해석이 작동해있어야 함 “Der Bewandtnischarakter des Zuhandenen wird durch die Überlegung nur so genähert[only gets brought near], nicht erst entdeckt, daß sie das, wobei es mit etwas ein Bewenden hat, als dieses umsichtig sehen läßt.”(360)

★시간화가 해석을 가능케 한다. “Die Verwurzelung der Gegenwart in der Zukunft und Gewesenheit ist die existenzial-zeitlich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afür, daß das im Verstehen des umsichtigen Verständnisses Entworfene in einem Gegenwärtigen nähergebracht werden kann, so zwar, daß sich dabei die Gegenwart dem im Horizont des gewärtigenden Behaltens Begegnenden anmessen, das heißt im Schema der Als-Struktur auslegen muß. […] Das »Als« gründet wie Verstehen und Auslegen überhaupt in der ekstatisch-horizontalen Einheit der Zeitlichkeit.”(360)*

★*Q. 어째서 그러한가?

A. 과학적 대상‘으로’ 봄도 시간에 의해, 특정한 기대와 연관의 지속(간직) 및 실험도구들의 현전시킴을 통해 가능해지는 기획투사이므로. ➔ 과학적 탐구 역시 대상에 대한 특정한 ‘-로서 해석하기’를 전제한다. 존재에 대한 이해가 바뀌기 때문에 과학적 탐구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손안의-존재자가 눈앞의-존재자로 이해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구성격에 대한 간과와 더불어, 도구가 도구연관 속의 자리를 가진다는 점도 간과되어야 한다. 도구는 생활세계로부터 방출되어 그 자체로 주제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출 역시 존재이해의 변양에 포함된다. “In der »physikalischen« Aussage »der Hammer ist schwer« wird nicht nur der Werkzeugcharakter des begegnenden Seienden übersehen, sondern in eins damit das, was zu jedem zuhandenen Zeug gehört: sein Platz. Er wird gleichgültig.”(361)

존재이해의 변양은 존재자의 영역을 제약/획정한다(=존재이해가 분절된다). 존재영역—지평—의 기투/윤곽지음이 탐구에 선행한다. “Am Leitfaden des nunmehr führenden Verstehens von Sein im Sinne der Vorhandenheit wird die Entschränkung aber zugleich zu einer Umgrenzung[delimitation] der »Region« des Vorhandenen.”(362)

(학문에 적합하게 기투 혹은 후설 식으로 말하면 학문에 적합하게 태도변경하며)존재자를 객체화=주제화=독특한 현전시킴 “Das Ganze dieses Entwerfens, zu dem die Artikulation des Seinsverständnisses, die von ihm geleitete Umgrenzung des Sachgebietes und die Vorzeichnung der dem Seienden angemessenen Begrifflichkeit gehören, nennen wir die Thematisierung. Sie zielt auf eine Freigabe des innerweltlich begegnenden Seienden dergestalt, daß es sich einem puren Entdecken »entgegenwerfen«, das heißt Objekt werden kann. Die Thematisierung objektiviert. Sie »setzt« nicht erst das Seiende, sondern gibt es so frei, daß es »objektiv« befragbar und bestimmbar wird.”(363-364)

Q. “Diese Gewärtigung der Entdecktheit gründet existenziell in einer Entschlossenheit des Daseins, durch die es sich auf das Seinkönnen in der »Wahrheit« entwirft. Dieser Entwurf ist möglich, weil das In-der-Wahrheit-sein eine Existenzbestimmung des Daseins ausmacht.”(363) 발견됨을 예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존재영역에 대한 예지를 일컫는가?

A. 아니, 진리에 대한 기대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Q. ‘Gewärtigung’이라는 비본래적인 것과 관련된 단어를 사용한 다음 어떻게 “Der Ursprung der Wissenschaft aus der eigentlichen Existenz”로 이어지는가?(363)

A. “gründen”에 기대면, 진리에 대한 본래적 기투가 비본래적인 방식의 발견돼있음-기대를 근거지운다.

탐구되는 존재자의 너머에로 초월*해야만—지평이 이해되어야만—객체화하는 탐구가 가능하다. “Damit die Thematisierung des Vorhandenen, der wissenschaftliche Entwurf der Natur, möglich wird, muß das Dasein das thematisierte Seiende transzendieren. Die Transzendenz besteht nicht in der Objektivierung, sondern diese setzt jene voraus.”(363) ➔ 특정한 존재방식으로 이해함=주제화는 존재 일반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며, 주제화를 가능케 하는 도구연관(으로부터의 방출)이 이해되려면 “현존재에게 하나의 세계가 개시되어있어야 한다.”(364)

*Q. 특정 존재영역에 대한 이해, 존재 일반에 대한 이해 모두 지칭하는 것 같다.

A. 아니다. ‘주제화’는 전자고, 주제화를 가능케 하는 게 초월이기 때문에 후자만 지칭한다(K씨). 손안의-존재자를 쥘 때도 있는 초월(J씨). ➔ 그래서 c)의 제목이 세계의 초월인 것.

★Q. 본래성과 비본래성은 양립 가능한가? 

A0. 본래성과 비본래성에 정도차가 있는 것 같다(H2씨). ➔ 순수한 본래성과 불순한 본래성(본래성이 비본래성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경우)이 구분되는 게 낫지 않은가? 비본래성 자체는 균일해야 할 것 같고, 소위 순수한 본래성은 쉬워서도, 지속적이어도 안 될 것 같다.

A1. 본래성/비본래성은 이항대립이 아닌 근본범주와 파생범주의 문제. 따라서 애초에 양립가능성의 문제가 안 대두된다. 파생범주의 작동에서 근본범주는 이미 작동하고 있다. (H씨)

A2. 등급을 나눌 경우 선악에 대한 가치평가가 들어간다. ‘괜찮은 퇴락’과 ‘나쁜 퇴락’은 없다.*

*그러면 모든 퇴락은 균일한가?(K씨) ➔ 자기다움에 입각한 수준차가 있을 수는 있는데, 적어도 선악에 입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도덕적 가치평가 외에 비본래성에 대해 가치평가를 하고 있기는 한가? ➔ 부정적 대상이 아니어서 가치평가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어서(H씨) 또는 일상/본래가 서로 반대되는 게 아니라서(K씨) 비판하지 않는 것이다. cf. “Das eigentliche Selbstsein beruht nicht auf einem vom Man abgelösten Ausnahmezustand des Subjekts, sondern ist eine existenzielle Modifikation des Man als eines wesenhaften Existenzials.”(130) ➔ 소위 구조적 퇴락은 비판의 대상이 아닌데, 가십처럼 대안이 있는 퇴락은 비판하고 있지 않은가? 필연성으로서의 퇴락과 함몰로서의 퇴락은 구분돼야 한다(J씨).

A3. J씨: 더 본래적이고 덜 비본래적인 것을 떠나서 성립하는 구조적인 퇴락이 있다? ➔ 그 경우, ‘안 구조적인’ 퇴락, 즉 ‘나쁜 퇴락’이 있게 된다. ‘구조적 퇴락’보다 유한성이 낫다. ➔ 굉장히 흥미로운 자기혐오.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적 조건에 대한 혐오.

c) 세계의 초월성의 시간적 문제

도구연관으로서의 세계(의 존재)는 어떻게 가능한가? 현존재의 세계는 현존재의 이해와 함께 개시되어있다. “실존하면서 현존재는 그 자신의 세계이다.”(364) 유의미성의 통일체로서의 세계가 가능한 이유는 시간이 지평적 도식을 가지는 덕분이다. 다가옴은 자신을-위해[Umwillen seiner]라는 도식 속에서 작동한다. 있어왔음은 무엇-앞에서[Wovor]라는 도식 속에서 작동한다. 현전시킴은 하기-위해[Um-zu]라는 도식 속에서 작동한다. “Die existenzial-zeitlich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r Welt liegt darin, daß die Zeitlichkeit als ekstatische Einheit so etwas wie einen Horizont hat. Die Ekstasen sind nicht einfach Entrückungen zu... Vielmehr gehört zur Ekstase ein »Wohin«[whereto] der Entrückung. Dieses Wohin der Ekstase nennen wir das horizontale Schema. Der ekstatische Horizont ist in jeder der drei Ekstasen verschieden. Das Schema, in dem das Dasein zukünftig, ob eigentlich oder uneigentlich, auf sich zukommt, ist das Umwillen seiner. Das Schema, in dem das Dasein ihm selbst als geworfenes in der Befindlichkeit erschlossen ist, fassen wir als das Wovor der Geworfenheit bzw. als Woran der Überlassenheit. Es kennzeichnet die horizontale Struktur der Gewesenheit. Umwillen seiner existierend in der Überlassenheit an es selbst als geworfenes, ist das Dasein als Sein bei... zugleich gegenwärtigend. Das horizontale Schema der Gegenwart wird bestimmt durch das Um-zu.”(365)

Q. 시간성과 세계성을 매개해주는 “탈자태의 어디로”로서의 ‘지평적 도식’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도식’인가?

A. ‘셰마’를 그냥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용도의 셰마는 곁에-있음이다(H2씨). A2. 도식=시간규정(칸트) (H씨) ➔ 이미 세계와 관련된 구조로 한 번 언급된 구조들을 시간의 언어로 재서술해주는 대목.

A3. 현재는 현재의 지평을 만들고, 장래의 장래의 지평을 만들고, 기재는 기재의 지평을 만드는데, 그 지평들이 통합된 것이 세계이다. 조 휴즈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칸트의 삼중종합을 시간성의 지평으로 이해한다. 제 1종합이 현재의 지평을 만들고, 제 2종합이 과거의 지평을 만들고, 제 3종합이 미래의 지평을 만든다(H2씨).

Q. 이를테면 단순한 기재와 기재의 지평은 어떻게 다른가?

A. 기재 = 시간성의 한 양태이자 염려의 가능조건 중 하나, 기재의 지평( 도식) = 세계가 현존재의 심정성에 입각해 개시되는 방식

A2. 지평적 도식을 통해서만 세계가 세계로 드러날 수 있다.

Q. 세계와 시간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A. 세계의 가능조건이 (현존재의) 시간성이다. 현존재의 시간성이 현존재 자신과 함께(염려) 세계성을 개시한다(H2씨, J씨). ➔ 시간성을 세계에 적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도식(H2씨). 지평이 세계의 구조계기라기보다는 현존재의 세계개시성의 구조계기들이다(J씨).

★Cf. 칸트에게서 ‘도식’: 지성의 열두 근본범주(비시간적 규정들)가 어떻게 시간화되어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가? ➔ ★★★<하이데거 버전> 시간의 근본범주(다가옴, 있어왔음, 현전시킴)가 어떻게 세계에서 개시되는가?

Q. ‘지평’과 ‘도식’은 같은가?(H2씨)

A1. 지평적 도식은 일단 ‘so etwas wie einen Horizont’이다. 지평은 세계와 동일하고(?), 지평적 도식은 세계가 시간화될 있게 해주는, 그로써 개시될 있게 해주는 이다. ‘세계에 적용되는’이 ‘지평적’이다. 세계가 개시될 때, 도식을 매개로 세계가 시간적으로 개시된다.

시간성이 현존재의 존재의미이기 때문에 (시간화로써 [세계를] 개시해줄) 현존재가 없다면 시간이 정초하는 세계 역시 없다. “Die Welt ist weder vorhanden noch zuhanden, sondern zeitigt sich in der Zeitlichkeit. Sie »ist« mit dem Außer-sich der Ekstasen »da«. Wenn kein Dasein existiert, ist auch keine Welt »da«.”(365)

cf. “현존재가 시간화되는 한, 세계도 있다. […] 세계는 눈앞이나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 안에서 시간화된다.”(J씨)

세계가 대상의 가능조건으로서 미리 전제/개시되어있으며(손안의- 또는 눈앞의-존재자는 세계내존재라는 존재방식에 의해서만 만나질 수 있으며), 현존재가 세계내자체를 통제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세계는 초월적이다. “Das faktische besorgende Sein bei Zuhandenem, die Thematisierung des Vorhandenen und das objektivierende Entdecken dieses Seienden setzen schon Welt voraus, das heißt, sind nur als Weisen des In-der-Welt-seins möglich. In der horizontalen Einheit der ekstatischen Zeitlichkeit gründend, ist die Welt transzendent. Sie muß schon ekstatisch erschlossen sein, damit aus ihr her innerweltliches Seiendes begegnen kann.”(365-366)

‘초월의 수수께끼’에 대한 올바른 접근: 주체가 어떻게 객체에 이르는가?(x), 무엇이 세계내부적 존재자와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가?(o) “Das »Transzendenzproblem« kann nicht auf die Frage gebracht werden: wie kommt ein Subjekt hinaus zu einem Objekt, wobei die Gesamtheit der Objekte mit der Idee der Welt identifiziert wird. Zu fragen ist: was ermöglicht es ontologisch, daß Seiendes innerweltlich begegnen und als begegnendes objektiviert werden kann? Der Rückgang auf die ekstatisch-horizontal fundierte Transzendenz der Welt gibt die Antwort.

Q. ‘주체가 어떻게 객체에 이르는지’에 입각해 문제를 전개한다고 해서 꼭 세계가 객체들의 총체로 이해되는가? 하이데거는 왜 이렇게 생각했는가?

 

§70 현존재적 공간성의 시간성

현존재는 공간을 열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Es füllt nicht wie ein reales Ding oder Zeug ein Raumstück aus, so daß seine Grenze gegen den es umgebenden Raum selbst nur eine räumliche Bestimmung des Raumes ist. Das Dasein nimmt – im wörtlichen Verstande – Raum ein. Es ist keineswegs nur in dem Raumstück vorhanden, den der Leibkörper ausfüllt. Existierend hat es sich je schon einen Spielraum eingeräumt.”(367-368)

방향잡기와 거리제거는 어떻게 가능한가? “Das Sicheinräumen des Daseins wird konstituiert durch Ausrichtung und Entfernung. Wie ist dergleichen existenzial auf dem Grunde der Zeitlichkeit des Daseins möglich?”(368)

방역의 개시는 세계성에 빚지고 있으며, ‘저기로’와 ‘여기로’와 관련된 간직하는 예상을 필요로 한다. “Die Bewandtnisbezüge sind nur im Horizont einer erschlossenen Welt verständlich. Deren Horizontcharakter ermöglicht auch erst den spezifischen Horizont des Wohin der gegendhaften Hingehörigkeit. Das sichausrichtende Entdecken von Gegend gründet in einem ekstatisch behaltenden Gewärtigen des möglichen Dorthin und Hierher.”(368)

공간성을 가능케 하는 현전시킴 “Näherung und imgleichen Schätzung und Messung der Abstände innerhalb des ent-fernten innerweltlich Vorhandenen gründen in einem Gegenwärtigen, das zur Einheit der Zeitlichkeit gehört, in der auch Ausrichtung möglich wird.”(369)

퇴락적 공간성을 가능케 하는 ‘저기’에 대한 망각 “In der nähernden Gegenwärtigung von etwas aus seinem Dorther verliert sich das Gegenwärtigen, das Dort vergessend, in sich selbst. Daher kommt es, daß, wenn die »Betrachtung« des innerweltlichen Seienden in einem solchen Gegenwärtigen anhebt, der Schein entsteht, es sei »zunächst« nur ein Ding vorhanden, hier zwar, aber unbestimmt in einem Raum überhaupt.”(369)

세계와 공간성 “Die Welt ist nicht im Raum vorhanden; dieser jedoch läßt sich nur innerhalb einer Welt entdecken.”(369)

 

§71 현존재의 일상성의 시간적 의미

일상성의 존재론적 의미는 무엇인가? 일상성이란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 곧 관습의 습관적인 ‘반복’(예상, 보유, 현전시킴)으로 이루어진 시간적인 연장돼있음이다. “Die Alltäglichkeit meint das Wie, demgemäß das Dasein »in den Tag hineinlebt«, sei es in allen seinen Verhaltungen, sei es nur in gewissen, durch das Miteinandersein vorgezeichneten. Zu diesem Wie gehört ferner das Behagen[comfortability] in der Gewohnheit, mag sie auch an das Lästige und »Widerwärtige« zwingen. Das Morgige, dessen das alltägliche Besorgen gewärtig bleibt, ist das »ewig Gestrige«. Das Einerlei[monotony] der Alltäglichkeit nimmt als Abwechslung, was je gerade der Tag bringt[takes whatever the day happens to bring as variety]. […] Das Einerlei, die Gewohnheit, das »wie gestern, so heute und morgen«, das »Zumeist« sind ohne Rückgang auf die »zeitliche« Erstreckung des Daseins nicht zu fassen.”(371)

 

5 시간성과 역사성

§72 역사의 문제에 대한 실존론적-존재론적 해설

 (자신의 존재구조상 존재이해를 갖추고 있는, 그리하여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는) 현존재의 전체존재에 있어서 죽음은 단지 하나의 끝일 뿐이다. 다른 끝은 현존재의 시작, 곧 탄생[Geburt]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태까지의 현존재 분석은 마치 그가 그의 뒤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저 전진하기만 하는 듯이, 곧 일면적으로 이루어져왔다. 현존재의 시작이 고려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탄생과 죽음 사이 현존재의 연장[Erstreckung]”, 곧 현존재의 전체 “삶의 연관”이 간과되었다(373).

 현존재의 삶의 연관은 (마치 그가 눈앞의-존재자인 양) “‘시간 속에서의’ 체험의 연속”으로 이해되어선 안될 것이다(373). 그 경우 현존재는 유일하게 실재적인 현재만을 살면서 계속해서 다음 현재로 건너뛰는[durchhüpfen] (금붕어 같은) 존재자가 될 것이며, 이미 지나간 탄생과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은 (사실과 달리) 비실재적인 것이 될 테고, 현존재가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연장되어있다는 사실이 존재론적으로 해명 불가능해질 것이다.

“Das Dasein existiert nicht als Summe der Momentanwirklichkeiten von nacheinanderankommenden und verschwindenden Erlebnissen. Dieses Nacheinander füllt auch nicht allmählich einen Rahmen [des Lebens] auf.”(374)

 현존재는 현재들만을 살아감으로써 (미리 규정되어있는) 삶의 ‘구간’을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로소 연장시킴으로써, 하이데거의 표현으로는 스스로의 고유한 존재를 연장으로 구성함으로써 삶의 연관을 구성한다. “현존재의 존재 속에 이미 탄생 및 죽음과 관련된 ‘사이[Zwischen]’가 놓여있다.”(374, 강조는 하이데거) 탄생과 죽음은 실재적일 뿐만 아니라 (그 진의에 입각한다면) 일회적이지 않다. “현사실적 현존재는 태어난 채로(gebürtig) 실존하고,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의미 속에서 또한 이미 태어난 채로 죽어간다(sterben). […] 염려로서 현존재는 ‘사이’이다[ 존재한다].”(374, 강조는 하이데거)

 이처럼 현존재에게 고유한 연장, 운동[Bewegtheit, movement] 그리고 지속[Beharrlichkeit, persistence]은 (그의 존재의미인) 시간성에 의해 어떻게 근거 지워지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우선 하이데거는 “연장된 자기연장의 구체적[종적] 운동”을 현존재의 발생[Geschehen, occurrence, 생성, 역사함, 일어남]으로 일컫는다(375). 현존재의 삶의 연관에 대한 여태까지의 질문은 “발생의 존재론적 문제”에 관한 것으로, “발생구조의 노출[발견]”과 그것의 가능조건으로서 “발생성[Geschichtlichkeit, 역사성, 일어남-성격]의 존재론적 이해의 획득”을 요구한다(375).

 한편 발생의 문제는 현존재의 ‘누구’에 해당하는 ‘자기’의 지속성(Ständigkeit)의 문제를 소급지시한다. 발생에 대한 분석은 자립적인(selbstständig) 현존재의 시간성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역사학[Historie, historiography] 자체를 발생에 대한 학문과 동일시하여 이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짐멜의 인식론적 접근이나 리케르트의 논리학적 접근을 피한다 하더라도 역사학은 발생을 여전히 “한 학문의 [완성된] 객체”로서 접근함으로써 역사학을 가능케 하는 [생성적인] 발생의 근본현상을 불가역적으로(unwiederbringlich, irrevocably) 도외시하기 때문이다(375, 강조는 하이데거). 애초에 “어떻게 역사가 역사학의 가능한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답하기 위해서는 발생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와 발생성 (일반) 및 그것을 근거 지우는 시간성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375). 이러한 작업은 본질적으로 “현상학적 구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375).*

*Q. 어째서 이 말 뒤에 “Die existenzial-ontologische Verfassung der Geschichtlichkeit muß gegen die verdeckende[은폐하는] vulgäre Auslegung der Geschichte des Daseins erobert[정복하다, 성취하다] werden. Die existenziale Konstruktion der Geschichtlichkeit hat ihre bestimmten Anhalte[clues, grounds, supports] am vulgären Daseinsverständnis und eine Führung[guidance] durch die bisher gewonnenen existenzialen Strukturen.”(375-376)이 따라나오는가?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적 구축이란 어떤 작업을 의미하는가?

A. 통속적인 해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태 자체에 입각해 새롭게 구축되어야 한다는 뜻 아닐까?

 상술한 작업은 “발생[역사]의 통속적인 개념” 및 모든 발생[역사]에 공통적이라고 여겨지는 계기들에 대한 탐구로 시작된다(376). 그와 같은 통속적 발생[역사] 해석에 반대해서 이루어지는 발생에 대한 실존론적 구축은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존재 및 시간성으로서의 염려에 대한 분석에서 그 실마리를 가진다. 발생성[역사성] 염려에 의해 근거 지워짐에 따라, 현존재는 본래적으로 또는 비본래적으로 발생적일 수 있다. 그리하여 일상성에 대해 수행되었던 분석은 현존재의 비본래적 발생을 해명해준다.

 “현존재의 발생[생성]에는 본질적으로 개시와 해석이 속한다.”(376) 발생적인[역사적인] 실존 방식으로서의 개시와 해석으로부터 “역사에 대한 명시적인 개시와 포착”이 가능해진다(376). 역사에 대한 이와 같은 주제화는 정신과학으로서의 역사학 및 그에 상응하는 정신과학적 세계 구성[Aufbau]의 가능조건이다. 그리하여 현존재의 발생성[역사성]은 학으로서의 역사학의 존재론적 유래[Herkunft]이다.*

*Q. “Erst von hier aus sind die Grenzen abzustecken[marked out, staked out], innerhalb deren sich eine am faktischen Wissenschaftsbetrieb orientierte Wissenschaftstheorie den Zufälligkeiten ihrer Fragestellungen aussetzen[launch] darf.”(376)을 이해하지 못했다.

A. 현존재의 발생[생성]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를 도모하고 나서야 사실학으로서의 역사학의 탐구영역이 획정될 수 있다.

★생성이 시간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이 생성을 가능케 한다 “Die Analyse der Geschichtlichkeit des Daseins versucht zu zeigen, daß dieses Seiende nicht »zeitlich« ist, weil es »in der Geschichte steht«, sondern daß es umgekehrt geschichtlich nur existiert und existieren kann, weil es im Grunde seines Seins zeitlich ist.”(376, 강조는 하이데거)

 다른 한편 현존재는 역사학 없이도 달력시계를 사용해 ‘시간 속에’ 존재하면서 내부시간적인[innerzeitig] 존재자들 및 자연을 만난다. 이에 하이데거는 통속적인 발생[역사] 해석에 반대해 [달력과 시계에 기반한] 내부시간성이 아닌 현존재의 시간성이 발생성[역사성]을 가능케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자 한다. 이때 내부시간성 역시 현존재의 시간성으로부터 발원하며, 결국 내부시간성과 발생성[역사성] 모두 시간성으로부터 파생된, 그러나 서로간에 등근원적인 이 된다. “그러므로 발생[역사]의 시간적 성격에 대한 통속적 해석은 그것의 경계 내에서 유효하다.”(377) [내부시간성 역시 정당한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데거가 모든 역사학의 문제가 발생에 관한 실존론적 분석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의 역사학은 ‘범주적’ 수단과 일차적 존재론적 지평 모두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근원적인 근거를 파고드는 작업이 요구될 뿐이다. 하이데거는 이어질 자신의 작업이 딜타이의 작업을 계승하는 것임을 밝힌다.*

*리차드 팔머, 이한우 옮김,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문예출판사, 2011, pp.193-195

“[…] 딜타이에 있어서 역사성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인간은 내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다양한 대상화를 통해 스스로를 이해한다[세계 이해 ➔ 자기이해].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는 오직 [삶의 고체화된 형태인] 역사만이 대답할 수 있다.’ […]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기 이해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이다. 즉 인간의 자기 이해는 과거에 이루어진 고정된 표현들을 통해 해석학적 우회로를 거쳐서 획득된다. 따라서 [자신의 본성에 대한] 인간의 자기 이해는 역사에 의존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역사적성격을 갖는다.

 2) 인간의 본성은 [니체에게서와 같이] 고정된 본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고정적인 본질을 알기 위하여 시간의 벽에 끊임없이 벽화를 그려 자신을 대상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 게다가 딜타이는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질은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의 문제는 앞으로의 역사에 의해 결정될 문제다. […] 인간이 계속해서 자신의 유산인 형식화된 표현들을 갖게 됨으로써 점차 인간은 창조적이고 역사적으로 되어간다. 과거에 대한 이러한 파악은 노예의 형태가 아니라 자유의 형태이다. 좀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이러한 파악은 인간이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 의욕할 수 있는 데 대한 충분한 자기 인식과 의식의 자유를 말해준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킬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체를 변화시킬 있는 힘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진정한 그리고 진보적인 창조력을 갖고 있다.

 역사성이 지닌 또 하나의 의의는 인간이란 역사에서 벗어날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역사 속에서 역사를 통하여 형성되기 때문이다. […] 딜타이에게서 이는 ‘역사적 상대주의’로 나타났다. […] 역사란 궁극적으로 세계관들의 연속이며 우리는 한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확고한 판단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

 

§73 발생[역사](Geschichte) 대한 통속적인 이해와 현존재의 일어남[생성](Geschehen)

 “역사의 본질”, 즉 “역사성의 실존론적 구축”을 묻기 위해서는 “근원적으로 역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378). 그러므로 우선은 “통속적인 현존재해석에서 ‘역사’와 ‘역사적’이라는 표현들로 무엇이 뜻해지는지” 보아야 하는데, 그 뜻은 다의적이다(378).* 

*’역사’는 ‘역사적 현실성’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정신과학적 학문—역사학—도 가리키는데, 후자의 의미는 현재의 고찰에서 배제된다.

 ‘역사’는 우선 ①지나간 [Vergangenes]으로서, ‘지금’ 그리고 ‘현재’ 현실적이라는 의미에서의 ‘현재’와 반대되는 과거의 으로 이해된다. 이 지나간 것은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미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역사는 비가역적으로 선행한 사건들에 속하지만, ‘지금’에 와서도 눈앞에-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를테면 만일 우리가 (현재에도 존재하는) 유적에 대해 ‘과거의 한 조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 표현은 유적을 지나간 것으로 만들기보다 유적의 유래를 드러내줄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것이 ‘역사를 가진다’고 말해질 때에는 미래까지도 포함하는 특정한 생성 및 흥망성쇠의 연관이 가리켜진다. 그러므로 이때의 역사란 ②특정한 사건(Ereignis) 또는 영향의 연관이며, 과거의 것에 국한되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관통한다.

Q. ‘역사’의 두 번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로부터 유래해 생성의 과정을 거쳐 미래에까지 뻗어나가는 물건 혹은 사건이 가지는 것? 첫 번째 의미와 어떻게 다른가?

cf. “둘째로 역사는 […] 과거로부터 유래한 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생성과 연관된다. 이때 역사의 전개는 때로는 융성이라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쇠망이라는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그렇게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동시에 역사를 만들 수도 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신기원을 이루면서 미래를 규정한다. 이 경우 역사는 과거, 현재 및 미래를 관통하는 사건연관 내지 영향연관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역사에서는 과거가 특별한 우위를 점하지 않는다.”(⟪강독⟫, 468, 강조는 필자)

A. 식기와 라틴어의 차이. 라틴어는 영어에 지금까지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첫 번째 의미에서의 식기도 영향을 미치고 있겠지만, 눈앞에-존재하는 정도로 소극적이다(H씨).

A2. 첫 번째 의미는 지나가버렸다는 데 방점이 있고, 두 번째 의미는 역사를 만드는 영향에 방점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용법이든지 간에 거기-기재했던 현존재의 역사적 주체성과 관련되어있다는 점이다(H2씨).

 또한 ‘역사’는 자연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시간 내에서 일어나는 인간 및 인간집단 그리고 문화의 변천과 운명을 의미한다.”(⟪강독⟫, 468) 이때의 역사는 일어남의 사건보다는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존재자의 영역을 가리키게 된다. 마지막으로 ‘역사’는 ④전승되어온 [das Überlieferte]을 뜻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전통은 그 역사적 유래가 뚜렷하게 알려져있을 수도, 아니면 유래가 은폐되어 자명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 네 가지 의미를 종합하면, “역사란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현존재의 종적인[구체적인, 특수한] 일어남”으로, “서로-함께-있음 속에서 ‘지나간 것’ 그리고 동시에 ‘전수되어온 것’ 그리고 계속해서-영향을 미치는 강조된 의미에서의 일어남이 역사로 취급되는” 방식으로* 그러하다(379).

*“그것[역사]은 ‘이미 지나갔지만’ 사람들 사이의 공동존재 속에서 ‘전승되면서’ 계속 영향을 미치는 생기이다.”(⟪강독⟫, 468-469)

 이제까지 인간은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해왔다(379). 여기서 현존재와 역사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되는가? 현존재가 그 자체로 먼저 있고, 때에 따라 역사적일 수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현존재는 역사적인 존재자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혹시 일어남이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기에, “현존재가 그의 존재 속에서 역사적이기 때문에만 [비로소] 상황들, 사건들(Begebenheiten) 그리고 운명들이 존재론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379) 그 경우, 현존재를 근거 짓는 시간성과 현존재의 존재에 속하는 역사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 ‘과거’ 개념의 우위가 드러나고, 역사성의 근본구성틀 역시 해설될 수 있다.

 박물관의 유물이 ‘지나간 시간’에 속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현재’ 눈앞에-있을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역사적인가? 유물이 “역사학적 관심의 대상”, 곧 “역사학적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기에는, 애초에 그러한 것이 되기 위해서 유물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380). 유물에서 ‘지나가버린’ 요소는 바로 “그 내부에서 사물들이 하나의 도구연관에 속했고, 손안의-존재자로서 만나졌으며 하나의 고려하는, 세계-내-존재하는 현존재에 의해 사용되었던 그런 세계”이다(380). 즉, ‘과거’에 특정한 세계 내부에 존재했던 것이 지금은 단지 눈앞에-존재하게 된 것이 박물관의 유물이다. 그리고 세계란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의 (존재를 이루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유물의 역사적 성격은 그것이 사용되었던 세계 세계귀속성—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세계에 그 유물이 속했던 그런 현존재의지나가버렸음[과거가-되었음]’ 근거한다.

Q. 과거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가 다르다는 말인가?(J씨) 

A. 세계를 개시하는 현존재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럴듯하다.

A2. 그렇다고 해서 세계가 마냥 개인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H씨)

 그런데 ‘지나간’을 ‘지금 더 이상 눈앞에-있거나 손안에-있지 않음’으로 규정한다면, 실존하는 현존재는 지나가버릴 수 없다. 그는 단지 거기-기재했을(da-gewesen) 뿐이다. 이렇게 거기-기재했던 현존재가 바로일차적으로 역사적인 이(며, 다른 역사적인 것이 역사적이 되는 것은 거기-기재했던 현존재와의 관련 덕분이)다(381). 그렇다고 해서 현존재가 사라져야만 역사적인 존재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현전시키는-다가올 것으로서 있어왔을” 수, 즉 시간성을 관통해서 역사적일 수 있다(381). 지나가버렸음으로서의 ‘과거’와 현존재의 탈자태 중 하나로서의 기재성(Gewesenheit)은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 역사적인 것에 있어 기재가 우위를 가지는지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기재는 현재, 다가옴과 등근원적이기 때문이다.

★‘세계역사적인 것’=역사적이지만 현존재는 아닌 존재자 “Primär geschichtlich – behaupten wir – ist das Dasein. Sekundär geschichtlich aber das innerweltlich Begegnende, nicht nur das zuhandene Zeug im weitesten Sinne, sondern auch die Umweltnatur als »geschichtlicher Boden«. Wir nennen das nichtdaseinsmäßige Seiende, das auf Grund seiner Weltzugehörigkeit geschichtlich ist, das Weltgeschichtliche.”(381, 강조는 필자) ➔ 세계역사에 대한 통속적인 개념은 (역사학적 객관화가 아니라) 이러한 이차적으로 역사적인 것으로부터 발원한다. “Das Weltgeschichtliche ist nicht etwa erst geschichtlich auf Grund einer historischen Objektivierung, sondern als das Seiende, das es, innerweltlich begegnend, an ihm selbst ist.”(381)

Q. 세계역사적인 것이 오히려 역사에서 일차적이지 않은가?(H2씨)

A. 거기-기재했던 현존재가 세계역사적인 것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지, 거기-기재했던 세계역사적인 것 덕분에 현존재가 비로소 역사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것의 시간적 특성은 눈앞의-존재자의 시간-속에-있음으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더 옛날의 것이라고 해서 더 역사적이 되는 것은 아닌데, ‘현재’와 ‘과거’ 사이의 시간적인 간격이 역사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성의 근거는 시간-속에-있지-않은 현존재에 있다. 사실 인간이 “역사의 일차적 ‘주체’”라는 것은 아무도—통속적인 이해를 따라서도—부정하지 않을 것이다(382). 그렇다면, “얼마나(inwiefern) 그리고 어떤 존재론적 조건을 이유로 본질구성틀로서의 역사성은 ‘역사적’ 주관의 주관성에 속하는가?”(382)

 

§74 발생성[역사성] 근본구성틀

 역사성이 구성하는 현존재의 존재는 염려이고, 염려는 시간성에 근거한다. 따라서 현존재의 역사성에 대한 해석 역시 시간성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선구하는 결의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본래적인 실존에서 역사적 일어남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결의란 저마다의 고유한 책임에 스스로를 기투하는 것이며, 본래적으로는 선구의 모습을 띤다.* 선구에서 현존재는 죽음을 자신의 시야 안에 두면서, 피투 가운데서 가장 자기다운 자신을 인수하고자 한다. 이때 (자기다움의) 인수는 현존재마다 특수한—따라서 무엇이라고 확정할 수 없는—특정 현사실적 상황, 현사실적인 ‘거기(Da)’에 대하여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현존재가 결의하게 되는, 그리고 스스로를 그리로 기투하게 되는 현사실적 가능성은 어디서 길어지는가(schöpfen)? 죽음은 선구적 자기기투의 전체성과 본래성을 보장할 뿐, 선구적 자기기투에 그것의 구체적 현사실적 내용을 부여해주지는 않는다. 하이데거는 해당 물음에 대한 대답을 세계에의 피투성이 개시하는 일종의 지평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데거가 비본래적인 결의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여러 현존재가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 그리고 그 세계를 개시하는) 자기 자신에게 내던져져있다. 우선 그리고 대개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세인의 해석에 입각해 이해한다. 그러나 결의성은 현존재를 그 자신에게 되돌려주면서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개시하는데, 이 개시는 “결의성이 내던져진 것으로서 떠안는 유산(Erbe)에 입각해” 이루어진다(383). 다시 말해, 결의를 통해 이해되는 본래적인 실존의 가능성은 (역사적으로) 전수되어온 가능성들 하나이며, 본래적 실존 자체가 하나의 전승(Überliefern)이다.*

*Q. 어떤 근거에서 하이데거는 “Wenn alles »Gute« Erbschaft ist”라고 말하는가?(383)

Q. 현존재의 본래적 자기기투를 독창적인 것이 아닌 역사적 전승으로 특징지음으로써 하이데거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본래적 자기기투의 내용을 역사에서 길어와야 하는가?

A. 본래적 자기기투의 지평이 과거이기 때문이다. 길어올 곳이 거기밖에 없다. (K씨)

A2. 현사실성의 의미가 기투의 자의성을 제한한다. 역사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선례가 없으면 무엇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분별되지 않는다. (H2씨)

A3. 완전히 무차별하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사실적 가능성 내, 곧 유한한 선택지 내에서의 선택이다(K씨). ➔ 다만 (나쁜 것 대신) 좋은 역사적 가능성을 골라와야지.

 현존재의 선택이 본래적이면 본래적일수록 그것은 (애매한 대신) 일의적이 되며 (우연하고 잠정적인 대신) 비우연적인 것(, 곧 운명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죽음으로의 선구, 죽음에 대한 자기개방만이 현존재를 그의 유한성에로 밀어넣는다(stoßen). 현존재는 쾌락(Behagen)과 가볍게-생각함(Leichtnehmen), 물러서기(Sichdrücken)의 가능성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의 운명의 단순성”에로 데려가진다(384). (그리고 이러한 사태가 역사적인 전승으로서 이루어질 때,) 그로써 현존재의 근원적인 일어남[생기]이 무엇인지(=운명)가 드러난다.*, **

*“Damit bezeichnen wir das in der eigentlichen Entschlossenheit liegende ursprüngliche Geschehen des Daseins, in dem es sich frei für den Tod ihm selbst in einer ererbten, aber gleichwohl gewählten Möglichkeit überliefert.”(384, 강조는 필자)

**“현존재는 유산으로서 인수된 가능성들을 자신에게 전승하는 결의성 속에서 운명적으로 실존하면서, 세계-내-존재로서 자신이 겪었던 ‘다행스러운’ 사정들이나 잔혹한 우연들을 자신이 선택한 실존 가능성의 구현을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으로서 흔쾌히 받아들인다.”(⟪강독⟫, 475, 강조는 필자)

  (본래적) 현존재가 운명의 습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가 그의 존재의 근거 속에서 […] 운명이기” 때문이다(384, 강조는 하이데거). (본래적) 현존재의 실존이 운명적이기 때문에 그는 행운도, 불운도 맞을 수 있는 것이지, 현존재가 맞닥뜨리는 사건들의 연관으로부터 비로소 운명이 발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맞닥뜨림은 결의하지 않은 비본래적 현존재도 당하는 것이지만, 그는 운명을 ‘가질’ 수 없다.

 죽음으로 선구한 현존재는 “자신의 유한한 자유의 고유한 흘러넘치는-힘(Übermacht)”을 경험하며, 그와 같은 경험 가운데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로의 떠안김의 무력함(Ohnmacht)” 그리고 “개시된 상황의 우연”과 같음을 절감한다(384).* 이렇게 운명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가 타인과 함께 존재할 때, 그의 생기[일어남]는 공동생기(Mitgeschehen)이 되며, 공동체의 또는 민족의 운명으로서 “집단운명(Geschick)으로 규정된다.”(384) 집단운명은 개별적인 운명들을 합친다고 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개별적인 운명은 동일한 세계에서의 서로-함께-있음에 의해 미리 인도된다. 나아가 “참여와 투쟁**에서 집단운명의 힘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그의 ‘세대’ 속 그리고 ‘세대’와 함께하는 현존재의 운명적 집단운명은 현존재의 완전한, 본래적인 생기를 이룬다.”(384-385)**

*Q. 도대체 어떤 사태인가?

A. “고유한 책임 존재를 향해 침묵 속에서 불안을 인수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무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떠한 역경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투의 ‘압도적인 힘’으로서의 운명”(⟪강독⟫, 477) cf. “Schicksal als die ohnmächtige, den Widrigkeiten sich bereitstellende Übermacht des verschwiegenen, angstbereiten Sichentwerfens auf das eigene Schuldigsein […]”(385)

A2. 영원회귀에서처럼, 허무주의를 적극적으로 인수함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그림(H2씨).

**Q. 어떤 투쟁인가?(K씨)

A1. 한 세대 내 현존재들 사이의 투쟁

A2. 공동체 내 투쟁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대외적 투쟁 아닌가?(K씨)

***Q. 개별 현존재의 운명과 그가 속한 집단의 운명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후자가 전자를 인도해야 하는가? (그때에 현존재의 자유는 제한되지 않는가?)

cf. “하이데거는 […] 현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선택한 가능성이 공동체 전체가 구현해야 할 가능성일 경우에만 그것은 현존재를 사로잡을 수 있는 현사실적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경우에만 현존재는 자신의 운명과 공동체의 운명을 동일시하면서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을 던질 수도 있다고 보았다.”(⟪강독⟫, 477)

A1. 우선 개별 현존재가 운명을 가져야 그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집단운명이 발생한다. (H씨)

A2씨. 집단운명은 개별 현존재의 운명 찾기의 지평이기 때문에 일방적이지는 않다.

Q. 고유한 자기다움 찾기 프로젝트와 어떻게 양립하는가?(K씨)

A. 고유한 자기를 찾는 개인이 고립된 자유주의적 개인이 아니라 세계내존재다(H2씨).

 운명은 자신의 존재론적 가능조건으로서 염려를, 궁극적으로는 시간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운명의 양태로 실존한다는 것은 현존재가 “그의 실존의 근거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385). 또한 등근원적으로 도래하는 동시에 기재하는 존재자만이 “물려진(ererbt) 가능성을 전수하면서, 고유한 피투성*을 인수하고 ‘자신의 시간’을 위해 순간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385) 마지막으로, 본래적으로 유한한 시간성만이 본래적 역사성으로서의 운명을 가능케 한다.**

*전통을 의미하는 것 같다.

**Q. 현존재의 삶의 시간이 유한한 것과, 그가 자신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관계가 왜 이렇게 규정되는가?

A. 현존재에게 시간이 무한했다면, (단순한) 운명이 있지 않을 것이다.

 결의하는 자가 자신의 선택의 (역사적) 유래를 반드시 명시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직 현존재의 시간성 속에만이, 기투되는 가능성이 명시적으로 전승된 것이 될 수 있다. 결국 결의는물려져내려온 실존의 가능성의 반복이다(385). “반복은 명시적 전승, 거기-기재했던 현존재의 가능성에로의 되돌아감이다.”(385, 강조는 하이데거) 현존재는 선구하는 결의를 통해 (역사로부터) 자신의 영웅을 선택하고 (그의 실존적 가능성을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반복은 단순히 ‘지나간 것’을 그대로 다시 실현하는 것도, 현재를 이미 극복된 과거에 묶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반복은 거기-기재했던 실존의 가능성에 응답한다(erwidern, respond).* 결의에서의 가능성의 응답은 그러나 동시에 순간적인 것으로서 오늘날 ‘과거’로 유효한 것의 철회(Widerruf, renunciation)이다.”(386, 강조는 하이데거) 

*Q. 뭘 한다는 것인가?

A. 거기-기재했던 실존의 가능성의 가치를 회복한다?

★반복의 정의 “Die Wiederholung kennzeichnen wir als den Modus der sich überliefernden Entschlossenheit, durch den das Dasein ausdrücklich als Schicksal existiert.”(386)

 “그런데 운명이 현존재의 근원적인 역사성을 구성하면, 역사는 그것의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나간 것 속에서도, 오늘날 및 오늘날과 지나간 것 사이의 ‘연관’ 속에서도 가지지 않고, 도리어 현존재의 다가옴으로부터 발원하는 실존의 본래적 생기 속에서 가진다.”(386) 다가옴은 역사에서 본질적인데, (다가올) 죽음이 현존재를 그의 현사실적 피투성에로 되돌려 던지고, 그 되돌려 던져짐을 통해서만 비로소 기재가 역사적인 것에서 특유한 우위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존재, 즉 시간성의 유한성이 현존재의 역사성의 숨겨진 근거이다. 현존재는 반복 속에서 비로소 역사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시간적인 자로서 역사적이기 때문에 반복하면서 그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인수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역사학도 필요하지 않다.”(386)

Q. 그래서 ‘현존재는 역사적이다’라는 말의 뜻은 어떻게 되는가?

A1. 현존재는 이전에 기재했던 현존재의 실존 가능성을 반복하면서 실존한다.

Q. 현존재가 시간적이라는 것과 역사적인 것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J씨)

A1. 개인 ➔ 사회로의 확장?(R씨)

A2. 과거 세대와의 연관 여부가 더 핵심적인 것 같다.

A3. 역사성을 시간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H2씨).

요약: “Das in der Entschlossenheit liegende vorlaufende Sichüberliefern an das Da des Augenblicks nennen wir Schicksal. In ihm gründet mit das Geschick, worunter wir das Geschehen des Daseins im Mitsein mit Anderen verstehen. Das schicksalhafte Geschick kann in der Wiederholung ausdrücklich erschlossen werden hinsichtlich seiner Verhaftung an(its being bound up with) das überkommene Erbe. Die Wiederholung macht dem Dasein seine eigene Geschichte erst offenbar. Das Geschehen selbst und die ihm zugehörige Erschlossenheit, bzw. Aneignung dieser(or the appropriation of it) gründet existenzial darin, daß das Dasein als zeitliches ekstatisch offen ist.”(386)

 여태까지의 논의는 역사로서의 생기가 어떻게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현존재의 (삶의) ‘연관’을 구성할 것인지 보여주기에는 불충분하다. 하이데거는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체험적) 삶의 연관의 구성이라는 문제설정이 어디서 기원했으며, 어떤 존재론적 지평을 전제하는지 파헤치겠다고 말한다. 이는 비본래적인 실존은 어떤 방식으로 역사적인지 이해하는 작업과 병행된다.

 

§75 현존재의 발생성[역사성] 세계-발생[세계-역사]

  비본래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는 세계내부적으로 만나지는 것에 근거해 자기 자신을 이해, 곧, 기투한다. 이때 현존재가 만나는 것은 도구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사건들을 포함한 “일상적 행위와 변화” 전체로, 현존재는 그에 몰두하여 종사한다[treiben](388). (이에 따라 현존재의 삶의 ‘연관’ 역시 이러한 행위와 변화들의 경과를 따라, 고려된 존재자 및 그에 대한 체험에 입각해 이해되는 것 같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역사의 일어남이 개별적 주체들 속 ‘체험류’의 고립된 경과에 불과”해지는 것을 경계한다(388). 역사의 일어남을 설령 “주체와 객체의 ‘사슬[Verkettung]’”로 이해한다 해도, 이 사슬 자체가 어떤 존재방식에 따라 ‘일어나는지’가 먼저 알려져야 한다(388).

 하이데거에 따르면 “역사의 일어남은 세계내존재의 일어남”이지, 고립된 무세계적 주체의 생기가 아니다(388). “현존재의 역사성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역사성”이기도 한 것이다(388). “역사적인 세계-내-존재의 실존과 함께 손안의-존재자와 눈앞의-존재자는 언제나 이미 세계의 역사 속에 포함되어있다[einbeziehen].”(388) 이처럼 (역사학적으로 탐구되기 이전에 이미)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손안의- 또는 눈앞의-존재자를 하이데거는 세계-역사적인 [das Welt-Geschichtliche]’이라고 부른 바 있다. 세계-역사적인 것의 일어남에는 독특한 움직임[Bewegtheit]의 성격이 있다. 이를테면 반지가 보여지고 착용될 때, 이는 반지의 단순한 장소적 이동이 아니다.

 우선 그리고 대개 현존재는 자신의 역사를 눈앞의-존재로 경험되고 해석되는 세계-역사적인 것의 역사로 이해한다. 현존재는 일상적으로 ‘벌어지는[passieren]’ 일들에 의해 주의가 분산되며[zerstreut], 거기에 자신의 운명과 역사가 놓여있다고 잘못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는 이 분산에서 벗어나고자 할때조차 그가 마치 눈앞의-존재자인 양 눈앞의-체험들의 연관에 대해 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탄생과 죽음 사이 현존재의 삶의 연관에 대한) 물음의 지평은 “자기의 비상주성[Unständigkeit]의 본질을 이루는 비결의성”이다(390). 그 대신 물어져야 할 것은 “그 자신의 어떤 존재방식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을 다음과 같은 정도로 잃어버리는가, 그가 스스로를 주의분산으로부터 비로소 사후적으로 마치 모아들여야[zusammenholen] 할 정도로, 그리고 그 모임[das Zusammen]을 위해 하나의 포괄적인 통일체를 스스로 생각해내야 할 정도로?”이다(390). 이 물음의 대답은 앞서 죽음 앞에서의 도피로 규정되었었다. 반면 도피하지 않고 선구하는 결의성, 그 생기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물려져온 가능성을 반복하는 결의성은 “주의분산의 비상주성에 반해 자체로 펼쳐진 지속성[erstreckte Stätigkeit]”이다(390). “이 상주성[지속성] 속에서 현존재는 탄생과 죽음 및 양자의 사이를 운명으로서 자기의 실존 속으로 끌어들여서 보유하는 방식으로 그때마다의 상황의 세계-역사적인 것을 향해 순간적으로 존재한다. 기재적인 가능성들을 운명적으로 반복하면서 현존재는 자기 이전에 이미 기재했던 것으로 자신을 직접적으로, 즉 시간적•탈자적으로 도로 보낸다.”(⟪강독⟫, 484)*

*Q. 그 다음에 이어지는 “Mit diesem Sichüberliefern des Erbes aber ist dann die »Geburt« im Zurückkommen aus der unüberholbaren Möglichkeit des Todes in die Existenz eingeholt, damit diese freilich nur die Geworfenheit des eigenen Da illusionsfreier[오해 없이] hinnehme.”(391)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탄생이 결의 이후에 받아들여지며, 그를 통해 피투의 오해가 깨진다는 뜻인가?

cf. “[…] 현존재는 한편으로는 유산을 자기에게 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이라는 능가될 수 없는 가능성에 부딪혀 되돌아 오면서 탄생을 실존 속에 받아들인다.”(⟪강독⟫, 484)

A1. 탄생, 곧 세계에 내던져진다는 것의 의미가 전승행위를 통해 확실해진다(H씨).

 그리하여 결의성은 본래적 자기에 대해 충실한[성실한] 실존을 구성한다. “불안에 대해 준비된 결의성으로서 충실함은 동시에 자유로운 실존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권위인 반복 가능한 실존의 가능성 앞에서 가능한 존경심”이다(391). 

 나아가 결의성을 한갓된 체험, 결의의 작용이 있는 한에만 지속하는 무엇으로 보는 관점은 잘못되었다. “결의성 속에는 그것의 본질에 따라 모든 가능한, 자신에게서 발원하는 순간[들]을 이미 선취해놓은[vorwegnehmen] 실존적 상주성이 놓여있다.”(391)* 물론 상황에 따라 결의성은 특정한 결의를 포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본래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의 상주성이 깨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순간적으로 보존된다.** ‘순간’들의 연속이 현존재의 상주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간들이 “다가오면서 기재하는 반복의 이미 펼쳐진 시간성”으로부터 발원한다(391).

*Q. 이게 도대체 어떤 사태인가?

A1. 상주성=계속해서 자기 자신인 성질(J씨). 왔다리갔다리 안 한다(K씨). ➔ 그런데도 어떤 변화를 받아들일 수는 있다.

A2. 상주성=운명적으로 삶(H2씨). 결국은 자기다운 것만을 선택해 그런 순간만이 도래할 것이다.**Q. 현존재의 상주성이 순간적으로 보존된다는 것은 어떤 사태를 의미하는가?

A1. 순간을 ‘통하여’? 순간 속에 전체가 깃드는 그림.

A2. 특정산 순간에 선택에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존재는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 순간적 변화도 자기다움에 입각해서 이루어졌을 테니까.

 “그에 반해 비본래적 역사성 속에서는 운명의 근원적인 펼쳐져-있음[Erstrecktheit]이 은폐되어있다.”(391) 세인-자기로서의 현존재는 지나간 것은 이미 잊은 채 새로운 것을 기대하며 그의 ‘오늘’[만]을 현재화한다. 그는 기재를 진정으로 반복하기보다 ‘현재’[“의 세간적 해석”]에 입각해 ‘과거’를 이해한다(⟪강독⟫, 485).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유물을 짊어지고 ‘현대적인 것’을 쫓는다.”(⟪강독⟫, 486) 반면 본래적 역사성의 시간성은 “선구하면서-반복하는 순간으로서 오늘의 탈현재화이자 세인의 통속적 습관으로부터의 벗어나기”이다(391). “본래적 역사성은 역사를 가능한 것의 ‘회귀’[Wiederkehr]로서 이해하며” 이러한 가능성의 회귀가 “실존이 운명적으로-순간적으로 그 가능성을 위하여 결의된 반복 속에 개방되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391-392).

 이제 이어질 작업은 “현존재의 역사성으로부터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의 존재론적 발생”을 그려보이는 것이다(392).

 

§76. 현존재의 역사성으로부터의 역사학의 실존론적 근원

역사학의 실존론적 근원은 현존재의 역사성이다!

역사학은 자신의 탐구대상으로서 역사적 존재자를 전제해야 한다. “Das[역사학과 현존재의 생기 사이의 관계] möchte man zunächst durch den Hinweis darauf verdeutlichen, daß die Historie als Wissenschaft von der Geschichte des Daseins das ursprünglich geschichtlich Seiende zur »Voraussetzung« haben muß als ihr mögliches »Objekt«.”(392)

역사학은 존재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현존재의 역사성에 근거한다. “[…] sondern die historische Erschließung von Geschichte ist an ihr selbst, mag sie faktisch vollzogen werden oder nicht, ihrer ontologischen Struktur nach in der Geschichtlichkeit des Daseins verwurzelt.”(392)

사실적으로 역사학이 어떻게 성립하고 있는가는 역사학의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정체에 대해 알려주는 바가 없다. “Denn was verbürgt, grundsätzlich gesehen, daß dieses faktische Verfahren in der Tat Historie ihren ursprünglichen und eigentlichen Möglichkeiten nach repräsentiert?”(393)

역사학의 과제는 역사적 존재자의 개시이다. 학문은 선학문적 이해에 기반한 주제화의 방식에 따라 탐구할 존재자의 영역을 규정한다(주제화=사태영역 획정=학문적 기투(H2씨)). “In der Idee der Historie als Wissenschaft liegt, daß sie die Erschließung des geschichtlich Seienden als eigene Aufgabe ergriffen hat. Jede Wissenschaft konstituiert sich primär durch die Thematisierung. Was im Dasein als erschlossenem In-der-Welt-sein vorwissenschaftlich bekannt ist, wird auf sein spezifisches Sein entworfen. Mit diesem Entwurf begrenzt sich die Region des Seienden.”(393)

현존재에게 과거가 이미 개시되어있어야 역사에 대한 주제화가 가능하다. (과거가 어떻게 이미 개시되어있을 수 있는가는 전혀 사소하거나 당연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현존재에게 과거가 이미 개시되어있을 수 있는 것은 현존재가 기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H2씨). “[…] dann ist die historische Thematisierung der Geschichte nur möglich, wenn überhaupt je schon »Vergangenheit« erschlossen ist.”(393)

역사학의 탐구주제=기재했던 현존재의 (가능)존재 “Und weil das Dasein und nur es ursprünglich geschichtlich ist, muß das, was die historische Thematisierung als möglichen Gegenstand der Forschung vorgibt, die Seinsart von dagewesenem Dasein haben.”(393) ➔ 역사적인 현존재인 기재했던 현존재 역시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에 기재했던 세계 및 자신만의 방역을 가지는 세계내부적 존재자(세계역사적인 )를 가진다. 이 세계역사적인 것이 곧 역사학적 자료를 구성한다(H2씨).

유물의 획득 등은 역사학자의 실존의 역사성을 전제한다. 역사학자 자신이 역사적이라는 것이 역사학을 정초한다. “Die schon entworfene Welt bestimmt sich auf dem Wege der Interpretation des weltgeschichtlichen, »erhaltenen« Materials[e.g. 유물]. Die Beschaffung[acquisition], Sichtung und Sicherung des Materials bringt nicht erst den Rückgang zur »Vergangenheit« in Gang, sondern setzt das geschichtliche Sein zum dagewesenen Dasein, das heißt die Geschichtlichkeit der Existenz des Historikers schon voraus. Diese fundiert existenzial die Historie als Wissenschaft bis in die unscheinbarsten, »handwerklichen« Veranstaltungen.”(394) ➔ cf. 역사학은 역사학자의 결단에서 비롯한다(H2씨).

반복을 통한 기재했던 것의 개시가 역사학의 주제를 획정한다. “Die Umgrenzung des ursprünglichen Themas der Historie wird sich in Anmessung an die eigentliche Geschichtlichkeit und die ihr zugehörige Erschließung des Dagewesenen, die Wiederholung, vollziehen müssen. Diese versteht dagewesenes Dasein in seiner gewesenen eigentlichen Möglichkeit.”(394) ➔ 역사학의 대상은 기재했던 현존재에 그치지 않는다. 반복되어야 할 과거의 유산이란 실존적 가능성이다. 그 실존적 가능성=현사실적 가능성이 역사학의 진정한 탐구대상이다. 역사학은 가능적인 것을 주제로 삼는다(H2씨). 

역사학의 진정한 주제는 특정한 일회적 사건도, 일반적 법칙도 아닌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면서 기재한 가능성’이다. “Die Frage, ob die Historie nur die Reihung[series] der einmaligen, »individuellen« Begebenheiten oder auch »Gesetze« zum Gegenstand habe, ist in der Wurzel schon verfehlt. Weder das nur einmalig Geschehene noch ein darüber schwebendes Allgemeines ist ihr Thema, sondern die faktisch existent gewesene Möglichkeit.”(395)

본래적 역사성의 현사실적 실존 가능성에 대한 개시기능 “Nur faktische eigentliche Geschichtlichkeit vermag als entschlossenes Schicksal die dagewesene Geschichte so zu erschließen, daß in der Wiederholung die »Kraft« des Möglichen in die faktische Existenz hereinschlägt, das heißt in deren Zukünftigkeit auf sie zukommt.”(395)

역사학적 개시 역시 미래[다가옴]로부터 시간화된다. “Die »Auswahl« dessen, was für die Historie möglicher Gegenstand werden soll, ist schon getroffen, in der faktischen, existenziellen Wahl der Geschichtlichkeit des Daseins, in dem allererst die Historie entspringt und einzig ist.”(395) ➔ 역사학적 개시도 실존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어떤 결단이기 때문에, 결단한 현존재가 그것을 자신에게 도래하도록 하는 가능성이기 때문에 도래로부터 시간화된다(H2씨).

학문의 객관성은 탐구되는 존재자를 근원적이고 은폐되지 않게 드러내는 데서 온다. “Die in der schicksalhaften Wiederholung gründende historische Erschließung der »Vergangenheit« ist so wenig »subjektiv«, daß sie allein die »Objektivität« der Historie gewährleistet. Denn die Objektivität einer Wissenschaft regelt sich primär daraus, ob sie das ihr zugehörige thematische Seiende in der Ursprünglichkeit seines Seins dem Verstehen unverdeckt entgegenbringen kann.”(395)

‘역사학의 중심 주제가 기재했던 실존의 가능성이기 때문에만 그리고 이러한 것이 현사실적으로 언제나 세계역사적인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에만 역사학은 ‘사실’에 대한 끊임없는 지향을 스스로에게 요구할 수 있다’ “Nur weil das zentrale Thema der Historie je die Möglichkeit der dagewesenen Existenz ist und diese faktisch immer weltgeschichtlich existiert, kann sie von sich die unerbittliche Orientierung an den »Tatsachen« fordern.”(395)

Q. “Und andererseits kann die Existenz eines Historikers, der »nur« Quellen ediert, durch eine eigentliche Geschichtlichkeit bestimmt sein.”(396)을 이해하지 못했다.

A. 사료를 조사한다고 해서 비본래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실존적 가능성이라는 근원적 사태와 관계 맺고 있느냐 여부이다(H2씨).

Q. “Am Ende ist das Aufkommen eines Problems des »Historismus« das deutlichste Anzeichen dafür, daß die Historie das Dasein seiner eigentlichen Geschichtlichkeit zu entfremden trachtet.”(396)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역사주의가 문제인가?

A. 역사주의는 모든 것이 역사적인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역사적 상대주의가 옳다는 논의이다. 하이데거는 역사학이 (사태를 얼마나 탈은폐시키느냐에 따라) 객관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상대주의에 반대한다(H2씨).

그렇다면 본래적인 역사학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H2씨) ➔ 역사성에 대한 니체의 규정과 하이데거의 시간성 “Entschlossen auf sich zurückkommend, ist es wiederholend offen für die »monumentalen« Möglichkeiten menschlicher Existenz. Die solcher Geschichtlichkeit entspringende Historie ist »monumentalisch«. Das Dasein ist als gewesendes seiner Geworfenheit überantwortet. In der wiederholenden Aneignung des Möglichen liegt zugleich vorgezeichnet die Möglichkeit der verehrenden Bewahrung der dagewesenen Existenz, an der die ergriffene[taken up] Möglichkeit offenbar geworden. Als monumentalische ist die eigentliche Historie deshalb »antiquarisch«. […] Sofern dieses aber aus dem zukünftig-wiederholenden Verstehen einer ergriffenen Existenzmöglichkeit ausgelegt ist, wird die eigentliche Historie zur Entgegenwärtigung des Heute, das ist zum leidenden Sichlösen[detaching itself] von der verfallenden Öffentlichkeit des Heute. Die monumentalisch-antiquarische Historie ist als eigentliche notwendig Kritik der »Gegenwart«.”(396-397) ➔ 기념비적 역사학(도래/장래: 기념비적인 가능성을 현존재 자신에게 도래케 하는 역사학)/골동품적 역사학(기재: 과거의 것을 보존하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 역사학)/비판적 역사학(현재). 이때, 기념비적 역사학은 골동품적 역사학이다. 그렇게 통일된 본래적 역사학은 순간으로서 현재를 있는 그대로 열어밝히고, 그에 따라 세간적 오늘에 대한 비판이 될 수밖에 없다(H2씨).

기재했던 것이 반복적으로 개시되는 해석학적 상황의 마련 “Die historische Thematisierung hat ihr Hauptstück in der Ausbildung der hermeneutischen Situation, die sich mit dem Entschluß des geschichtlich existierenden Daseins zur wiederholenden Erschließung des dagewesenen öffnet. Aus der eigentlichen Erschlossenheit (»Wahrheit«) der geschichtlichen Existenz ist die Möglichkeit und die Struktur der historischen Wahrheit zu exponieren[to be set forth].”(397)

 

§77. 역사성의 문제에 대한 앞선 해설과 딜타이의 연구 요르크 백작의 이념 사이의 연관 ★⟪강독⟫ 참고

 

6 시간성과 통속적 시간개념의 근원으로서의 내부시간성

§78 현존재에 대한 앞선 시간적 분석의 불완전성

 현존재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에 따르면 역사는 ‘시간 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경과이며 시간성은 (시간성에 대한 실존론적 이해 없이) 시간의 계산과 관련지어 이해된다. 그에 따라 현존재는 시간을 취한다[시간이 걸린다]고 말할 수도, 시간을 잃어버릴[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 이때 “존재자가 ‘시간 속에’ 있다”는 말, 그리고 세계시간의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404) 시간성에 대한 기존의 분석은 이에 대답을 줄 수 없다. 

cf. “시간성이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또한 시간성이 현존재의 존재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밝히기 위해 앞장에서 수행된 것은, 실존의 존재구조로서의 역사성은 근본적으로는 시간성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시간적 성격을 해석할 때 모든 생기는 ‘시간 내부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 그러나 역사와 자연에 관한 학문들에 시간요인이 나타난다는 사정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현존재가 모든 학문적 연구 이전에 이미 시간에 맞추어 살고 있다는 현실이다. […] 세계의 유의의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시간 […] 세계시간 […] 이 시계와 같은 것의 사용에 선행하면서 그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강독⟫, 503-504)

 “일상적인 […] 현존재는 시간을 우선 내부시간적으로 만나지는 손안의-것과 눈앞의-것에서 발견한다. 현존재는 그렇게 ‘경험된’ 시간을 가까운[친숙한] 존재이해의 지평에서, 즉 어떤 방식으로 눈앞에-있는-으로서 이해한다. […] [파생적인 것으로서] 통속적 시간 개념은 근원적 시간의 평면화[수평화]에서 유래를 가진다.”(405, 강조는 필자)

cf. “이상에서 하이데거는 시간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 하나는 근원적 시간으로서 현존재의 존재의미인 시간성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통속적 내지 파생적인 시간으로서 ‘지금이라는 시점들의 연속’으로서의 시간을 가리킨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계시간으로서 세계의 유의의성에 입각하여 해석된 시간이다. 세계시간은 ‘지금은 일할 시간’이라는 예에서 보이는 생활세계의 의미와 결부되어 있는 시간이다. 이에 반해서 통속적 시간은 그러한 생활세계적인 의미가 배제된 시간이다.”(⟪강독⟫, 505) ➔ 1에서 2가 나오고, 2에서 3이 나온다.

 통속적인 시간 이해 하에서 시간은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를 오간다(Schwanken). 그것은 ‘영혼’에 귀속되는 동시에 (영혼과 구분되어) 의식적 성격을 가진 (또 다른) 객체로 이해된다. 헤겔에게서 시간이 주관적일 가능성과 객관적일 가능성은 모두 지양을 맞는다. 헤은 ‘시간’과 ‘정신’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면서 역사로서의 정신이 어째서 시간 안에 존재하는지 알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앞선 시간분석은 헤겔과 그 결론이 맞아떨어지지만, 헤겔(의 것)과는 대립되는 기초존재론적 의도를 통해 구분된다.

“Die Frage, ob und wie der Zeit ein »Sein« zukommt, warum und in welchem Sinne wir sie »seiend« nennen, kann erst beantwortet werden, wenn gezeigt ist, inwiefern die Zeitlichkeit selbst im Ganzen ihrer Zeitigung so etwas wie Seinsverständnis und Ansprechen von Seiendem möglich macht.”(406)

 

§79 현존재의 시간성과 시간에 대한 고려

 일상적 현존재를 지배하는 평균적 해석은 “말 속에 분절되어있으며 언어 속에 표현되어[ausgesprochen] 있다.”(406)* 언어는 시간에 대한 일상적 현존재의 이해 역시 표현해주는데, 현존재는 ‘저때쯤[dann, 그때는]’(기대되는 것), ‘~하기 전에[zuvor, 그전에]’, ‘지금’(현전화하며 자리하는 곳)**, ‘당시’(보유되는 것), ‘즉시’, ‘막’ 등의 말을 사용해 자신이 그에 빠져있는 고려된 존재자와의 관계를 규정한다. 이때 ‘저때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그 지평은 이후)를, ‘당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망각된 과거(그 지평은 이전)를 뜻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특유한 지위를 누리는 ‘지금’(오늘)이 있다. ‘저때쯤’, ‘당시’, ‘지금’은 때를-정할--있음[시점기록가능성](Datierbarkeit)’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울러 그[고려하며 빠져있는 현존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하면서 세상 사람의 평균적 해석에 따라서 살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말로 분절되고 언어로 언표된다. 세계-내-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신을’ 언표한다.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들에 몰입해 있는 존재로서의 현존재는 고려되는 것 자체를 언표하고 그것에 대해서 논의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언표한다.”(⟪강독⟫, 507)

**“고려는 ‘그때’라는 말로 예기하면서 ‘그 당시’라는 말로는 보유하고 그리고 ‘지금’이라는 말로는 현전화하면서 자기를 표명한다.”(⟪강독⟫, 508)

***“이렇게 ‘지금’, ‘그 당시’ 및 ‘그때’가 ‘무엇을 해야 할 때’로서 정해지는 것”(⟪강독⟫, 508)

 때를-정할-수-있음이 그에 본질적으로 귀속되는 것, 때를-정할-수-있음이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잉여적이다. 대답은 당연히 ‘시간’(=세계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말들이 어떻게 시간을 가리킬 수 있으며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나아가 현존재는 자신이 고려하는 존재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과거나 현재, 미래 중 하나를 지시한다. 이는 어째서 그러한가? “왜냐하면 ~에 대한 해석하는 말걺[Ansprechen]은 [현존재]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 즉 둘러보면서 이해하는[,] 손안의-존재자의 곁에 있음[—]손안의-존재자를 발견하면서 만나게 하는[—] 표현하기 때문이고, 이러한 것이[표현이] 해석하는 말걺 및 말함과 함께 스스로를 하나의 현전화 속에서 근거 지우고 오직 이러한 것[현전화]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407-408)*

*Q. 국역/의미를 알고 싶다.

A. 고려의 시간성: 기대하고 보유하는 현전화. “……에 대해서 말함이 자신을 함께 밖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손안의 것을 발견하며 만나게 해주는, 손안의 것 곁에 둘러보며 이해하며 존재함을 함께 밖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고, 자신을 함께 해석하는 이러한 말함과 이야기함이 현재화함에 근거하고 있고 오직 이 현재화함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이기상 역, 530-531)

A2. “다시 말해서 현존재는 도구적 존재자에 대해 말하면서 그러한 도구적 존재자를 사용하는 자기 자신을 함께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함께 해석하고 언급하는 것은 현전화에 근거하며, 그러한 현전화로서만 가능하다.”(⟪강독⟫, 509-510)

 “기대하면서-보유하는 현전화는 스스로를 [세계의 유의의성을 고려했을 때 ‘~을 할 때’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금 그것[기대하면서-보유하는 현전화]이 […] 자기 자신을 위해 언제나 이미 개시되어있으며 이해하면서-말하는 해석 속에서 분절되어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시간성이 현[여기, 개시성]의 밝혀져-있음을 탈자적으로-지평적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적으로 현 속에 언제나 이미 해석 가능하고 그로써 알려져있다. 스스로를 해석하는 현전화, 즉 ‘지금’ 속에서 표현된 해석된 것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부른다.”(408)

*현전화가 자기 자신을 바깥으로 내놓는다=[세계]시간이 (현존재의 말을 통해서) 시간화된다=현존재의 언어를 통해서 전달 가능한 형태로 분절된다(H2씨). / “그것[‘예기하면서-보유하는 현전화’]은 지금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때라는 식으로 자신을 해석하는 것이다.”(⟪강독⟫, 510)

**근원적인 시간이 아닌 고려의 시간, 고려되고 계산되는 시간, 손안에-있는 시간, 세계시간 ➔ 말로 드러난다=해석된다(=이미 이해되어있다)(H2씨).

• 근원적인 시간진술(Zeitangabe)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은 ‘때를 정할 수 있음’과 함께 비주제적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자체로 분명하게 자각되지 않은 채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에서 현존재는 그 자신에게 이미 세계-내-존재로서 개시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발견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석된 시간도 현존재의 개시성 속에서 발견되는 존재자에 입각해서 그때마다 ‘때를 정할 수 있음’이라는 성격을 갖게 된다.”(⟪강독⟫, 511)

• ② 폭(Spannweite)을 가짐 “즉 [그때까지가 가리키는] ‘그동안’만 폭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때, 저 때는 모두 ‘때를 정할 수 있음’이라는 구조와 함께 그때마다 변화하는 ‘폭’을 지니고 있다. ‘지금’은 예를 들어 휴식 중이거나 식사 중의 ‘지금’이며, ‘그때’는 아침식사를 하는 중이거나 산에 올라가고 있는 중의 ‘그때’이다. 예기하면서-보유하고-현전화하는 고려는 이러저러하게 ‘시간을 자기에게 허용하면서(lassen sich Zeit)’ 존재자들이나 일들을 고려하고 시간을 자신에게 진술하지만, 이는 시간을 특별히 계산하면서 규정하는 것 이전에 행해진다.”(⟪강독⟫, 512)

• ③ 공공적 성격 “따라서 일상적 고려는 고려되는 <세계>에 입각하여 자신을 이해하는 한, 자신에게 허용하는 시간을 자신의 <시간>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적으로 이용하고 계산하는 시간으로 이해한다.”(⟪강독⟫, 513)

• 비본래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에게 시간이 없고, 본래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에게 시간이 있는 이유 “순간이 기재적 장래 속에 붙잡혀 있다는 것은, 현존재가 지금 수행하는 일을 자신이 구현해야 할 본래적인 현사실적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현존재는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자신의 삶에게 통일적인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는 현사실적인 실존 가능성에 따라서 살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삶의 전체성과 통일성을 구현하고 있으며 온전히 자신으로 살고 있다.”(⟪강독⟫, 514)

 

§80 고려된 시간과 시간내부성(Innerzeitigkeit)

 시간에 대한 고려는 천문학적이고 달력에 입각한 시간계산(Zeitrechnung)을 지평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시간계산 역시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염려로서의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에 속한다. 즉, 현존재는 세계에 내던져진 채 퇴락해있기 때문에 시간을 시간계산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이다. 시간계산 속에서 시간의본래적인공공화가 발생한다. “현존재의 피투성이 시간이 공적으로 ‘주어지는’ 이유이다.”(412) 시간의 공공화는 사후적으로 또는 때때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개시하고 실존하는 존재자인 한 언제나 이미 일어나있는 현상이다.**

*시간계산은 시간의 양화가 아니라 시간을 계산하는 현존재의 시간성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시간고려는 시간계산 없이도 가능하지만(e.g. ‘지금은 밥 먹을 때다’),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계산된 시간의 지평 안에서 고려한다. 시간계산은 고려된 시간이 공공화의 요구를 받음에 따라 발생한다. 예를 들어 혼자서 밥을 먹을 때는 그것이 몇 시일지를 규정할 필요가 없지만, 누군가와 저녁약속을 해야 한다면 몇 시에 만날지를 규정해야 한다. 그리고 현존재는 이미 공동존재이다. 고려된 시간의 (암묵적) 공공성은 시간계산을 통해 강화/명시적이 된다. 이때, 시간계산은 시간척도(Zeitmaß)를 필요로 한다. 시간척도에 따라서 시간계산은 시간측정(Zeitmessung)이 된다. 첫 번째 시간척도는 태양, 두 번째는 농부시계, 세 번째는 인공시계이다. 시계사용(Uhrgebrauch)은 시간의 공공화를 완성한다(H2씨).

 공적인 시간은 손안의 그리고 눈앞의-존재자들이 안에서 만나지는 그런 시간이다. 그 결과 해당 존재자들은 시간내부적이라고 불린다. 나아가 현존재는 [해당 존재자들이] 자신의 궁극목적이 되는 존재가능성과 관련하여 어떤 용도가 있는지를 ‘계산’하기를 예기한다.* 이때, “일상적인 둘러보는 세계내존재는 가시성[Sichmöglichkeit]을, 즉 밝음[Helle]을 요구한다. 눈앞의-존재자 내부의 손안의-존재자와 고려하면서 교섭할 수 있기 위해서 그렇다.”(412, 강조는 하이데거) 그리고 세계와 함께 현존재에게는 자연 및 그에 따르는 낮밤의 변화 역시 개시된다. 낮이 현존재가 필요로 하는 빛을 마련해주고, 밤은 빛을 탈취한다.

*Q. 어째서 그냥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하기를 예기하는가?

A. 예기는 비본래적 시간화에서 언제나 동반된다.

 그리하여 낮에 종사하는 일로써 스스로를 이해하는 현존재는 ‘낮이 된 그때’에 스스로에게 시간을 부여한다. 고려된 ‘그때’는 바로 빛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기능하는, 가장 가까운 존재자인 태양이 뜨는 시점이다. “태양이 뜨는 그때가 …을 할 시간이다. […] 태양이 고려 속에서 해석된 시간의 때를-정해준다. 이러한 때를-정함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시간기준인 날[der Tag]이 자라난다.”(412-413) 그리고 현존재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날들은 태양의 규칙적인 움직임 의거해 세어지고 분할된다, 계산된다

 태양의 빛과 자리는 모두에게 공통적이며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시간에 대한 진술은 상호적으로 조화롭게 수행된다. (물론) 이러한 공적인 때를-정함은 시간을 [messen] 있는 도구인 시계를 요구한다. (그리고 태양이 그 시계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손안의-존재자인 시계 곁에 있는 내던져진 존재(인 현존재)는 시간성에 근거하므로, 시간성이 시계가 발견될 있는 근거이자 가능조건이다. “왜냐하면 오직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발견과 함께 만나지는 태양의-경과에 대한 예기하면서-보유하는 현전화만이 스스로를 해석하는 것으로서 공적으로 주변세계적인 손안의-존재자로부터의 때를-정할--있음을 가능하게 하고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다.”(413) 자연적 시계인 태양을 대신하는 인공적 시계 역시 태양의 경과를 반영해야 한다.

“Darin liegt: mit der Zeitlichkeit des geworfenen, der »Welt« überlassenen, sich zeitgebenden Daseins ist auch schon so etwas wie »Uhr« entdeckt, das heißt ein Zuhandenes, das in seiner regelmäßigen Wiederkehr im gewärtigenden Gegenwärtigen zugänglich geworden ist.”(413)

cf. “In other words, the most elemental and primitive time referents, the rising and the setting of the sun, are conceived as part of one's circumspective concern. The way in which I make use of the universe as equipment is the background from which time determinants, such as sunrise and sun­ set, take their meaning. By extension, modern man, though he no longer relies on the rising and the setting of the sun as his chief elements of time, nevertheless still understands his time determinants in terms of his circumspective concern. Five o'clock means getting off work; eight o'clock means meeting one's girl friend at the corner; etc.”(Gelven 1989: 217)

 그런데 그와 같은 시간-재기[시간측정]에서 측정되는, 시간-재기를 통해 공공화되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고려함에서 해석된 시간은 언제나 이미 [궁극목적/유의의성과 관련하여] … 시간[또는 하기에 좋지 않은 시간]으로서 이해되어있다. 그때그때마다의 ‘지금은 여기서 이거와 저거’는 그 자체로 언제나 […을 하기에] 적합한 것(geeignet)이거나 부적합한 것이다. […] 그리하여 우리는 시간의 시간화에서 공공화되는 시간을 세계시간이라고 부른다.”(414) 즉, 현존재가 고려하면서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시간은 비주제적일지라도 ‘세계시간’으로 이해된다. 세계시간은 “무언가를 할 때로서 정해져있고[datierbar], 폭을 가지며[gespannt], 공적이고 그렇게 구조화된 것으로서 세계 자체에 속한다.”(414)

 고려된 시간의 공공화는 자연적 시계(=태양)의 개시에서 이미 시작되어 시계 사용이 완전해지고 개선됨에 따라 강화된다. 중요한 것은 시계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아니라, 그것 실존론적-존재론적 의미이다: “현존재의 시간성의 시간화의 어떤 양태가 시간계산과 시계사용의 발달방향[Ausbildungsrichtung]에서 명백해지는가?”(415)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파고들어져야 하는 것은 바로 시간계산 및 고려된 시간의 명시적인 공공화가 현존재의 특정한 시간화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원시적’ 현존재와 ‘진보한’ 현존재를 비교하면, 후자에게 낮밤의 여부와 태양빛의 현존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는 밤을 낮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이제 [인공]시계로부터 읽히며, 시계에서 몇 시인지가 곧 시간이 몇 시인지를 가리키게 된다. 그럼에도 시계의 사용 역시 현존재의 시간성에 근거하는데, [인공]시계 역시 태양의 움직임에 의해 규제되기 때문이다. 원시적 현존재 역시 그림자를 사용하는 한 하늘을 직접 관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태양이나 그림자 속에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그렇다면 시간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416). 시계를 본다는 것은 “스스로-[…을 할]시간을-취함”에 근거한다(416). 그러나 이렇게 시간을 취할 때 현존재는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지금에 대해 말한다[Jetzt-sagen].* 지금은 언제나 이미 이해되고 (…을 할 지금으로서) 해석되어있다. “시계사용에서 수행되는 때를-정함은 눈앞의-존재자의 탁월한 현전화로 밝혀진다.”(416)** 시계로써 공공화된 시간에 입각해 [시계바늘을 읽는] 현존재는 지금의 연속, “눈앞에-있는 지금다양체”를 만난다(417).

*지금을 ‘~할 시간’의 구조로 말하는 것(H2씨)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이 ‘~할 시간’으로 더 이상 이해되지 않고,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정보만이 이해되면서 시계바늘이 탁월하게—두드러지게—눈앞의-것으로서 현재화된다. 이렇게 시계바늘이 손안의-것이 아닌 눈앞의-것이 됨으로써 고려된 시간의 차원에서 통속적 시간이해의 차원에로 이행한다(H2씨).

 “Das Messen konstituiert sich zeitlich im Gegenwärtigen des anwesenden Maßstabes in der anwesenden Strecke. Die in der Idee des Maßstabes liegende Unveränderung besagt, daß er[Maßstab] jederzeit für jedermann in seiner Beständigkeit vorhanden sein muß. Messende Datierung der besorgten Zeit legt diese im gegenwärtigenden Hinblick auf Vorhandenes aus, das als Maßstab und als Gemessenes nur in einem ausgezeichneten Gegenwärtigen zugänglich wird.”(416-417)

cf. “Here the fallenness of man asserts itself, and the ensuing interpretation of time is to use that which measures as the key to understanding it. However, that which measures is present­ at-hand, and its ability to measure is due to its ability to be broken down into parts. […] Such an interpretation of time, based upon that which measures, inevi­tably leads to the view that time is made up of a series of now-moments. […] Time does not lie at the basis of a measuring de­ vice; rather, a measuring device lies at the basis of public time. It is when I shift from the significance of 8:00 (I will meet my friend at the restau­rant) to the substantial existence of 8:00 (there is actually a moment that bears the title 8:00, followed by another moment called 8:01) that the essential inauthenticity of self-understanding enters into the picture.”(Gelven 1989: 217) 

 세계내존재의 시간성이 공간의 개시를 가능케 하듯이 세계시간 역시 현존재의 특정한 장소와 결부되어있다. “시간이 하나의 장소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이 때를-정함이 공간장소적인 것에, 이 공간장소적인 것이 모두를 위한 기준으로 구속력이 있도록 결부되는 것의 가능조건이다.”(417)* 나아가 시계 사용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역사적이며 모든 시계는 저만의 역사를 가진다.**

*Q. 이 말의 의미를 모르겠다.

A. 고려가 등근원적으로 세계시간과 현존재의 실존론적 공간성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때 고려는 근원적 시간성에 의해 가능하다(H2씨).

★Q. 오히려 세계시간이 고려를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닌가? 세계시간이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가능케 하므로. 

A. 세계시간이 ‘고려된’ 시간이라면 고려가 앞서야 하지 않는가?(H2씨) ➔ 그 경우, <시간이 존재의 가능근거>라는 전체 도식이 무너지지 않는가?

**Q. 이 말의 의미도 모르겠다.

A. 태양에서 농부시계를 거쳐 인공시계가 되었다.

 공간적 사물(e.g. 시계바늘) 및 그것의 움직임, 길이 등등을 통해 시간이 측정된다고 해서 시간이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존재론적으로 결정적인 것은 측정을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현전화에 놓여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필연적으로 지금을-말하는 시간측정에서 […] 측정된 것 자체[시간?]는 은폐되어 길이[Strecke]와 숫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찾아지지 않는다.”(418) 한편 현존재에게 고려된 시간이 소중해지면 질수록 시계의 사용은 보다 편리해진다.

“Die Zeitmessung vollzieht eine ausgeprägte Veröffentlichung der Zeit, so daß auf diesem Wege erst das bekannt wird, was wir gemeinhin »die Zeit« nennen. Im Besorgen wird jedem Ding »seine Zeit« zugesprochen. […] Diese[Weltzeit] hat auf dem Grunde der ekstatisch-horizontalen Verfassung der Zeitlichkeit, der sie zugehört, dieselbe Transzendenz wie die Welt. Mit der Erschlossenheit von Welt ist Weltzeit veröffentlicht, so daß jedes zeitlich besorgende Sein bei innerweltlichem Seienden dieses als »in der Zeit« begegnendes umsichtig versteht.”(419)

Cf. “Public time belongs in the world; and this means that the significance of the world is to some extent determined by nows, agos, and thens. If this is true, however, then the ontological ground of public time is not some metaphysical characteristic, but Dasein's temporality, since Dasein alone has Being-in-the-world.”(Gelven 1989: 218)

 만일 ‘객관적’이라는 말이 세계내부적으로 만나지는 존재자들의 즉자적으로-눈앞에-있음을 의미한다면 시간은 객관적이지 않다. 또 ‘주관적’이라는 말이 ‘주체’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면 시간은 주관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세계시간은 모든 가능한 객체보다 ‘객관적인데’, 왜냐하면 세계시간은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가능조건*으로서 세계의 개시성과 함께 언제나 이미 탈자적으로-지평적으로 ‘외사’되어있기** 때문이다.”(419) 칸트의 견해와 달리 세계시간은 (심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것(e.g. 태양)으로부터도 무매개적으로 발견된다. 나아가 “세계시간은 그러나 또한 모든 가능한 주체보다도 ‘주관적인데’, 왜냐하면 세계시간은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는 것 자체의 존재로서의 염려의 잘 이해된 의미 속에서 이러한 존재를 비로소 함께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419)*** 시간은 ‘주체’ 속에도, ‘객체’ 속에도 없고, ‘안’에도, ‘밖’에도 없으며 모든 주객의 이전에 ‘존재’하[지도 않는]데, 그것이 이 ‘이전’의 가능근거이기 때문이다.

*Q. 어째서 그러한가? 세계시간 속에서만 세계내부적 존재자가 발견되어서인가? 

A. 현존재는 세계시간 내부에서만 세계내부적 존재자들을 만나게 된다. 모든 손안의- 그리고 눈앞의-존재자들은 시간내부적인 존재자들로 성격규정된다.

**Q. “Objicieren”의 뜻도 모르겠다. 

***★Q. 어째서 세계시간이 염려를 가능케 하는가? 근원적 시간성이 아니라(H2씨).

A. 이때의 염려가 현사실적으로—퇴락에 입각해—이루어진다면 이상하지 않다. 말하자면 퇴락의 시간성이 퇴락한 염려(일상에서의 염려)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K씨). ➔ 그 경우 근원적 시간성과 세계시간이 어떻게 구분되는가?(T씨, H2씨) ➔ 본래적 시숙/비본래적 시숙으로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

cf. “Public time, then, is neither subjective nor objective. It is not subjec­tive, because it is not a characteristic of the subject, but rather a mode or way in which the subject is in the world. It is not objective, because it is not the characteristic of that which is known, since it comes before knowing (in this sense, Kant is right). On the other hand, it cannot come before subjectivity or objectivity, since "to be before" presupposes time.”(Gelven 1989: 218)*

*세계시간은 자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주관적이지 않고, 세계내부적 객체가 아니기 때문에 객관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시간은 현존재의 존재양식에서 비롯하므로 주관적이고, 모든 객체들의 가능근거이기 때문에 객관적이다. 그런데 일상적 현존재는 퇴락하여 근원-파생관계를 거슬러 역으로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시간내부성으로부터 시간을 탐구하고자 하며, 이때 발견되는 것이 통속적 시간이다(H2씨).

 “그렇다면 시간은 ‘존재’를 가지는가?”(419) 중요한 것은 탈자적-지평적인 현존재의 시간성이 세계시간, 손안의- 그리고 눈앞의-존재자의 시간내부성을 구성하는 세계시간을 시간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시간적’이라고 말해질 수 없다.

 

§81. 시간내부성과 통속적 시간개념의 발생(Genesis)

 [세계]시간은 시계의 사용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났으며, 시계사용의 실존론적-시간적 의미는 “움직이는 시계바늘[Zeiger]의 현전화”였다(420). 이때 [시계바늘의 움직임을 따라] 숫자를 세는 현전화는 예기하는 보유함[예상하는 간직함]과 통일체를 이루면서 성립한다. 즉 더 이상 지금이 아닌 ‘이전’과 ‘이후’의 지평이 지금을-말함에서 개방된다. 그리하여 시계사용에서 개시되는 [세계]시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그것[세계시간]은 움직이는 시계바늘에 대한 현전화하는, 세는[zählend] 추적 속에서 보여지는 세어진 으로, 현전화가 이전과 이후를 따라 지평적으로 열린 보유함 및 예기함과의 탈자적 통일체 속에서 현전화가 시간화되는 방식으로 그렇다.”(421)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시간의 정의—“이전과 이후의 지평 속에서 만나지는 운동 속에서 세어진 것”—와 같다(421).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시간의 근원을 문제삼지 않고 ‘자연적인’ 존재이해에 머물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해석은 이후의 시간 해석의 지평을 규정지어, 시간은 둘러봄 가운데서 고려된 시간, ‘세어진 것’, 시계바늘의 움직임에서 드러나는 시간으로서[만] 이해되고 말았다. 그렇게 움직여진 것[시계바늘]의 현전화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여기 지금, 여기 지금…’과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세어진 것이 [곧] 지금”이 되었다(421). “그리고 지금은 ‘모든 지금’에서 ‘곧-더-이상[-있지-않음]’과 ‘아직-지금이-아님’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계사용에서 ‘보아지는’ 세계시간을 [통속적 시간이해에서의 시간인] 지금-시간이라고 부른다.”(421)

cf. 세어진 것이 손안의-존재자이면 세계시간, 눈앞의-존재자이면 통속적 시간인 것 같다. 셈/측정/계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유의의성이 결부되느냐가 구분의 기준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양가적이 된다.

 고려가 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수록 시간보다는 해당 시간에 이루어지는 일에 현존재의 주의가 기울여진다. 그러나 오히려 그럴수록 현존재는 더욱 적극적으로 ‘지금, 그때, 당시에’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 통속적 시간이해에 대하여 시간은 지속적으로눈앞에-있는-’, 동시에 사라지고 다가오는 지금의 연속[Folge]으로서 보여진다. 시간은 하나의 뒤따라-일어남[Nacheinander]로, 지금의 ‘흐름’으로, ‘시간의 경과’로 이해된다.”(422)

*Q. 적극/소극이 명시/암묵 or 주제적/비주제적과 대응되는 것 같지 않은데, 어떤 의미일까?

A. 침묵이 가장 적극적인 말인 것처럼, 시간을 잊고 몰두할수록 오히려 시간을 잘 산다?

 세계시간의 본질에는 시간성의 탈자적 구조에 따라 때를-정할-수-있음이 속했다. 즉 ‘지금’은 언제나 ‘…을 하[기에 적합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지금’이었다. 그에 따라 이 지금의 구조에는 세계의 유의의성이 결부되어있었다. 그러나 통속적 이해에서 해석되는 지금-시간에서는 이와 같은 때를-정할--있음이나 유의의성이 결여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은폐된다. 그리하여 시간성의 탈자적-지평적 구조는 이러한 은폐를 통해 평면화된다[nivellieren]. 지금들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상호외재적으로 분할되어 서로를 뒤따르는 연속을 이룰 뿐이다.

 

 “통속적 시간이해가 수행하는 세계시간의 평면화하는 은폐는 우연한 것이 아니다. […] 고려하는 시간측정[시간-재기]에서 세어진 것, [곧] 지금은 손안의-존재자와 눈앞의-존재자의 고려에서 [그릇된 존재이해에 의거해] 잘못 이해된다. […] 지금은 […] 함께-눈앞에-있다: 즉, [현존재는] 존재자를 만나고 지금 또한 [같은 방식으로] 만난다.”(422-423) 그에 따라 지금은 눈앞의-존재의 존재이념에 의거해 ‘보아진다’. 지금은 사라지고, 다가오면서 과거와 미래를 이룬다. 지금의 자리는 동일한 것[Selbiges]으로 고정되어 현존하고[anwesen], 그 자리에 새로운 지금들이 들어선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시간을 영원성의 모상으로 본 것이다.

 “지금의-연속[Die Jetztfolge]은 끊기지 않고 빈틈이 없다.”(423) 지금의 ‘부분’으로 아무리 파고든다 해도 지금이라는 성격, 그 동일성은 [눈앞의-존재자답게] 유지된다. 시간을 동일자 또는 눈앞의-존재자로 보는 시각에서 비로소 지금들의 연속성의 문제*와 같은 아포리아가 생겨난다. ‘폭을 가진다’는 세계시간의 성격 역시 잊힌다. “시간의 폭을-가짐[Gespanntheit]은 시간고려 속에서 공공화된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체의 지평적 펼쳐져-있음[Erstrecktheit]으로부터 [더 이상] 이해되지 않는다.”(423)

*Q. 어떤 아포리아인가?

A. 시간이 폭이 사라졌을 때, 오히려 ‘지금’이 포착 불가능해진다는 아포리아. 포착하려는 순간 사라져버리고, 무한분할된다는 아포리아(H2씨). 점들이 연속되어 선이 형성되지만, 점 자신은 무한분할되는 문제. 연장을 갖지 않는 것으로부터 연장을 만들어내는 데서 생겨나는 문제(K씨).

cf. “If, however, I conceive of this time (which was originally con­ceived in order to account for datability) as made up of independent mo­ments that do not render an existentially adequate account of datability, then I have conceived of time in such a way as to undermine its very ontological beginning point. Significance must now be added on to temporal events rather than constituting their very nature. Time is treated as something present-at-hand rather than as a mode of the ready-at-hand within the mode of Being-in-the-world.”(Gelven 1989: 219)

 그러나 지금-시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시간이 무한해진다는[unendlich] 이다. 시간이 끊기지 않는 지금의 연속으로서 성립하고, 그 지금이 곧바로 흘러가버리는[, 그럼에도 지금의 자리가 동일한 즉자로서 유지되는] 시간관 하에서 시간의 끝과 시작점을 찾을 수는 없다.*

*“Jedes letzte Jetzt ist als Jetzt je immer schon ein Sofort-nicht-mehr, also Zeit im Sinne des Nicht-mehr-jetzt, der Vergangenheit; jedes erste Jetzt ist je ein Soeben-noch-nicht, mithin Zeit im Sinne des Noch- nicht-jetzt, der »Zukunft«.”(424)

 시간의 무한성을 낳는 이와 같은 평면화 역시 현존재의 염려에 근거 지워진다. 내던져진 채 퇴락한 현존재는 우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고려된 것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고, 선구하는 결의성에 해당하는 본래적 실존으로부터 도피하면서 죽음—세계-내-존재의 끝—을 외면한다[wegsehen]. 유한성에 대한 이러한 외면 역시 끝을 향한 존재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현존재의 비본래적 시간성을 잘 드러내준다. 현존재의 자기이해가 세인에 의해 주도된다는 사실도 공적 시간의 무한성을 확고하게 한다[verfestigen]. 각자성을 지니지 않고 죽음에 대해 오해하는 세인은 죽지 않고 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유한성을 직시하기는커녕,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계속되는[weitergehen] 시간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낚아채고자 한다. 그와 같은 현존재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시간관의 유래는 일상 가운데서 망각되어있다. 이제 시간은 모든 현존재에게 속하기에 그 어떤 현존재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현존재 없이도 계속된다.

cf. “To be sure, iauthentic existence does not make any overt claims to being infinite; as such, it would be exposed as false. Rather, it conceives of time in such a way that time has no meaning, and hence no end. […] As long as ordinary time is treated as if it were infinite, Dasein is forever kept from fully realizing its finitude, and hence its own self as able-not-to­ be. […] The perspective of the infinite is not available for man; any attempt to employ it destroys the true understanding of the self: the full meaning of one's death and one's essential finitude. […] Consistently with the entire argument, the whole view of au­thentic and inauthentic existence comes down to a proper or improper understanding of time. A misunderstanding of the finitude of time characterizes inauthenticity.”(Gelven 1989: 219)

 그런데 수수께끼와도 같은 것은, (통속적 시간이해에 따르면 두 말이 모두 똑같이 성립해야 하는데도) 우리가 시간이 사라진다고는 말하지만 시간이 발생한다[entstehen]고는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말 속에는 보다 근원적인 시간성*에 대한 암묵적 이해가 놓여있다. 사라져가는 시간을 주시하는 현존재는 붙잡히지 않는 시간을 붙잡고자 함으로써 금방 지나간 것은 곧바로 망각하고 미래(만)을 예기한다. 비본래적 실존의 비본래적 시간성이 곧 시간이 사라진다는 통속적 경험의 가능조건이다.

 “Das Dasein kennt die flüchtige Zeit aus dem »flüchtigen« Wissen um seinen Tod.”(425)

*세계시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Q. “In der betonten Rede vom Vergehen der Zeit liegt der öffentliche Widerschein der endlichen Zukünftigkeit der Zeitlichkeit des Daseins. Und weil der Tod sogar in der Rede vom Vergehen der Zeit verdeckt bleiben kann, zeigt sich die Zeit als ein Vergehen »an sich«.”(425)을 이해하지 못했다.

A. “And since even in the talk about time’s passing away death can remain covered over, time shows itself as a passing away “in itself”.”<영역 404> 시간의 사라짐을 경험하는 와중에도 죽음은 망각될 수 있고, 그 경우 시간은 현존재의 존재와 유리된다.

 가장 근원적인 시간성 역시 모든 평면화와 은폐를 뚫고 드러난다. “통속적 해석은 시간-흐름을 비가역적인[nichtumkehrbar] 서로를-뒤따름으로서 규정한다.”(426) 그런데 시간이 도대체 왜 거꾸로 흐를 수 없단 말인가? 시간의 비가역성은 공적인 시간의 유래가 유한성에 대한 이해 가운데서 끝을 향해 가는—끝을 향해 존재하는—근원적 시간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통속적 시간표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존재의 일상적 존재방식에 그리고 우선 지배적인 존재이해에 속한다. 그렇기에 또한 우선 그리고 대개 역사는 공적으로 시간내부적인 생기로 이해된다.”(426) 통속적 시간표상이 타당성을 잃는 것은 그것이 시간의 ‘참된’ 개념이 되고자 할 때 그리고 유일한 시간해석이 되고자 할 때이다. 

 현존재의 [근원적] 시간성에 대한 분석은 통속적 시간해석에로의 평면화와 그것이 은폐하는 바에 대해 접근하게 해주지만, 반대로 통속적 시간해석으로부터 출발하면 현존재의 [근원적] 시간성이 접근 불가능하다. 후자는 일차적으로 다가옴으로부터 시간화되지만, 전자는 현재를 근본현상으로 가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재로부터 ‘순간’을 해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본래적인 다가옴과 통속적인 미래, 기재와 과거는 상응하지 않는다.

 한편 통속적 시간경험은 ‘주체’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 결여되어있는 곳에서조차 ‘영혼’ 및 ‘정신’과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서 증거되는데*, 통속적 시간개념과 정신을 연결하고자 한 헤겔에게서 가장 명시적이 된다.

*Q. 두 사람이 한 말이 무엇인가?

A. 강독 534쪽 참고할 것. 시간을 위해 마음이 요구된다/시간은 마음의 연장이다.

 

§82. 시간과 정신에 대한 헤겔의 파악에 반해 시간성, 현존재 세계시간의 실존론적-존재론적 연관 부각시키기[Abhebung] <영역본>

 ‘역사의 발전은 시간 속에 떨어진다’고 주장한 헤겔의 시간관은 통속적 시간이해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시간관에 대한 해명은 비교의 작업을 통해 하이데거 자신의 시간성에 대한 견해를 부각시켜줄 수 있다. 이를 위해 하이데거는 첫째, 헤겔에게서 시간의 본질은 무엇이며 둘째, 정신의 본질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시간 속에 떨어지는지’를 묻는다.

cf. 내적으로 완결된 이념은 자신을 알기 위해 자신의 외부, 곧 자연을 산출한다. 즉 자연은 이념에 외재적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공간이다. 공간은 자신 밖에도 또 공간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은 무차별적이므로 이 공간과 저 공간이 아직 구별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규정적이다. 이때 공간의 부정은 점—폭도 없고 위치만 갖는 것—이다. 점은 다른 점을 부정하고 제한한다. 그러나 공간의 부정은 다시 부정된다. 왜냐하면 점은 공간이 아닌 동시에 공간적인 성격도 가지기 때문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상위규정이 선이다. 선은 점이 공간적으로 있는 것이다. 선이 부정되면 면으로 이행되고, 면으로써 비로소 개별적 공간이 정립된다. 그러나 이는 타자부정이 아닌 자기부정이기 때문에 공간으로서의 면은 곧 시간이다. 시간은 있으면서 없는 것(있음 자체는 공허하므로 있음은 없음이다), 없으면서 있는 것이다(H씨).

 헤겔은 “추상적 서로의-바깥(outside-of-one-another)”으로서 공간과 시간을 함께 다루면서—그러나 병렬하는 것은 아니다—공간의 진실/정체가 시간이라고 주장한다<407>. “공간은 자연의 자기-바깥에-있음(being-outside-itself)의 무매개된 무차별성이다. 이는 공간이 서로 구별 가능한 점들의 추상적 다수성임을 뜻한다.”<407> 그렇다고 해서 점들이 합쳐져 공간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공간 자체는 무차별화된(undifferentiated)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반면 점은 공간 내에서 무언가를 차별화해냄으로, 공간의 부정으로서 그럼에도 공간 속에 존재한다. 공간 자체는 “점들의 다수성의[복수의 점들의] 무차별화된 서로의-바깥이다.”<408>* 그런 의미에서 그 자체로 정립된 공간은 시간이다.**

*Q. 헤겔에게 공간은 점이 아니라 점성(Punktualität)이라는 하이데거의 서술을 이해하지 못했다(429).

**Q. “»Die Negativität, die sich als Punkt auf den Raum bezieht und in ihm ihre Bestimmungen als Linie und Fläche entwickelt, ist aber in der Sphäre des Außersichseins ebensowohl für sich und ihre Bestimmungen darin, aber zugleich als in der Sphäre des Außersichseins setzend, dabei als gleichgültig gegen das ruhige Nebeneinander erscheinend. So für sich gesetzt, ist sie die Zeit«.”(430)이라는 헤겔의 언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에 대한 부정인가?

A. 공간의 부정인 점이 부정된 것이 시간(H씨).

 자기 자신이 더 이상 아니되 자기 자신인 그것, 즉 공간에서 발생하는 부정이 지양된 것이다. “점성(punctuality)으로서 부정의 부정이 시간”이다<408>. “모든 점은 지금-점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 정립’된다’.”<408> 그와 같은 정립의 가능조건은 지금이며, 지금이 점의 존재를 구성한다.* 끝내 시간을 ‘직관된 생성(intuited becoming)’으로 정의하는 헤겔의 시간관은 지금의 직관 가능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통속적인 시간이해를 근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Q. 여기서 공간과 시간의 동일성으로 이어지는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A. 생성=없음에서 있음, 있음에서 없음으로 이행함. 이러한 이행이 직관된 것이 시간이다(H씨).

cf. (b) 생략.*

*정신 역시 시간과 마찬가지로 부정의 부정이다. 그럼에도 시간은 정신과 달리 직관될 수 있기 때문에 둘은 구별되고 정신이 시간 속으로 들어선다(H씨).

 

§83. 현존재의 실존론적-시간적 분석학과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기초존재론적 물음(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