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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가제: Interpretations- und Gewissheitsbegriff bei Husserl: zu einer Phänomenologie des Selbstausdrucks(후설에게서 해석과 확실성의 개념: 자기표현의 현상학을 향해)

현상학의 핵심 개념으로서의 확실성

 현상학이 탐구하는 질문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자아의 의식적 삶과 세계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해주는 현상학적 개념 중 하나는 확실성입니다. 자아는 세계 및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진리에 접근할 수 있을 때 확실성을 확보하며, 접근할 수 없을 때 불확실성에 빠집니다. 달리 말해 의식의 내용이 존재의 내용과 일치할 때 자아는 확실성을 소유하며, 의식의 내용이 존재의 내용과 불일치할 가능성이 있을 때 자아는 확실성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확실성, 후설의 개념을 사용하면 필증성(Apodiktizität) 의식하는 자아와 존재하는 세계 사이 결합의 징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설은 (명증의 여러 성질 가운데서도) 필증성을 이를테면 충전성보다 “더 높은 존엄성”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하고 철학의 목표로 삼습니다(Hua I, 55).

기존의 연구

 현상학적 확실성의 개념에 관심을 가지고 저는 후설이 필증성의 확보를 위해 선택한 방법론인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에 대한 석사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은 칸트와 피히테에게서 그랬듯이 세계를 현상화함으로써 자아로 하여금 필증적인 지식을 획득할 수 있게 해줍니다(Schnell 2012). 저는 후설의 후기 철학에서 소개되는 소위 비데카르트적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이 필증성 및 비현상학적 인식의 정초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기존의 해석적 모델에 반대하여, 후설이 말년에까지 필증적이고 따라서 근원적인 진리를 찾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주장했습니다.

새로운 연구의 동기

 그러나 논문 작성의 과정에서 저는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후설에게서 ‘필증성’이 다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과 둘째, 필증적 진리를 찾기 위해 고안된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이 오히려 필증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긋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문헌 검토를 통해 저는 후설이 굉장히 다양한 맥락에서 ‘필증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냈습니다.

 (1) 후기의 후설은 자연적 태도 하에서 직관되는 본질 역시 필증적으로 알려지는 것으로 규정합니다(Hua VI, 383; Hua XXXIX, 237). 그렇다면 필증적 지식이란 반드시 초월론적 환원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이를 통해 저는 후설에게서 ‘필증성’이 매우 유연하게 쓰이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2) 자아의 육화, 인간화, 타인에 대한 의식, 세속화 등을 비롯한 모든 세계인식을 비필증적 명증으로 간주했던 초기의 서술과 달리(e.g. Hua XXXV, 429) 1934년 봄에 쓰인 유고, ‘나의-존재함의 필증성이 가지는 의미’는 초기에 부정했던 인간성과 세계내존재의 필증성을 (추정컨대 상호주관성의 필증성까지) 복원합니다(Hua XXXIV, 467-468). 그렇다면 후기 후설에게서 복원된 필증성은 초기 후설에 의해 부정된 필증성과 같은 뜻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저는 후설에게서 확실성을 평가하거나 정의하는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변화를 추적하는 데 흥미를 느꼈습니다.

 (3) 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필증적 해석’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1930년 10월에 쓰인 유고에서 후설은 “초월론적 자아의 자기해석” 가운데서 “무엇을 필증적 명증[으로] 진술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Hua XXXIV, 230-231). ‘필증적 해석’이란 표현은 일종의 형용모순처럼 들립니다. 해석이란 필증적 명증의 양상으로 직관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만 가해져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당 유고에서 후설은 ‘필증적 해석’의 가능성을 명백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후설에게서 초월론적 환원 이후의 직관 외에 해석을 통해서도 필증성을 추구한다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직관을 통해 확보되는 필증성해석을 통해 확보되는 필증성을 구분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둘째, 흔히 ‘비데카르트적’이라고 불리는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들의 끝에도 데카르트적 환원의 고유한 특징으로 알려진 필증적 비판의 과제가 남아있음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저는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확보될 수 있는 직관적 필증성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이해한 한계의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1) 지평에 대한 탐구를 심화하면서 후설은 자신이 초기에 정립한 무전제성의 원칙이 더 이상 지켜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타개하기 직전에 쓰인 유고에서 후설은 자신이 세계 속의 육화된 인간이라는 점을 모든 현상학적 탐구 이전에 탐구의 토대(가 되는 지평으)로서 필증적으로 확신한다고 말하며, 이러한 확신의 출처로 “세계확실성”에 대한 “해석”을 듭니다(Hua XXXIX, 252). 또 다른 예로, 세계내존재는 핑크에게서 ‘세계속박성(Weltbefangenheit)’이라고 표현될 만큼 현상학적 탐구의 강력한 지평을 이루며(문아현 2019) 데리다 역시 ‘기원’의 오염을 울부짖으며 초월론적인 것의 본질적인 세속화를 주장합니다(데리다 2019). 이를 통해 무전제적인 직관이 아닌 지평 가운데서 작동하는—그러므로 일종의 순환을 낳을 수밖에 없는—새로운 방법론이 후설에게서 요구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2) 1922/23년의 강의록인 ⟪입문(Hua XXXV)⟫에서 대대적으로 수행되는 필증적 비판은 과거와 미래 및 타자를 직관의 한계로서 선언합니다. 쉽게 말해 과거와 미래, 그리고 타인의 마음은 결코 의심 불가능하게 직관될 수 없습니다. 보다 후기의 후설은 현제를 제외한 시간과 타자성에 더해 잠과 무의식,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의 세계, 그리고 추정컨대 본능의 권역 역시 직관이 미칠 수 없는 곳으로 이해하는 듯합니다. 저는 이러한 한계들을 돌파하기 위해 후설이 해석의 방법론을 동원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후설에게서 해석의 개념을 파헤치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해석의 정의

 후설에게 해석(Interpetation/Auslegung)이란 “지평의 탈은폐(Enthüllung)” 또는 외현(Explikation)입니다(Hua IX, 319). 해당 정의가 수록된 암스테르담 강연에 따르면 현상학적 심리학을 통한 지평의식의 탐구는 현상학자로 하여금 직관된 것에 대한 기술을 넘어 직관되지 않은 것을 해석( 구축)하게 만듭니다. 현행적으로 작동하는 지평의식은 주제화되지 못하고 따라서 공허하지만, 해석자는 그 공허한 것으로부터 현실적이 될 수 있는 계기들의 다양체가 무엇일지를 재현작용(상상/기억/기대 등)을 통해 구축합니다. 이로써 현실적인 지각의 지평은 가능한, 무엇보다 다양한 관점에서의 지각에 대한 기대들로 이루어져있음이 드러납니다. 한 마디로 후설은 직관되지 않는, 따라서 몸소 드러난 그대로 기술할 수 없는 가능성의 영역에 가해지는 탐구 방법을 해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지평의식에 대한 해석 역시 지평의식 가운데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점, 후설에게서도 해석학적 순환이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지각의 지평에는 가능한 지각만 속해있지 않습니다. 지각의 지평에는 지각을 발생시킨 “침전된 [발생의] 역사가, 그때그때마다 엄밀한 방법으로 탈은폐할 수 있는 [그런] 역사로서 포함되어 있”습니다(Hua XVII, 252, 강조는 필자). 역사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습성상호주관적 세계 역시 지평의 구성요소로서 포함되어 있습니다(Hua XVII, 248-249). 우리는 눈앞의 대상을 지각할 때조차 우리의 과거의 습득물(Erwerbe)들과 공동체적인 삶의 배경을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육화된 인간성, 타인 그리고 세계의 존재는 후설이 여타 존재자 인식의 가능근거로서 (직관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하는 것입니다(Hua XXXIX, 256). 후설에 따르면 다른 모든 확실성의 토대로서 확실한 인간적, 상호주관적 세계는 역설적으로 가설적인 세계무화에서조차 전제됩니다.

알고 싶은

(1) 해석적 방법론을 통해 탐구되는 본능의 권역

 본능은 그 대상극이 비직관적이고 무규정적인 지향성으로서, 그것이 충족될 경우에만 대상의 정체가 사후적으로 알려집니다. 본능은 본능의 충족행위로서의 모든 실천을 정초하는데(Hua LXII, 85-86), 그런 의미에서 후설은 자아의 삶이 인식삶이기 이전에 “본능적 충동삶”이라고 주장합니다(Hua LXII, 95). 특히 모든 동물은 근원적으로 자기보존종보존의 본능을 가지며, 추정컨대 이로부터 자신이 아닌 존재자, 세대, 탄생과 죽음, 곧 상호주관적 주변세계에 대한 의식이 나타납니다. 자기보존의 본능은 인간적 세계내존재를 지속하려는 본능으로, 종보존의 본능은 상호주관적 공동체를 지속하려는 본능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후설은 본능을 직관이 아닌 해석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모든 “발생은 언제나 이미 충동, 본능을 전제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테면 갓 태어난 유아에게서 그의 충동체계는 그것이 직관되기 이전에 전제됩니다(Hua LXII, 102). 이를 자기보존/종보존의 본능과 연결지으면, 앞서 모든 여타 확실성의 토대로서 구축된 육화된 인간성, 상호주관성, 세계성의 확실성은 본능의 현상에 의해 그 현상학적 내용을 확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본능에 대한 심화된 탐구를 통해 확증하고 싶습니다.

(2) 현상학의 방법론으로서의 해석과 삶의 방식으로서의 해석 사이의 관계

 해석학은 하이데거에 이르러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아닌 해석하는 존재자인 인간에 대한 이해로 전회한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와 같은 전회가 후설에게서도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현상학적 해석은 지평의 외현(들춰냄)으로 정의되었는데, 인간의 지각적 삶 역시 이 같이 끊임없는 지평외현의 과정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Ricoeur(2016) 역시 ⟪논리연구⟫를 사례로 들며 후설에게서 지각의 개념이 일종의 해석개념임을 피력합니다(Ricoeur 2016: 82-83). 그런데 저마다의 세계해석은 저마다의 역사와 인격의 구체적 내용, 즉 개개인의 지평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지는 관점적 자기표현입니다. 자신에게 그리고 세계에서 무엇이 현실적이고 가능한가를 이를테면 자유변경을 통해 가늠함은 개성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여 현상학의 방법론으로서의 해석과 삶의 방식으로서의 해석 사이의 관계 사이를 정립하고, 나아가 지각과 상상보다도 근원적인 자아의 작용으로서 자기표현본능의 개념을 정립하고 싶습니다. 모든 본능과 의지는 그 유형이 공통적일지언정 개인마다 다른 (표현의) 양식(Stil)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후설이 모든 ‘할-수-있음(Können)’의 원천으로 보았던 본능의 목록에 자기표현본능을 더함으로써, 그가 개별자에 소홀하고 모든 개별자에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본질적 양식만을 탐구했다는 실존주의적 비판에 창조적으로 응수하고자 합니다.

(3) 직관적 확실성과 차별화되는, 해석이 확보할 있는 구축적 확실성

 저는 후기 후설이 복원하는 육화된 인간성, 상호주관성, 세계존재의 확실성이 직관이 아닌 해석을 통해 확보된, 명명하자면 ‘근원지평’들이 가지는 구축적 확실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구축을 통해 필증적인 것으로 알려지는 것들의 성격과, 그것들이 가지는 필증성의 성질을 탐구해보고 싶습니다. 우선 구축적 확실성과 직관적 확실성을 비교하고, 구축적 확실성이 인식정당화에서 수행하는/수행하지 못하는 역할—이를테면 Ricoeur(2016)의 비판대로 지평을 이유로 (구축적 확실성이) 궁극적 정당화에 이르는 데 실패하는지(Ricoeur 2016: 65-66)—을 탐구한 뒤, 구축적 확실성의 개념을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피력한 실존적 조건의 확실성 개념과 비교하고 싶습니다(e.g. SZ 258).

 마지막으로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해석과 구축을 서로 다른 방법론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에 대해서도 제 의견을 정립해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Schnell(2012)은 현상의 가능근거, 이를테면 시간화의 과정은 구축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암묵적으로 현상에 대한 직관/해석을 현상의 가능근거에 대한 탐구의 방법론으로부터 배제하고 있습니다.

(4) 해석 개념 도입의 의의

 저는 후설이 해석의 방법론을 활용해 소위 ‘구축적 현상학’을 전개함으로써 자연성의 개념을 이원화하고 진정한 형이상학의 길을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구축적 현상학을 통해 자연성은 그 존재가 의심스러우므로 초월론적 환원의 대상이 되는 자연성과 초월론적 세계의 세속화된 산물로서 결코 그 존재가 의심될 수 없는 자연성으로 나뉩니다. 전자는 단순히 있는 것들의 총체이지만 후자는 모든 자연적 존재자의 인식과 실천을 뒷받침하는 의미지평으로 규정됩니다. (여기서 세계의 필증성이 세속화라는 작용을 통해 성취되는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서술에서처럼 전제로서 말하자면 요청되는 것인지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에 대해서도 답변을 구성해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자연적 세계가 필증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세속화/구축됨으로써, 이를테면 ⟪논리연구⟫이나 ⟪이념⟫에서 탐구영역으로부터 배제되었던 형이상학적 질문들이 대답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현상학자를 형이상학으로 가는 길을 막았던 ‘초월의 수수께끼’가 세속화/구축을 통해 대응되기 때문입니다. 초월론적 현상학이 가능케 하는 형이상학은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궁극적으로—존재에 대한 경험적 이해에 선행하여—답하는 존재론으로, 모나드에 대한 입니다(Lee 2022: 211-213). 구축적 현상학의 이러한 추정적 성과들을 살펴보는 일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5) 해석의 한계와 회의주의의 문제

 해석은 필연적으로 관점적으로 이루어지기에, 해당 관점이 틀릴 수 있지 않느냐는—다른 관점이 가능하지 않느냐는—상대주의 회의주의의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육화된 인간성, 상호주관성, 세계성의 즉자성과 필증성을 복원하는 후설의 원숙한 철학이 어떻게 이 문제에 대응할지, 가설적인 답변을 구성해보고, 그러한 답변의 의의와 한계를 추적하고 싶습니다.


Husserliana 외 참고문헌: 

Alexander Schnell, Phänomenbegriff und Phänomenologische Konstruktion bei Husserl und Heidegger,Studies in Contemporary Phenomenology, 2012, Vol.6, p.43-54.

Paul Ricoeur, ed. & trans. by John B. Thompson, Hermeneutics and the Human Scienc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

Nam-In Lee, The Concrete and the Plural, Königshausen & Neumann GmbH,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