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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죄책감이 행위에 부과되는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존재에 부과된다고들 배운다. 내가 무엇을 하거나, 말거나 대 내가 누구이냐 아니냐 사이 구분이 작동한다. 하이데거는 그 어떤 프로젝트나 커미트먼트를 선택해서 얼마나 탁월하게 처신하든 결코 해당 기투가 요구하는 바를 충분하게 해낼 수 없다는 데 따르는 존재론적 죄책을 말했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존재론적인 수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어떤 존재의 가능성을 선택하든, 그 언제든 도대체가 충분히 '있을' 수 없다는 감각.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개념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아마 존재론적 죄책은 보편적인 사정이지만, 존재론적 수치는 감각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자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태고, 후자는 실존적으로 취약한 몇몇에게만 체험된다.
사실 존재에는 그 어떤 결핍도 없다는 하이데거의 생각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안일하다. 차라리 수치심이 (원래도 무인) 내 실존을 말하자면 납작하게 짓눌러 으깨버리는 현상을 통해 타인의 실존 여부에 대한 회의주의를 타파하는 사르트르 쪽이 훨씬 감동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무결핍성이 현상학적으로 봤을 때 아예 의미가 없는 관찰인 것은 아니다. 수치심은 결국 자기 자신이 그처럼 결핍 없어야 할 존재(의 경지)에 애초에 이르지를 못했다는 감각, 그래서, 만일 존재가 그처럼 결핍 없는 것이라면 스스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치장과 매혹, 노력과 성과를 통해서든 존재할 자격을 획득할 수 없으리라는 감각.
내가 직관하기에 수치심의 본질은 난 당연히 존재하고, 그 점 자체에서는 아무 결핍이 없는데, 다만 이런저런 면이 부족하거나 이상에 뒤떨어진다는 사태 따위에 있지 않다. 수치심의 본질은 의식 깊숙이 실은 내가 당장 존재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데 대한 자각과, 그 가공할 인식을 은폐하기 위해 의식의 표면을 교란시키는 불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테면 영유아기에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양 방임을 당하거나, 사람으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양 학대에 노출되는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에는 수치심이 동반된다고 연구돼온 게 아닐까. 나는 부족해요, 가 아니라 나는 없어요. 나를 제발 있게 해주세요. 이 문장은 문법상 오류지만 철학적으로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