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2024년 8-9월의 독서

바보바보 2024. 10. 10. 22:46


 유학지에 되돌아왔다. 아직 10월이지만 패딩 점퍼와 코트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껏 몸을 싸맨 이곳 사람들은 정작 우산은 챙기지 않은 채 비를 뚫고 자전거를 탄다. 슬슬 우울해지기 쉬운 계절이라, 비타민D 보충제를 부엌 테이블에 꺼내놨다.

 아무래도 햇수로 2년차다 보니 처음과는 많이 다르다. 외롭거나 고민이 있을 때 마음 편히 부를 수 있는 이곳 친구들을 사귀었고,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한국인 언니들이 있다. 집안일도 감을 익혔고 외식은 거의 하지 않는다. 레시피도 다양화해보고 있다. 무사히 연구석사 과정을 졸업했고, 박사논문 프로포잘은 2안 정도를 완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생활은 그다지 정리되어있지 않다는 느낌이다. 권태나 절망의 고통은 아니다. 권태를 느낀다기에는 박사 입학 여부를 기다리느라 초조하고, 절망하고 있다기에는 딱히 슬픈 일이 있지는 않다. 그저 학생이라고도 아니라고도 하기 어려운 지위로 대학 도시를 부유하는 기분이다. 정확히 무엇을 연구하게 될지 몰라 어떤 책을 우선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는가 하면, 추진 중이어서 확실히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기도 하다.

 늘어놓자면 투고 목표로 완성했던 글이 있었지만 한국인 선배님들의 피드백을 받은 뒤 고칠 게 상당히 많다는 생각을 품게 돼 풀이 죽었다. 한 개의 논문을 쓰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논문은 결코 아는 것 전부를 쏟아내는 장이 아니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① 박사논문 프로포잘의 개선, ② 선배님들의 피드백 반영해 투고할 원고 수정, ③ 그걸 바탕으로 20일에 있을 CFP 응모 및 11월 컨퍼런스 발표 준비, ④ 청강 및 참여 중인 수업과 리딩 그룹 쫓아가기, ⑤ 소피가 좋아해준 내 소설 '빛의 무게' 마저 영어로 번역하기 정도가 머릿속에 있다. 당장의 중요도는 ②, ③ > ① > ④ > ⑤ 순. 최강 J다 보니 이렇게 착착차라락 할 일 리스트가 정리가 돼야 맘이 편하다. 

 마지막으로 애인이 너무 보고 싶다. 서로 어깨를 주물러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장거리 연애는 아무리 길어져도 적응되지 않는다. 기다려주는 그에게 고마울 뿐이다. 요새 흑백 요리사 관련 짤들을 자주 만나는데 (적어도 내 생각에는) 트리플 스타 님께서 아주 도 닦는 강아지 같으신 것이 내 애인과 참 닮은 것 같다. 인스타그램에서 마주칠 때마다 아주 반갑다. 댓글창에서도 인기 폭발이다. 제일 웃겼던 주접 댓글은 '왔다 내 블러셔'...♥︎

 작은 성과들을 되새기며 의지를 단단히 다져야 하는 요즘이다. 힘들 때마다 떠올리며 위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고 있어왔음에 감사하기. 무엇보다 성과에 집착 말기!


1. B. C. Hutcheson, Levinas: A Guide for the Perplexed, Continuum 2004.

 ⟪시간과 타자⟫ 속 '자기의 양심보다 독보적인 것에 대한 충성이 더 중요하다'는 문구에 꽂혀 레비나스 관련 서적을 좀 찾아봤다. 자율성과 독립성을 중시하는 기존 현상학자들과 달리 레비나스는 도덕의 기원을 오히려 타율성(hétéronomie)으로 본다. 내가 따라야 할 가치나 나의 도덕적 의무는 나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내게 부과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임이 자유에 선행하며, 나는 기본적으로 응답하는 존재자이지 맥락으로부터 돌출돼 기존에는 없던 행위의 장을 새로이 개척하는 누군가가 아니다.

 레비나스는 후설 역시 개척의 주체관을 가진 사람들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후설의 (이론적일 뿐 아니라 실천적이기도 한) 지향성 개념이 목표로 하는 이해를 스스로에게 겨눠진 것이든 타인을 향한 것이든 폭력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후설의 윤리관, 구체적으로 양심관이 과연 타인에 대한 감수성(sensibilité)을 결여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분명 자기결정에 방점이 찍혀있기는 하지만, 그처럼 결정하는 자기가 애초에 공동체의 번영을 자기의 번영으로 생각하는 ⟫Ich in meinem Wir⟪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동체 안에서만 자기다움을 발견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후설의 직관은 헤겔의 인륜성 개념을 연상시킨다. 단, 후설이 애매한 말들로써 개별자의 전적인 독립성과 그의 전적인 사회성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워 뵈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한다는 인상은 떨칠 수 없다. 헤겔이 욕심쟁이인 것과 마찬가지로.

2. Guy Elgat, Being Guilty: Freedom, Responsibility, and Conscience in German Philosophy From Kant to Heidegger, Oxford University Press, 2021.

 하이데거 부분만 찍먹했는데 시쳇말로 갓띵작이다. 내 짧은 한 평생 ⟪존재와 시간⟫ 전반부를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한 책을 본 적이 없다. ⟪존재와 시간⟫의 한국어 번역본과 관련하여 'Schuld'가 '책임'으로 번역돼 죄의 의미론적 계기가 사라져버린 것이 늘 한탄스러웠는데, 이 책 덕분에(?) 한탄이 더 깊어졌다. 새 번역이 나온다면 어떻게 염려하든 그 염려는 결코 충분할 수 없다는 데 따르는 죄책의 의미가 반드시 살아야 한다.

 특정한 도덕적 커미트먼트는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자'는 식으로 공허하게 일반화될지라도 염려의 한 방식, 현존재가 특정한 규범성에 얽매이게 되는 한 가지 경로에 불과하다. 하이데거는 양심을 현상학적 존재론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양심'의 의미를 도덕의 권역 바깥으로 흘러넘치게 해 상당히 비대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으로 살기로 기투하는 양심의 가능성을 열어버린다. 존재론은 다만 제 모습대로 있는 것을 탐구할 뿐이기에 거기에는 부족한 것도 잘못된 것도 없다는 것, 그렇기에 성격에서의 결핍이나 부작위, 가치가 결핍된 행위 등을 중심으로 양심의 운동을 해석하는 것은 양심에 대한 참된 존재론적 해석이 아니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규범을 개별자의 기투, 저마다의 선택의 문제로 만들어버리지 않고도 양심의 존재론을 펼칠 길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러프한 아이디어지만 셸러든 하이데거든 (세간적) 양심을 단순히 죄책감이나 불편감을 일으키는, 부정적 사태에 대한 경고 사이렌 따위로 보는 것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양심은 일이 잘못 돌아가는 때에만 작동하는 알람이 아니라 항상적으로 그리고 실정적으로(positively)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그 일이란 개별 인간의 인테그리티를 수호함으로써 실존적 자기보존을 도모하는 것이다(cf. Hart 1992, 286). 

 요 근래 인테그리티에 대해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한다. 한국어에 상응하는 말이 없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로서는 해당 단어가 가진 여러 의미들이 어떤 통일성을 향유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보기에 영단어 'integrity'의 의미는 대략 다섯 가지 정도의 뜻이 거미줄처럼 서로 얽혀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①성실성, 진지함, 진정성 있음 (대충하지 않음, 헌신하고 있음) ②자기다움 (남에게 인정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신념이 무엇이냐에 민감하게 반응함, 자율적임) ③정직함 (거짓말하지 않음, 위선 없음) ④온전함 (오염 혹은 손상된 곳이 없음), ⑤조화로움 (부분들 사이에 갈등이 없음). 중요한 것은 이 다섯 의미가 모두 개념적으로 분리 가능해보인다는 사실이다. 'diligent', 'authentic', 'honest', 'complete', 'harmonious'가 서로 다른 의미원을 그리는 단어들이듯이. 그렇다면 어떤 사태가 이 의미들을 묶어주는 걸까? 충실함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being faithful to one's project, to oneself, to truth'로 ①, ②, ③ 정도는 엮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무언가에 한결같이 충실하다면 영혼의 균질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숨은 전제를 활용한다면 ④, ⑤의 의미도 포섭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더 의미심장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다섯 의미들 중에 도덕적으로 옳은 내용에 대한 추구를 담보하는 의미가 없을 때--정직함조차 그 자체로는 무엇에 대해 정직할 것이냐에 대해 내포하는 바가 없다--인테그리티는 과연 덕인가, 아니면 그저 형식적 완전함에 불과한가? 나아가 양심은 이 다섯 개의 의미 요소 각각과 어떻게 관계하는가?

3. Simone de Beauvoir, Trans. H.M. Parshley, The Second Sex, Vintage Classics, 1997. 

 서론과 결론, 마지막 챕터를 찍먹해서 책 전체에 대해 평가할 자격은 없지만, 읽은 부분만 따지면 선험의 권역을 다루는 체계적인 철학서보다는 경험적 차별을 비판하는 에세이에 가깝게 느껴졌다. 1949년에 출간된 책이어도 오늘날에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구구절절 무릎이 탁 쳐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본질주의에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는 입장이다. 보부아르가 그토록 강조하는 상황의 영향력이란 참 막강하지만,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만 구성되며 유전자에 의해 발현되는 본성이라는 것이 조금도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진화나 뇌과학 및 심리학 연구로 확증될 있는 육체의 경향성이 있다. 예를 들어 평등이 우리보다 훨씬 보장된 나라에서도 학과별로 성별 선호차라는 것이 유의미하게 존재한다고 한다. 인간이란 이성적 동물이라는, 이제는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가 실은 보부아르가 간과하는 애매성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표현해준다. 동물이기에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육체에 불가피하게 각인되어있는 주문들에 응하는 경향을 가진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을 갖추기에 주문들이 절대적 명령이 되지는 않도록, 다른 주문을 타고난 사람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주어지도록, 애초에 어떤 주문을 타고나든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하는 건전한 사회를 만들 능력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동물은 비이성적 부자유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데, 이는 별도의 애매성들이 개입된 별도의 주제다.

 아무튼 보부아르의 결론은 여성도 스스로의 자유와 잠재력을 발휘해 남성과 동등한 위치를 점하고 성숙한 인간들 사이의 형제애(brotherhood)에 동참하자는 것이다. 나는 당장은 딱히 이 결론에 반감이 없는데, 이 말이 혹자에게는 여성도 남성처럼 되자는 것으로 들릴 수 있을 것이며, 깊이 파고든다면 문제적일 여지가 충분하다. 페미니즘 이론 내부에서 보부아르의 리셉션이 궁금해졌다.

4. 캐빈 패스모어, 이지원 역, ⟪파시즘⟫, 교유서가, 2024.

 파시즘을 그 용례와 무관하게 완성된 의미를 가진 이념적 대상성으로 보지 말고 각각의 상황에서 '파시즘'이란 말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탐구해야 한다는 저자의 역사학적 관점에 동의했다. 파시즘의 의미는 실제로도 완전히 규정될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파시즘은 반공산주의를 내세우지만 그 어떤 공산주의 사상만큼이나 급진적으로 사회의 계급질서를 건드린다. 일부 국가에서는 토지 개혁 등의 조치를 단행하는 데 동기가 되어주었다고 한다. 또 파시즘은 반자유주의를 표방하지만 상당히 많은 우파 지식인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여러 파시즘'들' 사이에서 단일한 내용을 찾기보다는 정치적 패내티시즘, 패내틱들을 동원한 반대 입장에 대한 탄압과 같은 정치적 형식이 공유됨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5. Max Scheler, Trans. Manfred S. Frings, The Human Place in the Cosmo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09.

 블로그에 오랜만에 전문 요약을 올리려고 열심히 정리했는데 노트 필기만으로 진이 빠져버렸다. 생명의 여러 수준을 충동(Drang, impulsion), 본능, 연상적 습관, 지성으로 나눈 뒤 생명 일체로부터 정신(Geist, spirit)의 권역을 구분해내는 형이상학 저술이다. 셸러에 따르면 정신은 생명 없이는 그 실현을 위한 에너지를 획득할 수 없지만, 생명의 그 어떤 요소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생명이 나아갈 방향을 규정해준다. 정신을 담지하는 인격(person)은 모든 대상, 심지어는 세계 자체를 대상화할 줄 알아도 그 자신은 대상화될 수 없는 것으로서 가치를 지향하고 '세계의 근거'와 교통한다.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는 생명과 정신을 모두 갖춤으로써 마찬가지로 생명과 정신을 모두 갖춘 세계의 근거가 스스로를 전개 및 실현시키는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대상화 및 반성할 줄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무엇과 존재론적인 차이를 획득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나아가 (후설의 초월론적 환원에서도 그렇고) 세계 '전체'를 '그 자체로' 대상화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경험인지 난 잘 모르겠다. 궁극적으로 진화학과 뇌과학이 동물의 지성과 인간의 정신 사이의 질적 차를 지워나가는 중인 오늘날, 셸러의 이 책이 어떤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셸러 자신도 당대의 과학적 성과를 상당히 성실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형이상학은 과학적 지식이 아직 부족했던 시대의 산물일까? 아니면 오늘날에 와서도 동일한 형이상학이 반복될 여지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