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바보 2024. 6. 8. 03:58


 불안도 삶에 대한 사랑도 모두 간헐적인 발작과 같다. 그 속에 휩싸여 있을 때에는 도저히 다른 양태의 존재가 가능하기나 한지 의문스럽지만 그처럼 강력한 감정의 효력은 악하든 선하든 일시적일 뿐이다. 불안에 속아 삶을 저주해선 안 된다. 반대로 불 같은 의욕에 속아 너무 많은 미래를 약속해서도 안 된다. 믿을 것은 감정이 아니라 감정보다 훨씬 잔잔하고 지속적인 마음의 습관, 구체적으로는 내가 수동적 용기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일종의 덕성이다.

 수동적 용기를 갖춘 인간은 도피적 사고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당장의 쾌고가 삶을 지배하도록 두지 않는다. 대신에 그녀는 스스로가 가장 제정신일 때에 옳다고 판단한 일들을 의무로 생각하며 하나씩 수행해나가는 방식으로 삶의 시간을 채운다. 이를테면 폭음의 기회를 뿌리치고 셸러를 매일 몇 쪽씩 읽는 인간의 용기를 내가 특별히 '수동적'이라 부르는 데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옳다고 판단된 의무가 현재의 나에게 너무나 낯설게(alien, fremd), 달리 말해 내가 능동적으로 결정한 나 자신의(authentic, eigen)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것처럼 경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잠시나마 누그러뜨려줄 수 있는 자해적 행위에 몰입하는 대신 셸러를 읽으라는 명령이 당장의 지독한 불안 하에서는 도대체가 나 자신에게서 온 것처럼 생각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순간에조차 수동적 용기를 가진 인간은 가히 이질적이라 느껴지는 저 의무를 무시하지 않을 수 있다. 달리 말해 그는 저 의무의 힘에 영향을 받을 줄 안다. 그리고 수동성이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 그러니까 파토스를 경험할 수 있는 능력에 해당한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의 한 구절: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죄책으로부터 철두철미 해방되는 일의 불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 그 가운데서 모든 악이 영원히 용서될 그런 결국의 조화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Sami Pihlström, Transcendental Guilt: Reflections on Ethical Finitude, Lexington Books, 2011, pp.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