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se

Firenze

바보바보 2024. 11. 12. 08:04

 부주의하다면 부주의했고, 억울하다면 억울했다. 단 하루만에 비행기 한 편과 기차 세 편을 내리 놓쳤다. 갑작스러운 데다 상당한 추가 지출이 있어 그로써 마치 내 존재의 무게라도 감해진 듯, 하루종일 허했다. 목구멍에서 신 맛이 나도록 실컷 뛰어가놓고 세 번째 기차를 놓쳤을 때는 로마 도심의 잿빛 정류장에 주저앉았다. 훌쩍거리면서 여행함이라는 실존의 양태를 저주했다. 하지만 마침내 피렌체 역에 도착해, 거리의 식당으로부터 스며나오는 누런 빛깔과 끊이지 않는 말소리에 맞닥뜨리자 스르륵 긴장이 풀렸다. 마음을 다스리고 시뻘건 플로렌타인 스테이크를 뜯었다. 또 먹고 싶다.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은 내 죽음 이후의 시간성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시간이 있으리라는 것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나는 대학원의 E 씨가 놀렸듯 막무가내 관념론자가 아니다) 도시를 가득 채운 대규모 건축물들을 통해 그 존재감을 처음으로 몸소 느껴버렸다.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의 도시민들은 자기네 삶의 시간 내에 완공될 리 만무한 무지막지한 건축 프로젝트 등을 추진했다. 프로젝트의 세부를 속속들이 아는 건축가도, 메디치 가의 통 큰 후원자도 자신이 개시한 기획의 끝을 보고 죽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전혀 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진척이 됐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무척 신기했다. 현대인의 삶은 웬만하면 한 계절, 반 년, 길어야 사오 년짜리의 기획을 연달아 이어붙임으로써 전개된다. 마치 여러 개의 우표를 조금씩 겹쳐서 나란히 늘어놓듯, 조금은 지저분하지만 역동적인 모양새로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네 삶이 단 한 개의 기획만으로 채워져 있다는 의미에서 단순하지 않도록 시간을 관리한다. 복합성이야말로 현대적 시간의식의 미덕이다. 애초에 평생을, 아니 평생을 넘어 투자해야 하는 단 하나의 기획 따위를 추진할 동기 자체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런 기획은 오롯이 '나'에게 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처럼 행위나 작업이 내것이라는 표식, 무엇인가가 나에게만-귀속됨, 즉 배타적인 저작자로서의 권리(authorship), 일종의 고집스러운 폐쇄성에 가까운 이 자기지시를 욕망한다면 피렌체 도시민들의 시간 감각에 공감하기 어렵다. 그들은 특정한 시간구간에 걸쳐서만 전개됐다 돌연 죽음이란 이름의 끝을 맞는 자기 자신에게 국한된 주체성이 아닌 우리, 심지어 누군지 그 이목구비의 생김새조차 뜯어볼 수 없는 미래 세대에게 제 주체성의 문을, 저작자로서의 권리를 열어주었다. 엄청난 신뢰가 필요한 일이다. 내가 진심을 다해 개시한 커미트먼트의 이행 및 완수를 생판 모르는 미래의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감각일까. 


 

 보볼리 공원은 정말 아름다웠다. 넘어지면 코를 박을 거리에 있는 피티 궁전에 들어가보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이 될 정도로. 너무 좋은 것들을 하루 안에 다 깊이 향유할 수는 없다. 피렌체의 전망이 내려다 보이는 가장 높은 곳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의 입을 빌려 정말이지 '깊어-투명한 하늘의 돔(tiefklare Himmelsdom)'이 거기 있었다.


 수태고지는 단 한 번만 발생한 신화적 사건이지만 그 미술적 표현의 가짓수는 무궁무진하다. 시대마다, 급기야 각 화가마다 서로 다른 수태고지의 이미지가 있다. 일회적인 수태고지(the annunciation)가 아닌 수태고지들(annunciations)이 있는 것이다. 아마 가장 유명할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수태고지 그림 속 마리아는 세계를 구원할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어달라는, 거의 일방적이다시피 한 천사의 요구에 조금의 동요조차 하지 않는다. 우삐찌 미술관에 전시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빈치의 마리아는 심지어 미소를 띠고 있다. 마치 이런저런 식물을 묘사하느라 마리아의 심정에 공감할 시간은 아예 없기라도 했듯이. 반면 헨리 오사와 태너의 수태고지 그림 속 마리아는 갑자기 통지된 가공할 의무로 인해 얼굴이 혼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다.

 전자의 마리아는 어쩌면 무언가를 당하는 사건, 곧 파토스조차 누리지 못할 정도로 제 고유하고 독립적인 행위자성을 상실했지만, 후자의 마리아는 아무리 유약할지언정 자신에게 고유한 행위자성 덕분에 파토스를 가질 수 있다.* 

 한편 마찬가지로 우삐찌에 전시된 시몬 마티니의 '수태고지' 속 마리아는 그 중간에 있는 것 같다. 천사가 갑작스럽게 날아오자마자--그의 조급함과 속도는 아직도 펄럭이고 있는 옷자락으로 표현돼 있다--그녀에게 무지막지한 소식을 알린다. 마리아는 눈살을 찌푸리고 긴장한 채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마리아는 몸을 천사로부터 돌리고 있다. 고개만이 신의 메신저를 향하며 최소한의 예우를 갖춘다. 단, 그녀는 태너의 마리아가 지닌 격정을 모른다. 시몬 마티니의 마리아는 올리브 잎에 딸려온 신성한 의무가 어떤 이유로든 싫을지언정, 두렵지는 않아 보인다.

*태너의 미학적 지향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우리는 수태고지를 거부하는 마리아를 상상할 수 있다. 나는 구원자의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요, 항변하는.


 "있죠, 나는 제 2의 마리아였어요, 라고 안나가 말했다. 그동안 사람들의 죄가 너무 많이 쌓여서, 예수가 재림 이전에 한 번 더 육화되어야 했죠. 내가 열네 살이었을 무렵의 어느 날, 나는 방 안에 앉아 언제나처럼 자기 전에 소설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 한 명이 한 줌 빛의 모양새로 나를 찾아왔어요. 내가 아이를 배야 한다면서요. 그리고 그 아이가 사람들 대신 스스로를 희생해, 모두의 죄를 사해줄 거라면서요. 당신 역시 어린 시절부터 저질러온 죄가 있을 테니, 당신까지도 당신의 아들 덕에 구원될 거라고 말하면서요.

 저는 입이 얼어붙었습니다. 우선 너무 무서웠어요. 그 천사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도, 날개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똑바로 쳐다본다면 눈이 멀 것 같이 밝은 빛, 밝음 자체였습니다. 나는 시선을 비스듬히, 나의 책장에 꽂아넣은 채 불꽃처럼 스파크를 일으키며 제 침대보를 태우고 있는 천사의 음성을 잠자코 들어야 했어요. 어느새 손이, 나아가 온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그의 풍채보다도 그가 가져온 소식이었어요. 수태고지라뇨, 저는 그 당시 열네 살이었어요. 생리를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되었었죠. 아이를 낳고 싶기는커녕, 내 성기에 털이 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공포스러웠어요. 그제야 나는 어른들의 집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명화들의 거짓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림 속에서 수태를 고지받는 마리아들은 모두 하나 같이 결연한 얼굴이었습니다. 마치 하루아침에 당신이 신의 아들을 배리라는, 심지어는 이미 뱄다는 소식이 차분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실제로 마리아는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신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가 얼마나 무겁게 느껴졌을까요? 나 역시 몹시 두려웠어요. 나는 침대보가 다 타버리기 전에 용기를 내보았습니다.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요. 나는 너무 어려서,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다고요. 낳다가 죽어버리면 어떡하냐고요. 빛의 천사는 의아스러운 눈치더군요. 신의 아들을 낳다 죽는 만큼 명예로운 죽음이 어디 있냐면서요. 게다가 당신은 바로 천국에 갈 텐데? 라고 말하는 그는 나를 조금도 이해하고 있지 못했어요. 내가 대답했어요. 나는 천국을 아직은 원하지 않아요, 할머니가 되어서야 원할 생각이에요. 나는 완고했습니다. 이 씨발년! 천사가 말했습니다. 너는 반드시 지옥에 갈 것이다. 왜냐하면 전 인류는 바로 너로 인해 구원을 받을 소중한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악과 죄의식으로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너 때문에 지상에서도 지옥을 경험할 것이다, 라고 저를 저주하고서 천사는 창문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지옥이 무서웠지만 저는 다시 읽고 있던 책으로 돌아갔어요.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된 저는 지옥이 아니라 액자 속에 안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저의 공포를 헤아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알게 되었어요. 각자의 삶은 각자의 것이며, 그 삶이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액자 속으로 넣어주신다는 것을요. 물론 어떤 그림일지는 알지 못하지만요."('라 누벨 마리', 이곳 "zehn"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