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40510 한국에 가면은요

바보바보 2024. 5. 10. 11:42

1.  각오한 채로 화장기 없이 번화가에 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탁구를 치고 싶다. 가능하다면 데이트로. 끝나고는 삼겹살이나 샤브샤브를 먹으러 가고 싶다. 카스도 한 병 시킬 생각이다.

2. 집에 두고 온 청키한 닥터마틴을 다시 신고 싶다. 메리제인 구두도 그립다. 식물 뷔스티에 원피스도 다시 입고 싶고, 내 최애 청자켓도 다시 걸치고 싶다. 2년째 장바구니에 넣어두기만 한 빨간 가방도 냉큼 지르고 싶다. 호커스포커스의 하얀 롱스커트도. 스틸레토 플랫슈즈도. 카드지갑 한 개는 진짜로 필요하다.

3. 아직 영업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포트와인을 팔던 독서 바에 가서 소설을 쓰고 싶다. 가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 감각이 너무 이상하다. 그리고 주머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소설 수업을 한 개 듣고 싶다. 1년에 단편소설을 한 편씩만 써도 중년이 되면 벌써 열 편, 스무 편이다.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를 유치하지 않게 풀어가보고 싶다. 인물 설정을 구체화한답시고 내가 잘 모르는 회사생활 같은 것을 아는 척하는 일은 그만 두고 싶다. 그러고 보니 새 소설을 쓰기 전 ⟪빛의 무게⟫를 마저 번역해서 리디아와 훌리안, 누구보다 와이칭에게 보여주고 싶다.

4. 할머니와 토토가 보고 싶다. 할머니께는 뽀뽀를 해드리고, 토토와는 그의 따뜻한 몸뚱이를 끌어안은 채 번갈아 숨을 쉬다 같이 잠들고 싶다. 1년 사이 조금 컸을까?

5. 부모님께 요리를 해드리고 싶다. 메뉴는 두 분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6. 오밤중에 육회를 배달시킨 다음 먹방 유튜버와 함께 먹고 싶다.

7. 번화가에서 싸구려 타로점을 보고 싶다. 그리고 걷다가 나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사람이 바글바글한 어느 브랜드의 팝업스토어에 들러 성숙한 향기가 나는 바디로션을 사고 싶다.

8. 하루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올림픽을 보고 싶다. 특히 펜싱과 양궁, 탁구, 브레이크댄스, 배드민턴이 기대가 된다. 하지만 태권도와 유도, 역도, 높이뛰기, 기계체조 등도 챙겨볼 것이다.

9. 만화방에 가서 완결이 났다는 ⟪덴마⟫를 다시 읽고 싶다.

10. 화장품을 마구 사고 싶다. 쓸 일도 없는 연보라색 블러셔와 번지지 않는 마스카라, 맥의 씨 시어 립스틱이 갖고 싶다. 마지막 것은 면세점에서 살지도 모른다. 출국하기 전엔 이니스프리에 가서 겨울용 보습크림을 챙겨놓고 싶다.

11. 우다영의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김사과의 ⟪하이라이프⟫를 읽고 싶다. 카프카와 머독과 보부아르를 한국어로 술술 읽고 싶다. 지하철에서 읽기 편한 시집도 좋고. 소요서가에 있다면 ⟪The Sovereignty of Good⟫의 국역본이 어떤지도 확인하고 싶다. 

12. 예쁘게 차려입고 호텔에 딸린 바에 가서 똥폼을 잡고 싶다.

13. 네일아트를 받고 싶다. 벚꽃이나 자두 색깔로. 아니면 돈을 좀 더 들여서 한 살이라도 손이 젊을 때 아트를 받아볼까 싶다. 한 번쯤은 모조 보석이 주렁주렁 달려 부담스러울 정도인 그런 아트를 받고 싶다. 그러면 하루종일 손톱만 바라보고 있어도 즐거울 것 같다.

14. 키링을 운동화나 가방에 다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해보고 싶다. 흰색 뉴발란스 운동화를 꾸미면 딱 좋을 것 같다.

15. 저녁에도 여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서 지도교수님의 작업물을 쭉 훑고 싶다. 인공지능, 막스 셸러, Wartime quartet에 대한 입문서도 읽고 싶다. 하루에 한 문단씩 보부아르를 번역하고도 싶다.

16. 화려한 색감의 빈티지 홀케이크를 테이크아웃해 연구실에 찾아가 대여섯 명쯤과 함께 나눠먹고 싶다. 신입생 분들 앞에서 멋진 언니인 척을 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애정어린 구박을 받고 싶다. 그러고 보니 분석철학 대 대륙철학 배 크레이지아케이드 대회는 개최하지 못했다. 밀어붙였으면 사실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출국 전 이래저래 뭔가 복잡했다.

17. 회와 곱창, 돈까스, 텐동, 아부리초밥, 낙성대 역의 양념갈비를 먹고 싶다. 팝콘 그리고 복숭아가 잔뜩 올라간 케이크도 먹고 싶다.

18.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사서 목포나 광주처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국내의 도시로 떠나보고 싶다.

19. 에무 시네마에 가서 진지한 얼굴로 예술영화를 보고 싶다. 웃긴 장면이 나오면 너무 크지는 않은 목소리로 애인과 까르르 웃고 싶다. 애인이 종종 찾는 영상자료원이라는 곳에도 따라가보고 싶다. 그런가 하면 헝거 게임이나 메이즈 러너 같은 킬링타임용 영화를 빈지와칭하고 싶기도 하다. 

이 중에서 절반이라도 하면 대성공이다. 한국에 간다고 해도 종강이 아니기 때문에 할 일의 연속인 것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새벽까지 여는 할리스커피와 함께한다면 데드라인을 못 맞출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