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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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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 0장(2018.11) 유치하지만 진지했던 스물 네 살 가을의 추억.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성했던 장편소설. 총 15장까지 있었고, 안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는 기억이다. 0. 혼자 공책을 펴는 시간, 그때만큼은 테이블 위의 스탠드 불이 태양보다도 강력하다.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자연으로부터의 빛이 차단된 방 안에서, 안나는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프랑스어를 두 어절쯤 적어보았다. 그 사이 전구의 둥근 몸뚱어리가 눈꺼풀을 향해 인공의 열기를 쏘는 것이 느껴졌다. Je suis 알파벳들은 적히자마자 안나의 머릿속에서 제 음가를 연주했다. 그녀는 그 발음을 생각하면서 문득, 이 말들이 혹시 ‘Jesus’의 오타는 아닐까 하는 농담 같은 진담, 혹은 진담 같은 농담을 꾸며보다가 그만 두었다. 안나의 프..
미완 - 사과로부터의 푸른 빛(2022.2) 앙리 르 시다네르의 그림들은 견고해 보이는 우리네 세계가 실은 언제나 미세하고 부드럽게 진동하고 있으며, 매 순간 예측할 수 없는 색깔의 빛을 입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세계에 대해 고정불변하게 타당할 인식을 찾고자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아름다움까지 훼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식은 일종의 반달리즘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처음에는 인식의 효용에 대한 강박적인 기대와 그것의 덧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인물이 메시지를 육화하지 못하고 단지 예시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상이 조금이라도 배어있는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이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흔하고 치명적인 실수가 아닌가 생각한다. I 오빠가 정성스럽게 피드백을 해줬음에도 불..
도도는 도도도도 / 비평가들(2022.1) (1) 회사에서 도도의 별명은 ‘도도는 도도도도’였다. 도도에게 일을 시키면 도도가 도도도도, 눈알을 잽싸게 굴리고 빠르게 타자를 쳐서 도도도도 프린터로 달려가 다시 도도도도, 서류가 필요했던 사람에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또는 도도가 도도도도, 전화를 걸거나 외근을 나가 볼일을 보고 잠시 커피를 마시는 요령도 없이 도도도도, 회사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도도는 후배도 없는 유일한 말단사원에 불과했고, 입사 후 3년이 지나도 그 점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능력 있고 성실한 데 있어서는 그녀의 상사들보다 배로 나았다. 아무리 규모가 작다고 해도 도도 없이는 회사 전체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게을렀으며, 일은 자꾸만 위에서 아래로 끝내는 뿌리의 밑동인 도도에게로 내려왔다. 도도는 혼나지도 않았다. 도..
풀꽃과 장미의 수난(2021.12) 전문은 https://knower2020.com/forum/view/595615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올 포 미’의 첫날은 긴장감 넘치면서도 한산한 끝을 맞았다. 가게에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나와 내 곁을 지키기 위해 반차까지 낸 혜연, 그리고 동네에 새로 생긴 피자집이 궁금해 걸음을 떼준 이웃들 몇 명이 전부였다. 아무리 가오픈 차원에서 단축 운영을 했다고는 하지만, 하루에 손님 네 명은 너무하다 싶었다. 혹시 이름이 피자집답지 않아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혜연과 꼬박 일주일을 ‘올 포 미’와 ‘미 앤 마이 피자’ 사이에서 토론한 끝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는데...... 바닥에 떨어진 도우 부스러기를 줍고, 행주로 테이블을 닦으면서 혜연에게 역시 네 말을 들을 걸 그랬나 봐, 사람들이 여기가 ..
커피하우스가 타버리고 남은 재(2021.7) https://knower2020.com/forum/view/564861에서 전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커피하우스가 타버리고 남은 재 커피하우스가 타버리고 남은 재 7월의 비엔나는 마음이 부풀은 관광객들에게조차 역겨울 정도로 더웠다. 그들은 미술사 박물관 앞에서 한 마리의 굵은 ... knower2020.com 7월의 비엔나는 마음이 부풀은 관광객들에게조차 역겨울 정도로 더웠다. 그들은 미술사 박물관 앞에서 한 마리의 굵은 뱀이 되어 줄을 서있었다. 공교롭게도 모두가 노랑이나 갈색, 올리브색의 상의를 입고 있었으므로 그냥 뱀도 아닌 구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의 비늘은 폭염을 견딜 만큼 두껍지 않았고 그늘 또한 구시가지의 악명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햇빛이 잔인할 정도로 공평하게, 박물관 앞의 가..
몽상이 생의 하나뿐인 낙인(2021.9) 20210904 16:12~18:09의 즉흥적인 글. 누가 보면 내 일상은 휴가 같아 보일 수 있다. 나는 이르면 열두 시, 늦으면 두 시에 하루의 첫 눈을 뜬다. 이른 아침 해가 뜰듯 말듯 하는 모습을 못 본 지는 매우 오래되었다. 언제나 태양이 가장 강렬할 때에, 커튼이 쳐진 방 안으로까지 침투해오는 그 존재감을 온몸으로 애달프게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뭉친 어깨를 주무르면서 부엌으로 나가면 전날 밤 썰어둔 계절 과일이 락앤락 속에 담겨있다. 나는 체리나 사과를 집어먹거나 복숭아 따위가 썰린 것을 한 입 베어물고 씹을 때마다 한 꺼풀씩 옷을 벗는다. 과일을 삼킬 때즈음 나는 샤워 부스 안에 서 있다. 샴푸에서는 제비꽃 냄새가, 바디워시에서는 라벤더 냄새가 난다. 아닌가, 라벤..
제지기오름(2021.8) 제지기오름 바닷소리의 데시벨에 맞서 해발 구십 미터 남짓의 작은 오름 엄마 아빠 손을 붙잡고 사실 그럴 나이는 훨씬 지나서 그저 일직선으로 성질 급한 아빠와 허리 아픈 엄마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든 조절해보며 오른다 바닥엔 세잎클로버 무리와 이름 모를 풀, 목재 계단 투박하게 이따금 새똥 짓궂게 그리고 나팔 악대처럼 모여있는 취나물 사이에서 올 여름 첫 모기들을 만난다 허벅지 위 융기한 붉은 오름 정상에서의 파노라마 땀에 젖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다리 한두 번 긁적여본 뒤 두리번거리면 나무에 걸린 책갈피 독실한 누가 남기고 갔는지 신이 죽음의 짐을 내려놓게 해준단다 고개를 떨궈 솔방울로 축구를 한다 제지기오름의 어원이라던 어느 젊었을 절지기와 함께 그러나 산 사람의 패스는 차마 죽은 자에게 닿지 못하고 애꿎..
소마와 프시케(2018.3) 서양고대철학 수업시간의 망상에서 시작해 공모전에 응모도 했지만 탈락했던 이야기. 심사평이라도 받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퇴고를 굉장히 오래 거쳤었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사람이 없이 텅 빈 해변. 나와 영미가 그 위에 드러누운 채로 있다. 가까이서 파도가 철썩이지만 물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백사장 곳곳에 박힌 소라껍질도 표면이 너무 고운 나머지 인공의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여기서는 영미가 제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혹은 움직임을 당해도 피부에 모래 한 알 달라붙지 않는다. 이튿날은 아늑한 오두막이다. 이 오두막에도 수상한 구석이 있다. 가까이서 난롯불이 타오르는데도 내 맨살은 뜨거워질 줄을 모른다. 벌겋게 색이 달아오를 리도 없으니 근심을 던 채, 그저 영미에게 가까워졌다가 물러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