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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ze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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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망령의 숨(2022.4) 추위. 크리스마스가 지나자마자 불쑥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날은 좋지 않았다. 거리가 쓰레기로 가득했기 때문에, 실내에 한참 박혀 있었다. 축제를 벌이지 않은 몸으로 한겨울을 맞았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러서 불현듯,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의견에 지나지 않은지 의심했다. 나는 의견이다, 하고 말을 내뱉어 보았다. 내가 지금, 여기 있음은 진리가 아니라고. 오늘 내 말 상대는 차디찬 공기였으며, 입김이 마스크 너머로 퍼져 허공에 짧은 자취를 남겼다. 나는 일을 마치고 직장을 나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두껍지는 않았다. 보풀이 많이 일고, 주머니가 양 옆으로 큼직하게 달린 못생긴 코트였다. 겨울 내내 이것으로 버텼다.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옷을 사..
라 누벨 마리(2022.9) 라 누벨 마리 아담한 식당이었다.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을 에메랄드 색 벽지가 따스한 빛깔로 둘러싸고 있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종업원이 나에게 메뉴를 가져다주면서 설명해줄까요? 라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가 무엇을 먹을지를 알고 있었다. 치즈와 감자를 섞어 걸쭉하게 만든, 알리고란 이름의 프랑스식 요리였다. 삼 년 전, 무라사키 하나라는 이름의 여행 작가의 책에서 알리고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끈적하지만 잘 끊어지고, 황금빛이지만 구수하고, 먹다 보면 든든해지는 것을 넘어 듬직한 것이 뱃속에 들어차는 기분이라고 무라사키는 썼다. 듬직한 것을 먹는다는 그 기분을 궁금해한 지가 무려 삼 년이었다. 궁금증은 오랜 시간 환상의 입구가 되어주었다. 나는 직장의 점심 시간에 동료와의 수다나 간식..
석류인간(2022.8) 문청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지만, 소설을 쓰는 재미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편안한 마음으로 취향과 논증과 위로를 주고받는 일의 소중함이 더 큰 요즈음이다. 이런 선호 체계 하에서 창작에 대한 내 욕망은 어디쯤 위치 지어져야 할까. 아직 배가 덜 고프고, 목이 덜 마르다. 이 사실에 잘못된 것은 없음을. “영지야, 나와 결혼해 줘. 매주 토요일처럼 매일을 보내고 싶어……” 2012년의 겨울이었다. 그 해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으며, 나는 그것 때문에 하루하루 실망해가던 중이었다. 실망감이 절정에 달했던 12월의 하루, 그 날 저녁의 거리는 폭설이 예고되었었는데도 차로 가득했다. 정말로 폭설이 내리기 전에 빨리 이동하고 싶은 사람들의 무리인 것 같았다. 아니면 직업..
풀꽃과 장미의 수난(2021.12) 전문은 https://knower2020.com/forum/view/595615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올 포 미’의 첫날은 긴장감 넘치면서도 한산한 끝을 맞았다. 가게에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나와 내 곁을 지키기 위해 반차까지 낸 혜연, 그리고 동네에 새로 생긴 피자집이 궁금해 걸음을 떼준 이웃들 몇 명이 전부였다. 아무리 가오픈 차원에서 단축 운영을 했다고는 하지만, 하루에 손님 네 명은 너무하다 싶었다. 혹시 이름이 피자집답지 않아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혜연과 꼬박 일주일을 ‘올 포 미’와 ‘미 앤 마이 피자’ 사이에서 토론한 끝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는데...... 바닥에 떨어진 도우 부스러기를 줍고, 행주로 테이블을 닦으면서 혜연에게 역시 네 말을 들을 걸 그랬나 봐, 사람들이 여기가 ..
커피하우스가 타버리고 남은 재(2021.7) https://knower2020.com/forum/view/564861에서 전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커피하우스가 타버리고 남은 재 커피하우스가 타버리고 남은 재 7월의 비엔나는 마음이 부풀은 관광객들에게조차 역겨울 정도로 더웠다. 그들은 미술사 박물관 앞에서 한 마리의 굵은 ... knower2020.com 7월의 비엔나는 마음이 부풀은 관광객들에게조차 역겨울 정도로 더웠다. 그들은 미술사 박물관 앞에서 한 마리의 굵은 뱀이 되어 줄을 서있었다. 공교롭게도 모두가 노랑이나 갈색, 올리브색의 상의를 입고 있었으므로 그냥 뱀도 아닌 구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의 비늘은 폭염을 견딜 만큼 두껍지 않았고 그늘 또한 구시가지의 악명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햇빛이 잔인할 정도로 공평하게, 박물관 앞의 가..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마시는 3가지 방법(2020.5) - 내가 본 몇 편 안 되는 홍콩 영화들에 대한 동경을 담은 소설.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은 나와 빠르게 헤어졌다는 점 외에도 하나의 공통점을 더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작은 방에서 혼자 살아온 지가 오래인 사람들이었다. 그 안에서는 이상하게도 두 극단으로 나뉘었다. 한 쪽은 매일 두 끼 이상을 무조건 집에서 요리를 해먹어 지나치게 성실하다는 느낌마저 들었고, 다른 쪽은 가스레인지를 켜본 적도 없을 정도로 전혀 요리를 하지 않았다. 한 쪽은 또 집을 알뜰살뜰 꾸몄으며 스스로 고른 가구를 들여 그 그림자까지 청소했다. 소품점의 유리창 너머로 예쁜 램프가 보이면 만 원 정도는 지불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었다는 뜻이다(그렇게 나는 선인장 모양, 빵 모양, 달 모양 램프 아래서 책을 읽다 낮잠을 자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