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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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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 - 부쉬 드 노엘(2021.2) 부쉬 드 노엘 "이와 관련해서, 추측하건대, 우리들 중 대부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쾌감과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퍽 감을 못 잡는 것 같다. 당신은 정말 크리스마스를 즐기는가?" (Eric Schwitzgebel, The Unreliability of Naive Introspection,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117, No. 2, 2008, p. 250) 사랑은 과자 같은 것이다. 바삭하거나 달콤하다. 그리고 없이 살 수 있다, 라고 썼다. 그리고는 가슴을 네 번 쓸어내렸다. 연구실에서 지선은 문득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을 까먹어버렸다고 털어놨다. 천천히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저 한순간에 바보가 된 것마냥, 갑자기 까먹어버렸다고. 그녀는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최근 보라색으로 ..
바다 망령의 숨(2022.4) 추위. 크리스마스가 지나자마자 불쑥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날은 좋지 않았다. 거리가 쓰레기로 가득했기 때문에, 실내에 한참 박혀 있었다. 축제를 벌이지 않은 몸으로 한겨울을 맞았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러서 불현듯,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의견에 지나지 않은지 의심했다. 나는 의견이다, 하고 말을 내뱉어 보았다. 내가 지금, 여기 있음은 진리가 아니라고. 오늘 내 말 상대는 차디찬 공기였으며, 입김이 마스크 너머로 퍼져 허공에 짧은 자취를 남겼다. 나는 일을 마치고 직장을 나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두껍지는 않았다. 보풀이 많이 일고, 주머니가 양 옆으로 큼직하게 달린 못생긴 코트였다. 겨울 내내 이것으로 버텼다.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옷을 사..
사생활(2023.6) 방 안으로 그가 들어왔다. 문을 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창문까지 활짝 열었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의 창문을 열었다. 그는 두 개의 벽을 차지하고 소설과 철학서로 가득한 서가로 손을 뻗었다. 책 대신 꺼내든 것은 인센스. 곽에는 절 향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세속을 초월하는 것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 향을 가장 좋아했다. 어쩌면 세속과 초월 사이에 구분선이 없다고, 그렇게 믿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며 일상을 살았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시공으로부터 넘어와 서울을 초토화시키는 고지라. 그는 종종 전후 일본에서 나온 영화를 보러 영상자료원이나 아트 시네마를 찾았다. 본드 스트리트에서 꽃을 사는 클러리서 댈러웨이. 버지니아 울프를 그는 언제나 감..
인물 스케치: 온마루(2023.5) 마루는 쾰른의 밤거리를 배회한다. 타국의 골목길은 아무리 익숙해지고 싶어도 언제나 낯설기만 한 미로이다. 만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루는 실시간으로 데이팅 어플을 들여다보며 마찬가지로 근처를 배회하는 여자들을 찾고 있다. 딱히 비극적이지도, 희극적이지도 않은 그 모습이 매사에 진지한 마루에게만큼은 희랍의 비극인 양, 동시에 끔찍한 희극인 양 느껴진다. 자신은 냉정하기 그지없어야 할 플라톤의 아들인데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이 비극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고작 성욕이라는 점이 희극이다. 마루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린다. 몇 분 전 추파를 던져봤던 여자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녀는 세 블럭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바에 있다. 마루는 그리로 걸음을 재촉한다. ..
라 누벨 마리(2022.9) 라 누벨 마리 아담한 식당이었다.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을 에메랄드 색 벽지가 따스한 빛깔로 둘러싸고 있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종업원이 나에게 메뉴를 가져다주면서 설명해줄까요? 라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가 무엇을 먹을지를 알고 있었다. 치즈와 감자를 섞어 걸쭉하게 만든, 알리고란 이름의 프랑스식 요리였다. 삼 년 전, 무라사키 하나라는 이름의 여행 작가의 책에서 알리고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끈적하지만 잘 끊어지고, 황금빛이지만 구수하고, 먹다 보면 든든해지는 것을 넘어 듬직한 것이 뱃속에 들어차는 기분이라고 무라사키는 썼다. 듬직한 것을 먹는다는 그 기분을 궁금해한 지가 무려 삼 년이었다. 궁금증은 오랜 시간 환상의 입구가 되어주었다. 나는 직장의 점심 시간에 동료와의 수다나 간식..
라파와 줄리(2022.12)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22. 짧은 소설로 감상을 갈음한다. 라파와 줄리 라파는 빈에 사는 스무 살의 소년으로, 키가 훤칠하고 몸은 아주 깡말랐다. 그는 레몬색 반팔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버는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관광객들이 빈에 대해 품어주는 환상의 덕에 그의 벌이는 불안정할 뿐 아주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그의 특기는 아마추어답지 않게 깔끔한 더블스톱으로, 그가 두 현을 동시에 켜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지갑에서 하나둘씩 동전을 꺼내보인다. 동전이 짤랑거리는 소리는 라파에게 반가운 반주이다. 라파의 버스킹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오후에는 15시부터 17시까지 도시의 가장 더운 시간을 피해 진행된다. 12시부터 15시 사이에 라파..
석류인간(2022.8) 문청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지만, 소설을 쓰는 재미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편안한 마음으로 취향과 논증과 위로를 주고받는 일의 소중함이 더 큰 요즈음이다. 이런 선호 체계 하에서 창작에 대한 내 욕망은 어디쯤 위치 지어져야 할까. 아직 배가 덜 고프고, 목이 덜 마르다. 이 사실에 잘못된 것은 없음을. “영지야, 나와 결혼해 줘. 매주 토요일처럼 매일을 보내고 싶어……” 2012년의 겨울이었다. 그 해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으며, 나는 그것 때문에 하루하루 실망해가던 중이었다. 실망감이 절정에 달했던 12월의 하루, 그 날 저녁의 거리는 폭설이 예고되었었는데도 차로 가득했다. 정말로 폭설이 내리기 전에 빨리 이동하고 싶은 사람들의 무리인 것 같았다. 아니면 직업..
비 오는 날, 생의 조각들(2017.5) 2017년이면 내가 학부 4학년을 통과하고 있었을 때구나.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하면서 꿈을 키웠던 시절의 단편. '모리돈부리'라는 덮밥집에서 사케동을 먹으면서 구상했던 기억이 난다. 언어에 대한 감각, 이를테면 콤마를 어디에 찍는 것이 심미적일지에 대한 관점이 지금과 달라 신기하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 올리는 게 적합해 보인다. 하늘은 남색이고 육지는 따분하다. 미국 중서부의 어느 대형슈퍼마켓에서 사람들은 이전부터 셀 수 없이 사온 물건을 또 쥐고 또 담고 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 일년 전과 마찬가지로 햄과 감자칩과 사과 알이 사람들의 봉지 속에서 등을 동그랗게 만 채로 웅크렸다. 계산대 앞의 캐시어는 표정도 없이 똑같은 행위를 몇백 번째 반복했다. 마트 옆의 1층짜리 상가건물도 따분하기는 매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