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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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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7 끼적끼적 별다른 글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오랜만에 일기를 쓰고 싶은 기분이라 무언가 끼적여 본다. 최승자 시인의 일기들을 읽고 있어서 그 영향을 조금 받은 것 같다. 오늘 하루는 반도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제를 기록해보겠다. 어제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5시 반이었다. 9시 반에 청강하는 수업이 시작되고, 통학하는 데 넉넉잡아 1시간 반쯤 걸리기 때문에 다시 잠을 청하기가 애매했다. 그대로 영차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요새는 외출 준비가 즐겁다. 러쉬에서 산 샴푸에서 나는 제비꽃 향기가 무척 상쾌하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지만 않아도 오후까지 상쾌함이 남을 텐데, 연기 한가운데 오래도록 앉아 있다 보니 2시만 되어도 향은 온 데 간 데 없다. 수업을 듣고 P씨와 컵밥을..
20220912 어떻게 지내세요 요로코롬 벚꽃이 피기 시작했을 때부터, 더위가 한 풀 꺾인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이다. 지금 내가 속해있는 연구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형용사 몇 개 속에 내 마음을 가두고 싶지는 않고, 여러 가지 신변잡기적인 사항들을 나열하면 좋을 것 같다. 눈을 감으면 사람들 하나하나의 얼굴이 또렷하게 그려지고, 저마다의 개성이 탄산 같이 터지면서 마음에 와닿는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 말하는 이상스러운 낙천주의자 분. 같은 닥터마틴 14홀 워커를 사서 신고 다니는, 나의 든든한 관념론 자매님. 그런가 하면 관념론자는 빌런이라고 생각하는 냉철한 분석철학도 분이 계시고. 평소엔 무심한 듯이 굴다, 아프다는 말 한 마디에 곧바로 약을 사다줬던 뽀글머리 분. 피곤하다고 얼굴을 어깨에 비비면 포..
20220320 망중한, 슈만 4월 1일까지 논문을 학과 사무실에 제출해야 한다. 남은 일은 결론과 초록 쓰기, 인용 형식 통일하기, 참고문헌 목록 작성하기 등이다. 새로운 생각을 생산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긴장이 풀어졌다. 느슨해진 마음으로 지난 한 주는 망중한을 즐겼다. 한 주 내내 카뮈를 읽었고, (카뮈를 철학자로 생각해주지 않지만 재미있는) 분석철학도 분을 따라 술자리에 나갔다. 오늘은 9년지기 동아리 선배와 경기 필하모닉의 슈만을 듣고 왔다. 3번 교향곡은 활기찼고, 4번 교향곡은 격정적이었다. 4번 교향곡은 1841년 초연 당시 청중 반응이 좋지 않았어서 실망한 슈만에 의해 개정되었다. 보통 콘서트 홀에서는 그렇게 개정된 버전이 연주된다고 들었다. 그러나 오늘 공연에서 들은 개정 이전의 버전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반..
20220313 대학원생 라이프 잘 사는 이야기도 좀 하고 싶다. 저는 대개 이러고 산답니다. 일상을 공유하는 일은 언제나 부끄럽지만,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욕구도 만만치 않아서.
20220215 Glücksmomenten 삶은 감정들의 바다이고, 나는 이성이라는 부표라도 끌어안고 있기 위해 책을 읽는다. 하지만 파도가 세면 내 왜소한 몸은 집어삼켜지고, 익사를 두려워하고, 끝내 물을 먹을 수밖에 없다. 살아남는다 해도 물 맛은 지독하다. 다음 파도를 예감하며 느끼는 불안도 지독하다. 그럴 때는 지독하지 않았던 순간들을 곱씹으면서 자위하는 수밖에 없다. 삶은 행복한 것이라고. 과거에 내가 미소 지었던 순간들이 있었으므로, 미래에도 그런 순간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앎에 대한 욕망과, 선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성찰하며 살아나가기만 한다면. 나 간신히 살아가고 있거든요. 쉽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20220123 진자운동 네게 무슨 일이 생기든 네 곁에 있을게. 너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긍정할게(이제는 다 괜찮아). 너의 미래도, 그것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든지 간에, 있게 되는 그대로 긍정할게(다 괜찮을 거야.) 네가 해왔고, 하고 있는 행동을 그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함부로 평가하려들지 않을게. 네 글의 독자가 되어줄게. 네 글의 팬이 되어줄게. 네가 무서워 하는 것이 있으면 내가 같이 싸워줄게. 너의 겁에 공감하지만, 같이 휘말리지는 않을게. 어쩌다 온 세상이 네 적이 된다면, 나도 온 세상의 적이 될게. 온 세상이 네 적이 되는 밤. 그 밤에 네가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줄게. 그 다음날. 낮이 되면 커피를 끓여줄게. 결국에는 네가 옳았다고, 너는 옳다고 생각해줄게. 내가 사랑으로부터 기대하는 말들이지만, 사실 나..
20220111 주절주절 멋지게 차려입고 커피숍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다. 배가 고파질 때즈음 인도 음식점에 가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게걸스럽게 난을 해치우고 싶다. 2년 만에 코인 노래방에 가서 자우림의 신곡을 불러보고 싶다. 정말 소박한 꿈들인데도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막상 하루를 저렇게 보내고 나면 너무 들떠서 논문의 소굴로 못 돌아올 것 같다. 반대로 막상 하루를 저렇게 보냈는데도 별로 들뜨지 않아서, 어차피 논문을 다 써도 별 것 없겠구나, 생각할 것 같다. 멋지게 차려입는 대신 싸구려 부츠를 신고 눈을 밟았다. 영향력을 휘두르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없어, 그가 잔을 채우면서 말했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할 때마다 내..
20211208 Kamera 저번 주 토요일에 S가 자신의 카메라를 만질 수 있게 해줬다. 12월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1시간. 사진을 찍는데 뒤편의 바 자리에서 문청으로 보이는 어느 여자가 소설을 필사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시간을 욕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