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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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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사드(Marquis de Sade), <미덕의 불운> 사드(Marquis de Sade), ⟪미덕의 불운⟫, 열린책들, 2011 '사디즘'이란 말의 원류가 된 사드 후작의 소설들을 한 번쯤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해왔고, 마침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번역된 판본이 있기에 구매했다. ⟪미덕의 불운⟫은 온갖 술수로 백작부인이 된 언니 쥘리에뜨와 달리 정직함과 자상함, 타인을 돕고자 하는 마음, 타인을 해치지 않고자 하는 마음, 은혜 입은 사람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 등 거의 모든 미덕을 갖춘 동생 쥐스띤느가 미덕을 발휘할 때마다 바로 그 미덕을 이유로 매번 새롭고 보다 잔인해지는 불운들을 끊임없이 맞이하는 이야기다. 소설은 일종의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어, 쥐스띤느가 아직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언니 쥘리에뜨에게 자신의 인생사를 털어놓는 장면에서 시작한다고 봐도..
하인리히 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뵐, 홍성광 옮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Und Sagte Kein Einziges Wort)⟫, 열린 책들, 2011. 1952년, 가난한 중년 부부의 하룻밤. 독일의. 흔히 사랑은 명랑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표상된다. 무엇보다도 삶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감정으로서 꿈꾸어진다. 그러나 사랑이 가난과 만나면 도리어 절망의 근원이 된다. 프레드 보그너와 캐테 보그너는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괴롭다. 그들은 단칸방에서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다가, 프레드가 아이들을 때리기 시작하자 별거를 감행한다. 프레드가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노동에 지쳐 집에서라도 휴식을 취하려 하지만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을 때리자마자 죄책감에 시달려 그들이 우..
김구, <백범일지> 상편 김구 지음, 이윤갑 주해, ⟪백범일지⟫ 상편,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0 아주 우연한 기회에, 별다른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아서 리뷰를 남기기로 했다. 김구--왠지 그는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지만--의 ⟪백범일지⟫ 상편은 1928년에서 1929년까지, 그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있을 때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는 두 아들들에게 자신의 인생사를 들려주기 위해 쓰인 책이다.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유서를 대하는 기분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자서전인지라 요약 같은 것을 하기도 부적절하고, 다만 내가 느꼈던 바들을 짤막하고 자유롭게 끄적이련다. 1. 김구는 어린시절부터 대범하고 의로운 성격을 품었으며 그것을 평생..
배수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배수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난다, 2015. 배수아의 장편소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가 '알타이의 목동처럼'이란 표현을 포함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구매했을 때, 나는 내가 이전엔 단 한 번도 여행기를 사서 읽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전형적인 여행기가 아닌 것으로 치자.) 직접 여행을 가기 전 실용적인 정보가 담긴 가이드북은 몇 권 구매했었지만, 일반적으로 타인이 여행에 가서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해 별다른 관심 없이 살아왔던 것 같다. 다만 이번에는 그 타인이 내가 동경하는 작가였을 뿐이다. 그 동경을 계기로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좋은 여행기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매우 애매하고 역설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믿는다. 좋은 여행기는 독자..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이탈로 칼비노, 이현경 옮김, ⟪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2014 (표지 디자인이 완벽하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의 원숙함은 아직 엿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칼비노의 젊음 그리고 좌파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고뇌와 연결지어 생각할 경우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수작이다. ⟪반쪼가리 자작⟫은 시작부터 풍자로 가득한 어른용 동화다. 사춘기의 문턱에 다가선 어느 소년의 시선에서 그가 속해있는 테랄바 가문의 자작의 굴곡진--문자 그대로 반토막난--생을 담고 있다. 메다르도 자작은 전쟁에 대한 별다른 두려움도 없이 호기롭게 십자군들의 전장에 나갔다가 정면으로 대포를 맞고는 몸의 반쪽을 잃는다. 반쪼가리가 된 자작은 공교롭게도 마치 하이드처럼 인간의 악만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의 본성을 따라 자작은..
페터 한트케, <어느 작가의 오후> 페터 한트케, 홍성광 옮김, ⟪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 책들, 2010 '작가'라는 직업에 로망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가진 로망은, 모든 로망이 그렇듯 키치하지만 다음과 같다. 작가는 여유롭게 늦잠을 잔 뒤, 옥색의 커튼 사이로 서서히 드세지기를 준비하는 햇빛을 느끼며 하루의 첫 숨을 고른다. 기지개를 편 뒤 침실을 나서면 부엌에서는 이미 함께 사는 동료 작가, 또는 동료 철학자, 또는 애인이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오전엔 식욕이 왕성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먹는 부어스트를 한 덩이 그리고 오렌지를 두 슬라이스 뺏어먹는 것으로 만족한다. 잘근잘근 먹을 것을 씹으며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좁지만 아늑한 공간에 가구들이 정확히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에 안정감 있게 붙박..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배수아 옮김, ⟪G.H.에 따른 수난⟫, 봄날의 책, 2020 '장편은 서사, 단편은 인물'을 무의식중에 공식처럼 생각하며 지냈던 것 같다. 손보미 소설가의 단편이 서사와 서스펜스로 넘쳐나고, 오정희 소설가의 (하나뿐이었던) 장편이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 것을 어쩌면 의도적으로 망각한 채로. 그런데 ⟪G.H.에 따른 수난⟫은 저 공식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처음부터 없었던 것마냥 무화시킨다. ⟪G.H.에 따른 수난⟫에는 서사랄 것이 없다. 가정부가 자신 몰래 치운, 자기 집에 속한 방에서 바퀴벌레와 마주하는 것, 그 바퀴벌레를 죽이는 것, 그리고 벌레의 사체에서 배어나온 하얀 체액을 섭취하는 것이 240쪽 남짓 되는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부다. 그렇다고 해서 인물의 성격이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