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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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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른하르트, <모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김현성 옮김, ⟪모자⟫, 문학과지성사, 2020. "결국 지쳤어, 피로뿐이야, 그리고 시간표에 따라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에 대한 공포. 정신적 공포. 그리고 극도의 무자비함, 극도의 무자비함, 하고 형은 말했습니다."(211) 베른하르트의 글을 음미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이미지를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영상화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의 인물들은 개성적인 이목구비나 주의할 만한 눈빛, 특별한 머리 색 등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후줄근하고 종종 불길하기까지 한 옷차림 속에 지나치게 쉽게 파묻힌 채, 나쁜 공기에 의하여 육체를 용해 당한 상태로 유령처럼 이승에 대한 저주의 말을 퍼부을 뿐이다. 인물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능력 또한 발휘할 기회가 마땅치 않다...
프란츠 카프카, <꿈> 발췌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김화영 옮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문학동네, 2019. 기억상실증에 걸린 기 롤랑이 전화번호부와 사교계 카드들, 빛 바랜 사진, 어느새 노인이 된 사람들의 안개 같은 기억 속에 웅숭그리고 있는 자신의 과거를 찾아나선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는, 나는 누구였느냐는 물음을 타인들에게 물어가며 오직 행운에 의지해 파리 곳곳을 뒤지는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자신이 다녔(다고 들었)던 학교가 문을 닫았음에 실망하고, 끝끝내 애인 드니즈의 행방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둘씩 손에 쥐게 되면서 자신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 무엇보다 오래된 감정과 재회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삶의 덧없음과 성스러움, 둘 모두에 대한 충전한 인식이라는 모순 위에서..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문학동네, 2021(고려원, 1995의 재출간). "대신에 "난 외로워서 상처를 입었거든" 이렇게 언젠가 말하였다. "나는 애정 속에서 질식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49) 배수아의 문학세계가 어떤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잉태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단편집이다. 등단작인 '1988년의 어두운 방'이 실려있다. 작가의 시선은 일관적으로 도시의 여자들에게 향하며, 그들에 대해 일종의 유형학을 수행한다. 도시의 여자들은 결혼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로 나뉜다. 결혼을 한 여자들은 백이면 백, 생명력을 잃는다. "여전히 이태리제 청바지 광고 모델처럼 생기발랄하고 만족하는 듯한 미소를 하고 있어도 옛날의 오래된 사진관에서 빛나는..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김남주 옮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2008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 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59) 서른 아홉 살의 폴은 외롭고, 로제는 작고 남성적인 자유에 취해 폴을 봐주지 않으며, 스물 다섯 살의 시몽은 연민과 욕망에 휩싸여 폴과 사랑에 빠진다. 그런 시몽은 잘생겼고, 맹목적일 정도로 순진무구하며, 결..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김이섭 옮김, ⟪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2001 "학교 선생은 자기가 맡은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는 차라리 여러 명의 멍청이들이 들어오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선생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절제한 인간이 아닌, 라틴어나 산수에 뛰어나고, 성실하며 정직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더 상대방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는가! 선생이 학생 때문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학생이 선생 때문인가! 그리고 누가 더 상대방을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또한 누가 상대방의 인생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더럽히는가!"(142, 강조는 필자) 마을의 수재였던 소년이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엘리트 신학도로서의 길에 오르지만, 신경이 쇠약해진 채로..
백은선, <도움받는 기분> 백은선, ⟪도움받는 기분⟫, 문학과지성사, 2021 화자는 무인 존재가 되고 싶다. 생명을 저주하는 삶이고 싶다. '0'이라는 기호를 동경하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고민한다. 절망, 하강, 몰락, 우울에 대한 열정과 그로부터 따라나오는 역설적인 생기로 넘치는 이 시들을, 단순히 모순으로 취급해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떤 독법을 선택해야 할까. 어쩔 줄을 몰라서 그저 읽고 또 읽었다. 잘 와닿지 않은 구절도, 마음을 날카롭게 찌르는 구절도 모두 수용하려 애쓰며 페이지를 끝까지 넘겼다. 그렇게 내내 혼란스러웠던 마음으로, 아픔과 슬픔으로 가득한 이 시집의 끝에 다다랐는데 어째서 나는 '도움받는 기분'을 느낀 것일까? 그 숱한 아픔과 슬픔을 죄다 통과하고도 어째서? 이전에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박하게 평가..
갈산 치낙, <푸른 하늘> 갈산 치낙, 서경홍 옮김, ⟪푸른 하늘⟫, 수다, 2011. 사람이 성취가 아닌 상실을 통해서 비로소 비약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다. 무겁게 침묵하는 푸른 하늘과, 부산스럽게 새 제도를 쏟아내며 전통문화에 러시아식 정치사상을 혼입하는 사회 사이에 어느 투바 족 유목민 아이가 끼어있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나이지만 형제와의 이별, 할머니의 죽음, 개 아르지랑의 죽음을 거치며 처음으로 실존의 의미를 묻게 된다. 첫째, 누나 토르라아와 형 갈카안이 새로운 공화국의 설립과 함께 의무가 된 초등교육에 참여하기 위해 유르테(게르)를 떠난 일은 아이에게 자신 또한 언젠가는 가족과 유목사회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리라는 불안감을 심는다. 오랜 시간 동안 화폐 문화조차 제대로 정립된 적 없이 오직 양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