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 <믿음에 대하여>
박상영, ⟪믿음에 대하여⟫, 문학동네, 2022. 네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연작소설이다. 이 책의 미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얄미운 상사 배서정부터 시작해서 '요즘 애들'마저 곤란하게 만드는 진짜 '요즘 애'인 윤나영, 방송 일을 시작하게 된 후로 자신의 이미지에 몹시 신경을 쓰게 된 김남준, 사랑에 적극적인 유한영, 광신자인 어머니께 시달리는 임철우까지 모든 인물이 세세하게 구분이 되고 성격이 콕 짚어진다. 둘째, 취재가 바탕이 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현실적이다. 비록 나 자신이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아 정서적인 공감이 가지는 않았지만 사회생활의 고충, 특히 코로나 시대에 회사를 다닌다는 것의 의미가 확 와닿았다. 먼 훗날 누군가 ..
정미경, <프랑스식 세탁소>
정미경, ⟪프랑스식 세탁소⟫, 창비, 2013. 수많은 삶들—출판사 편집장의 삶, 도박 중독자의 삶, 탈북민의 삶, 기자의 삶, 치매 걸린 어머니의 삶, 요리사의 삶—을 탐사하다가 완결 짓기보다는 눈길을 거둔다. 그리고는 장악이 아닌 응시가 서사를 만든다는 것을 증거한다.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백 명의 삶을 들여다 보는 백 개의 눈을 가지는 일일까. 3인칭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다가도, 무척 어렵겠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은 아무래도 반전이 있는 이었다. 서사를 무척 긴장감 있게 이끌어갔다. 그러나 마음에 깊이 남는 소설은 다. 두 인물이 애인관계로 진전되지 않고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친구관계로, 청자와 화자 관계로 남아서 다행이었다.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배수아 옮김, ⟪모든 저녁이 저물 때⟫, 한길사, 2018 가정법이 지배하는 소설이다. 우리가 살 수 있었던 모든 삶들, 바랄 수 있었던 모든 사랑들, 행할 수 있었던 모든 정치들을 현실세계와 가능세계의 교차를 통해 형상화한다. 문학의 형태를 입음으로써 이야기는 현실성과 가능성 사이의 위계를 해체시키고, 둘을 궁극적으로는 분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모든 가능한/현실적인 실존들의 끝은 공통적으로 죽음이다. 사람이 죽지 않는 가능세계는 없다.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냐고 묻는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다. 유대인 혐오, 제1차 세계대전, 볼셰비즘, 독일 통일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등장하기에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해한다. 형식적으로 아주 독특하고 미..
데버라 리비, <알고 싶지 않은 것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데버라 리비, 이예원 옮김, ⟪알고 싶지 않은 것들⟫, 플레이타임, 2018. / 버지니아 울프, 공경희 옮김, ⟪자기만의 방⟫, 열린 책들, 2021. '작가의 탄생'을 주제로 11월까지 소설을 쓰려고 해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읽게 된 책 두 권인데, 둘 모두 여성의 글쓰기를 다룬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자유롭게 소설을 쓰고 시를 쓰고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진지하게 바랐지만, 데버라 리비가 우리로 하여금 단지 '목소리를 크게 내도 된다'고 말해주기 위해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쓴 것을 생각해보면 울프의 바람은 반만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람들에게 그리고 가사일에 방해받는 거실이 아닌 나만의 방에서 블로그로, 화상회의로, 혼자만의 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