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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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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영,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우다영,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문학과 지성사, 2020. "세계는 아직 눌리지 않은 건반 같은 거야. 곡의 진행 안에 눌리는 횟수와 순간이 정해져 있어."(, 143)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을 지배하는 소재는 단연 물이다. 아이는 영화의 세트장인줄 알면서도 귀신이 보인다며 강물에 들어가길 망설이고(), 즐거워야 할 물놀이는 세쌍둥이의 맏이를 집어삼킨다(). 결혼식과 장례식이 동시에 펼쳐지고(), 불륜의 죄의식은 호텔 수영장 표면 위로 아른거리는 현무암의 이미지에 집약된다(). 마지막으로, 소설 전체를 통틀어 나에게는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이자 문자 그대로 소설집의 마지막 토막인데, 해파리들이 다이버들의 이마 위로 달라붙으면서 인간이 아마 심해어였을 시절부터 은밀하게 정착되어온 사람의 본래..
토마스 베른하르트, <모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김현성 옮김, ⟪모자⟫, 문학과지성사, 2020. "결국 지쳤어, 피로뿐이야, 그리고 시간표에 따라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에 대한 공포. 정신적 공포. 그리고 극도의 무자비함, 극도의 무자비함, 하고 형은 말했습니다."(211) 베른하르트의 글을 음미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이미지를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영상화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의 인물들은 개성적인 이목구비나 주의할 만한 눈빛, 특별한 머리 색 등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후줄근하고 종종 불길하기까지 한 옷차림 속에 지나치게 쉽게 파묻힌 채, 나쁜 공기에 의하여 육체를 용해 당한 상태로 유령처럼 이승에 대한 저주의 말을 퍼부을 뿐이다. 인물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능력 또한 발휘할 기회가 마땅치 않다...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문학동네, 2021(고려원, 1995의 재출간). "대신에 "난 외로워서 상처를 입었거든" 이렇게 언젠가 말하였다. "나는 애정 속에서 질식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49) 배수아의 문학세계가 어떤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잉태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단편집이다. 등단작인 '1988년의 어두운 방'이 실려있다. 작가의 시선은 일관적으로 도시의 여자들에게 향하며, 그들에 대해 일종의 유형학을 수행한다. 도시의 여자들은 결혼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로 나뉜다. 결혼을 한 여자들은 백이면 백, 생명력을 잃는다. "여전히 이태리제 청바지 광고 모델처럼 생기발랄하고 만족하는 듯한 미소를 하고 있어도 옛날의 오래된 사진관에서 빛나는..
한유주, <연대기> 한유주, , 문학과 지성사, 2018 어떤 것이, 누군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다시 말해,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우선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란 서글픈 것임을 강조해야 한다. 투명한 인간이 아닌 이상 존재는 존재만으로 쉽게 증명되기 때문이다. 존재는 증명되기 위해 자신 이외의 다른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유주의 인물들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확신하고 타인에게도 그 당연한 것을 인정 받기 위해 분투한다. 나아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것을 확정하고 구체화하며 충분히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 상실을 애도하려고도 한다. "나는 있다. 내가 있다(, 157)" 또는 "네가 있다[또는, 있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이 소..
백수린,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전체에 대해: 2020년 현대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었다. 을 좋게 읽었었는데 이번에도 사랑이라는 폭력적일 수도, 달콤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인 여성 인물의 내면을 꼼꼼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는 인상이다. 주인공 희주는 둘째 아이를 가진 뒤엔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는 주부이다. 희주의 욕망은 가족의 테두리를 허물지 않는 선 내로 통제된다. 그녀는 "붉은 지붕의 집(11)"에 사는 삶을 공상하며 그 속에서 남편 그리고 아이들과 바비큐를 먹는 것을 자신의 꿈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이 곧 그 선을 유지하고 수호하는, 심지어는 강화하는 허락된--고로 통제된--욕망의 예다. 그 붉은 지붕의 집이 허물어지고 있을 때 비로소, 집의 골격만 남은 그 터 위에서 희주는 근육질의 인부를 향해 허락받지 않은 자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