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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날드 브루지나, ⟪제 6데카르트적 성찰⟫ 옮긴이의 말 요약 Ronald Bruzina, "Translator's Introduction" to Eugen Fink's VI. Cartesianische Meditation. Teil I(The Sixth Cartesian Meditations), 1995, Indiana University Press. 후설의 조교로서 핑크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고, 의견차 가운데서도 헌신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인트로덕션.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로날드 브루지나에 따르면 1929년 말부터 후설은 같은 해 2월 소르본에서 성사시켰던 강연의 강의록인 ⟪데카르트적 성찰⟫의 근본적인 수정을 결심한다. 본래 ⟪데카르트적 성찰⟫은 독일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출간을 앞둔 채 마지막 퇴고까지 완료된 상태였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하이데거를 ..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안티크리스트⟫, 아카넷, 2013 "선(Gut)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힘의 감정을, 힘에의 의지를, 힘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이다. 악(Schlecht)이란 무엇인가? -- 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을 말한다."(§2, 17) "확신이란 감옥이다. [...]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은 강한 힘의 특성이다. [...] 반대로 신앙을 필요로 하고, 어떤 무조건적인 긍정과 필요로 하는 것, [...] [그것은] 약자에 속하는 것이다. [...] 신앙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가 자기 소멸[Entselbung], 자기 소외의 한 표현이다."(§54, ..
Alexandria / Georgetown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운 일이 생겨 일주일 정도를 누워있다, 굶었다, 미친 듯이 먹다, 웅크리다, 다시 자기만 하면서 지냈다. 하이데거와 면세 담배가 없었더라면 자책을 되풀이하다 제 정신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가 다 같이 나들이를 나가고 싶다고 해서 겨우 힘을 내 집 밖으로 나섰다. 조지 워싱턴의 생가인 마운트 버논에 다녀왔다. 마음은 여전히 편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되새기려고 노력했다. 24시간을 가족들과 꼭 붙어있는 지금, 나의 슬픔은 나만의 슬픔이 아니기에.
한스-게오르그 가다머, <진리와 방법 1> 서론, 1부 1장 1절 요약 한스-게오르그 가다머, 이길우, 이선관, 임호일, 한동원 옮김, ⟪진리와 방법 1⟫ 일부 요약 서론 근대 과학은 인간의 경험과 관련된 인식 및 진리가 자연과학의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철학의 경험, 예술의 경험 그리고 역사 자체의 경험"과 같이 "과학적 방법론의 지배 영역을 넘어서는 진리의 경험"과 관련해서는 그것의 독특하고 "고유한 정당성"이 추적되어야 한다(10). 구체적으로 역사적 전승에 의거한 이해를 통해 "과학의 방법적 수단으로는 검증될 수 없는 진리가 개현되는 경험 방식들"을 소화해야 하는 것이다(10). 예를 들어 우리는 철학의 고전적 텍스트를 이해함으로써, 과학으로는 깨우칠 수 없는 진리에 가닿는다. 요컨대 가다머는 자연과학과 차별화되는 정신과학만의 인식과 진리의 개념을 정..
Boston 20220623 원래는 22일 저녁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비행기가 8시간 남짓 연착되는 바람에 새벽 4시 반이 넘어서야 보스턴에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위탁한 수하물이 D.C.를 아예 떠나지도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 했건만 빌린 에어비앤비의 문마저 열리지 않아서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아침 8시까지 꼬박 하룻밤을 새웠다. 9시에 바로 독일어 시험이 있었기 때문에도 스트레스가 컸지만, 중간에 엄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실랑이들이 유달리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철학 공부를 하더라도 교수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가, 그러면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꾸라는 말을 듣고 그에 예민하게 응수하고 만 것이다. 그 대화가 어찌저찌 마무리된 뒤에는 위탁수하물의 행방과 에어비앤비 출입과 관련한 나의 ..
비 오는 날, 생의 조각들(2017.5) 2017년이면 내가 학부 4학년을 통과하고 있었을 때구나.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하면서 꿈을 키웠던 시절의 단편. '모리돈부리'라는 덮밥집에서 사케동을 먹으면서 구상했던 기억이 난다. 언어에 대한 감각, 이를테면 콤마를 어디에 찍는 것이 심미적일지에 대한 관점이 지금과 달라 신기하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 올리는 게 적합해 보인다. 하늘은 남색이고 육지는 따분하다. 미국 중서부의 어느 대형슈퍼마켓에서 사람들은 이전부터 셀 수 없이 사온 물건을 또 쥐고 또 담고 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 일년 전과 마찬가지로 햄과 감자칩과 사과 알이 사람들의 봉지 속에서 등을 동그랗게 만 채로 웅크렸다. 계산대 앞의 캐시어는 표정도 없이 똑같은 행위를 몇백 번째 반복했다. 마트 옆의 1층짜리 상가건물도 따분하기는 매한..
District of Columbia 2 무척 잘 먹고 있다. 외식을 자주 하지 않아서 거의 집에서만 챙겨먹는데도 살이 쪄서 돌아갈까 봐 걱정이다. 김치 대신 올리브를, 밥 대신 계란프라이를 주식으로 삼고, 내 몸통만한 레이즈 감자칩을 (지금도) 먹고 있다. 내 유학생활의 청사진이 그려지는 기분이다. 단기임대한 집에 식기세척기가 있어서 한국에서와 달리 설거지 걱정 없이 온갖 식기류를 꺼내 쓸 수 있는 것도 편하다. 한국에서는 믹스커피 따위를 마실 때, 뜨거운 물을 붓고 난 후 컵을 단순히 살살 흔들거나 포장지로 커피를 저었었는데, 여기서는 아무 생각 없이 티스푼으로 커피가루를 듬뿍 뜨고 휘젓기까지 할 수 있다. 설거지를 하는 일이 손목에 부담이 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사소하지 않은 축복이다. 커피는 세이프웨이라는 식료품점에서 5달러짜리 인스턴..
District of Columbia 1 잔여시간 5:00.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사랑스러운 S가 지난 해 생일에 선물해주었던 분홍색 노트에 첫 글자들을 막 새겨 넣어보고 있다. 시간이 너무 잘 가서 무서울 정도다. 이륙 즈음의 멍하고 혼미한 감각을 유도제 삼아서 바로 잠에 들었고, 기가 막히게 점심 때에 맞춰 깨어났다. 제육쌈밥이 아닌 미국식 소고기 스튜를 고르면서, 내가 이 여행에 큰 기대를 걸고 있거나 적어도 달콤한 인상을 가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밥을 먹고 나서는 블랙커피를 연달아 두 잔 마셨다. 그런 다음 독일어 공부를 잠깐 하다가 프루스트를 꺼냈다. 사교계 신사 스완과, 지저분한 소문을 꼬리처럼 달고 사는 오데트가 불장난 같은 것을 시작했다. 악명에 비해 오데트는 꽤나 사랑스러웠으며, 반면 스완은 그에 대한 다른 인물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