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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District of Columbia 1

 잔여시간 5:00.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사랑스러운 S가 지난 해 생일에 선물해주었던 분홍색 노트에 첫 글자들을 막 새겨 넣어보고 있다. 시간이 너무 잘 가서 무서울 정도다. 이륙 즈음의 멍하고 혼미한 감각을 유도제 삼아서 바로 잠에 들었고, 기가 막히게 점심 때에 맞춰 깨어났다. 제육쌈밥이 아닌 미국식 소고기 스튜를 고르면서, 내가 이 여행에 큰 기대를 걸고 있거나 적어도 달콤한 인상을 가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밥을 먹고 나서는 블랙커피를 연달아 두 잔 마셨다. 그런 다음 독일어 공부를 잠깐 하다가 프루스트를 꺼냈다. 사교계 신사 스완과, 지저분한 소문을 꼬리처럼 달고 사는 오데트가 불장난 같은 것을 시작했다. 악명에 비해 오데트는 꽤나 사랑스러웠으며, 반면 스완은 그에 대한 다른 인물들의 박한 평가에 실제로도 어느 정도 들어맞았지만, 생각보다 나 자신과 닮은 구석들이 있어 소설 내의 여론에 동조하기가 꺼려졌다. 성적인 욕망이란 어리석은 동시에 조금은 불쌍한 무언가이다. 중간에 스완이 음악의 본질을 헤아리는 부분에서 기분 좋은 충격을 느껴, 뒤늦게 헤드셋을 쓰고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슈만과 바흐, 비제의 내가 잘 모르는 곡들 사이를 헤맸다. 결국에는 리스트의 리베스트라움에 안착했는데, 음질이 너무 나빠서 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마치 베니스의 풍경화가 담긴 완성된 퍼즐을 마침내 부술 요량으로 탈탈 털어낼 때, 그 조각들이 정해진 순서 없이 불규칙한 리듬으로 딱딱하게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잔여시간 3:59. 뒷자리로부터 컵라면 냄새가 넘어오고 있다. 슬슬 배가 또 고파졌다. 토마토가 들어간 샐러드 국수에, 김이 살짝 빠져 부담스럽지 않은 콜라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착륙까지 세 시간 남짓만이 남아있었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렀고, 예전의 장거리 비행들에 비해 지루하지도 않았다. 뭔가를 잔뜩 싸왔기 때문이었는데 프루스트에 이어 레비나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면서 정작 머릿속으로는 (레비나스 최대의 적) 하이데거 생각을 했다. 현상학적 존재론이라는 게 형용모순이 아닐 수 있을까? 내가 현상학을 너무 후설 식으로, 일종의 인식이론으로만 여겨서 생기는 속좁은 의문인 걸까?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후설에게도 존재론이 있었다. 초월론적 환원이란 존재에 대한 모든 개입을 다만 임시적으로 철회함으로써, 오히려 존재의 타당성을 제대로 복권시키는 방법론이라는 앎이 내가 석사논문을 쓰면서 얻은 최고의 수확이었다. 그렇다면 인식론과 존재론이 서로 분리된 탐구영역이 아니라, 전자에 입각해서만 후자가 비로소 가능한 것은 아닌지. 왜냐하면 어쨌거나 그것이 인식되는 한에서만 존재를 논할 수 있기 때문에. 또는... 그렇게 일단은 아무런 비판적인 검토도 가하지 않는 채로 생각의 급류에 올라탔다. 얼마 전부터 하이데거 스터디에 반갑게 껴주신 H씨께서, 구조주의자들은 지성을 통해 현상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을 교정하려 한다고 말씀해주신 것이 뇌리에 줄곧 남아있던 차였다. 그들에게는 현상학적 존재론이라는 시도가 얼마나 오만한 것으로 여겨질까 가만가만 생각해보니 재미있었다. 근본적인 직관들이 서로 충돌하는 모양새를 구경하는 것만큼 즐거운 (그리고 복장 터지는) 일은 없으니까. 신뢰의 해석학과 의혹의 해석학을 일찍이 섬세하게 대비시킨 리쾨르의 통찰력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다.

 D.C., 무지개 깃발을 내건 유대교 회당 바로 옆. 7월 초까지 머무를 집의 위치였다. 머리가 짧고, 허리가 둥근 이웃 아주머니께서 로비 안으로 짐을 옮기는 일을 도와주셨다. 꼭대기인 5층까지 올라가야 했는데,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옆으로 열리는 형태가 아니라 경첩이 달린 밀고 당기는 문이었어서 신기했다. 언니가 준 노란 슬리퍼를 신고 벽이 연두색으로 칠해진 방에 짐을 풀었다. 쉬러 온 것치고는 독서 욕심을 너무 많이 낸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쪼록 여기 있는 동안만큼은 충전에 온 뜻을 두고, 부정적인 생각을 피하고, 용기와 자기사랑으로, 희망으로 똘똘 뭉쳐보자. 왠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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