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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하인리히 뵐, <천사는 침묵했다> 발췌

하인리히 뵐, 임홍배 옮김 ⟪천사는 침묵했다⟫, 창비, 2019.

번역이 매끄럽다

 전쟁 직후 독일의 폐허를 응시하는 책. 주옥 같은 구절들이 많은데, 손목이 슬슬 아파서 두 부분만 옮긴다. 차례대로 사랑을 집어삼키는 피로를 다루는 93쪽, 1948년의 독일의 본질을 꿰뚫어버리는 듯한 144-5쪽.


 "나와 함께 있어줘." 이렇게 말하고서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키스를 하자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그녀를 놓아주자 그녀가 말했다. "아냐, 이러지 마. 날 놓아줘. 너무 피곤해서 죽을 지경인데,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고. 배도 고파, 너무너무 배고파."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 그가 말했다. "당신도 날 사랑해?"

 "그런 것 같아." 그녀가 지친 기색으로 대답했다. "정말이야. 하지만 오늘은 놓아줘. 제발 혼자 있게 해줘......"


  제단은 폐허의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성가대 합창단석은 폭격으로 쓰러져 있었다. 아래쪽 둥근 기둥에 새겨진 늘어서 있던 성상들도 군데군데 파괴되어 있었다. 또르쏘 조각상들이 긁히고 떨어져나가서 부서진 돌이 마치 살아 있는 형상처럼 흉한 불구의 모습으로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 악마적 흉측함은 특히 튀었다. 상당수 얼굴들은 귀나 턱이 없고 얼굴의 균열이 이상하게 일그러져서 우악스런 불구자처럼 히죽거리는 듯했다. 또다른 입상들은 머리가 없고, 석조 목덜미만 몸통 위로 흉측하게 솟아 있었다. 팔이 없는 흉한 입상들도 말없이 애원하며 피를 흘리는 것만 같았다. 바로크식 석고 조각상 하나는 짓눌러 깨뜨린 계란처럼 기묘하게 부서져 있었다. 성자의 손상되지 않은 창백한 석고 얼굴은 슬퍼 보이는 예수회 신도의 갸름한 얼굴 같았지만, 가슴과 배는 깨져서 석고 부스러기가 떨어져내려 입상의 발 언저리에 하얀 조각들이 쌓여 있었다. 깨진 배의 어둠침침한 구멍에서는 응고된 석고가 달라붙은 짚이 삐져나와 있었다.


P.S. 한스와 레기나가 미사용 포도주를 마시면서 결혼을 약속하는 장면을 읽으며, 연인들이 침대 위에서 서로에게 읽어줄 수 있는 단편소설을 언젠가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