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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서론, §1-8 요약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Max Niemeyer Verlag Tübingen, 1967. (별도의 메모가 없는 한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참고: Martin Heidegger, trans. by Joan Stambaugh, Being and Time, SUNY press, 2010. &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2014(이하 ⟪강독⟫)

77ㅑ


서론: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해설[Exposition]

 ⟪존재와 시간⟫의 목적은 존재의 의미를 밝히고, 시간을 존재의미 이해의 지평으로서 해석해내는 것[Interpretation]이다.

1: 존재물음[Seinsfrage] 필연성, 구조 그리고 우위[Vorrang]

§1 존재에 대한 물음을 명시적으로 반복하는 일의 필연성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존재는 진지한 탐구의 주제가 되지 못했으며, 존재에 대한 물음 자체가 망각되었다. 망각의 이유로서 존재물음이 불필요하다는 지배적인 선입견은 고대의 존재론 속에서도 그 맹아가 이미 발견된다.* 하이데거 당대에까지 이어진 독단적인 선입견들은 세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allgemein] 개념이라는 선입견이다. 존재에 대한 앎은 존재자에 대한 모든 앎에 선행해 이미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존재에 대한 정의는 불필요하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특수자들 간의 차이를 모두 포괄하고 유일한) 존재의 보편성은 (특수자들 간의 차이에 따라 다수 존재할 수 있는) 유[Gattung]나 범주의 보편성을 초월한다고 지적한다. 이 특수한 보편성은 존재물음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기는커녕 "'존재'의 개념[을] 오히려 가장 어두운[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3).

 둘째, 존재는 정의될 없는[undefinierbar] 개념이라는 선입견이다. ‘존재’는 존재자와 달리 그것의 유개념과 종차로써 정의할 수도 없고, 그것의 예시가 되는[그것에 귀속되는] 존재자들을 제시함으로써 정의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는 존재가 존재자와 다르다는 것을 알려줄 뿐, 존재가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함의하지 않으며, 오히려 존재를 적극적으로 문제시할 것을 요구한다[auffordern].

 셋째, 존재는 자명한[selbstverständlich] 개념이라는 선입견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그 어떤 인식과 실천 가운데서도 존재가 무엇인지 이미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이러한 평균적인 이해 가능성은 오직 그 불가해성을 증명할 뿐이다.”(4)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에 대해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사태 자체가 불가해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반복[wiederholen, retrieve]해야 할 근본적 필요성[Notwendigkeit]”이 생겨난다(4). 그러나 애초에 존재에 대해 어떻게 물을 것인지와 관련해 적절한 물음설정[물음제기, Fragestellung, formulation of a question]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 존재에 대한 물음의 형식적 구조

 하이데거는 근본물음[Fundamentalfrage]으로서의 존재물음을 올바르게 제기하기 위해서 모든 물음이 공유하는 물음 일반의 “구조계기들”을 나열한다(5). 기본적으로 모든 물음은 물음에서 무엇이 물어지는지를 대답의 실마리로 가진다. 우리는 물음에서 물어지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사전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물음에 착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물음은 구함[Suchen, seeking, 찾음, 추구함]이다. 모든 구함은 구해지는 것으로부터 그것의 사전적인 방향을 가진다. 물음은 존재자를 그것의 그러함과 어떠함과 관련해[in seinem Daß- und Sosein] 인식하면서 구함이다.”(5) 

 이에 따라 첫째, 모든 물음은 물음의 주제[물어지는 , Gefragtes]을 가진다. 둘째, 모든 물음은 주제와 별도로 (그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심문되는 대상[물음이 걸리는 , Befragtes, what is interrogated]을 가진다. 이때 심문의 대상이란 물음의 주제를 이론적인 물음의 맥락에서 “규정적으로 만들고 개념화”한 것이다(5). 셋째, 모든 물음은 물음의 수확[물음으로써 얻어지는 , Erfragtes, what is ascertained]이자 목표를 가진다.*

*무엇에 관해 묻는가, 누구에게 묻는가, 왜 묻는가(J씨)

 존재물음 역시 물음이므로, 위의 구조계기들을 가진다. 존재물음의 실마리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사전적인 존재이해[Seinsverständnis]이다. 우리는 ‘존재’에 대해 앎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존재<인가>’라고 물을 때 저 ‘-이다’에 대해 사전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처럼 하나의 사실[Faktum]로 굳은 “평균적이고 막연한[모호한, vag] 존재이해”—우리에게 친숙한 존재론들이 여기에 포함된다—가 존재물음의 출발점인 동시에, 존재의미의 해명을 방해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5).

 존재물음의 주제[물어지는 것]은 존재이다. 이때 존재자를 존재자로 만들어주는 바로 그것인 존재는 존재자와 구분되어야 한다. 존재물음의 수확은 추후 독자적인 개념화를 요하는 존재의 의미이다.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는 개념은 존재자의 의미를 규정하는 개념과 구별된다. 마지막으로, 존재물음에서 심문되는 것은 존재자 자체[Seiende selbst]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의 존재와의 관련 속에서의[auf sein Sein hin, with regard to their being] 존재자 자체다. 그런데 존재자의 존재의 특성이 거짓 없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존재자가 있는[존재하는] 그대로 드러날 수 있게 해주는 접근법[Zugangsart]이 확보돼야만 한다. 이는 존재물음을 해명함에 있어 우위를 가지는 존재자를 물음의 출발점으로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런데 존재물음 역시 “특정한 존재자의 존재 양태[Seinsmodi]” 중 하나이다(7). 달리 말해, 오직 특정한 존재자들만이 존재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물음이 명시적으로[explizit] 설정되기 위해서는 해당 존재 양태(및 그러한 존재 양태를 내보이는 존재자)에 대한 해명이 요구된다. “존재물음의 수행[Ausarbeitung]은 다음을 일컫는다. 질문하는 존재자를 그의 존재 속에서 투명하게 만들기.”(7) 이 질문하는 존재자, “[여러 존재가능성 가운데서] 물음이라는 존재가능성을 가지는 것”이 바로 현존재[Dasein]다(7).* 현존재가 곧 존재물음상 우위를 가지는 존재자에 해당한다.

*‘da’는 ‘존재의 의미가 비로소 드러나는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이 현존재라는 것은 ‘인간은 존재가 드러나 있는 장소라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존재이해를 갖는 존재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강독⟫, 28)

 이어 하이데거는 자신의 기획이 순환적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왜냐하면 그는 “[특정한] 존재자를 그의 존재 속에서[in seinem Sein] 규정”한 뒤 바로 그것을 근거로 하여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7). 이는 존재물음의 대답이 비로소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을 존재물음의 설정을 위해 미리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그의 존재와 관련하여 규정함은(또는 그저 기술함은) 존재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해명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변호한다. 이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해명을 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수행된 수많은 존재론들이 입증해준다. 이때, 우리가 존재자를 그의 존재와 관련하여 규정할 때 전제하는 사전적인 평균적 존재이해는 그 자체로 “현존재 자체의 본질구성틀[Wesensverfassung]에 속한다”는 것이 중요하다(8).

“Nicht ein »Zirkel im Beweis« liegt in der Frage nach dem Sinn von Sein, wohl aber eine merkwürdige »Rück- oder Vorbezogenheit« des Gefragten (Sein) auf das Fragen als Seinsmodus eines Seienden.”(8)

§3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

 다음으로 하이데거는 존재물음의 “기능, 의도, 그리고 동기”, 소위 쓸모에 대해 묻는다(8). 그에 따르면 존재물음은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이고[prinzipiell] 구체적인 물음”이다(9). 그 이유는 존재물음이야말로 특정한 영역—“역사, 자연, 공간, 생, 현존재, 언어 등”(9)—에 속하는 존재자들을 취급하는 개별 학문들의 근본개념[Fundamentalbegriff]을 앞서 확정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개별 학문의 발전은 단순한 지식의 양적 증가가 아니라 근본개념상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이때 각 학문의 근본개념은 그 개념이 적용될 존재자들을 그것들의 존재의 근본구성틀에 의거해 해석하는[auslegen] 존재론을 통해 형성된다. 그런데 이처럼 특정한 영역과 관련된 영역적 존재론들은 수행을 위해 “실마리[Leitfaden, guideline]”를 요구한다(11).* “존재론적 물음은 실증학문들의 존재적[ontisch] 물음들에 비해 더 근원적이다. 그러나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탐색이 존재의 의미 일반을 해명하지 않고 남겨둔다면 그것[존재론적 물음]은 소박하고[안일하고] 불투명하게 남을 것이다.”(11)

“Alle Ontologie, mag sie über ein noch so reiches und festverklammertes[tightly knit] Kategoriensystem verfügen, bleibt im Grunde blind und eine Verkehrung ihrer eigensten Absicht, wenn sie nicht zuvor den Sinn von Sein zureichend geklärt und diese Klärung als ihre Fundamentalaufgabe begriffen hat.”(11)

*이는 후설에게서 영역적 존재론이 개별 학문을 정초하고, 생활세계 존재론 및 형식적 존재론--여기에는 'etwas überhaupt'의 본질에 대한 학문이 속한다--이 영역적 존재론을 정초하는 사태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후설의 입장에서는 (모든 여타 존재론을 정초하는) 하이데거의 근본존재론조차 인식이론인 초월론적 현상학에 의한 정초가 요구되는 불완전한 학, 토대 없이 부유하는 학으로 보일 것이다.

§4 존재물음의 존재상의(존재적, ontisch)* 우위**

*존재적 = 존재자와 관련된/현실적 vs 존재론적 = 존재의 일반적인 구조와 관련된/존재구조의 이해와 관련된(cf. ⟪강독⟫, 37).

**“현존재라는 존재자가 존재물음에서 갖는 우위”(⟪강독⟫, 37). 존재가능성으로서의 존재물음이 가지는 우위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해되는 것 같다.

 하이데거에게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와 차별화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속에서 그[이] 존재 자체가 그에게 문제시된다는 점에서 존재적으로 탁월하다. 그런데 현존재의 이러한 존재구조에는 그가 자신의 존재 속에서 이 존재에 대해[를 향해] 존재관계를 가진다는 점이 속한다. […] 현존재는 그의 존재 속에서 모종의 방식으로 그리고 명시성을 가지고 스스로를 이해한다. 그의 존재와 함께 그리고 그의 존재를 통해서 이러한 것[스스로의 존재] 자신에게 개시되어있다는 점이 이러한 존재자[현존재]에게 적합하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로 현존재가 가지는 하나의 존재규정성이다. [요컨대] 현존재의 존재적 탁월함은 그가 존재론적이라는 데[그가 존재를 이해한다는 데] 놓여 있다.”(12)*

*“Das Dasein ist ein Seiendes, das nicht nur unter anderem Seienden vorkommt. Es ist vielmehr dadurch ontisch ausgezeichnet, daß es diesem Seienden in seinem Sein um dieses Sein selbst geht. Zu dieser Seinsverfassung des Daseins gehört aber dann, daß es in seinem Sein zu diesem Sein ein Seinsverhältnis hat. Und dies wiederum besagt: Dasein versteht sich in irgendeiner Weise und Ausdrücklichkeit in seinem Sein. Diesem Seienden eignet, daß mit und durch sein Sein dieses ihm selbst erschlossen ist. Seinsverständnis ist selbst eine Seinsbestimmtheit des Daseins. Die ontische Auszeichnung des Daseins liegt darin, daß es ontologisch ist.”(12)

 이때 ‘존재론적’이라는 것은 꼭 현존재가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명시적이고 이론적인 탐구인 존재론을 수행함[ausbilden]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현존재는 “선존재론적[vorontologsich]”으로, 이는 “[이론으로서의 존재론을 수행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존재에 대해 [이론 이전에도] 이해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12). 물론 선존재론적 현존재는 단순히 존재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다른 존재자들에 비해 탁월하다.

 현존재가 그와 관계맺는[verhalten] 존재란 ‘실존[Existenz]’이다.* 실존하는 존재자의 본질[Wesen]은 그것의 질료적 무엇임[sachhaltigen Was]이 아니라, “그 자신의 것으로서의 그의 존재로 존재해야 한다[daß es je sein Sein als seiniges zu sein hat]”는 데 놓여 있다(12).**

*Q. 실존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 “Das Sein selbst, zu dem das Dasein sich so oder so verhalten kann und immer irgendwie verhält, nennen wir Existenz.”(12)라는 정의만 놓고 보면, 현존재만 실존의 방식으로 존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예컨대 고슴도치는 자신의 존재와 관계맺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하이데거에게 ‘관계맺음’의 의미는 부연을 요구할 정도로 협소하게 쓰이고 있다. 

cf. ⟪강독⟫은 ‘관계맺음’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문제삼음’으로 해석한다. “실존이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가리킨다. 현존재는 […] 어떻게 것인지 그리고 자신의 삶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고뇌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불명확하게든 명확하게든 이해하고 있음을[존재론적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강독⟫, 37) 그러나 이 역시, ‘문제삼음’을 특별하게 인간적인 태도 또는 행위(e.g. 행위에 몰입하면서도 행위 자체에 대해 반성할 줄 아는 메타적 능력이나, 삶의 일부가 되는 특정한 행위가 아닌 삶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 등)로 재정의하지 않는 이상 실존이 인간에게 고유한 존재 방식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고슴도치가 A 먹이 대신 B 먹이를 고를 때에는 그 역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이데거는 ‘삶의 의미’라는 표현을 적어도 아직까지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

A. 실존은 자신의 존재와의 단순한 관계맺음이 아니라, 언어를 구사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존재자인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와 관계맺음이다(J씨). 이때 관계맺음이란 '여러 존재가능성 가운데서 본래적 가능성과 비본래적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함'을 뜻한다(S씨). 반면 고슴도치는 (적어도 하이데거의 입장에서는) 여러 존재가능성 가운데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기는 하지만, 선택의 지평 또는 가능근거를 문제삼지는 못한다(H씨).

Q. 실존함과 존재론적임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실존함이란 말하자면 그저 자신의 존재와 관계함이고, 존재론적임이란 실존의 여러 양태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를 (선)존재론적으로 이해함인가? 전체와 부분 관계인가?

A. 우선 '실존하는 것'과 '존재론적인 것'의 (외연은 둘 다 현존재지만) 내포는 같을 수 없다. 만일 둘의 내포가 같다면 존재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의 내포까지 같아져버리기 때문이다. 실존함이란 자신의 존재와 관계함, 그것도 존재가능성들의 선택과 관련하여 관계함이지만 존재론적임이란 존재자에 대해 이해함도 포함한다. 단, 하이데거가 '이해하다'라는 술어를 얼마나 넓게 사용하고 있는지가 모호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본질에 대한 규정은 [현존재의 일반적인 무엇임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 현존재가 각자적인 존재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규정이어야만 한다.”(⟪강독⟫, 40)

 “현존재는 언제나 그 자신의 실존을 통해[aus, in terms of], [즉] 그 자신으로 존재할지 아니면 그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을지라는 그 자신의 가능성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한다.”(12) 현존재의 실존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이 될 자신의 가능성을 선택하느냐, 선택하지 않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결정되며, 이러한 결정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다(⟪강독⟫, 38). “여기서 이루어지는 그 자신에 대한 [현실에서 실제로 추구되는 존재가능성과 관련된] 이해를 우리는 실존적[existenziell]이라고 부른다.”(12) 반면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 대한 이해, 곧 “무엇이 실존을 구성하는가[konstituieren]”에 대한 [이론적] 이해는 (실존적이지 않고) 실존론적[existenzial]이다(12).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들의 연관을 우리는 실존이론성[실존성, Existenzialität]이라고 부른다.”(12)* 현존재는 그의 존재적 구조상 자기 자신에 대해 실존론적 분석학을 수행할 수 있다.

*Q.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A. 실존이론성이란 '실존의 구조가 가지는 성격'이다.

 그런데 현존재는 반드시 세계 내에 존재한다. 달리 말해, 세계-내-존재는 현존재의 본질이다. “즉 현존재에 속하는 존재이해는 세계와 세계 내부의 존재자들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고 있다.”(⟪강독⟫, 41)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그리고 다른 존재자에 대한 존재이해를 가지는 현존재의 존재구조는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구조에 대한 존재론의 근거이다.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하면,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학”으로서의 현존재 존재론은 다른 모든 존재론을 발원시키는 “근본존재론[기초존재론, Fundamentalontologie]”이다(13).

Q. ‘현존재가 자신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적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전제)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이 모든 영역적 존재론의 근본존재론이다(결론)’라는 논증이 자체로 타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현존재만이 다른 존재자의 존재를 이해할 있기 때문에, 모든 영역적 존재론은 어쩔 없이현존재에 의한영역적 존재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인가? 이를테면 고슴도치의 존재론이 자신의 뿌리로 인간의 존재론을 가질 필연적 이유가 무엇인가?

Cf. “Die Ontologien, die Seiendes von nicht daseinsmäßigem Seinscharakter zum Thema haben, sind demnach in der ontischen Struktur des Daseins selbst fundiert und motiviert, die die Bestimmtheit eines vorontologischen Seinsverständnisses in sich begreift.”(13)

A. 현존재만이 학문을, 그러므로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론의 가능조건이다(J씨). 그러므로 현존재가 어떻게, 어째서 그와 같은 가능조건이 되느냐에 관한 학인 현존재 존재론은 모든 여타 존재론의 가능조건에 대한 학, 곧 '근본존재론'이다. 단, 현존재를 실마리로 삼아 내린 결론을 어떻게 다른 비-현존재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 즉 현존재가 정말 존재물음에서 탁월한 우위를 점하는지는 재차 의심해볼 수 있다(H씨).

 현존재가 (존재물음을 답함에 있어서) 다른 존재자들에 비해 가지는 우위는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화될 수 있다. 첫째,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들에 비해 존재적으로 우위를 가진다. 왜냐하면 현존재는 “그의 존재 속에서 실존을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13). 달리 말해, 현존재만이 자신의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 둘째, 현존재는 존재론적으로 우위를 가진다. 현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론적인’—존재론을 수행하거나, 선존재론적으로나마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는—존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셋째, 현존재는 자신 이외에 자신과 다른 존재자 역시 이해하므로, “모든 존재론들의 존재적-존재론적 가능조건”이다(13).* 그러므로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보다 먼저, 일차적으로[primär] 심문되어야 한다. 이러한 현존재의 우위는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이해 이전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 및 그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석에 의해 간파되어 있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존재물음에서 물어지는[gefragt] 그것과 언제나 이미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물음이란 현존재가 가지는 존재에 대한 선존재론적 이해를 철저하게 밀어붙이는 일[die Radikalisierung]과 동일하다.

*Q. ‘(영역적) 존재론의 존재적 가능조건’과 차별화될 ‘(영역적) 존재론의 존재론적 가능조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A. 전자는 존재론이 있을 수 있는 조건으로서 '현존재가 있음'이고, 후자는 존재론(의 존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서 '현재가 존재물음을 수행함' 또는 '현존재가 존재론적임'이다.


2: 존재물음 수행의 이중과제 / 탐구의 방법과 개괄(Aufriß)

§5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위한 지평 발굴(노출, Freilegung)로서의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학(Analytik)

 현존재가 곧 존재물음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심문되어야 할 대상임은 밝혀졌지만, “이해하는 해석 속에서”(15) 현존재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는 아직 답변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다.* 우리들 자신이 현존재이기 때문에 현존재는 우리에게 존재적으로 가장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그 이유로 현존재는 존재론적으로 가장 먼 것이다.”(15) 이는 “세계이해의 존재론적 되돌아-비춤[Rückstrahlung]”이 현존재의 자기해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16). “현존재는 자신이 관계하는 눈앞의 존재자들에 입각해서, 즉 <세계>[눈앞의 존재자들의 총체]로부터 자기의 존재를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강독⟫, 44-45) 그러므로 현존재는 그것이 “스스로를 그 자신에게 [세계의 존재자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von ihm selbst her, on its own terms]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되어야 한다(16). “구체적으로 말해 해당 접근법은 존재자를 그가 우선 그리고 대개[우선 대부분의 경우, zunächst und zumeist] 어떠한지 속에서, 그의 평균적인 일상성[Alltäglichkeit] 속에서 보여줘야 한다.”(16)

*Q. 하이데거에게 이해(Verstehen)와 해석(Auslegung, Interpretation), 나아가 분석(Analytik)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그러나 “현존재의 일상성의 근본구조”에 대한 현존재에 대한 분석학은 존재물음이라는 보다 상위의 과제에 의해 제한된다.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우선 잠정적이다[vorläufig, preliminary]. 그것[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은 이 존재자의 존재를 그 존재 의미에 대한 해석 없이 단지 비로소 끄집어낼 뿐[herausheben]이다. 그것[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은 도리어 가장 근원적인 존재해석을 위한 지평의 노출을 준비한다.”(16) “그리고 이러한 지평이 획득되고 난 후에 현존재 분석은 다시 더 높고 본래적인 존재론적 토대 위에서 반복되어야만 한다.”(⟪강독⟫, 47)

Q. 하이데거에게 해석의 ‘지평’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A. das Vorwissen.

 그렇게 노출되는 존재 일반에 대한 해석의 지평이자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시간성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가져오면 시간은 “현존재 일반이 존재와 같은 것[so etwas wie Sein]을 그로부터 비명시적으로[unausdrücklich] 이해하고 해석하는 그것”, 즉 “존재를 이해하는 현존재의 존재로서의 시간성을 통한[aus der Zeitlichkeit, in terms of temporality] 존재이해의 지평”이다(17). 하이데거는 자신의 시간성 분석이 통속적[vulgär, common] 시간이해—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된 “시간을 ‘지금이라는 시점들의 연속’으로 보는” 이해(⟪강독⟫, 47)—와 관련된 베르그송 등등의 오류를 종식시켜줄 수 있으리라 자신한다.

 물론 시간은 그것에 대한 소박한[naiv] 이해 하에서도 존재론에서 또는 존재적으로[현실적으로] 존재자들의 서로 다른 영역(e.g. 시간적 존재자 vs 비/초시간적 존재자 등)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어떻게, 어떤 권리를 가지고 시간이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해 왔는지, 어떻게 “시간의 소박하게 존재론적인 사용 속에서 그것[시간]의 본래적인 가능한 존재론적[존재이해와의] 연관성이 표현되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제대로 탐구된 바가 없다(18).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토대로, “올바르게 보아지고 해설된 시간현상 속에 모든 존재론의 핵심적 문제설정[Problematik]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18). “만일 존재 일반이 시간으로부터 개념화되어야 한다면[Wenn Sein aus der Zeit begriffen werden soll]” 기존에 비시간적, 초시간적으로 이해되었던 존재자 역시 실질적인[positiv] 의미에서 새로이 ‘시간적’ 성격을 담지하게 될 것이다(18).

 그렇게 비시간적, 초시간적 존재자까지 포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시간적’이라는 표현이 ‘시간 내적인’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하이데거는] 존재와 그것의 성격들 및 양상들이 갖는 근원적 시간규정성을 존재시간적(temporal) 규정성[나아가 존재시간성(Temporalität)]이라고 부르고 있다.”(⟪강독⟫, 48-49)

“[…] nennen wir die ursprüngliche Sinnbestimmtheit des Seins und seiner Charaktere und Modi aus der Zeit seine temporale Bestimmtheit. Die fundamentale ontologische Aufgabe der Interpretation von Sein als solchem begreift daher in sich die Herausarbeitung der Temporalität des Seins.”(19, 강조는 하이데거)

§6 존재론의 역사에 대한 해체(Destruktion)라는 과제

 시간성은 현존재의 시간적 존재양태로서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의 가능조건이다. 이처럼 “현존재 자체의 ‘벌어짐[일어남, 생기, Geschehen]의 존재구조” (중 하나)를 가리키는 역사성이란 관습[과거로부터 물려받은 ] 현존재에게 그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와 관련된 가능성을 개시[erschließen]하는 동시에 제약한다[regeln] 성격이다(20). 시간적으로 존재하는 현존재는 언제나 그때그때마다 특정한 존재이해에 입각해 존재하는데, 이 이해는 그의 과거에 존재했던 세대가 형성해 놓은 관습적 이해를 다시 형성하는 동시에 그 영향 하에서 형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존재 그의 과거‘이며’ 그의 존재의 방식에서 그렇다[Das Dasein »ist« seine Vergangenheit in der Weise seines Seins]. 이 존재는, 거칠게 말해, 그때그때마다 그의 미래로부터 ‘벌어진다’[aus seiner Zukunft her »geschieht«]. […] [현존재는] 물려받은[überkommen, customary] 현존재 해석 속으로 자라-들어가고 그 속에서 자라-난다. […] 그의 고유한 과거—그리고 이는 언제나 그의 ‘세대’의 과거를 의미한다—는 현존재를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그를 앞서있다.”(20, 강조는 하이데거)

 현존재의 역사성은 역사적 사건들로서의 역사[Geschichte] 가능조건이며, 나아가 전통[Tradition]이 무엇을 어떻게 넘겨주는지[übergeben]를 탐구하는 역사학[Historie] 가능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존재의 역사성 없이는 역사학적 질문도, 역사적 사건의 발견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의 결여는 말하자면 역사성이 그 자체로 ‘결여되어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성의 ‘결여태로[als defizienter Modus] 있음’을 뜻할 뿐으로, 역사성이 현존재의 존재구조임을 오히려 드러내주는 사태다.

“Unhistorisch kann ein Zeitalter nur sein, weil es »geschichtlich« ist.”(20)

 현존재가 역사적으로 존재한다는 이해는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가능성으로서의) 존재물음 또한 역사적이라는 통찰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존재물음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존재물음의 역사가 탐구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존재는 그의 세계에 퇴락해있으며[빠져살며, an seine Welt verfallen, entangled in the world] 그처럼 세속적인 기준에 입각해 스스로를 해석할 뿐만 아니라 전통에도 퇴락해있다. “전통은 그[현존재]로부터 고유한 주도권을, 물음과 선택함을 빼앗아간다[abnehmen].”(21) 전통이 (현재의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넘겨주는지는 심지어 전통 그 자신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전통은 “전수된 범주와 개념들”의 “근원적 ‘원천’에 대한 접근”을 봉쇄함으로써 그것들을 자명한 것처럼 둔갑시키고, 그 유래를 망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듦으로써 “현존재의 역사성을 뿌리뽑는다.”(21)

 전통의 (파괴적인) 영향력은 존재론의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그리스의 존재론의 자장 안에 남아있는 오늘날의 철학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존재 일반을 [이를테면 현존재의 역사성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세계’로부터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와 같은 (비본래적인) 존재이해 가운데서 존재론은 전통에 퇴락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중세 존재론 역시 그리스의 존재론을 체계화한 것이었는데, 근대의 형이상학 및 초월론적 철학에 주요 모티프들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존재론의 역사 일반이 존재물음을 망각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존재물음이 (망각되지 않고 진정으로 수행되기 위해서, 나아가) 자신의 역사를 투명하게 아는 방식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존재물음의 실마리를 따라서(an) 수행되는 [존재론의] 해체”가 요구되며 이 해체는 “존재의 주도적인[leitend] 규정들”을 담지하고 있는 “근원적인 경험들”(에 소급해 되돌아가는 이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22, 강조는 하이데거).

 존재론의 역사에 대한 해체는 기존의 존재론적 관점들을 부정적으로[부정하며] 상대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것들의 한계를 지우는[Grenzen abstecken] 실질적인[긍정적인, positiv] 작업이다. 나아가 이는 다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닌 현대[Heute]와—현대가 존재론의 역사를 취급하는 방식과—관계하는 작업이다. 해체의 초점은 존재에 대한 기존의 해석이 존재를 시간현상과 얼마나 긴밀하게 관계된 것으로 이해해 왔는지, 곧 (진정한) ‘시간성’이 제대로 탐구되었는지에 맞춰져있다.

 ①칸트는 시간을 그것의 현상 자체로부터 탐구한 최초의 철학자였으나, 그의 도식론[Schematismuslehre]은 시간성에 대한 올바른 통찰에 이르지 못했고 그 결과 시간에 대한 탐구를 존재론과 끝내 결부시키지 못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칸트의 실패는 그가 첫째, 존재물음 일반 그리고 현존재 존재론을 관철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둘째,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전수된 통속적 시간이해”에 머물렀기 때문이다(24). 그러나 특히 레스 코기탄스와 관련한 ②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입장 역시 존재자를 (신에 의해) 만들어져있음[피조성, Geschaffenheit]으로 성격규정하는 ③중세의 존재론을 무비판적으로 물려받음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Zufolge dieser doppelten Nachwirkung der Tradition bleibt der entscheidende Zusammenhang zwischen der Zeit und dem »Ich denke« in völliges Dunkel gehüllt, er wird nicht einmal zum Problem.”(24)

 중세 존재론 또한 ④고대 존재론의 존재 이해를 말하자면 답습한 산물이다. 고대의 존재론은 존재의 의미를 “존재론적-시간적 ‘현전성[Anwesenheit]’”인 파루시아 또는 우시아로, 즉 현재라는 시간의 양상과 관련하여 이해한다(25). 고대 존재론은 현존재를 로고스를 가진 동물(zoon logon echon), 곧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 존재의 본질이 말하는 능력[Redenkönnen]을 통해 규정되는 살아있는 것”으로 정의하는데, 이때 말함(legein)은 “[눈앞의 존재로서의] 무언가에 대한 순수한 ‘현재함[Gegenwärtigen]’이라는 시간적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26).*

*“Das legein selbst, bzw. Das noēindas schlichte Vernehmen[apprehension] von etwas Vorhandenem in seiner puren Vorhandenheit […]”(26)

 그러나 고대의 존재이해는 존재물음에서 시간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명시적인 숙지 없이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시간을 여러 존재자들 가운데 하나의 존재자로 취하면서 그것의 존재구조를—그것도 시간 자신에 대한 암묵적이고 소박한 이해를 지평 삼아—포착하고자 했다. 고대의 존재이해를 대변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론은 칸트와 베르그송의 시간론(고로 존재론)을 포함해 자신 이후의 시간파악[Zeitauffassung]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에 대하여 본론에서 제시될 해석은 고대 존재론의 기초와 한계를 알게 해줄 것이다. 이와 같은 “존재론적 전승[Überlieferung]에 대한 해체의 수행에서 비로소 존재물음은 그것의 진정한[wahrhaft] 구체성을 획득”, 즉 그 필요성과 그것을 반복하는 작업의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26).

§7 탐구의 현상학적 방법[]

 존재론의 방법론을 (해체의 대상이 되어야 할) 기존의 존재론들의 역사로부터 밝히고자 하는 시도는 부적절하다. 하이데거는 본론에서 수행할 존재론의 취급방식[Behandlungsart]으로서 (관행이 아닌, ‘사태 자체’가 요구하는 대로) 현상학을 택한다. ‘사태 자체로!’라는 표어로 대변되는 현상학은 사변과 가상에 반대(하며 진실에 대한 직관을 옹호)하지만, 그러한 취급 방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특수 또는 특별한지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가 있다. 현상학은 그리스어 ‘파이노메논’과 ‘로고스’의 합성어이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각 단어의 의미 그리고 그것의 합성[Zusammensetzung] 결과의 의미 순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Q. 근대에 시작된 ‘현상학’의 이념적인 의미를 고대 그리스어에 대한 이해를 통해 확정하는 접근은 정당한가?

A.현상의 개념

 하이데거는 자신의 그리스어 지식을 총동원해 ‘파이노메나’, 그리하여 ‘현상[Phänomen]’을 ①“-자신에게서[자신만으로]-스스로를-보여주는 [das Sich-an-ihm-selbst-zeigende, what shows itself in itself], 열려밝혀진 [das Offenbare, the manifest]”으로 확정한다(28). 그리스인들에게 현상은 “백일하에[am Tage] 놓여 있는 것 또는 속에 들어와질 수 있는 것의 총체”로서 존재자들을 가리키는 ‘타 온타’와 동일시되기도 했다(28).

 그러나 존재자는 어떻게 보아지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아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한 스스로-보여줌[Sichzeigen]을 우리는 어떠해보임[Scheinen]이라고 부른다.”(29) 이때 현상은 ②그러그러하게 겉으로 보여지는 , ‘그래보이는, ‘가상’[das so Aussehende wie, das »Scheinbare«, der »Schein«]”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29). 이 가상이 진상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에 대한 ①의 정의는 ②의 정의를 비로소 가능케 하는 근원이다.

 중요한 것은 ①과 ② 모두 ‘현출[나타남, Erscheinung, appearance]’ 또는 ‘한갓된[bloß] 현출’이라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상과 달리) 현출은 언제나 무엇의 현출이며, 그 무엇은 스스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여주는 다른 무엇을 통해 스스로를 알린다[sich melden, announce itself]. 달리 말해, (현출함을 가능케 하는 매개자의) 스스로를-보여줌과 (그를 통한) 현출함 자체인 스스로를-알림은 구분되어야 한다. 현출은 (②가상으로서의 현상과 마찬가지로, ①진상으로서의) 현상을 전제하고 그에 의존하지만, 현상은 현출이 아니기 때문에 현출의 개념을 토대로 현상을 정의해서는, 나아가 현상학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단, 30쪽의 마지막 문단에서 하이데거는 현출이 ②가상이 되는 가능성을 논한다.

 결정적으로 ‘현출’은 현상의 정의에 쓰이기엔 그것이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지가 지나치게 애매하다. ‘현출’은 한편으로 “스스로를-보여주지-않음으로서의 스스로를-알림”이기도 하고, 그렇게 “알리는 것 자체”이기도 하다(30). 심지어는 그저 (현상과 같이) ‘스스로를-보여줌’을 가리키기도 한다. 게다가 만일 현출에서 스스로를 알리는 것이 결코 열려밝혀질 없는 것일 경우 현출은 “산출, 또는 산출된 것[Hervorbringung, bzw. Hervorgebrachtes]”이기는 하지만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산출물은 아닌 한갓된 현출로 이해된다(30). 이 ‘한갓된 현출[함]’은 (가상적인) 어떠해보임[scheinen]이 아니라 이를테면 칸트의 (물 자체와 결부된) 현상 개념에서와 같이 “스스로를 현출 속에서 숨기는[verbergen] 것의 [자신을] 알리는 발산[meldende Ausstrahlung]”이다(30, 강조는 하이데거).

Q. 한갓된 현출과 가상 사이의 차이, <한갓된 현출-(이를테면)물 자체> 관계와 <가상-진상> 관계 사이의 차이는 정확히 무엇인가?

A. 한갓된 현출과 물 자체는 상이한 대상성들인 반면, 가상과 진상은 하나의 동일한 대상성의 두 면모다. 한갓된 현출은 (다른 현출과 달리) 자신이 현출시켜주는 것(e.g. 물 자체)을 '있는 그대로', 즉 본래적으로 드러내주지 못한다. (그 현출시켜주는 것의 본성으로 인해.)

 이처럼 ‘현상’은 일반적으로 (소위 진상의) 현상, 가상, 현출, 한갓된 현출 모두를 가리키는 데 쓰이지만, 이 중 가상과 현출은 (한갓된 현출까지 포함해)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상(의 형식적 의미=①)에 의해 정초되어있다[fundieren]. 그런데 현상 개념을 그것의 형식—현상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무엇인지와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것—이상으로 현상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존재자가 현상으로서 말걸어지는지[ansprechen, address]”, 나아가 “스스로를-보여[주는 현상]이 하나의 존재자인지 아니면 존재자의 존재성격인지”를 대답해야 할 것이다(31). 하이데거는 C에서 이 문제로 되돌아온다.

B. 로고스의 개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로고스’의 개념은 단순히 여러 개의, 심지어는 상충하는 의미들—“이성, 판단, 개념, 정의, 근거, 관계 등”(⟪강독⟫, 61)—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상이한 의미들은, 그에 대한 기존의 이해 및 번역이 간과한 것과 달리, ‘로고스’의 보다 일차적인 의미에 의해 정초되어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로고스의 일차적인 의미는 (명제적 진술이 아니라) 아포파이네스타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서의아포판시스이다. “로고스는 무엇인가를 보게 해주는데(파이네스타이), 그 무엇이란 [말에서] 그에 대해 말해지는 것[worüber die Rede ist] 그리고 말하는 자(매개자) 위해 말해지는 것”이다(32, 강조는 하이데거). 한 마디로 로고스는 “지시하는[제시하는, aufweisende] 보게-[Sehenlassen]의 의미에서 열려밝혀줌[Offenbar-machen]”이다(32). 이어 하이데거는 ‘아포판시스(보게-함으로서의 말함)’로서의 ‘로고스’가 어떻게 ‘로고스’의 다른 부차적인 의미들을 정초해주는지 살펴본다.

 첫째, ‘아포판시스’로서의 로고스는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음성으로 이루어지는 ‘대화[Sprechen]’의 성격을 가진다.

 둘째, ‘아포판시스’로서의 로고스는 언제나 “[①]무언가를 [②]무언가로서 보게 함”이기 때문에, ①과 ② 사이의 둘이-함께-있음[Beisammen]으로서 ‘신테시스’의 구조형식을 가질 수 있다(33).

 셋째, 로고스는 ‘아포판시스’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비로소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그리스어로 진리에 해당하는 알레테이아개념의 일차적 의미는 일반적인 이해에서와 달리 (판단과 사태 사이의, 표상과 대상 사이의 상응, 곧) ‘일치[Übereinstimmung]’가 아니(라 사태 자체가 숨겨지지 않고 드러남이)다. 이에 따라 ‘참됨[Wahrsein]’(을 가능케 하는) ‘알레테우에인(alētheuein)’이란 “말이 그에 대해 존재하는 존재자를, 아포파이네스타이로서의 레게인[말함] 속에서[,] 그것[존재자]의 숨겨짐[Verborgenheit]으로부터 꺼내고 그것을 숨겨지지 않은 것[Unverborgenes]으로서 보게 함, [즉] 발견함[entdecken]이다.”(33, 강조는 하이데거) 반면 ‘거짓됨[Falschsein]’(을 가능케 하는) ‘프세우데스타이’란 “은폐함[verdecken]의 의미에서의 속임[Tauschen]”으로, 무엇인가를 보게 하되 그 “무엇인가가 아닌 것으로서 그 무엇인가를 내어줌”에 해당한다(33, 강조는 하이데거).

 요컨대 그리스 철학에서의 진리 개념은 근원적으로 ‘판단[Urteil]’(으로서의 로고스)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로고스는 [진리를] 드러냄의 일정한 양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로고스는 진리의 일차적 장소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강독⟫, 63) 그리스적 철학에서의 참됨은 판단이 아닌 “아이스테시스, 곧 “무언가에 대한 단적인[schlicht], 감성적 인지[수용, Vernehmen]”에서 온다. 이러한 사유의 연장선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의 가장 단순한 존재규정들인 범주들을 단적으로 관조하면서 인지하는” 노에시스가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참”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강독⟫, 64). “노에인은 결코 은폐할 수 없고, 결코 거짓될 수 없”다(33).**

*Q. ‘아이스테시스’와 ‘노에시스’ 사이의 관계는 대립관계가 아니었나? 아무런 설명 없이 연속적으로 병렬되어 있다.

A. 아이스테시스, 노에시스 모두직관'이라는 점에 묶여있고, 이는 후설의 개념화와 상통한다. +  눈앞의-존재의 인식 방식이라는 점에서도 상통한다(H씨).

**2년 뒤 후설 역시 ⟪형식논리학과 초월론적 논리학⟫ 및 ⟪경험과 판단⟫에서 논리적 판단은 반드시 지각과 같은 수용적 직관의 경험을 근원으로 가진다고 주장한다.

 넷째, ‘아포판시스’로서의 로고스는 “무언가를 단도직입적으로 보게 함” 또는 그 무언가를 “인지하게-[허락][Vernehmenlassen]”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이성, 담론의 근거*, (하나가 다른 하나를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관계 및 관계성을 의미할 수 있다(34, 강조는 하이데거).

*Logos —> legein —> legomenon[(아포판시스 기능의 결과로) 지시된 것] = hypokeimenon[근거, 기체] => ratio

C. 현상학의 선개념(Vorgriff)

 그러므로 ‘현상학’의 형식적[formal] 의미는—이 의미는 통속적[vulgär] 맥락에서도 유지되는 것 같다—‘아포파이네스타이 타 파이노메나’, 곧 “스스로를 보여주는 것으로 하여금, 그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보게 [Das was sich zeigt, so wie es sich von ihm selbst her zeigt, von ihm selbst her sehen lassen, to let what shows itself be seen from itself, just as it shows itself from itself]”이다(34). 그러므로 ‘패노메놀로기’는 ‘로고스’를 포함하고 있는 학문의 다른 이름들(e.g. ‘Theologie’)과 달리 학적 탐구의 실질적 내용[Sachhaltigkeit]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지시[Aufweisung]와 직접적 증명[Ausweisung]”을 통해 대상을 탐구하는 방법을, 곧 무엇을탐구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탐구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적[deskriptiv] 현상학’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다.

“Formal berechtigt die Bedeutung des formalen und vulgären Phänomenbegriffes dazu, jede Aufweisung von Seiendem, so wie es sich an ihm selbst zeigt, Phänomenologie zu nennen.”(35)

 그러나 ‘현상’에 대한 형식적이고 통속적인 이해를 떠나, ‘현상’을 현상학적으로 개념화하고자 할 경우, 이때의 ‘현상’은 “스스로를 우선 그리고 대개 곧장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서 현상학적 작업을 통해 비로소 “명시적인 지시”의 경로를 획득할 수 있는—그러므로 현상학을 요구하는—“숨겨진” 것이다(35, 강조는 하이데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은 존재의 진리라는, (그 자체로) “스스로를 우선 그리고 대개 보여주는 것”으로 정의되는 것의 의미와 근거를 이룬다(35).*

*그러나 현상학은 존재 및 존재자를 올바르게 드러내야 하므로, “사태를 그 자체로 드러낸다는 의미의 형식적이고 통속적인 개념도 현상학적으로 중요하게 된다.”(⟪강독⟫, 68)

 그런데 이렇게 현상학을 요구할 정도로 은폐되고 위장되는[verstellen] 것은—존재물음 자체의 망각에서 보았듯이, 그것도 심각하게 은폐되고 위장되는 것은—존재자이기보다 존재다. 요컨대 현상학을 통해 탈은폐되어야 것은 존재다. “존재론은 오직 현상학으로서만 가능하다.”(35, 강조는 하이데거) 심지어 “현상학적 지성[Verstand, understanding]에서의 현상은 언제나 오직 존재를 이루는 그것이기 때문에 […] 실질적 내용만을 취하면[Sachhaltig genommen] 현상학은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학문—존재론이다.”(37) 마찬가지 견지에서 “현상에 대한 현상학적 개념은 스스로를-보여주는 것으로서의 존재자의 존재, 그 존재의 의미, 변양들 그리고 파생태들”이다(35).* 이와 같은 스스로를-보여줌[현상학적 의미에서의 현상함]이란 결코 현출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출과 달리 현상에서는 현상의 배후에 (스스로는 현출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근원적) 현상을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순수) 현상을 존재에 대한 개입을 의도적으로 철회한 결과로 규정하는 후설의 현상학과 결별하고자 시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지하다시피 현상은 숨겨질 수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은폐된다. 현상은 아예 발견된 적이 없을 수도, 발견되었지만 다시 숨겨져 매장될[파묻힐, verschütten, submerge] 수도 있다. 어떤 매장은 가상에 의해 대체되는 위장[Verstellen, dissimulation or disguise]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이데거는 은폐 가운데서도 이 위장으로서의 은폐가 그에 의한 기만과 오도를 바로잡기가 무척 어렵다는 의미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위장의 경우에서 진상을 대체하는 가상은 그 뿌리가 가려진[verhüllen] 채 (가짜이기는커녕) 정당화가 불필요한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며, 연역의 출발점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한편 현상학적 방법에 의해 근원적으로 직관되었던 개념조차 명제화되자마자 그 근원적 의미가 은폐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개념이 그 본성으로 인해 우연적 은폐보다도 필연적 은폐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학은 언제나 자기비판을 수행해야 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기존에 현상학에 의해 일구어졌던 성과를 철회해야[abgewinnen, wrest] 한다. 존재론으로서의 현상학은 그 “분석을 시작함[Ausgang]”, “현상으로 접근함[Zugang]”, 그리고 “은폐를 뚫고 [Durchgang]” 모두에 대해 진지한 방법론적 고려를 요구한다(36, 강조는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이상의 논의로부터 ‘현상적[phänomenal]’과 ‘현상학적[phänomenologisch]’을 구분한다. ‘현상적[phänomenal]’은 ‘현상적 구조’에서와 같이 “현상과 만나는 방식[Begegnisart]에서 주어지고 해설 가능한[외현 가능한, 들춰낼 수 있는, explizierbar]” 성격을 뜻한다(37). 한편 ‘현상학적[phänomenologisch]’은 “지시* 해설**의 방식에 속하는 모든 것 그리고 이러한 연구에서 요구되는 개념성[Begrifflichkeit]을 이루는 모든 것”이 담지하는 성격이다(37).

*cf. “이때[구성적 성취에 대한 연구에서] 다시금 아무것도 상정되어선 안 되며[, 연구의 대상은 무언가에] ‘걸맞게’ ‘풀이’되어선 안 되고, 도리어 지시되어야 한다. 오직 이를[전제 없는 지시를] 통해서만 저 궁극적인, 궁극적인 것으로서 그 배후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유의미하게 따지고(erfragen) 이해할 것이 없는 그런 세계이해가 만들어질 수 있다.”(Hua XVII, 249) <-> 하이데거: 전제(시간성, 선존재론적 존재이해, 존재론적 존재이해 등) 있는 지시.

**cf. “의식은 방법적으로 탈은폐될[enthüllen] 수 있다.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존재양상성 속에서 꾸려내는[schaffenden] 그것의[의식의] 성취 속에서 그것을[의식을] 직접적으로 [sehen]’ 수 있는 방식으로.”(Hua XVII, 251)

 그러므로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해 묻기 위해 현존재에 대한 근본존재론을 수행함에 있어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적 의미는 해석[Auslegung]”이다(37, 강조는 하이데거). 현존재의 현상학이 요구하는 로고스( 기능)은 존재의 의미와 근본구조를 알려주는[kundgeben] 헤르메네우에인이며, 그에 따라 “현존재의 현상학은 해석학[Hermeneutik]”이 된다(37, 강조는 하이데거).

 이때 ‘해석학’이란 문자 그대로 ①(존재의 의미 및 현존재의 존재구조에 대한) 해석의 작업을 수행하는 학문을 뜻한다. 그런데 현존재의 현상학은 또한 ②“모든 존재론적 탐구의 가능조건들을 관철[ausarbeiten]”(37)한다는 의미, 곧 “모든 영역존재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검토한다는 의미”(⟪강독⟫, 69)에서의 ‘해석학’이기도 하다(37). 마지막으로 현존재의 현상학은 ③“실존의 실존이론성에 대한 분석학이라는[,] 철학적으로 이해할 경우 일차적인 의미”에서 ‘해석학’이기도 하다(38). ③과 관련하여 역사성에 대한 (실존론적) 논구가 진전될 경우, 현존재의 현상학은 ④“역사학적 정신과학들의 방법론”이라는 (딜타이적) 의미에서의 ‘해석학’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해석학이 탐구하는) 존재는 유[Gattung]가 보편적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모든 존재자를 규정하는 보편적인 것이다. “존재 및 존재구조는 모든 존재자를 초월하고 존재자들에 대한 모든 가능한 규정성을 초월한다.”(⟪강독⟫, 69) 그런 의미에서 존재는 “단도직입적인 초월자[das transcendens schlechthin]”이다(38, 강조는 하이데거). 이떄 “초월자로서의 존재에 대한 모든 개시는 초월론적[transzendental] 인식이다. 현상학적 진리(존재의 개시되어있음[개시성, Erschlossenheit])는 베리타스 트란센덴탈리스다.”(38, 강조는 하이데거) 이 연장선에서 심지어 “철학 [일반]은 보편적 현상학적 존재론”이다(38).

“Philosophie ist universale phänomenologische Ontologie, ausgehend von der Hermeneutik des Daseins, die als Analytik der Existenz das Ende des Leitfadens alles philosophischen Fragens dort festgemacht hat, woraus es entspringt und wohin es zurückschlägt.”(38)
 

§8 논의(Abhandlung) 개괄

1부: 시간성과 존재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에 대한 해설로서의 시간에 대한 해설[에 기반한] 현존재 해석

1.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vorbereitend, preparatory] 근본분석

2. 현존재와 시간성

3. 시간과 존재

2부: 시간성의 문제설정을 실마리로 삼는[,] 존재론의 역사에 대한 현상학적 해체의 근본특징들

1. 칸트의 도식이론과 존재시간성[Temporalität]의 문제설정의 전단계로서의 시간[Zeit]

2. 데카르트의 ‘코기토 숨’의 존재론적 기초[Fundament]와 ‘레스 코기탄스’의 문제설정 속 중세 존재론의 전수되어있음[인수, Übernahme]

3. 고대 존재론의 현상적 기반[Basis]과 한계를 분별하기 위한 자료[Diskrimen]로서 시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