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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오이겐 핑크,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적 철학과 동시대의 비평> 요약

오이겐 핑크(Eugen Fink), R. O. Elveton 역,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적 철학과 동시대의 비평(The Phenomenological Philosophy of Edmund Husserl and Contemporary Criticism), 노에시스 프레스, 2000 중. 후설을 공부한다면, 절대 읽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그런 글.

고전적 논문들의 번역 선집.

에드문트 후설의 서문(1933. 6) 후설은 자신의 구성적 또는 초월론적 현상학에 대한 (피상적이지 않은) 진지한 비판에 응수하는 작업을 제자 오이겐 핑크에게 맡긴다. 후설에 따르면 이 글은 "내가 전적으로 나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거나 내 신념으로서 공공연하게 인정할 수 없는 문장은 하나도 담고 있지 않다."(71)

본문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은 크게 독단적 직관주의(intuitionism)존재론화(ontologization)라는 비판에 직면해왔다. 첫째, 현상학은 "무매개적으로 주어진 것"이 어떻게 주어질 수 있었는지, 그 자기소여가 얼마나 정당한지에 대한 비판 없이 그것의 인식론적 가치를 독단적으로 맹신한다(72). [경험에서의] 직관이나 자기현출에 비해 논증이나 논리적 근거지움은 인식론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다. "달리 말해, 철학적 진리의 개념은 대응이라는 소박한 이론의 측면에서 정의된다."(74) 그 결과 현상학은 "무엇보다도 아프리오리한 지식의 독특한 성격"마저 경험적인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74). 둘째, 현상학은 지식의 주제를 존재자로 한정하는 (잘못된) 존재론주의(ontologism)에 개입한다(75). 실재적 존재자뿐만 아니라 본질과 같은 아프리오리마저 "현존하는 대상성[객관성]"으로, "명료하고 자기부여하는 직관"의 상관자로 전락한다(75). 그 결과 "의미와 존재, 실재성과 타당성 사이의 깊고 기본적인 차이"가 망각되며, 이념성이 일반적 대상성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평준화된다(75).

 두 비판은 '사태 자체로!'라는 현상학의 슬로건에 이미 내재하는 문제로 수렴된다. 사태 자체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 주관에게 주어진 사물과[존재자와] 사태 자체의 독단적 동일시가 현상학을 지배하고 있다.

 핑크는 이 비판들을 제기하는 비평가들이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이 체계화된 ⟪이념들⟫ 이전의) ⟪논리연구⟫에서의 기술적 현상학을 초월론적 현상학과 잘못 동일시하고 있다고 우선 지적한다. 그와 같은 동일시에 따르면 현상학은 "단순히 발견된 것을 보고하는 기술적 학문"에 불과하다(73).* 구체적으로, 상술한 비판들은 현상학과 기존의 전통철학 사이의 차이를 보지 못하는 채, 두 가지 그릇된 전제 위에서 성립한다. 첫째, 저 비평가들에게는 ⟪논리연구⟫에서의 '직관주의적 존재론주의'가 현상학의 유일한 방법론이며 둘째, ⟪이념들⟫의 출간은 [⟪논리연구⟫로부터] (칸트적) 비판철학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78-79).**

*하지만 ⟪논리연구⟫ 또한 (원초적 형태로나마)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하며, 경험적 실재론을 넘어선다(83).

**비판가들의 두 번째 전제와 관련해 핑크는 ⟪논리연구⟫도, ⟪이념들⟫도 "객관적 앎[지식]의 가능성과 관련된 초월론적 문제의식"을 완전한 의미에서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반박한다(82). [그러나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후설의 현상학을 신칸트주의에 편입시키지 않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첫 번째 전제에 반해, 핑크는 ⟪논리연구⟫의 핵심이 "앎[지식]의 능력으로서의 직관의 일차성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표의적인 앎의 작용에 반해 모든 앎의 직관 가능한 본성의 일차성"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이를테면 지각적 지식이 논리적 지식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79, 강조는 필자). "오히려 앎은 [...] 언제나 그리고 모든 유형의 명증에서 앎의 작용 속에서 명증과 함께 주어진 사태의 자기부여"이다(79-80). 앎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지각적 지식과 논리적 지식 모두에 공평하게 적용되며, 공허한 지향과 충족된 지향이라는 현상학적 개념 구분에 정당하게 의거한 결과(이지 직관을 맹신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후설이 아프리오리/본질이 경험적 존재자로서 직관된다고 주장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오해이다. 아프리오리/본질은 자유변경과 그 가운데서의 불변자의 추출이라는 특수한 작용의 상관자다. [아마도 이 연장선에서] 후설이 존재론주의에 개입한다는 오해 역시, "있는 것(what is)과 타당한 것으로 수용된 것(what is accepted as being valid)" 사이의 현상학적 구분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81).

 마지막으로, 현상학에서 '사태'라는 개념은 매우 넓게, "형식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82). 그것이 실재적이든 이념적이든, 지평이든, 의미이든, 부조리이든,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현출하는 자리로[지점으로] 가져와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사태에 해당한다(82). 무엇보다도 현상학적 사태는 결코 독단적으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향성의 틀 하에서 분석되는 것이다. "지향적 외현은 [...] 현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 의식에 현전하는 것 너머의 권역으로도 이른다. 지향성에 속하는 의미-지평에 진입하기 위해, 현전적이고 파생현전적인 지향들, 기대들, 그리고 습성적 습득물들의 작동하는 시스템 전체에 진입하기 위해서 말이다."(82) [그러므로 사태 자체로의 귀환은 사태의 일방적 수용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선 안 되며, 사태란 언제나 지향적으로 구성된 채로 지평을 동반하면서 주어질 수밖에 없음을 고려해야 한다.]


 일련의 비판들에 응수한 뒤, 핑크는 비판철학과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을 구분하고자 한다. 둘을 (그릇되게) 동일시하고자 하는 경향성에는 세 가지 그럴 듯한, 매혹적인 근거가 있다. "철학에 대한 진정하게(genuinely) 현상학적인 이념의 부적절한[불충분한] 형성, 체계-구성의 외적으로 형식적인 관련성, 그리고 용어상의 유사성"이 바로 그것이다(85). 확실히 두 철학은 "세계에 대한 소박한 관점의 독단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인식을] 직접적으로 문제시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85). 공통된 문제의식에 대한 해결책 또한 유사해서, "존재적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이론"을 통해서 독단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86, 강조는 저자). 이에 따라 두 철학 모두 초월론적 철학을 내세우며, 검토되지 않은 전제로 얼룩진 실증적 학문과 초월론적 철학 사이의 관계를 정초받는 학과 정초되는 학 사이의 관계로 설정한다. 게다가 두 철학의 초월론적 '관념론'은 경험적 실재와 양립 가능한 것으로 상정됨으로써 공통적으로 주관적 관념론과 차별화되고, "존재에 비한 의미의 우위"를 함께 강조한다(87).

 그러나 비판철학자들은 상술한 공통점에 [대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이 초월론적 통각의 정의 등에서 다시금 비판 이전의 방법론으로 되돌아가는 독단주의적 행보를 걷는다고 지적한다. 초월론적 현상학에서의 자아는 순수 형식이 아닌 개별자로 이해되는 데다, 경험적 자아와 내용(content)의 면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비판철학자들에게 "이는 초월론적 자아가 존재적(ontic)임을 가리킨다."(88) 뿐만 아니라 소박한 태도에서 선철학적 경험 대상들에 통용되는 형상 이론을 초월론적 경험의 권역에 적용하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88). 요컨대 비판철학자들은 모든 경험의 정초 토대(foundational)가 되어야 할 초월론적 자아가 일종의 [경험적] 존재자--내재적 경험--으로 이해된다는 데 대해 지속적인 불만을 제기한다. 의식은 존재(자)의 전제가 되어야지, 그 자체로 존재(자)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초월론적 현상학은 "존재자들을 그것의 초월론적 '전제들'과 관련하여 '해명'"하지 않고 "다른 존재자를 통해서 존재자를 해명한다."(89)

 하지만 핑크는 [현상학의 경험주의화를 지적하는] 이러한 비판들이 비판철학적 관점 및 전제에 입각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반박한다. 초월론적 현상학은 그것의 고유성에 입각하여 이해되어야지, 비판철학적 관점 및 전제에 입각해 이해되어선 안 된다.

 두 철학 모두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곧 존재의 의미를 파고든다는 점에서 사변적 형이상학과 차별화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비판철학은 직관되지 않고 구축될 뿐인 '아프리오리한 세계-형식'의 개념 속에서 모든 문제를 제기하고 해소하고자 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세간적이며(mundane), 핑크의 표현으로는 "세계-내재적"이다(91). 풀어 말해, 비판철학은 소여를 가능케 하는 초월적 통각과 [소여에 대한] 초월적 수용(acceptance[타당하게-여김]) 사이의 [형식적] 관계에만 관심을 가진다. 비판철학은 "실재의 토대인 의미의 권역에 대한 구축적 해설"을 제공하고자 할 뿐, 실재적 세계를 넘어서지는 않는 것이다(94). 반면 현상학은 비판철학과 달리 "세계의 기원"을 묻는 비세간적, "세계-초월적" 학문이며, 그것도 해당 물음에 엄밀하게 답하고자 한다(91, 강조는 필자).* 그렇기 때문에 신과 같은 비세계적 존재자를 끌어들이는 "독단적 형이상학의 파괴가 [현상학의] 최초의 과제"로 부상하는 것이다(91).

*이로써 현상학은 학문의 의미 자체를 확장시킨다. 경험이나 구축에 의한 세계-내재적 학문뿐만 아니라 세계[존재]의 절대적 근거에 대한 입증 가능하고(demonstrative) 외현적인(explicative) 학적 인식인 세계-초월적 학문을 학문으로서 성립시키기 때문이다(93). 현상학이 엄밀학이 된다는 것은 세계의 기원 또는 세계-근거를 사변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특정한 방법론을 사용해 명증을 제공할 수 있는 "이론적 경험과 지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93). 이처럼 현상학이 사변철학으로부터 차별화될 수 있는 이유는 현상학적 환원이 "순수하게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적 태도'의 한계(limitedness)'를 초월"하는 덕분이다(94).

"Criticism's problematic comes to rest with the interpretation of the meaning of beings, phenomenology sees its decisive problem in the question concerning the origin of the world, a problem which it in principle keeps free from all naive (precritical) interpretations of being. If the basic motivating question of dogmatic metaphysics concerned the origin of beings, by contrast phenomenology explicitly raises the question concerning the origin of the world. [...] If Criticism justifiably charges dogmatic metaphysics with using beings to clarify beings without having at all posed the nature of beings as a problem (i.e., without having sought the conditions for the possibility of their givenness), from the perspective of phenomenology the 'critical' philosophy [...] can be characterized as a clarification of that which is within the world (beings) by means of the world-form and therefore as a basically mundane philosophy."(92, 강조는 필자)


⭐️ 이제까지는 비판철학과 후설의 현상학이 모두 '초월론적'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은폐된 두 철학 사이의 차이를 그것의 "근본문제들(basic problems)"상의 차이에 입각해 부각시키는 것이 과제였다(95). 그러나 이로써 현상학의 의미가 정제된 언어로 완전히 해명된 것은 아니다. 이 상황에서 긴급히 해명되어야 할 주제는 바로 현상학의 동기이다. "만일 한 철학적 이론이 그것이 숙련되게 해결하고자(master) 시도하는 특수한 문제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면, 현상학은 맨 처음부터 특정한 '불가해성'을 담지하는데, 이는 현상학이 원칙적으로 세간적 문제들과 관련하여[에 입각하여] 포착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96, 강조는 필자) 여기서 핑크는 현상학의 동기가 되어줄 수 있는 무언가, 즉 현상학이 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현상학 이전에--자연적 태도의 지평 내에서--제기될 수 없다는 역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현상학의 동기가 되어줄 수 있는 무언가, 즉 현상학이 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현상학적 환원 자체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문제로서 처음 기원"하지만 이 환원 자체가 "이미 그것을[해당 문제를] 숙련되게 해결하기 위해 취해져야 하는 첫 번째 단계다."(96, 강조는 저자)

"If one has referred it[reduction] to a question situated within the horizon of the 'natural attitude' (the question, for example, concerning the possibility of knowledge as a question of theoretically valid presuppositions), not only phenomenology's general and principal character is of necessity missed, but also the sense of its unique epistemological methods."(97)*

*Q. 하지만 Overgaard (2002)는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곧 초월론적 환원의 동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Fink (1933)와 그 중에서 누가 더 타당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가?

 게다가 현상학이 세간적인 문제들("인식론, 과학철학, 존재론, 보편적 자기반성의 이론 등")과 결합될 수 있으며 그것도 "이러한 세간적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초월론적 문제로?] 변경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 또한 비판의 빌미를 제공한다(97). 그러나 환원 이전에는 결코 저 세간적 문제들에 [진정한] 철학으로서의 성격이 입혀질 수 없다. 비판철학은 현상학을 세간적 학문으로 오해했을 뿐만 아니라 "현상학의 '동기부여되지 않은' 성격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자기 자신의 문제의식을 현상학적 환원에 선행하는 동기로 정립"했다(97). 핑크는 비판철학이 견디지 못한 동기 부재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해당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 위해, 그는 현상학이 스스로를 소개하고 해설하는 방식 자체에로 관심을 돌린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소개 및 해설은 현상학이 이미 동기부여되어 수행되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phenomenology does not concede the character of philosophical reflection to its own departures from within a worldly problem-formulation."(97, 강조는 저자)

 "There is no problem already given within the world which can serve to occasion our setting phenomenology into practice, that is, our actual advancing along its way to knowledge. [...] If, therefore, phenomenology's basic problem does not exist before the performance of the reduction, since his problem itself takes shape in and through the reduction, its basic motivating problem can nevertheless be indicated (even though in a provisional and quite vague manner) by way of anticipation* in speaking about phenomenology, for speaking about phenomenology presupposes having actually passed along its way."(98, 강조는 저자)

*Q. 이 표현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 것 같은데, 잘 하지 못한 듯해서 아쉽다.

 핑크는 특히 '현상학적 환원'과 '구성'의 개념[에 대한 해설]에 집중한다. 먼저 그는 현상학적 환원이 비판철학에서처럼 에고의 순수 형식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론이 아니며, 초월론적 자아가 "자기경험과 심리학 모두의 경험적 대상"인 세간적 자아가 아님을 보이고자 한다(99). 환원은 비판철학에 봉사하지도, "내재성의 독단적이고 주관주의적 철학"에 봉사하지도 않는다(99). [그러나 이러한 오해들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현상학적 환원을 개념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은, 가장 먼저 '환원에 대해 말하는 일'이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왜냐하면 환원은 "우리의 인간적 가능성들을 '초월하는'", 한 마디로 낯설기 짝이 없는 작용이기 때문이다(100, 강조는 저자). 낯설 뿐만 아니라 세계-내-구속(imprisonment within the world), 곧 자연적 태도 하에서는 환원이 그 속으로 돌입하고자 하는 문제설정에 애초에 "접근할 수가 없다(inaccessible)."(100) 그러므로 환원에 대한 모든 최초의(initial) 해명들은 "그것의 수행이 그것을[해명을? 환원을?]* 초월할 그런 작용에 호소(appeals to an act the performane of which is to transcend it)"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릇된다(101).

*Q. 둘 중 무엇인지 모르겠다.

 '자연적 태도'의 개념 자체가 초월론적이라는 점도 간과되어선 안 된다. 세계-내-구속에 대한 해명은 해당 구속을 이미 벗어난 주체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설에 의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간적 경험이 가지는 믿음성격"으로써 규정된) 자연적 태도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 역시, 현상학에 대한 부당한 비판에 응수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102).* 핑크는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개별적 통각의 변화에도 지속되는 "항상적 세계-통각"으로 [재]규정한다(103). 그러나 이러한 세계-통각을 인간에 의한 보편적인 정립으로, 즉 세속-내적인(intramundane)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상술한 '불가피한 오류[해설의 그릇됨]'에 빠진다. 인간됨은 저 일반정립에서의 "수용들의 보편적 통일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104). 자연적 태도에 대한 참된(authentic) 이해는 에포케의 수행을 통해서만 획득된다.

*"우리는 이미 철학에 대한 현상학적 입문의 문제가 자연적 태도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자연적 태도 내에서 시작한다는 역설로 이루어졌다고 진술했다."(102,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적 태도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현상학의 동기를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까?

 "As the disconnecting of the belief in the world, the epoché is not a refusal to hold a belief which is already known to be a belief which is already known to be a belief, but is in truth the first authentic discovery of the belief in the world: the discovery of the world as transcendental dogma. [...] Insight into this basic correlation of epoché and belief in the world is of the utmost importance for understanding the reduction. The epoché is not a mundane inhibiting of the ontic and intramundane belief in the being of the world."(104)

 환원의 덕분에 비로소 세계통각은 경험으로서, 그것도 초월론적인 경험으로서 접근 가능해진다. 세계에 기반한 무엇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최초로 문제시되며, 이는 현상학자가 세계 바깥에 서있음과 더불어, 달리 말해 "현상학이 자신의 문제를 정식화함이 세계를 초월함"과 더불어 가능하다(108). 유사한 견지에서, 에포케가 "보편적 세계-주제학(thematic)에 대한, 세계 속의 자연적 삶에 속하는 모든 작용들에 대한 순전한 삼감-변양(abstinence-modification)"으로 이해되는 것은 문제적이다(108, 강조는 필자). 에포케의 수행자는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철회하지 않는다. 그녀가 세계통각의 수행으로부터 거리를 둔다면, 그것은 오히려 세계를 알기 위해서다.

 나아가 에포케의 수행자는 기존에는 소박하게 살았다가 이제부터는 에포케 가운데서 살아가는 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 역시 아니다. 핑크는 에포케가 근본적으로 반성적이라는 점에 착안해, 그것의 수행자의 정체성을 삼분화한다. 첫 번째는 자연적 태도 하에서의, 초월론적 구성 기능에 무지한 인간자아다. 두 번째는 세계를 구성하면서 그로써 세계를 [타당한 것으로] 수용하는 초월론적 자아다. 이 자아는 [현상학에 대한 통념적 이해에서와 달리] 세계에 대한 믿음을 중지하지 않고 "오히려 더한 강도로 실행하며", 첫 번째 자아를 '인간'이라는 자기통각의 형태로 수용한다(110). 세 번째는 "에포케를 수행하는 '관찰자'"로, 두 번째 자아와 달리 그 어떤 세계에 대한 믿음에도 참여하지 않는다(110). [세계가 타당성-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두 번째 자아에게가 아니라 이 세 번째 자아에게이다?] 자아의 삼중적 구조에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현상학적 환원이 어째서 세계의 상실을 낳지 않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아의 분리 불가능성과 통일성의 의미를 고차원적으로 변형시키는지 이해할 수 있다.


 에포케에 대한 후설의 서술은 애매성으로 점철되어있다. 풀어 말해, 바로 그 서술들을 구성하는 개념들, 이를테면 '세계에 대한 믿음'이나 '타당성-수용'과 같은 개념들이 심리학적 개념인지 아니면 초월론적 현상학의 개념인지가 애매하다. 핑크는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에 대한 숱한 오해를 낳아온, 현상학과 심리학 사이의 혼동을 저지하는 것을 자신의 다음 과제로 삼는다.

 심리학과 [초월론적] 현상학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전자의 대상이 영역적인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심리학의 탐구 대상은 "나 자신의 내재성의 권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월자가 해당 권역 안에서 지향적 대상으로서 등장한다(112). 이때 존재자의 소여가 존재자의 실재(reality)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존재자 자체(beings in themselves)를 우리에 대한 존재(beings for us)로부터 구분해내는 것이 자연적 태도의 본질에 속하며, 또는, [...] 세계를 우리의 '세계에 대한 표상'으로부터 구분해내는 것이 그러하다."(112) [이러한 구분에 대한 오만한 망각 또는 월권이 곧 심리학주의에 해당한다.]

 "Developed as a positive science, psychology moves from the start within the self-explication of human experience as being only receptive and impotent. Psychology can now also degenerate into 'psychologism' if it should attempt to reduce beings to their being-given, if it should discount the evidence of outer experience and proclaim the transcendent to be a mere acceptance-image, a mere correlate of a subjective meaning, or if it should orient the concept of all nonimmanent being along the lines of a 'merely intentional object,' thereby making the reality of the world an illusion in order ultimately to end with the absolutization of immanence."(112, 강조는 필자)

 핑크는 심리학주의와 [초월론적] 현상학 사이의 차이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현상학은 [세계 내] 영역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 자신의 대상으로서 세계를 그 총체성 속에서 가지는 철학으로서 [...] 현상학적 환원은 세계 내 한 영역을 제한하는(einschränken)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한계들을 제거함으로써(entschränken) 세계 너머로 나아가는 방법이다."(113) 둘째, "현상학은 [타당한 것으로] 수용된 것의 단순한 소여와 그로부터 독립적일 수도 있는 '무언가' 사이를 원칙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 초월론적 수용은 [...] [심리적 주관의 세간적 수용에서와 달리] 무능함과 수용성이라는 내적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113) 셋째, 현상학은 "세계를 순전히 우리에-대한-존재로 용해시키지 않고, 자연적 태도를 중지함으로써[,] 그로부터 이 차이[사물 자체와 우리에 대한 것으로서의 사물 사이의 차이]가 (그리고 이에 따라 세계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 사이의 안티테제가) [비로소] 그 자체로 발원하는 초월론적 믿음을 일차적으로 탐구한다."(113, 강조는 필자)* 이로써 초월론적 현상학이 내재성에 대한 철학이라는 비판철학의 지적은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된다. 초월론적 주관성은 심리학적 주관의 내재와 초재, 둘 모두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Q. 어떤 의미에서 초월론적 믿음으로부터 해당 안티테제가 최초로 발원하는가? 주어진 것과 그로부터 더 사념함의 계기 때문인가?

 하지만 환원과 초월론적 현상학의 탐구영역에 대한 ⟪이념들⟫에서의 해설의 맥락이 지나치게 복잡한 것도 사실이다. 핑크는 이를 "현상학을 심리학으로부터 구분해내는 데 대한 [...] [후설의] 거슬리는(disturbing) 무관심"이라 표현한다(118).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개념을 도입한 뒤 [비일관적이게도] 후설은 내재적 대상과 초월적 대상의 소여 방식상의 차이에 대한 지향적 분석으로, 즉 자연적 태도 하에서의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격규정"으로 되돌아간다(115). 하지만 핑크는 이 [갑작스러운] 심리학적 작업에 대해 자비로운 독해를 시도한다. "[그것은] 전통적 인식론적 문제에 대한 물음도, 심리학의 정초토대(foundation)에 대한 물음도 아니며 오히려 에포케의 수행을 위해 예비교육적인(preparatory) 의식의 본질에 대한 해석이다. 달리 말해, 이 모든 분석들은 이미 수행될 것[으로 예정되어있는] 에포케를 겨냥하고 있다."(115, 강조는 필자) 초월론적 주관을 '순수 의식의 영역'이나 '잔여물'과 같은, 부적절하게 추상적인 표현으로 규정한 것도 "초월론적 철학의 시작에 그림자를 드리우는(overshadow) 근본적인 당혹스러움(perplexity)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일 뿐이다(116).

cf. Zocher의 비판에 반해 노에마에 대한 심리학적 개념과 초월론적 개념 사이를 구분하는 작업(116-118)

"In other words, the transcendental noema is the world itself viewed as the unity of acceptances contained within the belief which belongs to transcendental subjectivity's flowing world-apperception. If the psychological noema is the meaning of an actual intentionality which is to be distinguished from the being itself to which it is related, then by contrast the transcendental noema is this being itself. [...] Here 'relation to the object' only has the sense of referring an actual nomea(i.e. the correlate of an isolated transcendental act) to the manifold of act-correlates which, through the synthetic cohesion of constant fulfillment, first forms the unity of the object as an ideal pole."(117-118, 강조는 저자)

 결국 중요한 것은 초월론적 현상학을 자연적 태도 하에서의 심리학과도, 마찬가지로 자연적 태도 하에서의 비판철학과도 구분해내는 일이다. 초월론적 현상학의 주제는 세계-내-존재도 "세계 자체의 아프리오리한 형식"도 아닌 "원칙적으로 비세속적(nonworldly)"인 것이다(119). 환원의 종착지는 완벽하게 낯설고 어두컴컴한 모험지이며, 그렇기 때문에 환원 자체도 "현상학적 철학의 사라지지 않고 항상적인 주제"고, 초월론적 주관성은 결코 처음부터 그 전체적인 면모를 드러내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특정한 미규정성을 항상 담지한다.](120). 심리학적 주관과 달리 초월론적 주관은 사전적인 이해의 도움 없이 탐구되어야 하며 그 탐구는 [초기에는] "단일한 사실적 작용삶의 흐름"에 제한된다(121). 현상학[적 관찰]자는 해당 체험류에 나타나는 타당성-현상으로서의 세계를 실마리로 삼아 전체 초월론적 존재에 나아가는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자신의 앎을 확장시켜야 한다.*

*Q. 모나드들 간의 상호함축을 탐구하는 모나돌로기와 관련하여, 제 5데카르트적 성찰이 타인경험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환원의 전개"에 불과하다는 핑크의 언명을 이해하지 못했다(121, 강조는 저자).


 환원과 관련된 방법론적 고려사항 가운데서, "존재의 관념[이념](idea)에 대한 환원과 형상학의 관념에 대한 환원"이 특히 비판철학의 지적에 응수함에 있어서 중요하다(122, 강조는 필자). 세속적 존재와 초월론적 존재는 존재의 상이한 영역들이 아닌, 존재의 상이한 양상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초월론적 현상학이 '존재론적'이라는 비판이 가해질 때, 만일 그 존재가 세속적 존재를 의미한다면 근본적으로 그릇된 비판이 될 것이다. 나아가 ⟪이념들⟫이 자연적 형상학과 초월론적 형상학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초월론적 에이도스"의 문제는 환원의 수행 이후로 분명 고유하게 제기될 수 있다(123).

 여러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이념들⟫은 현상학의 주제가 "초월론적 주관성의 구성 속에서의 세계의 생성"임을 드러내준다(123, 강조는 저자). 환원을 통해 최초로 드러나는 초월론적 주관은 이미 세계를 구성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즉 소유하고 있는 주관성이다. 이 소유야말로 "구성에 대한 분석이 그로부터 시작되는 문제"다(124). 지향성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은 구성적 분석을 위한 실마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향적 분석으로써 드러나는] 세계의 영역들 간의 차이, 자아론과 상호주관적 학의 차이 등등은 구성의 개념을 치밀하게 규정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가리켜준다. 핑크는 그렇기 때문에 후설의 대부분의 출간작들에서 "구성적 분석의 독특함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있지 않다"고 지적한다(125).

⭐️ "The reason for this lies in the fact that setting about the analysis of constitution necessarily requires that the basis for all inquiry into constitution be unfolded to its full extent. This means that, in the indeterminateness of its relation to the world, transcendental subjectivity must first undergo a provisional explication of its most elementary structures. [...] misunderstanding can arise which equates the transcendental and provisional analysis of acts and habitualities with a psychological analysis. A particular motive for such confusion lies in Husserl's occasionally speaking as if the act-intentional explication of transcendental subjectivity is already a constitutive analysis. [...] This relationship can be briefly characterized as the relationship between constituted and constituting intentionality."(125, 강조는 필자)

 구성된 심리학적 지향성이 수용적인 것과 달리, 구성하는 초월론적 지향성은 (적어도 미규정적이거나) 생산적이다. "환원이 초월론적 삶을 탈객관화하고(deobjectify) 그것을 세계 내에 위치시킴으로써[,] 초월론적 삶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드는 자기통각을 제거함을 통해 초월론적 삶의 세계성을 탈각시키"기 때문이다(126). 그런데 비판철학 역시 초월론적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구성의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에, 두 구성 개념 사이의 차이를 이해해야만 초월론적 현상학이 그 방법론적 독단성으로 인해 비판의 과제를[--애초에 초월론적 현상학은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그런 과제를--]그르쳤다는 비판에 응수할 수 있다.

 우선 첫째, 초월론적 현상학은 비판철학과 동일한 인식론적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비판철학은 "세계의 아프리오리한 형식을 통해" 지식의 대상이 어떻게 구성되느냐를 묻는 한에서 세간적인 학에 머무른다(128). 반면 초월론적 현상학은 세계의 구성 자체를 주제화하기 때문에 세간적 인식론의 한계를 초월한다. 혹자는 초월론적 현상학 역시 [초중기 문헌들에서] 감각적 휠레와 지향적 모르페의 구분을, 즉 질료와 형식의 구분을 고집한다는 점에서 비판철학과 친연성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핑크는 후설의 해당 구분을 "현상학의 첫 번째 문제수준의 소박성"에 속하는 것으로 치부한다(129). 보다 고차원적인 문제 수준에서는 "초월론적 시간화에 의해 촉발되는 심층적 구성"이 주제화되고, 그로써 처음에는 비지향적 계기로 규정되었던 휠레조차 구성의 산물로 재규정된다(129).*

*Q. 어째서 "현상학적 시간의 지향적 자기구성"은 "작용을 통해 전개되는 [...] 구성"이 아닌지 이해하지 못했다(129). 작용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무엇을 통해서 구성이 성립하는가?

 둘째, 비판철학은 '경험적'과 '초월적' 사이의 대립에 집착하는 반면, 현상학은 '세속적[세간적](mundane)'과 '초월론적' 사이의 대립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동일한 관념론을 수행하지 않는다. 현상학에서 세계는 절대적 주관성의 초월론적 구성물이지, 내재적 주관의 초월적 아프리오리가 아니다.

"Phenomenological idealism concerns neither an intramundane priority of the existing human subject in contrast to all other beings, nor a priority of the form of subjectivity (the transcendental a priori) with respect to intramundane beings in general (as theoretical objects of knowledge); rather is it a question of the world-priority(Weltvor-gängigkeit) of a subjectivity, first discovered by the reduction, which is 'transcendental' in a completely new sense. [...] Phenomenology does not skip over the mundane independence of beings from man, his unimportance and insignificance in the cosmos, or the pure receptivity of our human knowledge; rather does it allow the unreflected realism of the natural attitude to remain."(130, 강조는 저자)

 핑크는 마지막으로 비판철학 측에서 제기된 비판들이 현상학적 철학의 범위 내에서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 설령 저 비판들이 이제 그릇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해도 어떤 실질적인 가치를 담지할 수 있는지 묻는다(132). 우선 비판철학은 경험을 비로소 가능케 하는 "존재자와의 낯익음(preacquaintedness)"이라는 문제를 "세계의 아프리오리한 형식"에 대한 세속적 해명으로 해소한다(132). 한편 현상학은 같은 문제를 자연적 태도 하에서의 세계의 미리-주어짐[Vorgegebenheit]에 대한 [초월론적 태도 하에서의] 구성적 분석으로써 해소한다. 자연적 태도를 견지하는 철학은 그것이 아무리 인식의 가능근거를 캐묻는 문제의식을 가진다 할지라도 독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판들은 현상학의 수행을 지속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세 가지 역설을 드러내준다는 의의를 지닌다. 첫 번째 역설은 표현[진술] 상황의 역설[Paradoxie der Situation der Äusserung]이다. 에포케를 수행하는 초월론적 관찰자는 그 어떤 세속적 믿음에도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순수하게] 초월론적인 경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다. 문제는 그가 해당 지식을 자연적 태도 하에 있는 독단주의자에게 전하고자 할 때 발생한다. 핑크는 바로 단순히 상이한 것을 넘어 이질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이들 사이의 소통(communication)이 가능한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핑크는 독단주의자에게 겨냥된 현상학에 대한 최초의 해설이 근본적으로 그릇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 소통의 역설에서 찾는다.

 두 번째 역설은 현상학적 진술의 역설이다. 자신이 획득한 초월론적 경험에 대한 지식을 언표하고자 하는 초월론적 관찰자는 불가피하게 자연적 태도 하에서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당 언어가 담지하고 있는 세속적 의미는 세심하게 분별되지 않는 한 잔존하며, 현상학에 대한 끊임없는 오해의 소지가 된다. 

 세 번째 역설은 초월론적 규정들의 논리적 역설이다. 예를 들어 인간 자아는 죽음을 맞는 반면 초월론적 자아는 영원하지만, 둘은 동일한 자아라고 현상학이 주장할 때, 이 동일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핑크는 세속적 존재자들 간의 동일성만을 가리킬 수 있는 기존의 논리적 동일성 개념이 이 사태에 적용되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해당 사태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존재적 형식들의 동일성"이 아니라 세속적 존재자와 초월론적 존재자 사이의 "구성적 동일성"이기 때문이다(1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자인 인간과 무한자인 초월론적 주관 사이의 관계를 더 명료하게 설정하는 일은 지난한 과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