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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에드문트 후설, <상상과 이미지의식> 요약 및 비판

E. Husserl, Hrsg. von Eduard Marbach, Phantasie, Bildbewusstsein, Erinnerung. Zur Phänomenologie der anschaulichen Vergegenwärtigungen. Texte aus dem Nachlass: 1898-1925. Den Haag: Martinus Nijhoff, 1980. (Hua XXIII, 1-107)

후설에게서 현전 개념의 협소함에 대한 문제 제기

- 상상의 독자성을 위한 짧은 변론 -

1. 서론

 본 글은 후설이 1904년에서 190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학기에 수행한 ‘상상과 이미지의식(Phantasie und Bildbewusstsein)’ 강의(Hua XXIII, 1-107)에서 상상작용을 정의하기 위해 활용하는 현전(Gegenwärtigung, Präsentation/Präsenz)의 개념이 지나치게 협소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같은 협소함은 상상 개념의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적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본 글은 첫째, 후설이 어떻게 ‘현전’과 ‘비현전’의 대립쌍을 이용해 상상을 정의하고자 하는지 설명하고, 둘째, 그와 같은 과정에서 무비판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전’의 정의를 밝힌 다음, 셋째, 해당 정의의 협소함이 어떻게 상상 개념의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지 보일 것이다.

 

2. ‘상상과 이미지의식강의에서 상상의 정의

 ‘상상과 이미지의식’ 강의의 목표는 지각과 상상 사이의 차이를 밝혀냄으로써 상상작용을 정의하는 것이다. 해당 강의에서 수행되는 논의의 윤곽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후설은 첫째, 상상을 정의하기 위해 요구되는 현상학적 분석틀을 확립한 후, 둘째, 상상을 영상화(Imagination)의 일종으로 취급하면서 그것을 물리적 영상화인 이미지의식과 평행적인 정신적 영상화로 규정하고자 시도하며,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식과 상상이 가지는 차이를 지각계기의 개입 여부로써 포착함으로써, 넷째, 이미지의식과 달리 지각의 계기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상상을 지각과 철저히 구분해낸다. 결론적으로 후설은 지각은 현전성을 부여하는(geben) 반면, 상상은 비현전성을 부여하기에 둘은 차별화된다고 주장한다.

 

2.1. 상상의 정의를 위해 요구되는 현상학적 분석틀

 ‘상상과 이미지의식’ 강의에서 후설은 상상작용을 정의하기 위해, 모든 심리작용이 (추정적으로) 공유하는 ‘파악내용-파악작용-대상/객체’이라는 삼중의 인식 구조를 활용한다.

 ①먼저 ‘파악내용(Auffassungsinhalt)’이란 파악작용이 가해지기 위해 요구되는 인식의 재료로서, 간단히 ‘내용(Inhalt)’ 또는 ‘자료(Datum)’로 가리켜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후설은 지각파악이 가해지는 재료를 ‘감각자료(Empfindungsdatum)’ 또는 줄여서 ‘감각(Empfindung)’, 상상파악이 가해지는 재료를 ‘상상자료(Phantasmen)’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의 재료들은 그 자체로는 지향적이지 않다. 파악내용 혼자서는 아직 대상과의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감각들에 감각들을, 감성적 내용들에 감성적 내용을 축적하면 곧 계속해서 체험된 내용들의 새로운 복합체들이 주어지지만, 현상하는 대상을 산출하지는 않는다.”(Hua XXIII, 23)

 ②이처럼 비지향적인 파악내용에 지향의 성격을 비로소 제공하는 것이 바로 순수 자아의 의식 활동으로서 파악작용이다. “[…] 내용을 해석하는(deuten), 그것[내용]에 대상적 관계를 제공하는 파악작용, 내용의 맹목적 현존재로부터 그것[내용]을 이것 또는 저녁으로 대상적으로 파악함, 그것[내용]과 함께 그것[내용]이 아니라 그것[내용]을 통해 어떤 사념을 성취하는 무언가를 표상함.”(Hua XXIII, 23) 후설은 파악작용을 “변동하는 의식성격들 곁에서 본질적으로 공통적인 것”인 “객관화하는 파악”이라고도 부른다(Hua XXIII, 6). 왜냐하면 예컨대 지각과 상상, 이미지의식은 서로 다른 의식성격을 가지는 체험 유형들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제 나름의 대상을 객관화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악작용이 오직 객관화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해 객관화의 기능만으로는 파악작용을 온전히 정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지각파악과 상상파악은 똑같이 객관화 기능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파악작용의 유형에 속한다. 파악작용을 온전히 정의하기 위해서는 객관화의 기능 외에 현전적 성격규정(성격화, Charakterisierung)의 기능 또한 언급해야 한다. 지각파악은 성격규정의 결과 대상의 현전을, 상상파악은 성격규정의 결과 대상의 비현전을 부여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파악작용의 유형에 속한다. “[…] 차이는 양편에서 공통적인, 그 속에서 대상의 “현출”이 수행되는 객관화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현전과 현전화[재현] 사이의 차이를 구성하는 저 성격규정에 놓여있다.”(Hua XXIII, 100)

 ③대상(Gegenstand) 또는 객체(Objekt)란 파악내용에 파악작용이 가해진 결과물이다. 서로 다른 유형의 파악작용들도 동일한 대상을, 그것도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한 의미를 담지하는(tragen) 대상을 산출할 수 있다. “양자[지각현출과 상상현출]는 동일한 대상을 현출하게 만들 수 있다 […] 우리는 한 번은 지각을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상상을 가진다.”(Hua XXIII, 10) 예를 들어 우리는 동일한 꽃병에 대해 그것을 눈 앞에 두고 지각할 수도, 머릿속에서 공연히 상상만 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후설은 그렇다면 “무엇이 [지각과 상상 사이의] 차이를 위해 일어나줄(aufkommen) 수 있는가?”라고 묻고, “명백하게 다음 두 개의 것이 [그렇게 해줄 수 있다.] 판단에 봉사하는 내용과 파악 성격 자체”라고 답한다(Hua XXIII, 10). 

 이에 따라서 후설은 파악내용과 파악작용, 특히 파악작용의 기능 가운데서도 현전적 성격규정의 기능을 척도로 삼아 지각과 상상을 구분하고자 시도한다. 달리 말해, ‘상상과 이미지의식’ 강의에서 후설은 ①감각자료와 상상자료 사이를 구분하고자 시도하거나, ②지각파악과 상상파악을 구분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지각과 상상을 구분하고자 시도한다. 그런데 이 중에서 첫 번째 시도는 계속해서 실패로 되돌아간다. 후설은 감각자료와 상상자료가 본질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하면서도, 두 자료 모두 감성적인 성격을 지니는 데다 ‘색’, ‘소리’와 같은 동종의 계기들로 이루어지기에 내용적 친연성이 두드러진다고 인정한다. “내가 하나의 색깔을 상상하면, 우리는 명료한 상상을 취하고, 색깔-상상자료와 [지각으로써] 경험된 색깔의 비교 속에서 동종성(Gleichartigkeit)을 발견한다.”(Hua XXIII, 97) 급기야 후설은 “상상자료의 무상성과 가변성 그리고 […] 감각들에 의미를 주는 통각들로부터 추상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속에서 사람들은 확고한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다”고까지 말한다(Hua XXIII, 93-94).

 그렇기 때문에 ‘상상과 이미지의식’ 강의의 대부분의 성과는 두 번째 시도, 즉 지각파악과 상상파악을 구분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결론부에서 후설은 두 번째 시도가 도출하는 결론이 첫 번째 시도가 부딪히는 문제점을 해결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감각자료와 상상자료 사이의 차이는 그것이 현전의 성격규정을 수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로 판가름된다. “감각과 그에 상응하는 상상자료는, 상이한 파악방식들을 도외시하면, 내용적 공통성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이미 상이하게 성격규정되어있다. 그렇다면 상상자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은 그것이 오직 재현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Hua XXIII, 107) 이러한 이유에서, 이어지는 절들은 후설이 파악내용상의 차이를 기준으로가 아니라 파악작용 상의 차이를 기준으로 어떻게 지각과 상상 사이를 구분하는지에 집중할 것이다.

*이처럼 파악내용과 파악작용을 엄격하게 구분함은 후설 현상학의 개성이다. “모든 심리적 체험은 순수 자아와의 정의할 수 없는(indefinibel) 관계를 가진다. 그런데 그것[순수 자아와의 관계]는 내용의 의미에서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몇몇 [학자들은] 순수 자아에 줄을 그어 치워버리고 단순하게 말한다: 내용이 현존하는 모든 것이라고.”(Hua XXIII, 7-8) 이러한 의견이 그릇된 것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체험의 수많은 유형들 사이의 차이를 내용상의 차이로 환원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2. 정신적 영상화로서의 상상

 후설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취하는 첫 번째 이론적 선택은 바로 상상을 영상화의 일종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바로 상상작용이 오직 이미지(Bild)를 경유해서만 가능하지 않느냐는 발상에서 따라나온다. “상상에서 대상은 […] 현전적인 것으로 현출하지 않는다. 그것[대상]은 그저 현전화되며(vergegenwärtigen), 흡사 그것이 거기 존재하는 것처럼, 그러나 오직 흡사 [그러하다.] 그것[대상]은 우리에게 이미지 속에서 현출한다.”(Hua XXIII, 17) 예를 들어 내가 카페의 창가에 놓여있는 꽃병을 상상한다면, 그때 현출하는 꽃병은 결코 꽃병 자체가 아니라 단지 꽃병의 이미지일 것이다. 이미지와 대상 또는 사태 자체 사이의 엄격한 구분은 모든 영상화가 공유하는 전제다. 나아가 꽃병의 상상이미지는 지각보다 본질적으로 덜한 명료성 속에서 흡사 꽃병 자체인 것처럼 현출함으로써, 만일 지각된다면 이미지보다 본질적으로 더 명료할 꽃병 자체를 표상할 것이다. “상상하는 자는 모두 이미지체험을 가진다. 대상적인 것이 그에게 현출한다. 그러나 누구도 이러한 현출[상상현출]을 대상의 자기현출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동요하는, 무상하게 때로는 나타나고 때로는 사라지는, 그때에 내용적으로 너무나 다양하게 변화하는, 너무나 희미한(matt) 현출을 누구도 대상의 현출로, 예를 들면 성 자체[의 현출로]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것의 ‘표상’으로, 하나의 현전화로, 하나의 구상화로는 잘 [취할 것이다.]”(Hua XXIII, 26)

 이로부터 후설은 상상이미지가 “내적 이미지표상” 또는 “정신적 이미지”로서 사진이나 그림과 같은 물리적인 이미지처럼 자신 바깥의 대상을 영상화하되, 다만 비물리적인 방식으로 그러할 뿐이라고 결론 짓는다(Hua XXIII, 17). “우리는 상상표상 속에서 지각표상에는 결여되어있는, 표상의 특정한 매개성을 발견한다.”(Hua XXIII, 24) 상상이란 상상이미지를 매개로 그것과 구분되는 별도의 주제, 이미지가 표상하는 대상 자체를 의향하는 이중적 지향성을 가진 작용이기 때문이다. 상상이미지는 그 속에서 상상되는 대상 자체를 현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한다. “정신적 이미지는 […] 하나의 주제(Sujet)를 재현한다.”(Hua XXIII, 21) 이처럼 상상의 대상성이 상상이미지와 그 속에서 상상되는 주제로서의 대상 자체로 나뉘기 때문에, 후설은 상술한 분석틀에을 활용함에도 불구하고 애매성을 피하기 위해 ‘상상 대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상상이미지’, ‘상상현출’, ‘상상표상’과 같은 표현을 활용한다.

 상상을 이미지의식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접근법에 따르면, 지각과 상상는 단일한 지향성을 발산하는지 아니면 이중적 지향성을 발산하는지—곧, 단일한 대상성을 가지는지 아니면 이중적 대상성을 가지는지—여부에 따라 차별화된다. 지각은 자신이 의향하는 대상 자체를 무매개적으로 곧장 지향하는 반면, 상상은 자신이 의향하는 대상 자체에 이르기 위해 이미지라는 별도의 대상적 계기의 매개를 거쳐야만 한다. “이미지적 표상들의 구성은 단적인 지각표상들의 그것보다 더 복잡한 것으로 드러난다.”(Hua XXIII, 29)

 

2.3. 물리적 영상화인 이미지의식과 상상 사이의 차이

 이처럼 상상은 영상화의 일종이지만,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그림이미지나 사진이미지를 통해 그 안에서 묘사된 대상 자체를 의향하는 물리적 영상화로서의 이미지의식과 하나의 본질적인 차이를 가진다. 후설이 이 차이를 취급하는 방식은 혼란스럽다. 강의의 5장에서 후설은 이미지의식과 상상 사이의 본질적 차이가 마치 상상이 영상화로 분류되는 것을 저지할 정도로 육중한 것처럼 다룬다. 그러나 6장에서는 이미지의식과 상상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해명으로 되돌아가면서, 해당 차이가 상상이 영상화로 분류되는 것을 저지할 정도로 육중하지 않음을 보이고자 하고, 상상에 영상화의 일종으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켜준다. 이처럼 상상과 이미지의식 또는 영상화 일반 사이의 관계가 임의로 변동하는 것을 후설이 허용하는 이유는 해당 강의의 목표가 어디까지나 지각과 상상 사이의 구분에 있으며, 영상화는 그 구분을 위해 수단적으로 활용되는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후설은 상상을 영상화의 일종으로 접근하는 것이 지각과 상상 사이의 구분에 이로운 한에서만 영상화를 주제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 강의에서 후설은 ‘상상은 이미지의식과 동종의 의식인가?’라는 질문을 지각에 대한 논의로부터 독립적으로 주제화하고 있지도 않고, 그에 대한 일의적인 대답을 제공하지도 않으며, 애초에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5장에서 부각되는 상상과 이미지의식 사이의 차이는 바로 지각계기의 개입 여부에 놓여있다. 이미지의식은 ‘물리적’ 영상화다. 이미지의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미지대상이기 이전에 물리적인 대상인 그림이나 사진 등이 앞서 지각돼야만 한다. 그런데 후설은 이러한 물리적 이미지대상이 “지각의 객체지만 […] 현행적인, 충돌 없는 지각 속에서 산출되는 현재와 충돌하면서 현출”하는 “허구물”이라고 기술한다(Hua XXIII, 54). 무매개적으로 대상 또는 사태를 현행적으로 드러내는 지각의 연관에 속하는 대신, 자신을 넘어서—스스로를 단지 허구물에 불과한 매개로 삼고—이미지주제를 의향함으로써 재현의식(Bewusstsein der Repräsentation)의 연관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예를 들어 액자 바깥의 지각되는 세계와, 액자 속의 영상화하는 세계는 서로 충돌을 빚는다. 반면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상상을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이미지의식에서와 같은] 허구물이 결여되어있다.”(Hua XXIII, 54) 상상이미지는 물리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지각을 요구하지 않고, “현전적인[현재적인] 것(Gegenwärtiges)의 그 자체로 반박의 여지가 없는 현실성과의 충돌을 통해 허구물로서 드러나지도 않는다.”(Hua XXIII, 55)

 이에 후설은, 지각의 현실성과의 충돌이 없다면 상상은 영상화가 아니라 지각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현출을 반박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것[상상]은 지각으로 간주되어야 하지 않을까?”(Hua XXIII, 55) 하지만 후설은 이 물음에 부정적인 답을 내놓는다. 상상이미지는 지각되는 대상들의 연관과 충돌하지 않기 이전에 원리적으로 충돌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사물은 지각의 시선장에서 현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위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다. 이 세계는 현행적 현재의 세계와 완전하게 분리되어있다. […] 우리는 그와 같은 것[상상사물]을 지각 객체들의 사이에서 발견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Hua XXIII, 57-58) 그리고는 이로부터 “상상의 본질에는 비현전성[비현재성]-의식(Nichtgegenwärtigkeits-Bewusstsein)이 속한다. 우리는 하나의 현재 속에 살고, 지각의 시선장을 가지지만 그 곁에서 우리는 이러한 시선장의 완전한 외부에서 비현전적인 것을 표상하는 현출들을 가진다”는 결론을 도출한다(Hua XXIII, 58-59). 상상이미지는 지각의 연관에 속하지 않으므로, 즉 지각될 수 없으므로 자동적으로 비현전적이라는 이 결론은 본 글의 논의에 있어서 중요하다. 후설은 오직 지각만을 현전성의 원천, 나아가 여태까지의 인용문들에서 암시되었듯 현실성과 현재성의 원천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상상을 비현전성의 의식으로 규정하는 5장의 결론은 상상을 재현의식인 물리적 영상화와 다시 평행하게 취급하는 6장의 논의와 연결된다. 지각계기의 개입 여부라는 본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상과 물리적 영상화는 다음의 양상에서 평행한다. 첫째, 두 작용 모두에서 일차적으로 현출하는 이미지대상과 그를 통해 구상화되는 이미지주제 사이의 구분이 유지되며, 둘째, 해당 이미지대상이 자신이 의향하는 이미지주제를 얼마나 적실하게(angemessen) 현시해주느냐의 정도차가 존재한다. 이러한 유사성에 힘입어, 후설은 5장에서 상상이미지는 지각 대상의 연관과 충돌하는 허구물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과 달리, 상상에서도 그러한 충돌이 존재한다고 재규정하며 기존의 입장을 번복한다. “[…] 전체 상상장은 전체 지각장과 그 어떤 상호침투(Durchdringung) 없이 충돌한다. […] 그러므로 여기서 또한 […] 일종의 충돌이 상상의 허구물을 규정한다.”(Hua XXIII, 67) 이제는 물리적 영상화에서의 물리적 이미지대상과 마찬가지로 상상의 이미지대상 또한 현행적 현재와 충돌하는 허구물로 개념화된다. 이로써 상상은 다시금 영상화의 범주 내로 편입된다. “[…] 아무 것도, 그를 통해 이러한 객체[상상이미지]의 도움으로 상상된 객체가 의식되는 재현의 방식을 정상적인(normal) 영상화로 포착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Hua XXIII, 68)

**물론 상상의 체험은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맞지만, 이러한 현재에로의 편입은 사후적인 반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후설은 말한다(Hua XXIII, 81).

 

2.4. 현전을 부여하는 지각과 비현전을 부여하는 상상

 상상과 영상화 사이의 차이 및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존하는 유사성을 경유함으로써 후설은 7장에 이르러 지각과 상상 사이의 관계를 확고하게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지각은 현전성을 부여하는 반면, 상상은 비현전성을 부여한다. 후설에게 이 명제는 지각은 자신이 표상하는 것 자체를 보여주지만 상상은 자신이 표상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재현한다는 명제와 동치다. 그에게 현전을 부여하는 의식이 아닌 모든 것은 재현의식이기 때문이다. 추후 보겠지만, 비현전과 재현 사이의 동일시는 현전을 지각을 통해서만 부여되는 성격으로 정의하는 협소함과 맞물려 후설로 하여금 모든 상상을 재현의식으로 잘못 취급하게 만든다.

 이상의 결론을 견지한 채, 8장은 현전과 비현전으로서의 재현 사이의 차이를 더 상세하게 정립하는 과제를, 9장은 해당 결론을 감각자료와 상상자료 사이의 차이의 문제에 적용하는 과제를 수행한다. 다만 7장에서 이미 현실성의 근원으로서의 감각내용과 상상자료 사이의 “근원적 현상학적 차이”를 다음과 같이 확립하고 있기 때문에, 후설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Hua XXIII, 81).

 “감각은 말하자면 [다른] 무언가를 위한 순전한 이미지로 간주되라는 부당한 요구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한다. 그것[감각]은 실재(Realität)의 인장이며, 그것에 견주어 모든 실재가 측정되고, 그것이 일차적인, 현행적인 현재다. […] 이에 반해, 상상의 감성적 내용인 상상자료는 비현전적인 것으로서 스스로를 부여하고, 현전적인 것으로 취해지라는 부당한 요구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며, 처음부터 비실재성의 성격을 담지하고 있으며, 일차적으로 다른 무언가로 간주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Hua XXIII, 80-81, 강조는 필자)

 

3. 지각으로부터의 현전으로서의 현전

 이상의 분석에서 드러나는 것은 후설이 ‘현전’을 ‘감각자료를 토대로 한 지각이 부여하는 대상의 성격 또는 작용의 그와 같은 성격규정함’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상의 측면에서 보면, 현전을 부여하는 작용인 지각에서 대상은 그 자체로 몸소 주어지지, 다른 것을 위한 매개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지각은 앞서 정리한 것처럼 현전성, 현실성, 현재성, 실재성의 유일한 원천으로 규정된다. “감각만이 진정한 실재를 그리고 현재실재를 가지며, 지향적 연관들에서 진정한 실재의 창시자이다.”(Hua XXIII, 77)  반면 상상을 비롯한 영상화에서 대상은 그 자체로 몸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 다른 것을 의향하기 위한 매개, 한갓된 이미지로서만 주어진다. 그렇게 상상을 비롯한 영상화는 비현전성 곧 재현의 성격, 비현실성, 비현재성, 비실재성만을 부여할 수 있다. 이 무능력은 현전성의 유일한 원천인 지각 연관과의 충돌에서 비롯하는데, 이 충돌의 결과 영상화의 이미지는 무(Nichts)로 이해된다. “[…] (현출하는, 유비적으로 재현하는 대상들로 이해된) 이미지는 실제로 하나의 무이다. 그것을 대상들이라 말함은 명백하게 변양된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며, 그것은[그 의미는] 자기 자신이 산출하는 <그것>으로서 완전히 다른 현존(Existenz)을 가리킨다. 이미지객체는 진정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내 의식의 외부에 현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의식의 내부에도 현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어떤 현존도 가지지 않는다.”(Hua XXIII, 21-22) 다른 말로, 이미지대상은 “현출하기는 하지만 무인 것, 그리고 오직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자를 현시하는 데만 봉사하는” 그런 것이다(Hua XXIII, 48). 

 다른 한편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후설에게 대상이 현전성을 결여한다는 것은 해당 대상을 지향하는 작용이 존재 정립의 계기를 내실적으로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과 동치다. “상상함은 지각 그리고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을 직관적으로 참된-것으로-정립함(ansetzen)에, 요컨대 개별적 구체자들을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하는 모든 작용들에 대립된다. 지각은 현전적인[현재적인] 현실성이 현전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현실성으로서 우리에게 현출할 수 있게 한다. […] 그에 반해 상상은 상상된 것과 관계된 현실성의식을 결여한다.”(Hua XXIII, 4) 간단히 말해 상상은 현전이 아닌 재현의 작용이기 때문에 자신의 직접적인 대상 곧 상상이미지의 존재를 정립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우리는 후설이 상상으로부터 모든 현전성, 현실성, 실재성, 곧 존재(Sein) 일반을 정립하는 힘을 박탈했다고 말할 수 있다. 후설에게 현전이란 오직 지각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거나 지각을 통해서 주어진 대상들에만 적용될 수 있는 이름이다. 따라서 ‘상상과 이미지의식’ 강의에서 후설은 현전을 지각으로부터의 현전으로 제한하여 정의하고 있다.

 

4. 문제 제기: 상상의 독자성을 위한 변론

 그러나 현전에 대한 위와 같은 정의는 지나치게 협소하며, 상상 개념의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후설은 현전 및 현전을 통해 주어지는 존재 일반의 개념을 지각으로부터만 가능한 현전으로 제한하면서, 필연적으로 상상의 개념 또한 현전이 아닌 의식, 곧 재현의식으로 제한하고 만다. 후설에 따르면 상상이 재현하는 상상대상 또는 상상의 이미지주제란 상상의 직접적인 또는 일차적인 대상인 상상이미지의 지각적 대응물이다. “[…] 상상이 특정한 방식으로 지각과 본질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말하자면 그것[상상]이 상응하는 지각과 동일시되는 경우에서 강화되고, 더 풍부하고 깊게 충족된다는 것,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의식이 자라난다는 것: 상상된 [상상이미지] 순전히 여기서 지각에서 현실적으로 자체로 주어지는 [상상대상/상상주제] 현전화이며, 그러므로 특정한 의미에서 상상은 지각대상성, 즉 대상성 자체의 순전한 이미지를 준다는 [의식이.]”(Hua XXIII, 86, 강조는 필자)

 달리 말해, 후설은 모든 상상에 대해서 그것이 유효하려면 그것에 대응되는 지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그것[상상자료]는 비실재적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유효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다면 곧 다시 감각일(das gegeben eben wieder Empfindung wäre) 다른 것의 현시자로서만 유효하다.”(Hua XXIII, 77)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누구에게나 즉각 직관에 배치되는 것이자, 상상의 광범위한 힘을 간과하는 부당한 요구로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지각세계에 원본이 없어 그런 이유로 지각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상상이 지각세계에 그 원본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바꿔 말해 모든 상상이 특정한 지각적 대응물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후설 자신이 그와 같은 상상의 가능성을 강의의 첫머리에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생산적 상상은 자의적으로 형상화되는 상상이다. 예술가가 탁월하게 연습해야 하는 것과 같다.”(Hua XXIII, 3)

 생산적 상상의 고유한 본질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의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원본을 부여하는 의식이라는 점이다. 한편 생산적 상상의 대상은 지각세계에 아직 현존한 적 없는, 그리하여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독창적 존재자’다. 생산적 상상을 통해 주어지는 독창적 존재자는 상상세계에 자신의 뿌리를 두고 있다. 설령 그 독창적 존재자가 추후 지각 가능한 형태로 제작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때 비로소 기존의 상상에서보다 훨씬 생생한(leibhaft) 인식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사후적으로 제작된 지각대상이 제작에 앞선 상상대상의 원본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다. 나아가 그렇게 제작된 지각대상은 독창적 존재자로서의 상상대상과 동일한 의미를 담지하지 못한다. 독창적 존재자의 예로, 마법사 해리 포터가 빗자루 축구 ‘퀴디치’를 플레이하기 위해 사용하는 날개 달린 공 ‘골든 스니치’를 떠올려보자. 골든 스니치는 오직 마법사들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닐 수 있는, 그리고 공이 자신만의 의지로 비행할 수 있는 마법세계에서만 자기 자신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해리 포터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기 위해 제작한 골든 스니치는 마법이 없는 머글세계의 것으로서, 원본인 마법세계의 골든 스니치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골든 스니치라고 부를 수도 없다. 혹자가 세트장에서 가져와 전시한 (마법적 비행 능력이 없는) 골든 스니치를 들고 사진을 찍은 후, 자신이 ‘진짜’ 골든 스니치를 만져보았다고 주장한다면 누구도 그 주장을 참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후설이 상상 일반에 요구하는 지각대상과의 대응은 오직 ‘가정적인’ 대응이므로—즉 상상 대상이 실제로 지각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각된다면 어떤 것일 그런 것과 대응하기만 하면 된다는 요구이므로—그 요구가 부당하지 않다는 가능한 옹호는 무효화된다. 정의상 지각세계에 그 대응물이 존재한 적 없는 독창적 존재자는 상상의 세계에서만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으며, 그것이 지각 가능해진다면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닌 한갓된 모사물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독창적 존재자는 오직 상상을 통해서만 몸소 그 자체로 현존하는 것으로, 곧 현전하는 것으로 주어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상의 대상이 지각의 대상과 동일한 의미에서 현전하는 것은 아니다. 지각은 지각세계 내의 대상만을 현전할 수 있게 하지만, 상상은 상상세계에 배타적으로 속하는, 나아가 그것이 지각 가능해진다면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상실할 그런 독창적 존재자의 현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후설의 현전 개념이 확장될 필요가 놓여있다.

 후설이 자신의 현전 개념이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문제를 깨닫지 못한 이유는 그가 상상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함에 있어 그것이 ‘지각 또는 영상화’ 중 하나여야 한다는 경직성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후설은 “그러나 상상파악이 모든 이미지성 없이 기능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다면 그것[상상파악]은 지각이 아닌가?”라고 물으면서, 영상화가 아닌 작용은 반드시 지각이어야 할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Hua XXIII, 49). 이러한 경직성이 곧 후설로 하여금 지각과도, 통상적인 영상화와도 차별화되는 상상의 고유한 본질인 생산성을 간과하게 만든 것이다. 상상의 생산성은 상상이 반드시 지각에 대응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폐기한다. 후설의 생각과 달리, 상상은 지각으로부터 독립적인 독자적 작용인 것이다.****

***본 글의 주제로부터는 벗어나지만, 마땅히 제기되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명백하게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는 대상들이 무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상상이미지가 의식의 외부에도, 내부에도 존재하지 않는 무라는 후설의 서술은 우리의 직관과 전적으로 배치된다. 우리는 분명 상상이미지를 ‘무언가’로서 가지며, 그것이 아무런 존재론적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을 경유해 상상대상에로 나아가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뿐만 아니라 수나 본질과 같은 이념적 대상 역시, 만일 현전이 지각 가능한 존재자의 특권이라면 현전하는 것으로 취급될 수 없다. 그러나 이념적 대상은 그 정의상 지각 불가능한 것으로서, 지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작용을 통해서—예를 들면 본질 직관을 통해서—비로소 그 자체로 몸소 현전한다.

****생산적 상상이라는 반례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상상은 재현의식이라는 후설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독창적이지 않은 존재자에 대한 상상의 경우에서도 생산적 상상에서와 동일한 생산성이 발동하느냐 하는 문제 역시 주목을 요구할 것이다. 만일 이 문제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모든 상상이 재현의식인 것은 아니다’라는 본 글의 약한 주장으로부터 ‘모든 상상은 재현의식이 아니다’라는 강한 주장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행의 가능성 여부를 논하는 것은 추후의 과제로 남겨놓는다.

 

5. 결론

 생산적 상상의 사례는 상상 일반이 그에 대응되는 지각이 존재해야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작용이 아님을 밝혀준다. 상상은 가능한 지각의 대상영역과 독립적으로 지각세계에 그 대응물이 없어 상상세계에서만 현존할 수 있는 독창적인 존재자들에 대해서도 가해질 수 있다. 이와 같은 독창적 존재자는 지각이 아닌 상상을 통해서만 현전의 성격을 부여받을 수 있으며, 그 경우 상상은 새로운 현실성을 생산해낸 것이 된다. ‘상상과 이미지의식’ 강의에 나타난 후설의 현전에 대한 정의는 모든 현전을 오직 지각으로부터만 가능한 것으로 단정함으로써, 상상의 고유한 본질인 생산성을 간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6. 참고문헌

김태희, ⟪시간에 대한 현상학적 성찰⟫, 필로소픽, 2014.

Husserl, Phantasie, Bildbewusstsein, Erinnerung. Zur Phänomenologie der anschaulichen Vergegenwärtigungen. Texte aus dem Nachlass: 1898-1925. Hrsg. von Eduard Marbach. Den Haag: Martinus Nijhoff, 1980. (Hua XX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