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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특별히 긴 글

화실 0장(2018.11)

 유치하지만 진지했던 스물 네 살 가을의 추억.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성했던 장편소설. 총 15장까지 있었고, 안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는 기억이다. 

El Greco, Opening of the Fifth Seal, 1608-1614, oil on canvas


0. 혼자 공책을 펴는 시간, 그때만큼은 테이블 위의 스탠드 불이 태양보다도 강력하다.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자연으로부터의 빛이 차단된 방 안에서, 안나는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프랑스어를 두 어절쯤 적어보았다. 그 사이 전구의 둥근 몸뚱어리가 눈꺼풀을 향해 인공의 열기를 쏘는 것이 느껴졌다.

 Je suis

 알파벳들은 적히자마자 안나의 머릿속에서 제 음가를 연주했다. 그녀는 그 발음을 생각하면서 문득, 이 말들이 혹시 ‘Jesus’의 오타는 아닐까 하는 농담 같은 진담, 혹은 진담 같은 농담을 꾸며보다가 그만 두었다.

 안나의 프랑스어 실력은 딱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대학에서 교양수업으로 몇 주 배운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첫 시간에 교수는 알파벳을 프랑스어로 읽는 법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다소 격앙되어서 A, B, C, D를 외웠다. 눈빛만 봐서는 불문학도들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진지했는데 덕분에 Q까지는 별 탈 없이 진도를 나갔다. 문제는 R이었다. 혀와 목 사이, 애매한 어디쯤을 진동시켜야했지만 다들 침만 잔뜩 고인 채 발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연이은 실패에 학생과 교수 모두가 쑥스럽게 웃었다.  제일 뒤에 혼자 앉아있던 안나만이 들뜬 분위기 속으로 녹아들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개미가 기어 다니는 발소리만큼이나 작았고, R 발음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첫 시간은 그렇게 듣는 둥, 마는 둥하며 흘려보냈다.

 그녀는 두 번째 시간이 되어서야 교수의 말에 약간씩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교수가 칠판에 ‘Je suis’라고 쓴 것이 계기가 됐다. 다른 단과대학과 달리 인문대학은 여전히 초록 칠판에 분필을 쓰고 있었고, 마지막 ‘s’가 적히면서 분필가루가 날리는 모습이 맨 뒤의 안나에게까지 선했다.

 “영어로 I am이에요. Je가 I, suis가 am. 이 뒤에 다양한 말이 붙어서 일인칭 문장들이 만들어질 수 있겠죠? 예를 들어 Je suis peintre, 나는 화가다. Je suis unique, 나는 고유하다.”

 안나는 예시들을 마음속으로 곱씹어보았다.

 “Je suis 뒤에 아무 말이 붙지 않아도 그 자체로 문장이 성립하긴 해요. 바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뜻으로요.”

 교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나의 바로 앞에 앉아있던 남학생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번 시간에 가장 우렁찬 목소리로 알파벳을 발음했던 학생이었다. 질문까지 할 정도로 열심일 거면 더 앞쪽에 앉는 게 낫겠다고 안나는 생각했다. 보려고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자리에서는 남자의 검은 가죽 가방 안이 훤히 드러났다. 여러 잡동사니 사이에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가 파묻혀있는 것이 인상 깊었다. 기독교인이거나, 철학을 공부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안나는 짐작했다.

 “그럼 혹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도 뒷부분은 ‘Je suis’라고 쓴 건가요?”

 질문을 들은 교수가 유난히 해맑게 웃었다. 안나는 남자가 기독교인보다 철학도에 가깝다고 결론지었다.

 “그렇습니다. 라틴어로 쓰인 문장이 더 유명하긴 하지만, 처음엔 프랑스어로 쓰였죠.”

 Je pense, donc je suis. I think, therefore I am. 교수는 ‘생각하다’를 뜻하는 ‘Pense’의 P를 발음할 때 마치 폭탄을 터뜨리듯 세찬 소리를 냈다. 안나는 무의식중에 앞에 앉은 남자의 가방 속 『팡세』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팡세』는 안나의 어머니가 성경 외에도 즐겨 읽은 거의 유일한 책이었다. 안나 역시 어렸을 때 어머니의 강압에 못 이겨 그 책을 가까스로 완독했다. 1990년에 출간되어 예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판본이었는데, 누렇게 바랜 페이지들 중 일부는 아예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이해의 공백은 어머니의 설교로 대신 채워졌다. 끝없는 절망과 불확실성 가운데 놓인 인간이 고통을 면하려면 신을 찾는 수뿐이야. 어머니가 특유의 신경이 곤두선 목소리로 역설하곤 했다. 그렇게 안나에게 『팡세』는 끝나버린 소녀시절의 상징이자, 신을 믿지 않게 된 지금도 그녀의 침대 맡에 놓여있는 책이었다.

 질문이 있은 뒤로 교수는 갑자기 데카르트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교수는 마치 언어를 가르치고 있긴 해도 마음은 언제나 철학에 가있었다는 것처럼 설명에 열을 올렸다. 데카르트는 진리의 확실한 토대를 찾아 항상 의심, 또 의심을 했답니다. 교수가 그런 열변을 토하는 동안, 안나 옆의 또 다른 신입생 둘은 데카르트의 초상화를 검색해보고선 그의 짧은 앞머리가 처피 뱅 같다는 식의 우스갯소리를 했다. 교수의 버려지고 숨겨진 꿈을 읽어낸 것은 안나뿐인 것 같았다. 혹은 안나의 앞에 앉은 철학도까지.

 교수는 이후로도 프랑스 철학자들을 몇 명 더 언급했다. 그때마다 학생들은 대체로 무관심했지만 안나만은 귀를 쫑긋 세워두었다. 안나는 ‘Je suis’라는 짧은 문장이 담고 있는 듯한 깊은 뜻에 대해 여러 번 혼자 고민해보았다. 외국어는 그 낯섦 때문인지 아무리 단순한 문장이라도 말의 의미를 고심하게 했다. 나는 존재한다라니. ‘나’는 누구고, ‘존재한다’는 건 또 무엇을 뜻하는지. 정작 집중해야 할 미술 전공 수업들에선 졸기 일쑤였지만, 프랑스어 강의에서는 안나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학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교수는 프랑스어로 수동태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먼저 능동문의 목적어를 주어 자리에 올리고, 알맞은 être 동사를 써주세요. 그 다음엔 과거분사를 붙인 뒤 전치사 ‘par’와 능동문의 원래 주어를 함께 적어주면......“

 être 동사는 영어로 be 동사 같은 것이었고, 전치사 ‘par’는 ‘by’와 쓰임이 비슷했다. 수동태를 만드는 과정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가 현재 시점에서 무슨 일을 당한다면 ‘Je suis’ 뒤에 적절한 과거분사를 써 붙이면 되는 식이었다. 그런데 안나의 의식 깊은 곳에서 자꾸만, 이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냐, 라는 외침이 들려오는 듯했다.

 수동태를 배운 그날 밤이었다. 잠에 들기 위해 드러누운 안나에게, 그녀의 마음속에서 사변을 맡고 있는 목소리가 질문을 하나 던졌다. 어째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가장 능동적이어야 할 문장이 수동태를 만드는 데 쓰인단 말인가. 삶이 그 주인인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살아져야하는 것일 때, 존재 역시 최대한 능동적인 것이어야 할 텐데. 사변가가 한 문장을 덧붙이면서 말끝을 흐리자, 안나의 속에서 이미지를 관장하는 화가의 목소리가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그렇다면 수동태로 쓰인 문장 중에서 ‘나’를 주어로 하는 것은 모두, 어떤 싸움의 광경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동사가 수동의 상태를 밀어붙이는 와중에 Je suis가 그 억척스런 강요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Je suis, 우리의 도도한 Je suis! 자신을 지키려는 Je suis가 자신을 때려눕히려는 과거분사와 힘을 겨룹니다. 마치 야곱이 괴력의 천사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것처럼.”

 안나는 언젠가 시인 아르튀르 랭보도 비슷한 유형의 이미지를 그려본 적이 있음을 상기했다. 그에 따르면 ‘영원’은 ‘태양빛이 섞인 바다’로 정의되었다. 바다는 고작 바다일 뿐이기에 태양을 거부하지 못한다. 노을을 비추지 않겠다고 반항하는 바다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바다는 태양의 붉음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기 위해, 계속해서 조금이라도 푸르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스스로를 보존하겠다는 투쟁 끝에서야 쏟아지는 노을 사이로 간간이 푸른 빛을 내세울 수 있다. 그렇다면 영원은, 랭보의 시구대로 바다와 그것을 비추는 태양이기도 하지만, 태양빛에 맞서는 바다의 애씀이기도 했다. 그 애씀은 수동의 동사에 맞서는 Je suis의 수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나는 그런 생각 끝에 머릿속 사변가와 화가의 은근한 재촉에 떠밀려 ‘Je suis’라 적었던 것이었다. 이어서는 사전을 뒤져 ‘Je suis déchirée’라고도 써보았다. 나는 찢겨있다, 조각나있다, 혹은 분열되어있다, 라는 뜻이 되었다. 그 문장 속에서 Je suis는, 즉 나의 존재는, 찢어지라는 과거분사의 강요에 조용히 저항하고 있었다. 안나는 마침표를 찍자마자 펜을 내려놓고 가슴께에 손을 댔다. 검지의 끝에 앙상한 쇄골이 만져지긴 했지만 새끼손가락의 아래쯤에서는 심장 뛰는 소리가 뚜렷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두 번째로 쓰인 문장이 곧바로 위안을 앗아갔다. 안나는 이번에도 사전을 뒤적이다 ‘Je suis sauvée’라고 써보았다. 나는 구원되었다, 라는 뜻이었다. 구원은 어머니로부터 딸에게로 이어져온 소망이자, 고통을 원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꿀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안나 안의 사변가가 다시 입술을 삐죽이기 시작했다.

 “이 문장은 오히려 구원의 불가능성을 넌지시 주장한다.”

 순간 안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지만, 사변가는 주인이 느낀 충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장을 이어갔다.

 “구원이 이뤄지려면 구원받는 대상이 스스로를 완전히 버린 채 오로지 구원을 주는 손길에 온 자아를 내맡겨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하다’라는 뜻의 동사 ‘sauveur’의 과거분사인 ‘sauvé(e)’의 위력은 다른 타동사들이 잠재적으로 지닌 수동의 위력보다 몇 만 배는 더 강하다. 혼자서도 열심히 꾸물거려온 주체를 순식간에 납작한 객체로 뒤바꿔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Je suis’는 그처럼 거센 강제 아래서도 꾸준히, 자신의 존재를 주장한다. ‘나의 존재’가 마지막까지 내세워지는 한, 진정한 구원은 좌절되고 만다.”

 사변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그녀 안의 화가가 입술을 옴짝달싹했다.

 “화가 엘 그레코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The Opening of the Fifth Seal)>은 요한계시록 상의 종말을 그린 작품입니다. 해설에 따르면, 작품 왼편에 파란 옷을 입은 한 남자는 양 팔을 하늘 위로 쳐든 채 세계에 대한 심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Je suis’의 저항 정신을 모르는 이의 눈엔 이 남자가 신의 은총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 역시 작품의 오른편에 있는 인물들처럼 포동포동한 천사로부터 흰 옷을 건네받고 싶어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늘을 떠받치듯 손바닥을 편 이 남자의 몸짓은, 거꾸로 천상에서 내려올 구원을 막기 위해 애쓰는 몸짓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남자의 얼굴은 영원한 천국의 도래를 앞두고서도 어딘지 불만에 차있어요. 그 불만은 신의 구원조차 밀어내는 ‘Je suis’의 악마적인 힘에서 옵니다.”

 안나는 자기 안에서 공모하고 있는 두 연인들의 끔찍한 합창을 얼른 잊고 싶었다.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란, 곧 구원이란 것을 받기란 영영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녀는 ‘나는 찢겨있다’와 ‘나는 구원되었다’가 적힌 공책을 화풀이하듯 세게 덮었다. 첫 번째 문장을 쓰면서 자기의 존재에 대해 느꼈던 희망은 두 번째 문장을 쓴 뒤 절망으로 바뀌어버렸다.

 그 절망의 근원인 자아를 잠시나마 죽이기 위해 안나는 매트리스 위로 기어 올라가 잠을 청했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을 꿈을 꾸는 동안 그녀는 두 팔로 스스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안나는 그 다음 학기를 쉬기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했다. 한두 달 정도 손을 놓고 보니, 그녀는 프랑스어로 말하거나 쓰는 법을 대부분 까먹어버렸다. 그러나 ‘Je suis’라는 문장이 지닌 끈질김의 느낌은 오랫동안 그녀의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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