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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번역

에드문트 후설, <위기 보충판> 7번 유고 '흘러들어옴(Einströmen)' 번역

E. Husserl (Hrsg. von R. N. Smid),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3 (Hua XXIX), s. 77-83, 모든 강조는 필자.

 후설은 작가로서 정말 끔찍하다. 문학으로는 절대 봐줄 수 없다. 질적인 정제에 대한 미적 욕망이 없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양적인 통제에 대한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고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 그의 장황함과 무절제함은 현상학 전공자인 나조차 변호해줄 수가 없다. 다만 이 글은 출간용 원고도 강의록도 아닌 유고이기 때문에 그 이유로 자비를 베풀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초월론적 환원의 대립작용인 세속화(Mundanisierung) 또는 세계화(Verweltlichung)를 집중적으로 주제화한다.


[77] 흘러들어옴(Einströmen)<1935년 여름>

 세계의 존재의미는 현상학적 환원의 개입(Einbruch[break-in, 침입])과 함께 변한다. '존재자'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데,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그렇다. [하지만] 그 후로 [이전의] 낡은 의미도 계속해서 타당하다. [그 낡은 의미는] 새로운 의미존립요소(Sinnbestände)를 통해서, 그러나 [이전의] 낡은 지평을 완전히 포괄하는 범주의 의미존립요소를 통해서 '확장된' 새로운 [의미]에 의미상(sinnhaft) 포함되고 지향적으로 함께 품어진 채로 계속해서 타당하다. ... 그러나 새로운 것은 동시에, 함께 진행되는 변화 속에서, 다시금 이전의 범주적 형태를 받아들인다.

 초월론적 소박성 속에서의, 공동의 의미에서의 세계(문두스)는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의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세계로서 초월론적 의미를 획득한다. [그리고] 세계적 주체들은 세속화들로부터 의미를, 그들의 자아작용들은 초월론적 자아작용들의 세속화로부터 [의미를 획득한다.] 자연은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자연이고, 그것의 세속적-심리적 상관자는 초월론적인 것의 세속화[된 버전들](Mundanisierungen)이다. 그러나 자연뿐만 아니라 전체 문두스(mundus)가, 그러므로 총체적인(gesamt) 세속적 주관성 그리고 그의 총체적인 심리적 삶 그리고 그 삶의 지향적 내용물이 세속화된 초월론적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러나 다음에 주목해야 한다[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것을 가진다]. 문두스, [즉] 선초월론적 소박성의 세계는 초월론적 탐구의[탐구가 가하는] 의미 변화 속에서 그리고 의미의 동적인 풍부해짐 속에서 [78] (경험지평의 초월론적 형성 및 초월론적, 이론적 규정과 함께인 초월론적인, 개시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범주적 형태를 얻으며, 범주들 속에서 소위 자기보존을 행한다. 세계는 세계로, 생명이 불어넣어지지 않은 육체들, 인간들, 동물들 등등이 있는 세계로 남는다. 하나의 보편적인 자연이 있는 세계 그리고 자연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그와 같은 경험과 인식] 하에서 세계적-심리적 작용들로써 학문적으로 인식하는 심리적 존재가 있는 세계로 말이다. 세계성의 내부에서 세계적인 것은 언제나 다시 세계적-심리적으로 구성된다. 모든 초월론철학적 상황 속에서, 그것의 발견된 탐구의 지점(Stand)에서 초월론적으로 경험된 것으로서 인식되고 지평상(horizonhaft) 포함된 것은 이전의 문두스가 아니다. 이와 같은 것으로서 초월론적 소박성 속에서 타당한 그것이 가능성들, 경험 가능성들 그리고 이론적 가능성들의 지평을 가지는 한에서, 초월론적으로 발견될 것은 아무것도 함유할 수 없었던 하나의 세속적인 학문성을 가지는 한에서 그렇다[이전의 문두스가 아니다](?). 그러나 이제 발견된 모든 것은 '세계'라는 범주적 형태를 받아들인다. 다만 상이한 방식으로 그렇게 받아들이는데, 자연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연으로 남고, 자연과학은 자연과학으로 남는다. 우리가 초월론적으로 얼마나 멀리까지 왔든지 간에, 자연의 의미 변화는 자연 자체의 무엇도 변경하지 않는다. 자연이 이제 또한 초월론적 현상으로 불려도 그리고 초월론적, 보편적 지평 속에 서있다 해도 그렇다. 정밀한 자연과학적 연구가 [얻고자] 노력하고 구체적으로 달성하는 바, 그것은 초월론적 환원의 전이든 후이든지 간에 아프리오리하게 구축적(konstruktiv) 지평 속에 놓인다. 이 지평은 결코 변화를 경험할 수 없는 그런 지평이다. 수학적으로 구축 가능한 자연의 가설적 예측은 정밀한 방법 속에서 항시적으로(fortgesetzt) 스스로를 보존하며, 미래의 보존 가능성을 그리고 그로써 같은 예측을 방법를 적법한(rechtmäßig) 지도 [방법]으로서 미리 그려낸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뀔 수 없다. [물리적] 자연은 오직 그것의 주관적인, 구체적으로 초월론적인 구성과 관련해서만 변화를 맞닥뜨린다.

 심리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심리적인 것 또한 [자연과 마찬가지로] 초월론적으로 구성되며 초월론적 탐구의 개입과 함께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인식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심리적인 것을 세속적인 심리적인 것으로서 구성하는 초월론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심리적인 것의 의미형태를 받아들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낡은 세계'의 의미 변화, 우리가 단도직입적으로 세계라 명명하고, 소박한-자연적 태도에서 하나의 완결된 [79] 지평을 가졌던 그것의 의미변화는 이 지평을 파괴한다(durchbrechen). 그러나 이 지평은 다시금 세계로부터 세계를, 곧 이념적인 범주적-존재론적 구조를 만든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데], 모든 변화들에서 다음과 같은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 바로 흐르는(strömen) 그리고 그럼에도 의미상 통일적인 생활세계가 그것의 생활세계적 구조를 유지하며, 그 구조 속에서 고유한 범주적 본질[에 따라], 학문적 사유의 심리적 능동성[활동성]이 그것의 자유로운 실천적 가능성들의 지평 속에서 자연을, 그것을 이념화하고-이론화하면서 자연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 정초된다. 학문적인 심리학 또한 생활세계적 구조 속에 있으며 물리학과의 언제나 고수되는 얽혀있음 속에서 [수행/성립] 가능하다. 그러나 순수한 수학과 자연의 사실성들에 대한 정밀한 학문이 그것의 이론적 진리들(최종적으로 정초된 것으로서 이념적으로 포착된) 속에서 변함없이 남는 동안, 세계의 심리적인 것에 대해서는 그런 일[진리의 보존]이 일어날 수 없다. 생활세계의 모든 변화 속에서 이전에 심리적인[심리적이었던] 것으로서 이전의 (선초월론적인) 세계지평 속에서 주어진[주어졌던] 것이 남기는 하지만, 심층적-심리적인 것의 증가(Zuwachs), 그러므로 또한 심층심리학적인 것들의 증가의 측면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이 심층심리학적인 것들은 이전의 세계지평에서는 그 자체로 닫힌 가능성으로서 미리 사념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전에 그것은 세계 속에서 누구를 위해서도 현존하지 않았고, 순전히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서 현존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래도] 모종의 접근방식들[--]그 자체로 이전의 세계지평의, 이전의 세계 자체에 함께 속했던[접근 방식들--]속에서는 접근 가능한 것으로 현존했다. 세계 자체가 변화한다. 세계는 스스로 변동하는 우주이고 다만 그 변동 속에서 고수되는 실재들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또한 변동하며 고수되는 존재자들의 이러한 우주로서 스스로를 '변동시키고' 또는, 우리는 새로운 말들로써 더 잘 말할 수 있는데, 세계는 초월론적인 것의 세계화(Verweltlichung), 그로써 초월론적인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ganz und gar) 세계 속에 받아들여지는 그런 세계화를 통해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의 운동은 환원의 착수와 함께 부상하는 세계의 재창조(Umschöpfung)이라는 구성적 의미를 가진다. 이 세계는 이때 범주적 구조의 보존 하에서 동일한 세계로서 그리고 신종의 지평, 흘러들어옴을 통해 언제나 다시 풍부해지는 변화들을 보존하는 바로 그 지평으로서 계속해서 구성된다. 만일 세계가 보편적으로 이러한 새로운 지평 속에서 구성된다면, 세계는 존재자 일반의 총체(Totalität)를 포괄하게 된다. 세계가 미리, 지평상, 이미 자신이 그때그때마다 초월론적으로 구성하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한에서 말이다. 초월론적- [80] 인격적 주관성으로(자아와 자아로부터 개방되는(erschließen) 초월론적 우리-전체 그리고 타자 가운데서의 초월론적 전체성(Allheit)으로) [향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그 주관성을 초월론적 전체-공동체-지평(Allgeminschaftshorizont)으로서 가지고, 그 속에서 모두를 위해 자아로서 실현 가능한(vermöglich) 태도변경들, 세속적 태도로의 실현 가능한 귀환의 지평을 가진다. 이 지평에는 '언제나-다시'[의 형식] 속에서 주체와 현상학하는 활동들까지 포함하는 모든 것의 세계화가 속한다. 바로 이것[이 소속]을 통해 전체성의 초월론적 지평, 초월론적 주체들의 전체공동체는 자신 안에서[그 자체로(in sich)] 구성된 세계, 그러나 이제는 '언제나 다시 새로운 초월론적 탈은폐들을 수행함' 그리고 '언제나 다시 세계태도로 되돌아갈-수-있음'이라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운동 속에서 움직이며 구성하는 세계를 [자신의] 상관자로서 미리 그렸다. 초월론적 주관성, 함축적으로는 전체주관성의 실현 가능한 운동으로부터 언제나 새로운 구성된 상관자적 의미를 획득하는 세계로서, 구체적으로 아프리오리하게 모든 초월론적인 것을, 이미 세속화된 것의 운동 속에 있는 그리고 그 운동 속에서 실현 가능하게 들어서면서 그리고 그것의 초월론적 역사성에 따라, 초월론적 생성됨(Gewordenheit)에 따라, 그리고 초월론적 생성함(Werden)에 따라 물어질 수 있는 모든 것으로서의 모든 초월론적인 것을 함축하는 의미를 [획득하는 세계를 말이다.] 이러한 초월론적 역사성은 초월론적 시간성 속에서 일어나는데, 초월론적 시간성은 초월론적 역사성 자체와 같이 이중화된, 상관적인 시간성이다. [그것은] 초월론적인, 구성하는 상호주관성(인격적인, 자아적인)의 시간성이자 구성된 세계의 시간성이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의 상관자로서 전자 속에 함축되어있으며, 그러나 또한 전자도 다른 방식으로는 후자 속에 흘러들어간 것으로서 그리고 흘러들어가는 것으로서 존재하고, 초월론적 환문을 통해 증명되고 관통될 것이다.

 이 두 가지 것들이 합치되는 모든 시간은 견고하게 선행되는(vorausgehend) [완성된] 형식, 그 형식 속으로 형식화된 것이 쏟아부어지는 그런 형식이 아니다. 도리어 이 모든 시간은 그 자체로 구성적인 '과정' 속에서 구성된다. 총체적으로 고찰했을 때 초월론적 전체주관성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전체성이다. 이 절대자는 '엔스 아 세(ens a se[독일어로 von sich selbst sein])'의 본질형식 속에 있는데 이때 이 '엔스'는 초월론적인 개별적 엔티아[존재자]의 전체성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금 '엔스 아 세'의 형식을 가지는 그런 엔티아의 전체성이다. 이러한 '아-세'-존재[자신으로부터의-존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해준다. 바로 그 존재가 구성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구성된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또한 시간은 이러한 전체성의 형식, 모든 개별적 주체에 자리(Stellung)를 부여하는 형식이다. 시간 없이 주체는 상상할 수 없으며 (왜냐하면 주체는 [81] 오직 전체성 속에서만 상상 가능하므로) [주체는] 자기구성을 위해 필연적으로 시간에 속한다. 자아로서의 모든 에고가 절대자, 자기 자신 속에서 자신의 타자들 가운데서의 자아존재를 그리고 타자들의 전체성을 구성하는 그런 절대자이기 때문에, 모든 자아는 그에게 고유한 초월론적 역사성과 시간성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이 전시간성을 지향적으로 자신 안에 담지한다. 그러나 세계가 초월론적 지평의 개시(Eröffnung) 그리고 모든 초월론적 가능성들의 지평으로서 구성된 후로, 세계화된 형태에서의 신종의 세계운동 속에서 모든 초월론적 가능성들 속의 모든 초월론적인 것을 자시의 안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제 이 세계 또한 '엔스 아 세'라는 형태의 전체성이 된다. '세계', '존재하는 모든 것(All des Seienden)'이라는 개념의 근원적 의미는 존재자 자체의 개념이 바뀐 것처럼 바뀌었다. 환원 이후의 그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소박한-자연적 세계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니며, 그 속에서는 구성하는 주관성이 발견될 수 없고, 구성하는 주관성은 낡은 소박성 속의 인간에게는 원칙적으로 그 어떤 반성을 통해서도, 그 어떤 '내적 경험'을 통해서도, 그 어떤 학문을 통해서도 접근 가능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의 초월론적 의미 변화의 결과로, 세계의 범주성(Kategorialität)을 계속적으로 보존하려는(erhalten) 필연성 속에서, 세계는 이제 다시금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다만 이제는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된다--바로 세계화된 형태 속에서 모든 것을 자신 속에 품으면서(enthalten) 말이다. 이때 초월론적 의식은 인간의 심리학적인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세계화된 초월론적 주체로서 등장한다(auftreten).

 이러한 기존의 세계와 [환원] 이후의 세계의 등장은 나의, 우리의, 철학하는 자의 그리고 함께(miteinander) 철학하는 자의 그리고 인간세계와 동물세계 등등 속에서 철학하는 자의 하나의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과정이다.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Was ist das für eine Zeit?) 우리는 자연스럽게[자연적 태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그 시간은 일상적 의미에서의 시간, 자연의 시간, 그러므로 또한 일상적인, 소박한-자연적 의미에서의 세계의 시간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이미 현상학하는 철학자라면 그렇다[현상학하는 철학자로서도 그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초월론적-현상학적 운동의 결과로 비로소 모든 초월론적인 것이 그리고 그렇게 또한 초월론적 환원 자체가 철학자의 심리적 수행으로서 세계 속으로 들어서기(eintreten) 때문, 그 세계 속에서 전환을 통해 우리에 의해 이전의 인간적 작용들의 것과 동일한 시간지평 속의 인간적 작용으로서 발견될 수 있는 것[환원]으로서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이 세계 속, 세계적 가능성들의 형식으로서 세계의 현실적인 시간지평 속에서는, 그 어떤 자연적-소박한 인간에 대해서도, 그 어떤 대단한(noch so) 정밀한 [학문활동을 수행하는] 학자에 대해서도 초월론적으로 객 [82] 관화된 것으로서의 무언가는 현존하지(vorhanden) 않으며 그의 대단히 완전한, 대단히 성공적인 경험과 사유작업 속에서도 [초월론적으로 객관화된 것은] 발견될 수 없다. 이념화된,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생각된 인간, 인간성(Menschlichkeit)의 종교 속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신으로 취해지는 그런 인간은 여전히 언제나 인간이다.

 이것이 현상학하는 자아 속에서 현상학으로서 일어나는(als Phänomenologie geschehen) 구성이다. 이 구성은 이성적인, 체계적인 진보 그리고 정정 속에서 이념적으로 보존되는 인식의 구성이다. 존재자 자체의, 일관적으로 함께 조화되는 자기부여의 진보 속에서, 예측된 존재자와 존재타당성들을 보존하고 절대적으로 보존할 그런 지평으로서의 존재지평의 일관적인 자기부여 하에서[의 인식 구성 말이다.] 진보 속에서 그때그때마다의 명증적인 것, 그때그때마다 자기 자신으로서 적법하게[합법칙적으로] 정립된 것이 하나의 미래지평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된 과거의 모든 것이 자신 속에 함께 그것[존재자]에 속하는 의미보충들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되돌아가-양도함(Rückübertragung)을 통해서 또한 새롭게 속하는 지평들을 취한다. 그것의 시간양상적 타당성의 명증과 함께 되돌아가-양도하는 이와 같은 통각을 통해 자연적-소박한 세계는 그것의 전체 시간성을, 모든 시간양상성들과 시간내용들 (또한 내용지평들)을 따라서 초월론적 발견들로부터 언제나 새로운 존재의미를 보존한다. 세계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언제나 이미 존재했고 전시간적으로 구성된 세계이며 언제나 이미 심리학적으로 구성된 자연 그리고 영혼적 존재와 함께 구성된, 독자적으로(für sich) 스스로를 심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초월론적 성격(Transzendentalität)의 익명적 지평을 가진다. 이것[초월론적 성격(Transzendentalität)의 익명적 지평]은 인간적 역사성 속에서, 현상학적 환원 이전의 자연적 학문에서 한때[한 번](einmal) 동기부여되었으며, 공동의 인간성 속에서 [인간이] 사실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사는 방식으로[방식에 따라서] 자라난다. 그러나 이러한 삶-내용의 형식의 본질적 필연성들 속에서 시간은 충족되고, [그렇게 충족된] 시간 속에서 새로운 것이 역사성 속으로 개입해 들어오는데, 사실들 가운데서의 한갓된 한 사실로서가 아니라 그리고 자신의 영향을 외부적으로[만] 미치면서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의 지향성, 보편적인 것으로서 보편적인, 다가올 역사성을 혁신(Neuformung)의 방식으로 규정하는 지향성 속에서 개입해 들어온다. 여기에 현상학적 환원의 개입이 속하지 않겠는가? 에포케는 삶의 양식으로부터 그리고 삶의 인격적 담지자로부터 동기부여된다--그러나 모든 것은 여전히(doch) 지향성이고 지향성으로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이 영향은 '역사적으로' 미쳐지며, 모든 새로운 것은 '동기부여된' 것[,] [83] 더 이전의 지향성과 그 지향성의 이전의 총체성으로부터 동기부여된 것이다.

 역사적인 것은 언제나 개입[침입]이다. 그러나 동시성과 연쇄성 속에서의 역사, 충족된 역사적 시간은 자신의 본질형식을 가지며, 그 속에서 세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타당한 모든 단계들에서 세계적으로 살아가는 주체를 위해 구성된 지평이었던 역사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본질형식을 가진다.] 그와 같은 세계의 본질형식--시간지평, 그 속의 시공간적인 국지성, 그러므로 모두를 위해 [어떤] 양식, 역사적 존재의 양식으로서 미리 그려지는 것, 그것이 역사적 생성함 속에서의 존재다. -- 존재타당성의 열린[개방된](offen) 체계 그리고 정정을 통한 보존 속에서. 그러나 [환원 이후] 새로운 태도와 시선의 방향을 만드는, 세계지평, 인간적 경험과 사고가능성들의 지평 속에는 놓여있지 않은 그런 가능성들을 발견하는 더 높은 [수준의] 역사성, 새로운 것의 개입, 하나의 동기가 효과를 내게 된다(wirksam werden).

 되돌아보면 -- 이 인식가능성들은 이전에는 인간을 위해서 존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실재들 그리고 이전의 세계에 대한 통각은 이제 필연적이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간접적으로 규정하고 그 규정성 속에서 보존하거나 그만 보존하는(entwähren) 자신의 방식들을 가진다. 그렇게 이전의 세계전체(Weltall)는 숨겨진, 이전에는 접근 불가능했던 차원들을 가진 것이 되는데, 그 차원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고 자신의 인식가능성을 가진다 -- 다만 오직 나중에(ex post), 되돌아보아졌을 때 그리고 귀납적으로, 숨겨진 것들을 사후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서 가지는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의 인식 가능한 본질구조의 틀 속에서 그렇다.

 그러면 또한 인간으로부터 동물들, 동물적 세계, 동물적 세계지평, 동물적 역사(계속해서 효과를 내는[영향을 미치는] 지향성, 개입들 등등)로의 양도[이행][이 발생한다.] 동물이 인간으로 발전함 속에서만, [이를테면] 다음의 유비를 따라서 그렇다. 아이가 인간이 되는--그러나 종과 종-발전에 따라 [다르게] 분배된--발전과의 유비. 동기들에 대한 물음, 이 역사성의 가능하고 더 정확한 본질형식에 대한 물음. 인간, 그의 이성의 발전-.

 인간성 속에서의 역사적 시간--모든 심리적인 것과 상대적인 존재자들(Onta), 그것들의 관점들 등등과 함께 내면에서 보아진 공동의 인간성의 시간. 이 역사적 시간은 필연적으로 자연시간과, 생활세계적 시간과, 현실적 시간과 합치한다--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특히 자연, 순수하게 이념화되어, 수학적 자연의 수학적 시간을 미리-그림(Vorzeichnung). 자연시간과 주관적 시간, 역사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