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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번역

에드문트 후설, <현상학적 환원> 34번 유고 '나의-존재함(Ich-bin)의 필증성이 가지는 의미' 번역

E. Husserl (Hrsg. von S. Luft), Zur Phänomenologischen Reduktion: Texte aus dem Nachlass (1926-1935), Kluwer Academic Publishers, 2002 (Hua XXXIV), s. 467-469, 모든 강조는 필자.

나의-존재함(Ich-bin)의 필증성이 가지는 의미(1934년 봄)

필증적으로 나의 코기타툼인 세계. 나를 위한 세계의 필증성, 나의 존재함의 필증성

 1) 나에 의해 현실적으로 또는 가능하게 경험된 것으로서의 세계의 존재론적 본질. 이 본질에는 하나의 유일한, 모든 변주들을 관통해 개별적으로 불변하는 것으로 남는 실재적인 것, 구체적으로 말해 '인간'이라는 본질형식, 말하자면 나, 이 인간이, 나의 모든 자기변주들을 관통하고 나의 개별성을 유지하는, 불변하는 본질 속에서 시공간적으로 실제적인 것으로서 속한다

 2) 이와 같은 불변하는 개별적 본질에는[본질적인 인간됨에는] 그러나 나의 신체적-심리적인 것이, 나의 기관으로서의 신체 속 나의 '지배함'이, 그리고 그를 통해 이러한 신체 자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세계적 '감성적' 경험(그것에 의해서는 위에서 말한 그 어떤 '실제적인 것'도 그것의 개별적 현존재에서 필증적으로 경험되지 않는)이 속한다.

 3) 나의 필증적으로 본질적인 인간적 존재에는 나의 다겹의 그리고 그때에 지속적으로 통일적인 의식삶이 속한다. 이 의식삶 속에서 나는 바로 지속적인 세계의식을, 세계에 대한 존재확실성을 가진다. 여기에는 그 속에서 내가 '세계에 대해' 하나의 그때그때마다의 경험영역을 가지는 보편적인 경험이, 나의 흐르면서 변동하는 지각장이, [468] 나의 기억들과 기억장들이, 그것들이 곧장 '수면 위로 떠오르는' 대로, 나의 사고가, 나의 의식적인 실천적 지향들, 나에게 의식되어가는 실천적 가능성들, 선택하는 결정들, 행위들이 그것을 동기부여하는 모든 가치들과 함께 속한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삶의 전체 흐름이, 세계 속으로 들어가-경험함(Hineinerfahren), 들어가-사고함(Hieneindenken) 그리고 들어가-힘씀(Hineinwirken) 등등으로서 속한다. 이때 다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내가 세계'에 대해' 그때그때마다 오직 하나의 영역을 경험영역으로서 또는 하나의 사고영역을 가진다는 데 대해서 말해질 때, 이러한 특수한 내용물 그 자체가 말하자면 하나의 '흐릿한(vag)' 지평, 하나의 흐릿한 잉여(plus ultra), 내가 그것에 대해 알려져있는 것들과 그것의 규정성들 속에서 또는 그것에 대해 알려져있지 않은 것들[미지] 속에서 명시적인 의식으로 나에게 가져올 수 있을 [그런] 잉여의 형식 속에서 의식된다는 것을. 그러나 [이] 알려져있지 않은 것들은 미리 신뢰된, 알려진 구조의 미지, 그 속에서 가능한 경험, 가능한 사고, 가능한 사고의 검증 등등이 취해지는 활동공간의 미지이다.

 이 모든 것이 분리 불가능하도록 함께 속하며 (사전에 벌써 신체-속에서-지배함을 포괄하면서) 나의 영혼적 의식삶을 형성한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다시금 분리불가능한 것은 모든 영혼적 능력, 모든 잠재성과 습성이다. 이것들은 순수하게 의식삶으로부터 발원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예를 들어 내가 하나의 타당성을, 예를 들어 하나의 판단을 수행한 뒤 무매개적으로 이미 '아직-계속-타당함'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끝나지 않았고, 이제야 비로소 나에게 타당한 판단이다. 이러한 총체적 정신적 존재는 시공간적 세계의 존립요소(Bestand)이며 필증적인 존립요소인데 (보편적인 세계경험이 계속해서 경과하는 동안) 다음을 통해 그렇다. [바로] 그 존립이 자신 안에 내 신체의 지속적이고 필증적인 경험타당성을 담지함을 통해서, 그리고 이러한 그의 육체적 존재가 비자립적인(인과적인) 부분으로서 전체 자연을 가지게 되도록 그렇다. [또한] 나아가 나의 심리적 전체성이 필증적으로 나의 신체의 필증적인 존재타당성과 분리 불가능함을 통해서 그리고 이를 통해 신체 속에 시공간적으로 위치지어진 존립을 가지고 그렇게 매개적으로 전체 자연 속에 존재하도록 그렇다.

*예를 들면 과거에 타당했던 바를 붙잡는 정신의 능력이, 세계를 의식하는 우리의 삶과 분리 불가능하다.

 내가 세계를 경험하고 이러한 흐르는 세계를-의식해-가짐(Weltbewussthaben) 속에서 세계를 그것의 불변하는 존재론적 구조 속에서, 물론 변동하는 개별적 존립요소들 가운데서긴 하지만, 경험하고 사념하는 동안, 나는 필증적으로 세계에 속하며, 구체적으로 이때에 그 속에서 내가 스스로를 세계와 관계된 것으로 알고 그것을 통해 내가 세계의 모든 규정된 것들과 규정되지 않은 것들을 아는 내 전체 의식삶이 나에 [469] 대해(für mich[대자적으로]) 세계에 속하며, 이러한 개별적 신체(이 의식삶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변동하는 특수경험들과 특수사념들 속에서 스스로를 의식하는 것인 [신체])로부터 분리불가능하게, 이러한 신체가 존재하는 그리고 신체가 존재하는 동안 거기 그리고 그때에 존재하면서 그렇다.

 이러한 해명들에 따르면, 그러므로 '나의-존재함'의 이러한 필증성에포케 속의 에고 코기토가 의식삶 속에서 타당한 세계의 존재와 관련해서 [가지는] 필증성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러한 필증성]은 물론 세계타당성의 토대 위에서 그것의 의미를 가지는 필증성이고, 세계의 존재론 전체에 속하는 필증성이다. 완전하고 전체적인 의미에서의 존재론은 하나의 일반적으로 생각 가능한 세계로서의 세계에 대한 모든 필증적 (또는 '아프리오리한') 진리들의 전체통일성(Alleinheit)이다.


cf. Hua XXXIX, 부록 24번. 내가 인간임이 필연적이냐는 물음에 대해, 적어도 나의 존재는 확실하지 않느냐는 후설의 동문서답. 

 "Ist eine Abwandlung meines reinen Ich-Seins denkbar, in der ich, obschon in Abwandlung meines faktischen menschlich-personalen Seins noch ich, dasselbe Ich, wäre, aber nicht mehr menschliches, nicht mehr Person eines Leibes und dadurch für mich selbst psychophysisch objektiviert seiend in der Welt, durch Beziehung auf die bleibend konstituierte Leiblichkeit mitlokalisiertes Ich in der Raumzeitlichkeit? […] Aber bleibt nicht jedenfalls dies, dass ich in Selbstwahrnehmung meiner selbst personal apodiktisch gewiss bin, nämlich so weit, dass diese Selbsterfahrung, wie viel ⟨auch⟩ in den mir zugegoltenen Bestimmungen modalisierbar ist, doch hinsichtlich des Ich-Pols und der uroriginalen Bestände prinzipiell nie modalisierbar ist? Jedes Sich-Umdenken der Selbstwahrnehmung, soweit es irgend Erdenkliches ergibt, ergibt notwendig abermals, vergegenwärtigend, einen möglichen Bestand uroriginalen Für-mich-Seins, einen Ich-Zustand, auf den reflektierend ich finde, dass ich in ihm für mich selbst uroriginal wäre und als dasselbe Ich, das ich jetzt wirklich bin. Ein Zweifelhaftsein, ein Nichtigsein in evidenter Ursprünglichkeit ist hier ein Widersinn."(Hua XXXIX, 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