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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풀꽃과 장미의 수난(2021.12)

 전문은 https://knower2020.com/forum/view/595615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올 포 미’의 첫날은 긴장감 넘치면서도 한산한 끝을 맞았다. 가게에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나와 내 곁을 지키기 위해 반차까지 낸 혜연, 그리고 동네에 새로 생긴 피자집이 궁금해 걸음을 떼준 이웃들 몇 명이 전부였다. 아무리 가오픈 차원에서 단축 운영을 했다고는 하지만, 하루에 손님 네 명은 너무하다 싶었다. 혹시 이름이 피자집답지 않아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혜연과 꼬박 일주일을 ‘올 포 미’와 ‘미 앤 마이 피자’ 사이에서 토론한 끝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는데...... 바닥에 떨어진 도우 부스러기를 줍고, 행주로 테이블을 닦으면서 혜연에게 역시 네 말을 들을 걸 그랬나 봐, 사람들이 여기가 피자집이라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아, 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혜연은 여기 주인은 내가 아니라 너야, 그러니까 네 결정이 옳은 거야, 라는 무지막지하게 비논리적인 응원을 보내줬다.

 “야, 그리고 손님들이 바보니? ‘올 포 미’ 밑에 달았잖아, ‘1인을 위한 피자 하우스’라고.”

 한 명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먹을 수 있는 피자를 팔고 싶다고 생각한 건 최근 한두 해 사이의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혜연과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갖고 있었던 아이디어였다. 나는 입이 짧은 편이었지만 피자는 몹시 좋아했고, 혜연은 음식을 가리지 않았는데도 피자만큼은 예외였다. 처음엔 까르보나라는 잘만 먹으면서 피자는 느끼하다는 게 말이 되냐고 따지기도 했지만, 사람의 취향은 논리로 재단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에게 피자의 위대함을 설득시키기를 포기하자 우리의 투룸에는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문제는 그 후에도 내가 계속해서 피자를 배달시켜 먹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나는 피자가 혀에 닿는 질감과 그 맛을 높이 샀을 뿐, 음식 자체를 많이 먹을 수 있지는 않았다. 아무리 작은 사이즈의 피자를 시켜도 두세 조각만 맛을 보고 다섯 조각 정도는 냉동실 구석으로 직행을 시키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음날 나머지 다섯 조각을 책임졌는가, 하면 또 아니었다. 한 번 얼려진 뒤 해동된 피자는 전날의 풍미를 잃어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멀쩡한 피자 조각들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쓸어넣는 나를 보면서 알뜰한 혜연은 경악했고, 하루는 참다 못해 그럴 거면 딱 세 조각만 시키지 그랬냐고 소리를 질렀다.

‌ 혜연의 날카로웠던 말씨가 무색해지도록 나는 그 말을 어느 아기자기한 꿈의 윤곽처럼 받아들였다. 그 날부터 나는 ‘피자를 세 조각어치만 주문하는 일이 허용되는 피자집’이라는 문구를 가슴 깊숙이 품고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요식업과는 전혀 무관한 스타트업에 청춘을 바치면서도, 그 문장 속의 판타지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나는 서른 살이 되면 회사를 그만두고 피자집을 차리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그 꿈을 실현한 것이었다.

*

 혜연과 나는 대학에서 만났다. 지금은 내 최고의 친구이자 생활동반자가 되었지만 새내기 때부터 친했다든지, 학과의 동기 관계로 서로를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2학년 2학기에 열린 ‘서양근대철학’이라는 수업에서 옆자리에 앉은 덕분에 서로를 알게 됐다. 혜연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철학도였고, 나는 저 멀리 경영대에서 발에 땀이 나도록 걸어온 신세였다. 대학에 왔으면 모름지기 철학 수업 하나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냐는 동경의 발로였다. 물론 우연히 서로의 옆자리에 앉게 됐다는 사실만으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가을날, 자기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펜을, 그것도 알 만한 사람만 아는 사이트에서 이벤트로 한정 판매하는 ‘꼬마 마법사 레미’ 요술봉 펜을 꺼내들었을 때만큼은 예외였다. 우리는 스물한 살씩이나 되어가지고 오색 비즈가 버블검 자판기처럼 들어차있는 필기구를 쥐고 있는 서로를 보자마자 헛웃음을 터뜨렸고, 창피해 하면서도 통성명을 해야 한다는 운명의식을 느꼈다.

 혜연과 나는 대체로 쓸모없지만 귀여운 물건에 대한 취향이 비슷한 것은 물론 그 외의 이슈들에 있어서도 말이 잘 통했다. 혜연은 남사스러운 내 이름을 듣고 호들갑을 떨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우리는 어느 샌가부터 수업을 같이 듣고 함께 점심까지 먹는 사이가 됐다. 학식으로 로제 파스타가 나오면 그녀에게서 가끔씩 “우리 장미 동족상잔하네” 같은 터무니없는 개그를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그 수업은 여러모로 내게 행운이었다. 평생을 함께할 친구를 만나게 해준 것도 모자라, 수업 자체도 명강의였다. 젊고 의욕적인 강사는 대충 학점을 따고 말면 장땡인 개론을 예상한 학생들의 기대, 또는 체념을 보기 좋게 부정해보였다. 그는 강의의 주제를 근대철학자들의 윤리학만으로 한정했고, 원전들의 일부를 직접 번역해 나눠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가끔은 전공자만 읽을 것 같은 2차 문헌까지 소개해주었다. 소개된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나와 혜연을 매료시킨 철학자는 데이빗 흄이었다. 도덕은 감정의 문제이며,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쾌와 안정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는 도덕적인 반면, 불쾌와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는 비도덕적이라는 설명이 단순하면서도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 애호가의 비장감을 풍기는 고학번 선배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유감스럽게도 강의와 토론은 대체로 칸트에게 호의적으로 이루어졌다. 안정감이건, 두려움이건 상황적인 우연에 의해 흔들릴 수 있는 모든 경향성을 도덕적 선택의 기준에서 배제하고, 그 자체로 옳으며 별처럼 육중한 도덕 법칙인 정언명령을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 윤리학의 핵심이었다. 혜연과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칸트주의자들에게 반대하면서 우리의 발랄한 흄을 변호하려고 노력 했다. 그녀가 먼저 당차게 반론을 시작하면, 내가 예시나 사족을 잇따라 덧붙이는 식이었다. 말들은 현학적으로 했지만 요지는 결국 ‘여러분 진짜 악을 만났을 때 도덕 법칙에 따라 반대하세요? 그냥 우웩, 저게 뭐야 싫어, 하는 거지’였다.

 어쩌면 그때 나는 조금 미쳐있었던 것 같다. 혜연이라면 아무리 로스쿨을 생각하고 철학과에 들어왔을지언정 철학을 계속 좋아했다지만, 나는 평생 인문학 일반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도 전공 공부를 등한시하면서까지 열심히 수업을 들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내가 임해왔던 종류의 사고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고에 몰두하는 일, 그리고 그 사고를 마음 맞는 사람과 나누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수업 전후로, 그리고 기말고사 기간 내내 이루어진 우리의 대화들이 혜연에게 역시 인상 깊은 경험이었는지 강의가 끝난 날, 종강 파티 겸 해서 술을 마시다 같이 살자는 말이 나왔다. 충동적으로 던져진 이야기였지만 우리 둘 중 누구도 그것을 술자리에서의 빈말로 여기지 않았다. 진짜로 투룸을 구한 혜연과 나는, 비록 낮에는 떨어져있었지만 나날이 밤의 고요를 공유했다. 요리만 좀 한다뿐이지 덤벙거리고 세상사 일반에 대해 줏대가 없었던 나와 달리 혜연은 생활력이 강했고, 모든 일에 견해가 뚜렷이 잡혀있었다. 인간관계의 문제에서든, 진로 문제에서든 나는 언제나 혜연에게 도움을 구했고 웬만하면 그녀의 말을 따랐다. 한편 혜연은 내가 자신의 말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들어줘서 좋다고 했다. 의견이 다를 때도 자기 말을 최대한 자비롭게 해석해주고, 이해해주려고 노력해줘서 늘, 고맙다고.

*

 3학년이 되자 우리는 현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언제 우리네 삶에 철학을 즐길 여유가 있었냐는 듯이 바쁘게 지냈다. 다시 익숙한 사고의 패턴, 유형이 정해진 문제를 풀 때 요구되며 창의력마저 어떤 암묵적인 틀 안에서만 발휘하게 만드는 그것을 중심으로 뇌를 재설정해놓아야 했다. 혜연은 로스쿨 진학을 위한 시험 공부를 미리 시작했고, 어느새 요술봉 펜을 만년필로 바꿔버렸다. 반면에 나는 여전히 요술봉 펜을 필통 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 어떤 회사에 가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조차 정립하지 못한 채 단순히 보다 확실한 취업을 위해 부랴부랴 경제학을 복수전공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혜연은 그토록 꿈꾸던 로스쿨에 입학했으며, 변호사시험에 통과하자마자 어엿한 로펌에 취직했다. 나 또한 졸업과 함께 지인이 몸담고 있던 스타트업에 입사했다. 매번 실수 연발에, 사장 언니와 친했음에도 몇 차례 잘릴 뻔하기까지 한 나와 달리 혜연은 모르는 사람들과 경쟁 관계 속에서 부대끼면서도 늘 적응에 성공했다. 힘들다고 말은 했지만 그 말의 끝에는 늘 자신감과 성취감이 어린 미소가 따라 붙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다 발견한 혜연의 통장에 찍힌 월급 액수를 통해서는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실제로 능력을 인정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눈에 혜연은 이 사회를 지탱하는 완벽한 어른이었다. 그녀는 어리숙한 나처럼 억지로 자신을 사회의 요구에 맞춘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요구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심지어는 스스로도 그 요구들에 충실한 근엄하고 양심 있는 심판관에 가까웠다.

 혜연에게 열등감을 느낀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내가 그녀보다 많이 가진 것이라고는 하찮은 낭만뿐이었다. 하지만 혜연 같은 친구가 내 곁에 있어 든든하다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 그랬기 때문에 서른 살이 되도록 한 번도 헤어질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닐까? 우리는 그 사이 세 차례나 이사를 했지만, 계속해서 같은 집에 살았다. 사실상 혜연은 나에게, 나는 그녀에게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내 부모님보다도 적극적으로 나를 보살폈으며, 나 역시 부모님보다도 혜연에게 더 의존적이었다. 스물아홉 살의 크리스마스에 내가 회사를 관두고 1인가구를 위한 피자집을 차리고 싶다고 말하자 혜연은 진지하게 내 결심을 응원해주었다. 메뉴를 개발하는 동안엔 피자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많은 실패한 피자들을 시식해줬고, 마지막에 상가 임대 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권리금 일부를 대신 내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피자 세 조각 정도의 양에 해당하는 동그란 피자를 마치 퀴시처럼 판매하는 ‘올 포 미’가 문을 열게 됐다. 물론 1인 피자라는 물건이 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엄연한 후발주자였다. 하지만 계절에 맞춰 다양하고도 흥미로운 메뉴를 내놓으려고 노력했으며, 처음엔 일률적이었던 사이즈도 S, M, L로 나누어 소비자의 선택폭을 넓혀나갔다. 인테리어를 세련되게 해두어서인지 어느 샌가부터 인스타그램에서 입소문이 돌았고, 덕분에 20대 손님들이 인증샷을 찍으러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모노톤 가구와 벽 곳곳의 흑백 타이포그라피 포스터들이 금속 쟁반에 나오는 알록달록한 피자와 생각보다 괜찮은 색채 대비를 이뤘던 게 비결이었다. 가오픈 첫날 단 네 명의 손님만이 다녀간 ‘올 포 미’는 점점 붐비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픈 직후 서너 달째가 고비였다. 점심에 올 손님을 위해 오전부터 가게 문을 열고, 야식을 찾는 손님을 위해 밤까지 가게에 머무르는 날들이 계속됐다. 재료 사는 것도 내 일, 피자 굽는 것도 내 일, 서빙하는 것도 내 일, 뒤처리하는 것도 내 일, 화장실 청소도 내 일이었다 보니 피로가 누적됐다. 나는 몸이 고장나기 전에 얼른 아르바이트생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구인구직 사이트가 매우 활성화돼있었기 때문에 나는 며칠 내로 희망자 몇 명을 만나 면접을 볼 수 있었다. 20살의 힘 좋아 보이는 대학생도, 25살의 알바 베테랑도, 취미로 각종 조리 자격증을 땄다는 27살 취준생도 만났지만 나는 고민 끝에 유능한 사람보다도 절실한 사람을 뽑기로 했다. 혜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밀어붙인, ‘올 포 미’를 위한 나만의 첫 결단이었다. 피자야 내가 책임 지고 굽는 거고, 알바생에게 맡길 것은 서빙과 계산, 테이블 닦기, 화장실 청소 그리고 약간의 잔심부름 정도일 텐데 그것들은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잘 해낼 수 있는 일들일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서른이 넘는 나이에 첫 아르바이트라며, 돈이 궁하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간절했던 지원자의 손을 들어줬다. 그녀는 그 목소리에 걸맞게 일을 시작하기로 한 첫날, 약속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서 내 일을 거들어줬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생의 손이 너무 고와서, 문자 그대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아온 게 아닐까 하는 근심 섞인 망상을 하기도 했는데 일단은 그저 지켜보았다. 그녀의 일머리가 열정을 따라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설거지에조차 별다른 요령이 없었으며, 해야 할 일을 일일이 메모해놓지 않으면 한두 사항을 까먹기 일쑤였다. 가끔은 메뉴를 잘못 전달하기까지 했는데, 그럴 때면 덜렁 남게 된 피자를 내가 저녁으로 먹어야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손님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일만큼에는 재능이 있어서, 나에게 혼나는 일은 있을지언정 손님들이 그녀의 일에 불만을 표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는데, 어떻게 보면 타고나기를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오직 그녀를 보기 위해서만 가게에 들르는 남자 손님들도 생겼다. 옆 건물의 덩치 큰 회사원 한 명이 특히 극성이었다. 그는 본인의 간에 기별 도 안 갈 것 같은 S 사이즈 피자를 주문하면서 그 기회를 잡아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곤 했다. 나는 실례라고 생각해 의식적으로 하지 않았던 일을, 실례인줄 알면서도 뒤늦게 수행했다. 그녀의 외모를 하나하나 뜯어본 것이다. 그녀는 키가 작았지만 비율과 스타일이 좋아 원래 키보다 적어도 5cm는 더 커 보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웃을 때마다 개성적으로 왼쪽 볼에만 보조개가 생겼 고, 눈동자는 어떤 조명 아래서든 렌즈를 낀 듯이 반짝거렸다. 그런 그녀의 이름은 ‘김풀꽃’이었다. 나는 자조적인 농담을 쳤다.

 “저랑 이름 바꾸셔야겠는데요.”

 “에이, 사장님 얼마나 아름다우신데요.”

 “그건 그렇죠.”

 그러면서 내가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 같은 포즈를 취하자 풀꽃 씨는 까르르 웃었다. 똑같이 환한 웃음이었지만 손님들에게 보여주는 것과는 조금 다른, 그러니까 아무런 사회적인 강제도 얽혀있지 않은 순수한 웃음이었다. 나는 그 웃음을 계기로 단순히 유머가 통하는 아르바이트생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처럼 어리바리하지만 그래도 열심이고 친절한 한 명의 인간, 김풀꽃 씨에 대해 호의를 느끼게 됐다. 어느 날 우리는 가게를 정리하고, 집에 갈 시간이 됐는데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생강차를 타 와서 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우리는 풀꽃과 장미로서 어린 시절부터 이름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초를 공유했다. 놀랐던 점은 그녀가 한 번 실제로 개명을 했다가 다시 원래 이름인 ‘풀꽃’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이름은 뭐였었냐고 묻자 그녀의 얼굴이 굳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냥 ‘풀꽃’보다는 덜 특이하고 좀 더 세련된 이름으로 바꿨다고만 얼버무리고는 대화를 다른 주제로 돌리려 했다.

 “혹시 사장님은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

 갑작스러운 선회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풀꽃 씨에게 불편한 이야기는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모두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흔하지 않은 공통점이 또 있었다. 어렸을 때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심지어는 하농을 칠 때조차 연습일지에 동그라미를 정직하게 그려넣는 모범생이었다. 내가 중학생이 됐을 때, 이만하면 ‘교양’을 충분히 쌓았다고 생각한 부모님께서 학원을 일방적으로 끊자 며칠동안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기도 했다. 그 뒤로 나는 연주에 대해선 어렴풋한 감각만 가지고 있는 채 감상자로 머물렀지만, 풀꽃 씨는 일반중학교에 다니다 뒤늦게 피아노에 입문해 예술고등학교에까지 진학했다고 말했다. 어쩌다 다른 진로를 찾게 돼 2학년 때 그만뒀다고 털어놓긴 했지만 말이다. 이번에도 나는 그 다른 진로의 세목을 묻는 대신 어떻게 피아노에 입문하게 됐는지를 물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서요. 부모님 친구 집에서 우연히 듣게 됐는데, 왜 좋은지 모르겠으면서도 계속 듣게 되더라고요. 어느 순간부터는 제 손으로 직접 쳐보고 싶어졌어요. 그런 음악을 직접 연주하는 마음은 무엇일지 궁금했거든요.”

 “저는 쇼팽이나 드뷔시 같은 사람 예상했는데. 어린 나이에 베토벤한테 끌리기는 좀 어렵지 않아요?”

 그건 사실 내 얘기였다. 나는 서른 살이 돼서도 베토벤의 음악에 대해 그것이 웅장하다는 것만 느꼈을 뿐, 정확히 무엇이 위대한 것인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풀꽃 씨는 풀꽃 씨만의 베토벤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깊어지자 내일은 홀에서 라운지 뮤직 대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틀자는 합의에 이르렀다. 다음날 우리는 다분히 모던한 피자집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틀어놓고, “질적으로 상이한 멜로디들의 기적적인 조화”와 “강약 사이의 연속적 균열”—풀꽃 씨의 표현들이었다—그리고 그 모순을 마치 신처럼 포용해내는 피아니스트의 손길을 상상하며 도우를 빚고 토핑을 올리고 접시를 날랐다. 단골 손님들은 바뀐 음악을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지만, 우리 둘만큼은 감정이 고양돼서 시간 가는 줄 모르다 영업을 마무리했다. 하루의 끝에 이르러, 나는 내가 풀꽃 씨의 베토벤론에 완전히 설득되었다고 생각했다.

 혜연에게 아르바이트생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준 건 그날밤이었다. 내가 풀꽃 씨를 채용하고 한 달 정도 같이 일한 사이 혜연의 로펌에는 일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혜연은 매일 같이 새벽에 집에 들어와 나보다도 일찍 출근했다. 주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빠짐 없이 공유하던 시절들이 그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외로움을 잘 타는 내가 그 시간동안 우울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풀꽃 씨 덕분이었다. 풀꽃 씨의 실수를 바로잡아주고, 신메뉴를 함께 시식하고, 가끔씩 클래식 음악을 논하고, 그러다가도 인기 있는 스트릿댄스 경연 프로그램 이야기가 나오면 그에 대해서도 위화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생, 아니 친구가 곁에 있어 행복했다. 그러나 큰 일을 마무리 지은 후 오랜만에 제 시간에 퇴근한 혜연은 내 행복이 그리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이름이 뭐? 김풀꽃?”


 “응, 개명도 했었는데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간 거래. 신기하지?”

 “혹시 어떻게 생겼어? 너 그 사람 사진 있어?”

 혜연은 어느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풀꽃 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첫 ‘베토벤 데이’를 보낸 날 가게를 나오면서 남긴 사진이었다.

 “장미야, 너 진짜 이 사람 누군지 모르는 거야? 손님 중에 알아본 사람도 없었어?”

 그러고 보니, 사랑스러운 풀꽃 씨를 환대하던 손님도 있었지만, 풀꽃 씨의 뒤에서 그녀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내던 사람들도 종종 보이긴 했었다. 하지만 나는 주방 일이 바빠 손님들의 반응을 일일이 기억하고 분석할 겨를이 없었고, 워낙 눈치가 느려서 그냥 손님 기분이 안 좋으신가 보지 하고 넘겼었다.

 “야, 이 사람 김제희잖아, 영화 배우.”

 “김제희?”

 “그래, 본명이 김풀꽃이어서 팬클럽 이름이 ‘풀다발’이었잖아. 이름이 재치 있었어서 아직도 기억난다.”

 “김제희가 누구지?”

 “너는 뉴스도 안 봐? 아님 유튜브는? 옛날에 예능에도 꽤 나왔었는데.”

 “내 폰에 유튜브 안 깔린 거 알잖아, 뉴스는 정신 사나워서 안 본 지 오래고. 영화 뭐에 나왔었는데?”


 “왜, 그, ⟪서희: 세기의 담판⟫에서 뜬금없이 거란족 미인으로 나오잖아. 네 취향은 아니지만 엄청 흥행해서 포스터 정도는 봤을 텐데.”

 “아!”

 나는 그제야 포스터 속의 유일한 여성이자 화려하게 머리를 땋았던 어느 배우의 이국적인 이미지를 기억해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정말 풀꽃 씨와 똑같이 생겼었다.

 “와, 나 그럼 지금 영화배우를 알바생으로 쓰고 있는 거야? 근데 그렇게 잘 나갔는데 왜 알바를 해? 나 딱 최저시급 주는데.”

 “너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혜연은 답답하다는 듯이 이마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내가 아무리 댓글창 싫어도 뉴스 좀 보고 살라고 했잖아. 그 배우, 몇 년 전에 프로포폴 불법투약에 필로폰 밀매로 잠시 구속까지 됐었어. 초범이라 실형은 안 살았지만 집행유예 기간도 꽤 길 었고, 여론도 진짜 안 좋았는데. 탄로났을 때 팬클럽이랑 소속사에까지 거짓말해가면서 덮으려다가, 검사 결과가 양성 나와서 망했지, 뭐.”

 혜연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여태까지 힘든 하루들을 나와 함께 명랑하게 견뎌줬던 사람이 마약사범이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필로폰은 투약 시 극단적인 행복감을 줘서 중독성과 의존도가 매우 높은 데다, 폭력적인 성향까지 일으켜 주변에도 위험이 되는 마약이었다. 혜연은 그녀가 공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며, 사회 질서를 현저하게 어지럽혔다고 덧붙였다.

 “근데 그런 사람으로는 정말 안 보였는데......”

 “야, 범죄자 얼굴에 범죄자라고 쓰여있어?”

 “그거야......”

 “너 진짜 잘못 걸린 거야. 여태까지 별 일 없었어서 다행이지, 누가 인터넷에 김제희 ‘올 포 미’에서 일한다고 글이라도 올리면 어쩌려고 그래?”

 “사람들이 그런 글을 올릴까? 집행유예 기간도 다 끝났다며.”

 “끝난 건 집행유예지, 죄의 사실이 아니잖아. 진짜 그런 글 올라와 봐, 네 피자집에 사람이 가겠어? 범죄자 쓴 사장님한테 시선이 곱겠어?”

 “나는 아무것도 몰랐......”

 “그걸 누가 믿어줘? 분명 ‘똑같은 약쟁이다’ 하면서 널 모함하는 사람까지 나올걸?”

 “나, 나에 대해서까지 나쁜 말이 나올 거라고?”

 “넌 30년동안 혼자서 네버랜드에 살았니? 당연한 거 아냐? 너 당장 그 제흰지 풀꽃인지 잘라. 지금밖에 기회 없어, 아직 아무 일 없을 때 소리 소문 없이 자르고, 새 사람 뽑아.”

 혜연은 평소와 같이 결단력 있게 그러나 훨씬 흥분한 채로 말했다. 그것은 말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나를 진심으로 위하는 것도 같았고, 풀꽃 씨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것도 같았다.

 “야, 내가 너 일 잘하는 사람 말고 절실한 사람 뽑겠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불안했어. 알바생은 그냥 베테랑 뽑는 게 제일이야, 말썽 안 피우고...... 에휴, 윤장미 진짜 순진해빠져가지고.” 

*

 그날밤 나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풀꽃 씨의 옛날 이름을 검색해봤다. 검색창의 자동검색어 목록에는 풀꽃 씨의 옛 이름 세 글자보다도 ‘김제희 마약’과 ‘김제희 논란’이 더 상위에 있었다. 나는 수많은 기사들 사이에서 영화배우 김제희가 저지른 사건, 사고를 정리해둔 아카이브를 발견했다. 아카이브에 따르면 그녀는 새로운 콘셉트로 변신을 시도한 19금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감독과 캐스팅 담당자를 모두 엿먹인 최악의 연기’란 혹평을 받고,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게 만든 책임자로 여론의 지목을 당한 뒤 그 스트레스로 수면 마취제 불법투약에 의지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린시절에 다 나은 줄 알았던 희귀병이 다시 도졌다고 적혀있었는데, 소속사가 게시한 그녀의 입원 사진은 대중의 동정을 유도하는 기만적인 제스처로 해석되어 오히려 ‘발연기’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 차라리 거기서 끝이 났다면 다행이었겠지만, 치료 과정에서 안 좋은 쪽으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퇴원하고 나서 필로폰을 밀매한 행적이 적발되었다. 재판까지 간 결과, 풀꽃 씨는 초범이었던지라 수면마취제 불법투약 사실이 함께 발견됐음에도 불구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최대한 은폐, 적어도 축소하려고 했던 행적들의 자세한 리스트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에 의하면 풀꽃 씨는 인터뷰에서 거짓말로 일관했고, 악플러들에게는 허위사실 유포죄로 고소하겠다고 SNS상에서 으름장을 놓았다.

 사이드 바를 내릴 만큼 내리고 나서 나는 부엌으로 가 생수를 찾았다. 500mL짜리 생수를 냉장고 앞에 선 채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페트병을 구기며 생각했다. 미소가 환한 풀꽃 씨는 법을 어긴 데다 심지어는 거짓말쟁이, 그러니까 나쁜 사람이었다.

[to be continued]